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장처 고문서 특징

  • 소장 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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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소개하는 자료들은 경기도 군포시 속달동의 수리산 기슭에서 세거해 온 동래정씨가의 세전 자료들이다. 이 가문은 조선전기 훈구파의 중진으로 활동한 명신으로 서예에도 일가를 이루었던 동래부원군 정난종(鄭蘭宗 1433~1489)을 파조(派祖)로 하는 익혜공파(翼惠公派)의 종택이기도 하다.
속달동은 정난종의 사패지지(賜牌之地)로, 그와 부인 완산이씨의 장지가 또한 이곳에 있다. 이후 정난종의 장자 정광보(鄭光輔 1457∼1524)가 역시 속달동에 거처를 마련하였다. 이후 정난종과 정광보를 비롯한 후손의 묘역과 그 종택이 계속하여 이곳에 자리하였으니, 정난종종택가 묘역과 더불어 이곳을 지켜온 지가 벌써 500년을 넘어선다.
500년 이상을 한 자리에서 지켜온 종택답게, 정난종종택에는 종택과 묘역 이외에도 상당히 많은 유물과 문헌들이 전해져 내려온다. 주요 유물로 33점의 금관조복(金冠朝服)을 비롯하여 40점 이상의 고가구, 20여 점의 의류, 18점의 고서화, 생활토기와 용기, 병풍과 족자, 현판 등이 현전한다. 문헌자료도 역시 상당하다. 7백여 점의 서책이 존재하는데, 이 가운데 200여 책은 성책고문서자료이며, 나머지는 대부분이 고서이다. 문서자료도 2천 500여 점에 달하는데, 이 가운데 개별고문서가 1천 100여 점에 달하며, 나머지는 주로 근대 이후에 생산된 문서들이다. 이들 자료 대부분은 군포시에서 수습, 소장자와 협의하여 보존처리 및 관리가 잘 이루어질 수 있도록 적합한 기관을 선정하여 위탁하는 등의 절차로 관리되고 있다. 유물 가운데 금관조복 등은 경기도박물관에 위탁하여 관리하고 있으며, 문헌자료 대부분은 한국학중앙연구원에 위탁하여 보관 중에 있다.
본서를 통하여 소개하게 된 자료들은 바로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위탁, 보관하고 있는 자료들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은 2003~2004년에 걸쳐 해당 가문의 차종손인 정준수씨와 군포시의 의뢰를 통하여 이 자료들을 위탁받아 정리·보관하고 있으며, 마이크로필름으로 촬영하여 공개하였다. 이들 문헌 자료들 가운데 이 책을 통하여 우선 소개하고자 하는 자료들은 문서자료, 그 가운데서도 전통시대의 개별고문서들이다. 이 글은 이 책에서 소개하는 이들 개별고문서들의 이해를 돕기 위한 글로써 우선 정난종종택의 인물들을 고문서와의 관련 속에서 검토하고, 이어서 개별고문서들의 내용을 문서유형별로 나누어 검토해 보기로 한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정씨는 신라의 전신인 사로육촌(斯盧六村) 가운데 하나인 자산진지촌(觜山珍支村)의 촌장으로 정씨 성을 사성(賜姓)받은 지백호(智伯虎)를 비조(鼻祖; 元祖)로 한다. 동래정씨는 지백호의 원손(遠孫)으로 안일호장(安逸戶長)을 지낸 정회문(鄭會文)을 득관시조(得貫始祖)로 하며, 고려 초에 보윤(甫尹)을 지낸 정지원(鄭之遠)을 일세(一世)로 하여 계대(繼代)하고 있다.
동래정씨는 조선 초기로부터 구한말의 시기까지 고관대작을 끊임없이 배출한,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명문벌열(名門閥閱) 가운데 하나였다. 동래정씨로 조선시대에 정승의 자리에 오른 인물만 17명에 달하는데, 이 수치는 전주이씨의 22명을 제외하면 가장 많은 정승을 배출한 수치이다.  1) 그러한 동래정씨 중에서도 여기서 거론하는 동래부원군 정난종후손가는 핵심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다. 정난종 자신이 세조·성종 대의 훈구파의 주요 중진으로 활동한 것을 시작으로, 그 아들 광보(光輔 1457~1524)와 광필(光弼 1462~1538)을 비롯한 많은 명유·명신들을 배출하였던 것이다. 앞서 말한 17명의 정승 가운데 영의정을 역임한 문익공(文翼公) 정광필을 비롯한 13명이 정난종의 후손이었다는 사실이 이를 잘 말해 준다. 이는 정난종을 파조로 하는 동래정씨 익혜공파(翼惠公派)의 위상을 잘 말해 준다.
