소장처 고문서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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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承俊(韓國精神文化硏究院 專門委員)
求禮 五美洞 文化柳氏家 소장 자료는 1960년대 이후 민속사 생활사 경제사 분야를 중심으로 발굴되었고, 현재 이에 관한 연구와 자료집이 출간되었다. 국립민속박물관·전라남도에서 펴낸 󰡔求禮 雲鳥樓󰡕(1988)  1) 가 대표적이라 할 수있다.  2) 󰡔求禮 雲鳥樓󰡕는 운조루 유씨가의 沿革 民俗 建築 典籍과 文書 書畵 등을 망라한 종합보고서이다.
이해준·이종범은 위의 󰡔求禮 雲鳥樓󰡕에서 고서와 고문서를 개략적으로 소개하였을 뿐만아니라 유씨가의 인물을 비롯한 가문의 내력을 소상히 밝히고 있다. 이 외에도 유씨가 자료를 이용하여 생활사, 의병운동사 및 사회 경제사 관련 연구가 있어, 본 고문서를 이해하는데 참고가 된다.  3)
한편 한국농촌경제연구원에서는 「농촌 및 농업구조 변천」(1991)에 관한 공동연구를 기획, 農家日記(국역본)와 함께 자료집으로간행하였다.  4) 1851년~1942년에 이르는 농가일기의 原題는 󰡔是言󰡕(柳濟陽 著)과 󰡔紀語󰡕(柳瑩業 著)이며, 농촌생활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이다. 김인걸이 해제를 붙여 펴낸 󰡔求禮郡社會組織文書󰡕에는 1814~1935년 사이 95종의 구례군 사회조직 관계자료를 正書化하여 간행하였다.
전남대학교 박물관에서 펴낸 󰡔古文書󰡕(3집)에는 일부 문서와 함께 해제도 붙이고 있다.  5) 󰡔古文書󰡕의 경우 부분적이기는 하지만 正書本으로 출간하였기 때문에 이용하는데 보다 용이하리라 판단된다.
필자는 유씨가 고문서의 조사·수집·정리에 참여하였지만 자료양이 워낙 방대할 뿐만 아니라 일부 자료는 소개되어 있기 때문에 본서에 게재된 개별 고문서만을 중심으로 해제하고자 한다. 본서에는 게재되어있지 않지만 簡札, 日記를 비롯하여 전체의 2/3 이상의 자료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 마이크로필름으로 촬영되어 있다. 어떤 학문분야이건, 유씨가를 대상으로 하여 연구하기 위해서는 본서에 게재되지 않은 자료를 참고하여야 할 것이다.
끝으로 조사에서부터 정리에 이르는 전과정을 주관하고 도와준 공주대 이해준 교수, 고인이 되신 유씨가 종손 유종숙 선생님께 감사드리는 바이다.  6)
柳氏家의 求禮 入鄕 來歷은 좀 특이한 면이 있다. 入鄕祖 柳爾冑(1726-1797)가 이른 바 吉地를 찾아 卜居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의 입향은 조선후기이래 유행한 풍수사상에 영향을 입은 바 크다.
유씨가는 입향조 柳爾冑의 아버지 柳榮三(1699-1735) 당대에 이미 구레지역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7) 이들이 선대의 거주지인 경상도 대구에서 구례로 移居해 五美洞에 터전을 닦고 살기 시작한 것은 1776년(영조 52) 무렵이었다.
입향이후 이들은 일반적인 生員·進士와 文科를 거치는 出世 진로와는 달리 武科를 통해 立身하고 있다. 유씨가에서는 구례 입향이후 유이주를 비롯해 柳億, 柳璟龍, 柳根泳, 柳宅善, 柳濟寬 등이 무과출신자였다. 반면 문과는 물론 生員·進士도 1명도 배출하지 못하였다. 이같이 武科를 세습하였기 때문에 유씨가 인물들은 관직을 지내지 못할 때일지라도 항상 閑良 또는 ‘선달’로 불리워졌다. 이 점은 유씨가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된다.
