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서를 남긴
사람들

주요인물

  • 고문서를 남긴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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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344년(충혜왕 5)∼1421년(세종 3).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초명은 소목(少目). 자는 일삼(日三), 호는 설천(雪泉)·천곡(泉谷). 고려 우왕초 진사에 합격하고, 1380년(우왕 6) 문과에 급제하여 보문각직학사(寶文閣直學士)를 거쳐 상주판관이 되어 청렴한 이름을 떨쳤다. 조선 개국 후, 1393년(태조 2) 청백리에 뽑혀 송경유후(松京留後)에 임명되었을 때, ‘자신이 대대로 고려에 벼슬한 가문으로서 어찌 다른 사람의 신하가 되어 송경에 가서 조상의 영혼을 대하랴’ 하고 궁전 기둥에 머리를 부딪치며 통곡하니, 태조가 ‘이 사람을 죽이면 후세에 충성하는 선비가 없어진다’ 하고 죽이려는 좌우를 제지하고 그를 급히 붙들어 내보냈다 한다. 1396년 개국공신 정희계(鄭熙啓)의 시호를 야박하게 지었다고 태조가 노엽게 여겨 축산(丑山)에 유배되고, 1400년(정종 2) 중승(中丞)을 거쳐 지보주사(知甫州事)가 되었다. 1411년(태종 11)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 강원도도관찰사가 되었으며, 벼슬이 참찬에 이르고 평양백(平壤伯)에 봉해졌다. 뒤에 장수의 용암서원(龍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사간(思簡)이다.
  • 1664년(현종 5)∼1735년(영조 11).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봉거(鳳擧), 호는 양기옹(兩棄翁) 또는 양기재(兩棄齋). 1694년(숙종 20) 문과에 급제하였고, 성묘종사사건(聖廟從祀事件)에 연루되어 30년간 낙척(落拓)하였으며, 태안군수·울산부사를 지낸 뒤에는 무주에 살면서 산수승경을 즐기며 은거생활을 하였다. 연시조인 「유원십이곡 楡院十二曲」 13수를 비롯 19수의 시조를 남겼다. 시조작품들의 주제를 살펴보면, 수분안행(守分安行)·은거(隱居)·청산옥수(靑山玉水)·백운청산(白雲靑山)·경전채초(耕田採樵)·청풍명월·물외한정·백운백구·강호구로(江湖鷗鷺)·도연명(陶淵明)·효(孝)·물외한거(物外閒居)·근신(謹愼)·옥봉운(玉峰雲)·적성하(赤城霞)·산촌은거·산수연하(山水烟霞)·벽봉창파(碧峰蒼波)·연하풍월(烟霞風月) 등으로 나누어진다. 작품 대부분이 산촌에 은거하면서 자연을 즐기며 자족한 작품이라는 것이 특징이며, 도연명의 귀거래적인 사상이 각 시조작품에 영향을 주었다고 본다. 이 작품들은 문집인 《양기재유고》와 《양기재산고》에 실려 있다.
  • 1712년(숙종 38)∼1791년(정조 15). 조선 후기의 실학자.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백순(百順), 호는 순암(順菴)·한산병은(漢山病隱)·우이자(虞夷子)·상헌(橡軒). 제천(提川) 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