【가계도 1】
정난종은 자(字)는 국형(國馨), 호(號)는 허백당(虛白堂)이다. 1456년(세조 2)에 생원·진사시와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처음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에 제수되었다가 뽑혀서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에 보임되었다. 이후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이조좌랑(吏曹佐郞), 이조정랑(吏曹正郞) 등을 거쳐 1465년(세조 11)에 종부시소윤(宗簿寺少尹)에 올랐다. 1466년(세조 12)에는 중시(重試)에 합격하고 곧 승정원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가 되었고, 발영시(拔英試)에 합격하여 좌부승지(左副承旨)로 옮겼다가 예조참판(禮曹參判)에 올랐으며, 또 등준시(登俊試)에 합격하여 형조참판(刑曹參判) 겸 오위장(五衛將)이 되었다.  2)
1467년(세조 13) 이시애(李施愛 ?~1467)의 난이 발생하자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가 되어 평정에 공을 세웠다. 1469년(예종 원)에는 《세조실록(世祖實錄)》 찬수(撰修)에 참여하였으며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옮겼다. 1470년(성종 원)에 중추부동지사(中樞府同知事)로 옮겨 사은부사(謝恩副使)로 북경에 다녀왔다.
1471년(성종 2)에 순성좌리공신(純誠佐理功臣)의 호(號)를 하사받고 동래군(東萊君)에 봉해졌으며 《예종실록(睿宗實錄)》 찬수에 참여하고 영안도관찰사(永安道觀察使)에 제수되었다. 이후 호조참판, 영안북도절도사(永安北道節度使),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 평안도절도사, 의정부우참찬(議政府右參贊), 이조판서(吏曹判書), 공조판서, 호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483년(성종 14)에는 주문부사(奏聞副使)로 재차 북경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1488년(성종 19) 사망시 그의 나이 57세였다.
정난종은 훈구파의 중진으로 성리학에 밝았을 뿐만 아니라 장수와 재상의 재능과 기예를 두루 갖추었다고 평가받는다. 또한 서예에도 일가를 이루어 초사와 예서를 잘 썼으며, 특히 조맹부체에 뛰어났다고 전해진다. 사후 익혜(翼惠)의 시호(諡號)를 받았는데, 사려심원(思慮深遠)하여 ‘翼’, 관유자인(寬柔慈仁)하여 ‘惠’라 하였다. 경북 용궁의 완담향사(浣潭鄕祠)에 제향되었다.
동래정씨는 주로 동래와 양산(梁山) 등의 영남일대에 산거(散居)하여 왔으며, 정난종 역시 예천(醴泉) 출신이다. 현재 종택과 묘역이 소재한 속달지역과 동래정씨가 관계를 맺게 된 것은 정난종이 관직에서 이루어 낸 성과의 대가로 이 지역을 사패지지(賜牌之地)로 받게 되면서부터이다. 정난종의 사후 인근에 있던 부인 완산이씨의 묘소를 이장하여 현 위치에 함께 쌍분으로 장례를 치렀는데, 이는 정난종의 유명에 따른 것이라 한다. 이후 정광보가 선영을 쫓아 이곳에 최초로 유택을 세우고 거주하였다. 이래로 정난종종택은 현재까지 500년 이상을 이 지역에 자리하고 있다. 또한 정광보, 정광필을 비롯한 후손들이 정난종과 함께 묘역을 이루게 되었는데, 현재 종택과 묘역은 서로 마주 보이는 수리산 기슭에 함께 자리하고 있다.
정난종 종택과 묘역이 자리한 속달(速達)은 수리산 서쪽편 줄기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골짜기 기슭에 자리한다. 속달이라는 이름은 수리산의 골짜기 안을 뜻하는 것으로, 한문의 “速達”은 음차에 불과하다고 한다. 조선시대의 속달은 남양만에 배를 타고 온 지방민들이 과천을 통해 서울로 올라가던 교통의 요지였다고 한다. 속달이 현 행정구역인 군포시에 편입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이 지역은 조선시대와 대한제국시기에 걸쳐 광주부 북방면에 편입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1907년 월경지 정리의 일환으로 안산군 북방면으로 편입되었으며, 1914년 군면폐합 때 안산군이 폐지되면서 속달이 포함된 북방면은 인근의 월곡면, 성곶면과 함께 수원군 반월면으로 편제되었다. 이후 1949년 수원읍이 수원시로 승격되고 수원군의 나머지 지역이 화성군으로 변경되면서, 이 지역 역시 화성군 반월면으로 변경되었다. 그러다가 1995년 반월면이 폐지되면서 해당 지역이 각각 수원시 권선구와 안산시, 군포시로 각각 나뉘어 편입되었다. 이 때 속달리는 둔대리, 대야미리, 도마교리와 함께 군포시에 편입되었으며, 현재 군포시 속달동으로 편제되었다.