무과를 통해 입신한 유씨가 인물들은 중앙관직보다는 外職을 역임하면서 국가로부터 성곽의 보수, 축성 등 주로 기술적 업무에 능력을 인정받았으며, 유이주가 그 대표적 인물이었다. 그는築城 분야 전문가이기도 하지만 相地에도 밝아 유씨가의 오미동 卜居는 그의이같은 전문지식에 연유한 것이었다.
유씨가 인물로서 고문서의 작성주체로서 자주 등장하는 인물들을 간략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가. 柳爾冑(1726-1797)
字는 聖佑(혹은 聖有), 號는 歸晩窩. 경상도 대구에서 태어났으며, 百佛庵 崔興遠(1705-1786)에게서 수학하였다. 어려서부터 騎馬와 화살, 병법을 익혔다. 49세 때인 1753년(영조29)에 閑良으로서 武科 丙科 제 5인으로 급제하였다.
일찍이 문경 새재를 넘다가 호랑이를 만나자 가지고 있던 채찍으로 내리쳐 호랑이를 물리쳤다고 한다. 英祖가 이 소문을 듣고 ‘拍虎大將’이라 칭찬하고 불러다 관직에 임용하였다. 1763년에 參上에 오르고 1767년에 남한산성의 축성에 참여, 五衛將 虞侯가 되었다. 1771년 전라도 樂安郡守에 임명되었으며, 이 때 품계가 올라 嘉善大夫로 승격되었다. 1776년에 함흥성 축성에 참여하였으며, 그 이듬해인 1777년(정조 1) 경상도 尙州營長, 1782년에는 평안도 龍川府使, 조금있다가 경상도 中軍으로서 영남감영의 築城을 지휘감독하였다. 1789년에는 함경도 三水府使에 임명되었다가 다시 水原 中軍에 임명되어 陵園의 개·보수를 담당하였다. 이 일을 훌륭히 완수하여 그 공으로 資憲大夫로 승진하는 한편 防禦使에 임명되었다. 1791년에 다시 용천부사에 임명되었다가 1793년(정조 17)에 병으로 사퇴하고 구례 오미동에 내려와 은거하였다. 그후 4년 뒤인 1797년(정조 21)에 72세로 세상을 떠났다.
일찍이 天文地理에 정통하였으며, 축성 전문가였다. 水原 園役을 비롯해 변방 각 지역의 築城사업을 주도하였다. 이같은 지식으로 말미암아 낙안군수 당시 보아 두었던 구례 오미동을 開基, 자신과 후손들의 터전으로 삼고, 세거지였던 대구에서 여러 동생들을 거느리고 이곳으로 이거하였다.
부인 양천허씨는 딸 하나만을 낳고 아들이 없자 從弟 爾翼의 아들 德浩를 繼後하였다. 딸은 南雲紀에게 시집갔으며, 측실이 낳은 딸은 洪錫榮에게 시집갔다.
나. 柳德浩(1757-1815)
柳爾冑의 系子. 贈職敎旨 및 호적에 의하면 그의 初名은 述浩이었다. 30세 되던 1786년에 술호에서 德浩로 改名하고 있다. 유덕호의 부인 載寧李氏는 이 지방 부호이자 역시 무과급제자인 李時華의 딸이다. 본서 所志에 그가 土豪로서 많은 長利를 놓았다는 기록이 보이고 있으며, 토지명문에도 빈번히 그의 이름이 등장한다. 따라서 그의 사위인 柳德浩도 많은 妻財를 물려 받았을 것으로 짐작되며, 이후 유씨가는 顯達한 양반가는 아니었지만 豪富한 무과출신 가문끼리 결합함으로써 이 지역에서 무시할 수 없는 사회적 지위를 구축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유덕호는 운조루 건축을 실질적으로 주관하는 등 가문내에서는 일정한 활약상을 보여주고 있지만 早死함으로써 대외적으로는 뚜렷한 행적은 남기지 못하였다.
다. 柳億(1796-1852)
字는 大年, 初名은 震億. 德浩의繼後子로서 生父는 光浩이다. 所志 戶籍 등에 의하면, 震億 또는 鎭億이라 표기하기도 하였다. 어려서 射藝를 익혀 1825년(순조 25) 謁聖武科에 급제하였다. 紅牌敎旨에는 그가 閑良으로서 丙科 제 4인으로 급제하고 있다. 1814년과 1815년에 연이어 부모상을 당해 治喪하였고, 3년상 뒤 宣傳官과 東道叅軍, 訓練判官, 別宮守門將을 지냈고 이 때 3품으로 진급하였다. 外職으로는 虞侯와 中軍을 지냈다. 그는 추사 김정희와 특히 가깝게 지냈고, 농업경영 등 治産理財에 힘써 家業이 풍족하였다. 유억의 부인 淳昌趙氏(1794-1852)는 남편을 대신해 올린 한글소지가 남아있다.
