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서를 남긴
사람들

주요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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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선도의 자는 약이(約而), 호는 고산(孤山) 또는 해옹(海翁)이다. 선생은 1612년(광해 4)에 진사 되고, 4년후 성균관유생으로서 권신의 횡포를 지탄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벽지에 유배되었다. 광해 15년에 인조반정이 일자 석방되어 의금부도사에 취임하였으나 곧 사직하고 이곳 향리에서 학문에 정진하였다. 1628년(인조 6) 별시문과의 초시에 장원한 후 봉림과 인평을 모시는 왕자사부가 되고 한성서윤과 예조정량을 역임하는 등 수차에 걸쳐 나라에 중용되었다. 병자호란 후에는 주로 완도의 보길도와 해남의 수정동 및 금쇄동에 은거하여 자연에 들어 원림을 경영하고 산중신곡(山中新曲)과 어부사시사(漁父四詩詞) 등 불후의 명작을 이루어 조경문학 및 국문학의 발전에 큰공을 남겼다. 그 사이 효종의 부름으로 벼슬에도 나아갔으나 당쟁으로 다시 유배당하는 등 많은 파란을 겪다가 현종 12년에 85세로 졸하였는데 숙종 원년에 신원되어 이조판서에 추종되고 시호를 충헌(忠憲)이라 하였다.
  • 조선 후기의 선비화가. 본관은 해남(海南). 자는 효언(孝彦), 호는 공재(恭齋). 정약용(丁若鏞)의 외증조이자 윤선도(尹善道)의 증손이다. 장남인 덕희(德熙)와 손자인 용(愹)도 화업(畵業)을 계승하여 3대가 화가 가정을 이루었다. 정선(鄭歚)·심사정(沈師正)과 더불어 조선 후기의 삼재(三齋)로 일컬어졌다. 1693년(숙종 19)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집안이 남인계열이었고 당쟁의 심화로 벼슬을 포기하고 학문과 시서화로 생애를 보냈으며, 1712년 이후 만년에는 해남 연동(蓮洞)으로 귀향하여 은거하였다. 죽은 뒤 1774년(영조 50)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조선시대 중기와 후기의 변환기에 활동한 그는 말과 인물화를 잘 그렸는데, 산수화를 비롯해서 회화작품은 대체로 중기의 화풍을 바탕으로 하여 전통성이 강한 화풍을 지녔다. 그의 말그림과 인물화는 예리한 관찰력과 뛰어난 필력으로 정확한 묘사를 보여주며 해남에 종손이 소장하고 있는 〈자화상 自畵像〉이 대표작으로 지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