【그림 1】 현재 속달과 묘역의 위치 (※ Google Earth 이미지날짜 2008년 1월 24일)
【그림 2】조선시대 광주부 북방면(※ 󰡔地圖󰡕 장서각 2-4583)
속달은 정난종종택을 중심으로 마을이 구성되어 있다. 경기도문화재자료 제95호로 지정된 현재의 종택은 18세기 후반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이후 훼손된 것을 비교적 최근에 보수하였다. 종택의 건물은 안채와 큰사랑채, 작은사랑채, 광채, 마방채가 현존하고 있으며, “ㄱ”자형의 안채를 사랑채와 광채가 둘러싸고 있는 튼 “ㅁ”자 모양으로 구성되어 있다.
마을의 중앙에 위치한 종택에서 우측 건너편을 바라보면 맞은편 산자락에 정난종 등의 선대 묘역과 재실이 보인다. 수리산을 배경으로 조성된 정난종 묘역에는 정난종 부부의 쌍분을 비롯한 다수의 묘소와 묘비, 신도비(神道碑) 2기, 묘갈(墓碣) 1기를 비롯한 다수의 장명등(長明燈)과 문인석(文人石) 등이 있다. 묘역으로 들어가는 길목에는 성달재(省達齋)라는 재실이 있는데, 이는 근래에 건립한 것이다.
정난종 부부의 쌍분은 묘역의 중간 아래편에 자리하며, 봉분 앞에 묘비와 상석 및 석물들이 배치되었고, 왼편 아래쪽에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신도비의 비문은 1525년(중종 20)에 조성되었으며, 남곤(南袞 1471~1527)이 찬(撰)하고 강징(姜徵 1466~1536)이 썼다. 정난종 부부의 쌍분 위단에는 장자 정광보 부부의 쌍분이, 다시 그 위단에는 차자 정광필 부부의 쌍분이 차례로 있다. 정광보의 묘갈과 정광필의 신도비 역시 각 봉분의 외편 아래쪽에 세워져 있다. 정광보묘갈의 비문은 이행(李荇 1478~1534)이 짓고 성세창(成世昌 1481~1548)이 썼으며, 정광필신도비의 비문은 소세양(蘇世讓 1486~1562)이 짓고 이황(李滉 1501~1570)이 썼다.
정광필부부의 쌍분 위단에는 정광필의 4자 정복겸(鄭福謙)부부의 쌍분이 자리하며, 그 옆으로는 정광필의 2자 정위겸(鄭僞謙) 및 손자 정유진(鄭惟愼), 정유청(鄭惟淸) 등의 묘소가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정난종 묘소의 아랫단에는 정난종의 6세봉사손 정진원(鄭震遠 1578∼1657) 부부의 쌍분이 자리한다. 정난종 이외의 묘소에도 묘비와 상석 및 여러 석물들이 함께 갖추어져 있다.
1489년(성종 20)에 처음 조성된 이래 현재까지도 훌륭히 보존되고 있는 동래정씨 묘역은 초선 초기에서 중기까지의 묘제 양식 연구는 물론 고고미술사나 금석학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기도 하다. 또한 정진원을 제외한 묘역의 배치가 선대를 아래에서부터 안장하여 점차 위로 안장해 가는 독특한 양식을 보여주고 있는 점도 독특한 사례로 관심을 끌고 있다. 현재 해당 묘역 전체는 경기도기념물 제115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그림 3】정난종종택 (※ 󰡔軍浦市 速達洞 東萊鄭氏 東萊府院君宗家의 歷史와 文化󰡕)
【그림 4】종택에서 바라 본 묘역 전경
【그림 5】묘역에서 바라 본 마을 전경
정난종은 부인 완산이씨(完山李氏)와의 사이에 광보·광필·광좌(光佐)·광형(光衡)의 4자와 1녀를 두었으며, 그 외에 측실소생으로 담(聃)이 있었다. 다섯 아들이 모두 관직에 나아갔는데, 정광보와 광형은 음서(蔭敍)를 통하여 관직에 나아갔으며, 정광필은 과거를 통하여 관직에 나아갔다.