라. 柳見龍(1817-1851)
字는 乃文, 號는 弄月軒. 35세의 나이로 早卒하였다. 그의 아우인 柳宅善, 柳籌善, 柳邦善 등이 과거(무과)에 급제하는 등 그의 형제들의 자질이 뛰어났다.
마. 柳宅善(1819-1873)
初名은 柳璟龍. 현존 홍패교지에 의하면, 그가 1851년(철종 2) 閑良으로서 무과 병과 제 70인에 급제하였다.
바. 柳濟陽(1843-1922)
족보에 1846년생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호적에는 세살 많은 계묘생(1843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름은 25세 때의 호적에는 柳根溢, 28세 때에는 柳濟泰로 개명하였다. 班名을 지닌 농촌 지식인으로서 쓴 친필일기 是言을 남겼고, 가문 소장 전적을 일차적으로 정리하였다. 각종 서책과 고문서 겉봉투에는 작성자 작성시기 사건명 등 정리되어 있다. 이 모든 것이 그가 정리한 목록이다.
2. 文化柳氏 五美洞派 系譜圖8)
유씨가 典籍은 형태별로 볼 때, 이해준·이종범이 적절히 분류해 놓았듯이 ① 고서류9) ② 고문서 ③ 조선후기-한말 향촌문서, ④ 유씨가 지주경영문서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들 전적은 작성 주체면에서 볼 때 他家門와 다른 특징을 지니고 있다. 즉 입안, 분재기, 토지명문의 상당수는 그 作成者, 授受者가 유씨가 인물이 아니다. 이같은 사실은 土地買得 등 유씨가 재산의 확대 재생산과정에서 舊文記로서, 혹은 소송의 결과로서 소유권의 立證 자료로서 확보하고 있었던 문서였다. 이 자료는 柳氏家가 大邱에서 求禮로 移居하기 이전에 작성되었으며, 소장 자료 가운데 18세기 중엽 이전의 문서는 거의 이러한 성격의 문서이다. 이것이 유씨가 고문서의 중요한 특징이다.
유씨가 고문서에는 유독 토지명문이 많다. 이것은 유씨가에 많은 토지를 매득했고, 또 한편으로는 매득할 때 구문기를 고스란히 물려받아 이를 철저히 관련문기로 보관해 두었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한 地番의 문서가 100여년간에 걸쳐 10여건 이상의 구문기를 남긴 것도 있다. 이러한 점에서 여타의 관련문기로 첨부되어 있는 531건에 달하는 토지명문은 물가와 소유권변동을 비롯한 상업사, 경제사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
관직의 유무와 높낮이는 혼인을 비롯한 사회적 지위를 좌우한다. 또한 혼인은 경제적 부와 직접적 상관관계가 있다. 유씨가의 경우 柳爾冑 柳億 양대에서 각기 郡守와 府使 등 外職을 지내면서 2품의 품계에 올랐다. 유덕호는 이 지역의 부호이면서 역시 무관출신자인 李時華의 딸과혼인함으로써 이 지역에서 확고한 사회 경제적 지위를 누리게 디었던 것이다. 따라서 유씨가의 사회 경제적 기반은 柳爾冑~柳億 당대에 그 기반이 갖추어진 것으로 보이며, 이 점은 이 가문 소장 분잭;와 호적의 노비수를 통해 확인된다.
유씨가에서 대대로 무과로 입신한 점은 문과를 통해 현달한 양반가의 그것보다 그 처신이 비교적 융통성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선조의 遺跡을 소중히 여겨 보존사업에 전력을 쏟는다든지 농업경영이나 기타 治産理財에 몰두할 수 있었던 것도 이들의 처신이 상대적으로 현실적이고 융통성이 있었음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한다. 농업경영을 비롯해 가정의 대소사를 현실성있게 묘사하고 있는 유씨가의 ‘農家’일기도 이들의 사회 경제적 처지와 무관하지 않다고 여겨진다. 이점에서 유씨가 문서는 기존의 고문서와 또다른 가치를 지닌다고 판단된다.
가. 紅牌敎旨