정광보의 자는 운지(運之)로 진사시에 입격하고 문과에도 여러 차례 응시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정광보의 출사는 문벌의 음덕을 통하여 이루어졌으나, 관직에서 공과를 지속적으로 쌓아 품계가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이르렀다. 경관직으로는 와서별제(瓦署別提)를 시작으로 군자감(軍資監) 등의 주부(主簿),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장악원(掌樂院) 등의 첨정(僉正), 통례원봉례(通禮院奉禮)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외관직으로는 아홉 고을의 수령을 역임하였는데 연산현감, 평양부판관, 정선·풍기·금산·순창·초계의 군수, 창원과 연안의 부사를 지냈다. 부인 전의이씨(全義李氏)와의 사이에서 4남 4녀를 두었으며, 그 가운데 차자 사룡(士龍)이 생원·문과를 거쳐 대제학(大提學)과 공조판서에까지 나아갔다.
정난종의 아들 가운데 가장 현달하였으며, 사직지신(社稷之臣)으로까지 추앙받는 이가 바로 차자 광필이다. 정광필은 자가 사훈(士勛), 호가 수천(守天)이며, 후에 문익(文翼)의 시호를 받았다. 1492년(성종 23) 진사시에 입격하고 곧이어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에 등용되고, 직제학과 이조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왕에게 극간(極諫)하여 아산(牙山)에 유배되었으나,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복직되어 부제학에 올랐다. 이후 이조참판·예조판서·대제학 등을 거쳐 1510년(중종 5) 우참찬(右參贊)으로 전라도도순찰사가 되어 삼포왜란(三浦倭亂)을 수습하고 병조판서에 올랐다. 1512년(중종 7) 함경도관찰사로 기민의 구제에 힘을 쏟았으며, 이듬해 우의정과 좌의정을 거쳐 1516년(중종 11)에 영의정에 올랐다.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조광조(趙光祖 1482~1519)를 구하려다가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로 좌천되기도 하였으나 1527년(중종 22)에 다시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이 되었다. 1533년(중종 28) 김안로(金安老 1481~1537) 등의 모함으로 인하여 영의정에서 파직되어 영중추부사로 좌천되었다가 관직에서 물러난 후, 김안로의 무고로 인하여 김해로 유배되기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1537년(중종 32) 유배 6개월 만에 김안로가 사사(賜死)됨에 곧바로 복직되어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중종의 묘정(廟庭)과 회덕(懷德)의 숭현서원(崇賢書院), 용궁(龍宮)의 완담향사(浣潭鄕社)에 배향되었다.
정광필은 본인뿐만 아니라 자손에서도 현달한 인물이 지속적으로 배출되었다. 13대손 정범조(鄭範朝 1837~1897)가 1892년(고종 29) 우의정과 좌의정에 오르기까지 정광필을 포함한 후손 가운데 무려 13명의 상신이 배출되었고, 그 가운데 4명이 영의정을 역임하였다. 익혜공파 가운데 정광필을 파시조로 하는 문익공파(文翼公派)가 있는데, 그 현달함이 이와 같아 익혜공파 전체 문중에서도 상당히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
【가계도 2】
정난종의 장자이자 광필의 형인 광보를 파조로 하는 집의공파(執義公派)의 경우 문익공파만큼은 아니지만 지속적으로 그 자손들이 관직에 진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출사의 방법에 있어서도 과거뿐만이 아니라 공신의 후손으로서의 지위를 활용한 훈음(勳蔭)을 십분 활용하였다. 정광보의 차자 사룡이 문과를 통하여 대제학과 공조판서까지 오르고, 손자 순우(純祐 1509~1556) 역시 문과 이후 파주목사까지 역임하는 등 집의공파에서도 초기에는 과거를 통한 출사가 중심이었다. 그러나 이후 19세기 후반까지 출사의 주된 방법은 훈음이었다.
정난종종택에만 국한했을 때, 증손 상철(象哲 1548~?)이 훈음을 통하여 출사한 이래, 1861년(철종 12) 학묵(學默 1829~1903)이 이전 해의 춘당대추도기(春塘臺秋到記)를 거쳐 문과 전시(殿試)에 합격할 때까지 출사는 훈음을 통해서만 이루어졌다. 특히 정난종의 종손들은 공신의 적장자로서 회맹연(會盟宴)에 참여하고 관직에 나아갔고 봉군(封君)되었다. 이와 같은 출사와 봉군은 현재 남아있는 교령류(敎令類) 문서들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비록 문벌의 음덕이 출사와 이후의 관력(官歷)에 중요하게 작용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이들의 사환이력(仕宦履歷) 모두를 설명해 주지는 않으며, 각 직위에서의 공과가 지속적인 사환과 승진을 가져다 줄 수 있었다.