柳爾冑, 柳億, 柳璟龍, 柳根泳 4인의 홍패이나, 이 가운데 柳根泳은 족보상에는 확인되지 柳濟寬인 듯하다.
나. 告身敎旨
유이주, 유억, 유우, 유경룡, 유제관 5인과 이들의 부인, 그리고 그 부, 조, 증조의 추증교지이다.
교지 가운데 柳億과 柳佑는 동일 인물로 파악되는데, 유씨가의 인명은 改名이 빈번하였기 때문에 자세한 관찰이 필요하다. 교지에 동시기에 상존하는 柳億과 柳佑도 동일인 여부를 고증할 필요가 있다. 족보에는 덕호를 繼後한 柳億, 그리고 유덕호의 後妻 龍宮金氏(1760-?) 소생으로 柳佑(1812-1874)와 柳佐, 柳仲, 女婿 韓復이 있다. 따라서 족보상의 유우는 유덕호의 庶子이다. 그러나 교지상에 나타나는 유우는 嘉善大夫에 까지 오른 인물로서 전혀 다른 인물이며, 그의 어머니도 교지 38번에 의하면 李氏(재령이씨)였다. 따라서 족보에서 유우를 ‘嘉善同中樞’라고 표시하여 교지상의 인물과 동일시 여기고 있는 것은 잘못이다. 1837년을 전후해 유억이 유우로잠시 개명한 듯 하다. 유억은 유우 이외에 유진억이란 이름으로 개명한 적도 있다. 호적에는 유우가 柳鎭斗 → 柳震五→ 柳佑로 개명하고 있으며, 1834년 호적에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1837년 이후의 유우의 고신은 서자 유우의 것이 될 수 없다.
가. 啓本
NO.1-4는 1777년(정조 1) 전라도 관찰사겸순찰사였던 鄭元始가 왕에게 올린 계본으로서, 柚子 進上, 罪人 到配 등에 관한 내용이다. NO.5는 경상도관찰사겸 순찰사 金 某가 올린 문서이며, 中軍(柳爾冑) 이하 감영소속의 別武士 左右別將, 諸將官 등의 정미년(1777년, 정조 11) 春夏 때의 褒貶한 내용을 보고한 것이다. 八字로 된 褒貶에 의하면 中軍 柳爾冑는 ‘上’으로 보고되어 있다.
나. 上書
進士 李文煥, 崔象龍(1786-?), 都奭珪 등 대구 士林과 柳文奎, 柳永震 등 유씨 일문에서 올린 상서로서 모두 9건이 실려있다. 1834년~1840년 사이 7년간에 걸친 이 상서에는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柳堯臣의 旌閭를 요청하는 글이다. 감사에게 올린 본 상서에는 문서의 接受日時가 기재되어 있어 지방행정사 연구의 一端이 된다. 旌閭 요청건에 구례의 인물들은 참여치않고 있으면서도 유씨가에 소장하게 된 것은 대구의 유씨일족과는 한 뿌리이기 때문에, 선조의 顯揚에 동참을 권유하거나 의견교환하는 과정에서 보존되어 온 것으로 보여진다.
다. 所志
소지류는 上書를 비롯해, 書目, 傳令, 手記·手標, 不忘記 등 유관 문서가 많으며, 제출 당사자는 유덕호, 유억과 유억의 처 淳昌趙氏(1794-1852), 유견룡 등이다. 이 가문 인물이 아닌 사람이 올린 것도 다수있으나 이 경우 정확한 연대를 모르는 것이 상당수 있다. 그러나 이것도 대부분 18세기 말- 19세기 중·후엽에 이르는 약 1세기 사이에 작성된 것이다. 奴 福來, 卜乃 등 奴名으로 올린 소지는 戶口單子에 의하면 유견룡, 유제양의 首奴인 卜來인 것으로 파악된다.
소지를 올린 당사자의 신분을 ‘化民’으로 표기되는데 화민은 ‘敎化의 대상인 民’ 또는 ‘교화받은 백성’으로 흔히 쓰인다.  10) 그런데 이 용어는 평민 천민이 아닌 양반이 자신의 수령에게 올릴 때 쓰이는 용어이기도 하나, 본서 1823년(NO.29·30)의 소지에서 보듯이 전라도에 거주하면서 慶尙道 지역의 수령에게 올릴 때도 칭하였다.
라. 戶籍
1774년~1891년 사이 柳爾冑, 柳德浩, 柳億, 柳見龍, 柳璟龍, 柳濟陽 柳濟陽의 戶口單子, 準戶口가 실려있다. 호적 가운데 柳洛喜는 족보 등에는 나와있으나 유현룡의 장자였다. 아마 30세 이전에 無子한 상태에서 사망한 듯하다.
호적은 양반가 자신의 가족의 구성, 개명여부 등을 알수 있지만 奴婢명단도 함께 실려있기 때문에 이 가문의 경제력을 가늠하는 중요한 자료이다.
가. 關