현재 해당 가문에서 전해지는 고신(告身)을 비롯한 교령류 문서는 모두 110점으로, 세 권의 첩책으로 제책되어있다. 이들 문서는 상철에서 학묵에 이르는 10대의 10명과 관련한 문서들이다. 이 문서들을 통하여 이 시기 정난종종택 인물들의 환력을 구체적으로 검토할 수 있다.
【가계도 3】
정난종종택에서 전래해 온 개별고문서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1594년(선조 27) 정상철을 통훈대부행사헌부감찰(通訓大夫行司憲府監察)에 임명하는 고신교지(告身敎旨)이다. 다른 종류의 문서로는 1687년(숙종 13) 광주부 북방면 속달동 9통 1호 정지익(鄭之翼) 호의 준호구(準戶口)가 가장 이른 시기의 문서이다. 이후 19세기에 접어들기까지 이러한 교령류 및 호적류의 문서들만이 존재한다.
천여 점에 달하는 정난종종택의 개별고문서 대부분은 19세기 이후, 대체로는 정학묵 대 이후의 것들이다. 개별고문서 뿐만 아니라 성책고문서도 시기가 일치하며, 한말 이후의 시기에 대해서는 개별고문서와 구분되는 1,400여 점의 근대문서가 또한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 자료를 통하여 19세기 이후 정난종종택의 풍부한 상을 그려보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리고 이 시기는 우리나라 역사에서도 그랬지만, 정난종종택의 문중사에서도 상당히 역동적인 시기였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 모두를 소개하지는 않으며, 그 일부를 이어지는 수록고문서의 개요를 설명하는 지면을 통하여 간단하게 언급하고자 한다.
동래정씨 정난종종택의 문헌자료로서 한국학중앙연구원에 그 관리를 위탁한 자료는 3,183점에 달한다. 이 가운데 개별문서자료로서 고문서의 분류에 따라 정리한 개별고문서가 1,077점이다. 개별문서자료에는 별도로 근대문서로 분류한 자료들이 1,413점이 존재한다. 이 자료들은 190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까지의 자료로서 주제별로 묶여 있던 자료들이다. 이 자료들은 기존 고문서 분류에 따른 정리가 어려우며, 보존 시의 묶음을 존중하여 각 묶음에 따라 적합한 주제를 분류하여 정리하였다. 이외의 문헌자료로는 성책고문서가 194책, 고서가 490책, 유물이 9점이다. 이들 자료에 대한 목록은 이 글의 뒤에 부록으로 수록하여 참고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상의 자료 가운데 이 책에 수록한 자료들은 대부분이 개별고문서이다. 이 밖에는 고신교지(告身敎旨) 등의 교령류 문서를 첩으로 엮은 3점의 《교지첩(敎旨帖)》과 2점의 《입의(立議)》를 해당 고문서 유형에 분류하여 수록하였다.
① 교령류(敎令類)
홍패(紅牌)가 2점이며, 3점의 《교지첩》에 제첩된 문서들이 109점이다. 홍패는 문과홍패와 무과홍패가 각 1점씩이며, 전자는 1861년(철종 12) 정학묵의 홍패이고, 후자는 1891년(고종 28) 정규선의 홍패이다. 정학묵의 문과급제와 관련해서는 그 전 해의 춘당대시(春塘臺試)를 통해 직부전시(直赴殿試)의 자격을 획득하였음을 보여주는 〈직부전시첩(直赴殿試帖)〉과 당시 종택의 상황을 보여주는 《영문록(榮問錄)》, 그리고 전시에서 정학묵이 작성한 〈시권(試券)〉 등의 관련 자료들이 다양하게 남아있다. 또한 《승지공교지첩(承旨公敎旨帖)》에 정학묵의 고신문서들이 53점이 온전히 남아있어, 과거 이후의 관직 변동을 구체적으로 살펴 볼 수 있다.
3점의 《교지첩》은 시대에 따른 인물별로 관련 문서를 첩으로 엮었다. 《교지첩》(1)은 정순우로부터 정사급까지 7대에 걸친 27점의 문서를 수록하였으며, 《교지첩》(2)는 정사급부터 정한동까지 4대 29점의 문서를 수록하였다. 마지막 《승지공교지첩책(承旨公敎旨帖冊)》은 정학묵과 관련한 문서 54점의 문서를 엮은 것이다. 《교지첩》에 제첩된 문서를 인물 및 문서의 종류별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인물

差定帖

敎牒

告身敎旨

勅命

追贈敎旨

有旨

비고

純祐(1509∼1556)

2

2

《교지첩》(1)

象哲(1548∼?)

9

9

震遠(1578∼1657)

2

4

6

之翼(1612∼1691)

2

2

行仁(1659∼1687)

1

1

必世(1683∼1755)

1

4

6

=平壤趙氏

1

師伋(1717∼1755)

1

3

1

《교지첩》(2)

=金海金氏

1

彦復(1735∼1819)

1

10

1

14

=蓮城金氏

1

1

混(1759∼1835)

1

3

=坡平尹氏

1

=原州元氏

1

翰東(1794∼1873)

8

10

=延安李氏

1

1

學默(1829∼1903)

2

48

1

2

54

《승지공교지첩책》

=漢陽趙氏

1

3

4

89

1

11

2

110

② 소·차·계·장류(疏·箚·啓·狀類)
8건 15점의 소지류(所志類) 문서가 이에 해당한다. 이 가운데 기축년에 호역(戶役)의 늑봉(勒捧)과 관련하여 순찰사에 올린 품목(稟目)과 1899년(광무 3) 문중 내의 분쟁과 관련하여 문중에서 장례원(掌禮院)에 올린 문서를 제외한 나머지 6건은 초본이다.
이미 언급한 품목과 1902년(광무 6) 식리(殖利)를 통한 호포(戶布)의 응납(應納)과 관련한 동내(洞內) 분쟁 문서를 제외한 나머지 문서들은 모두 1890년대 후반의 문중 내 사건과 관련한 것이다. 이 사건은 정규선의 정학묵 계후에 대하여 반발하는 문중원과 전체 문중과의 갈등이 표출된 것이다. 이 사건과 관련한 다수의 자료들이 해당 문중에 남아있으며, 그 사건의 간단한 개요는 이 책에도 수록한 《종중입의(宗中立議)》를 통하여 살필 수 있다.
③ 첩·관·통보류(牒·關·通報類)
1890년(고종 27) 병조에서 경상도관찰사에게 보낸 관(關) 1점만이 이에 해당한다. 이 문서는 송천근(宋千根)을 순장(巡將)으로 차정하는 내용이다.
④ 증빙류(證憑類)
증빙류에 속하는 문서는 총 214점이다. 2점의 입안(立案)과 206점(35건)의 호적류(戶籍類) 문서, 3점의 수표(手標)와 2점의 입의 및 1점의 첩(帖)이 이에 해당한다.
2점의 입안은 모두 계후(繼後)를 국가에서 승인해 주는 계후입안(繼後立案)이다. 하나는 1756년(영조 32) 예조에서 발급한 것으로 정시복(鄭始復)의 계후를 승인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1897년(광무 원) 장례원에서 발급한 것으로 정규선의 계후를 승인한 것이다. 시복은 정언복의 개명 전 이름이다. 장례원은 1895년(고종 32) 관제개혁 때 설치된 기관으로 기존에 예조에서 관장하던 계후관련 업무도 함께 담당하였음을 알 수있다. 장례원은 종래 통례원(通禮院)이 담당하던 궁중의식·조회의례와 함께 예조에서 관장하던 제사 및 능·종실·귀족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던 관서이다.
35건 206점의 호적류 문서에는 준호구(準戶口) 및 호구단자(戶口單子)를 포함하는 조선시대 호구문서와 함께 통표(統表) 및 호적표를 포괄하는 대한제국기의 광무호적, 일제강점기의 호적등본을 포함한다. 이 책에는 4점의 호적등본을 제외한 나머지 자료를 모두 수록하였다. 조선시대 호구문서는 1687년(숙종 13) 정지익 호의 준호구로부터 1887년(고종 24) 정학묵 호의 준호구에 이르기까지 200년간 8대에 걸친 21식년의 문서가 남아있어 매우 우수한 시계열을 보이고 있다. 대한제국기 광무호적은 1897년(건양 2)부터 1907년(융희 1)까지 매년의 것이 모두 남아있으며, 1906년(광무 10)의 경우는 4월과 11월에 작성된 2건이 남아있어 모두 12건(181점)이 전한다. 1907년의 경우 1~4통에 걸친 전체 통표와 호적표가 모두 남아있다. 그러나 나머지는 1통과 2통의 것만이 남아있으며, 그 가운데도 정학묵 및 정규선의 호가 포함된 1통의 호적표가 다수를 이루고 있는데, 아마도 정난종종택과 관련한 호들의 문서들이 아닐까 여겨진다. 흥미로운 것은 양자로 정학묵을 계후한 정규선의 생부 정완묵(鄭完默)의 호가 같은 통 내에 존재한다는 것인데, 이들의 본래 거주지는 현재의 양평지역이었으나, 정규선의 입후와 함께 이곳으로 이주해 온 것으로 보인다.