유씨가에서 煙戶雜役에서의 頉役을 요청하는 민원에대하여 관 사이에 오고간 문서이다.
나. 解由移關
柳爾冑의 1777년(정조 1) 樂安郡守(NO.1, 2), 柳億의 1833년(순조 33) 公忠道 虞侯(1건), 1846년(헌종 12)平安道 虞侯(1건)이 실려있다. 유이주가 임기를 마친 후, 그가 관활하던 官庫의 器物 등에 대해 그 이상유무 점검받은 후 이를 해당 관서로부터 확인받은 문서이다.
증빙류에서 주목할 자료는 입안이다. 본서의 입안은 모두 13건으로서 決訟立案이 10건으로서대다수를 차지한다. 그런데 결송입안은 모두 유씨가 구례 오미동으로 入鄕하기전인 18세기 중반 이전에 작성된 것이다. 따라서 이 문서는 유씨가에서 전답매매, 소송 등 소유권을 확보하거나 정당화하는 과정에서 입수된 것들이다. 본 결송입안은 원·피고가 모두 유씨가 인물이 아닌 타인들이다.
1688년(숙종14)의 NO.2 입안은 漢城府의 家舍賣買立案으로서, 매매당시 舊文記(本文記)인 1662년, 1681년, 1686년의 明文 所志 侤音이 첨부되어 있다. 따라서 그 기간 동안의 가격 등을 알 수 있다. 가사를 두고 소송을 벌인경우는 본 선이 최초로 발굴된 것이며, 비록 짧은 기간이긴 하지만 17세기 당시 한성부 家舍의 가격과 그 변동상황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5. 明文文記類
가. 分財記
NO.1·2·3·5의 別給文記는 僧侶가 그의 上佐들에게 재산을 상속한 문서로서 유씨가의 분재기는 아니다. 이 문서는 NO.4 문서와 함께 전답매매 혹은 소송사건과 관련해 딸려온 문서인듯하다. 문서는 승려들간의 분재양태와 그 의식을 엿볼 수 있다.
유씨가와 관련된 NO.6 문서는 李時華 → 有德浩妻 衿給文書, 즉 유덕호가 그의 처가로부터 받은 재산을 기재한 분재기이다. NO.7은 柳爾冑 → 有德浩 형제 및 조카에게 주는 家舍와 田民, 즉 토지와 노비를 상속해 준 都文記로서 장자와 차자의 몫만을 따로 기재하여 작성한 분재기이다. 이 때 장자는 立後한德浩를 말하나 次子는 족보상에는 나와 있지 않다. 그는 ‘NO.9의 ‘次子區處記’ 表題에 후대의 追記 즉, ‘大監有孼子一兒早逝耳’라는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賤妾所生으로 일찍 죽었으며, 분재기내에 ‘次子述’이라고 표현된 것으로 보아 그 이름은 ‘述浩’ 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NO.7, NO.8, NO.9는 동시에 작성된 분재기로서 NO.7 문서는 유이주 자식과伯姪(贊浩), 堂姪 文浩 등에게 준 都文記라면 NO.8과 NO.9는 장자, 차자의 몫만을 따로 작성해 분급해 준 문서로서 區處記로 명명하고 있다. 區處記 2건은 도문기와한날 한시에 작성된 것이지만 단순히 상속량만을 나열한 것이 아니라 도문기에 없는 分財序文을 기록하고 있다. 이 서문에는 분재에 관한 여러 원칙을 조목별로 나열해두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때 각각에게 분재된재산은 장자 덕호에게 전답 31石落 3斗落 5升落, 奴婢 14구, 차자 술호에게는 전답 13石落, 노비 6구가 상속되었다. 분재항목 가운데 전답 노비 뿐만 아니라 家舍도 중요항목으로 포함되어 있다. 次子 술호는 도문기 및 구처기에, ‘騰字垈田과 新造家舍를 그 間數를 헤아리지 않고 모두 許給한다’라고 하여 구체적 가옥규모는 알 수 없다. 장자 덕호 몫의 경우 도문기에 ‘瓦家幷垈址’라고 하여 구체적 규모를 적하고 있지 않지만 그의 구처기에는 자세한 家舍의 규모가 적기되어 있어, 이른바 99칸이었다고 일컬어지는 雲鳥樓의 가옥규모를 짐작해 볼 수 있다. 분재된 가사는 전체가 78칸이었다. 그 내역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蓋瓦祠堂