입의 2점은 성책고문서이나 이 책에 수록하였다. 둘 다 문중 내의 합의사항을 기록한 것이다. 하나는 1826년(순조 26) 정혼 등의 문중구성원이 작성한 것으로 선조 묘역에 대한 수호금양(守護禁養)의 내용을 담았다. 다른 하나는 1896년 정학묵 등 문중구성원이 작성한 것으로 정규선이 정학묵의 양자로 종통을 계승한 사실과 그 경위 및 관련 사실을 수록하고, 이에 대한 문중구성원의 동의를 기록하였다.
1점의 첩은 1860년(철종 11) 7월 춘당대(春塘臺)에서 치러진 도기과(到記科)에서 합격한 정학묵에게 전시(殿試)에 직부(直赴)할 수 있는 자격을 증명하는 문서이다. 나머지 3점의 수표는 1910년 이후의 문서로, 하나는 곽씨문중에서 동래정씨 묘역을 침범하였음을 인정하는 문서이고, 나머지 2점은 측량에 대한 수수료 및 회목의 매매와 관련된 거래 문서이다.
⑤ 명문·문기류(明文·文記類)
1904년(광무 8) 차성근(車聖根이 노(奴) 창운(昌云)에게 초가를 방매하면서 작성한 명문 1점만이 이에 해당한다. 이 문서의 필집이 정노춘이(鄭奴春伊)로 나타나며, 이 문서를 정난종종택에서 보관했다는 점에서 가옥의 실질적인 구매자는 정난종종택였음을 추정할 수 있다.
해당 가문에 전해지는 고문서에는 소지류와 명문·문기류 문서들이 매우 적은데, 정난종종택의 역사와 위상 및 여타 종류의 고문서자료들과 비교할 때 상당히 의문스러우며 매우 아쉬운 부분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말 이후,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의 시기에 걸친 가계경영과 관련한 자료들은 매우 다양하고 풍부하게 남아있다. 해당 자료들은 이 책에 수록된 치부류(置簿類) 자료 외에도 근대문서와 성책고문서 등에 다수가 분포하고 있으며, 이를 통하여 한말 이후 정난종종택의 가계경영의 구체적인 양상을 파악할 수 있다.
⑥ 서간·통고류(書簡·通告類)
약 600여 점으로 개별고문서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이 가운데 통문이 20점(9건), 혼서가 2점(2건)이다. 나머지는 모두 간찰류 문서로 그 수는 550여 점에 이른다. 통문은 1877년(고종 14)에서 해방 후인 1962년에 걸쳐 있으며, 모두 문중 내의 대소사와 관련된 것들이다. 혼서 가운데 하나는 1921년 정규선의 차자 혼례시의 문서이며, 다른 하나는 연길단자(涓吉單子)이다.
간찰은 연대 확인이 가능한 문서를 볼 때, 대부분이 일제강점기의 간찰이며, 한말과 해방 후의 문서가 일부 혼재한다. 안부 등의 일상사와 정규선 등의 상사(喪事)와 관련한 위장(慰狀)을 다수 확인할 수 있으며, 족보의 편찬 등 종택의 역할과 관련한 서간들도 다수 존재한다. 그 외에 눈에 띠는 자료로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조영원(趙泳元)이란 인물과 주고 받은 20여 통의 간찰들이 있다. 조영원은 정학묵의 요절한 친자 정규석의 처 한양조씨의 조카로, 이 간찰들은 정규선이 정학묵을 계후한 후 친가로 돌아간 한양조씨의 집안과 정씨가문과의 갈등과 전개를 보여준다.
몇 건 되지 않지만 1920년대 학교기부금과 관련한 간찰도 눈에 띤다. 이 책에는 수록하지 않았지만, 성책 및 근대문서에도 일제강점기 교육활동과 관련한 문서들이 존재하는 것으로 봐서 정난종종택은 당시의 교육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으로 보여진다. 이 가운데서도 간도의 동흥중학교에 대한 기부를 보여주는 간찰들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동흥중학교는 1921년 천도교계에서 북간도 용정촌에 건립한 학교로,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민족교육을 지속하여 항일투쟁의 전통과 많은 항일운동가를 양성한 교육기관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당시의 교장이었던 윤익선(尹益善 1871~1946)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교육가로 알려진 인물이다.
⑦ 치부·기록류(置簿·記錄類)
연대를 확인할 수없는 문서들이 다수 존재하지만, 대체로 한말에서 일제강점기 시기의 자료들로 추정할 수 있다. 각종의 금전거래와 관련한 문서, 흥정기, 추수기 등의 치부문서와 함께 전답 및 소작과 관련한 치부문서들도 존재한다. 성책고문서 및 근대문서에도 이와 유사한 성격들의 자료들이 다수 존재하므로, 이들을 통하여 한말 이후 정난종종택의 경제생활을 살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외에도 보경고진탕(補經固眞蕩) 등 몇 건의 화제(和劑)와 정한동 등의 안장기(安葬記) 등이 존재한다.
⑧ 시문류(詩文類)
제문(祭文)과 만사(輓詞), 시권(試券)을 비롯하여 기타 낱장에 기록한 시(詩)·서(序) 등의 시문기록들이 이에 해당한다. 제문·만사·시권은 그 모두를 수록하였으나, 그 밖의 시문에서는 〈경하족숙안와공정려서(敬賀族叔安窩公旌閭序)〉와 〈초여서거여(初如書居餘)〉만을 수록하였다.
제문 가운데는 1874년(고종 11) 정한동의 치제문(致祭文) 두 점이 존재하며, 그 밖에는 정혼·정학묵·정규선 등 집안 내에서 누대에 걸쳐 작성한 제문들이다. 만사는 6점이 존재하는데 이 가운데 4점의 작성시기를 확인할 수 있다. 그 시기는 1925년 5월로, 정규선의 상사에 만들어진 만사임을 알 수 있다. 시권은 3점이 남아있는데 구체적인 시기와 찬자를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뿐이다. 1861년(철종 12) 정학묵이 식년문과 전시에서 작성한 시권이 그것이다. 정학묵은 전 해 7월에 춘당대에서 치러진 도기과에서 합격하여 전시에 직부할 수 있는 자격을 획득하였으며, 이에 전시에서 병과 제8인으로 급제하였다. 이 시권은 바로 이 때의 시권이다. 나머지 두 점의 시권은 일반적인 과거가 아니라 문신을 대상으로 수행한 정시(庭試)에서 작성한 시권이다. 확실하지는 않으나 정학묵이 관직에 있을 때에 작성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⑨ 기타(其他)
동래정씨 선조의 묘역이 위치한 동래 화지산(華池山)과 정산(定山) 대박동(大璞洞)에 관련된 여러 문서들을 별도로 묶은 것이다. 이들 문서들을 별도로 분류한 것은 애초부터 이들 문서들을 따로 묶어서 보관해 온 의미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다.
화지산에는 동래정씨 시조 안일공(安逸公)의 묘소와 재실 등이 존재한다. 이와 관련한 문서로는 관련 절목(節目)과 제사 관련 문서 및 산도 등이 포함된다. 그밖에 동래정씨 문중에서 지방관에 올린 소장도 한 점 존재하는데, 이는 화지산에 대한 인근 백성의 침범을 막아달라는 내용이다.
대박동은 복재공(僕財公)의 묘소가 있는 곳이다. 복재공의 묘소는 그 위치가 알려지지 않다가 후대에 이르러 정산 대박동의 묘소를 확인하였다. 여기에는 이와 관련한 제반 기록과 통문, 산송(山訟)과 관련한 간찰, 산도 등의 문서가 분류되어 있다. 또 관련 절목과 묘비의 탁본이 함께 묶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