2칸

蓋瓦體舍

9칸

東翼廊

3칸

層屋

4칸

蓋瓦西翼廊

3칸

層屋

3칸

前行廊

6칸

中外舍

3칸

外舍

8칸

蓋瓦本行廊

12칸

下外舍

4칸

大門

1칸

西挾廊

3칸

東足砧舍

3칸

西行廊

12칸

內外舍

2칸

장자 덕호의 몫의 구처기에는 이들 가사와 전답 이외에 오미동의 新設戶, 동내 주위의 山林과 草木과 土石, 오미동 案山, 加耕田畓, 일부의 他家 산소를 제외한 산소 등이그의 소유임을 적시하고 있다. 따라서 3건의 분재기는 18세기말 당시 유씨가의경제규모 전체를 나타내주고 있다.
1809년에 작성된 NO.10 문서는 有德浩→ 崔輔澤(족보에는 崔遇鍾, 朔寧人)에게 주는 衿給文書이다. NO.11과 NO.12는 유덕호가 그의 자녀 一男一女에게 주는 衿給 都文記이며, NO.12는 11번의 謄寫本이다.
나. 土地明文
토지명문 즉 전답매매문서는 전체가 529건으로서 유씨가 문서 가운데 簡札 다음으로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 이 가운데 약 87%인 461건이 1건 이상으로 添附 혹은 粘連되어 있다. 특히 1780년대 이전에 작성된 명문 거의 구문기로 첨부된 문서이며, 이문서는 舊文記로서 매매과정에서 딸려왔거나 소송 등의 과정에서 생겨난 문서였다. 대개 2건~10여건에 이른다. 일련의 구문기는 대개 同一地番 혹은 동일지역의 物件이 거래상황이 기재되어있기 때문에 地價變動, 토지매매에 따른 구획단위(주로 量田 상의 地番)의 分化 등 경제사의 핵심 내용이 담겨있다.
명문가운데 유독 구문기의 비중이 높은 것은 유씨가 문서의 매우 큰 특징이다. 이같이 구문기가 잘 보존되고 문서별 연관성이 온존할 수있었던 것은 유씨가 인물들이 조상들의 遺跡을 보존하려는 의식이 매우 높았고, 그 의식이 대대로 전수되었기 때문이었다.  11) 특히 柳濟陽은 조상들의 거의 모든 文蹟에 註記와 目錄을 해두는 한편, 크고 작은 봉투로서 문서를 싸서 보관함으로서 훗날 문서의 離散을 막는데 결정적 기여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