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인물

  • 고문서를 남긴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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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안이 世宗 10년(무신)에 光州牧使에 제수되었을 때 당시 수령이 舊吏屬들을 혁파하거나 죽이는가하면 雜色人을 官屬으로 勒定하자, 閭閻間에 哭聲이 자자했다. 이에 辛保安이 군수로 들어와 이 지역을 엄히 다스려 이와 같은 폐풍을 일소하였다. 세종 10년(무신)에 광주목사로 옮겨갔으며, 그를 추모하는 ‘去思碑’가 세워졌다. 墓는 경기도 楊州 蘆原里이다. 부인은 淑夫人 鄭氏로서 判書 鄭士亻周의 딸이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는 서울사람으로서 영광군수로 내려왔다가 그의 次子 斯龜를 영광의 사족 淸州韓氏에게 장가들게 하였고, 그로인해 영월신씨가 영광에 터를 잡게 되었던 것이다.
  • 호는 寒沙. 어려서부터 睡隱 姜沆(1567-1618)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617년(광해군 9)에 20세에 생원시 입격하였고 1624년(인조 2)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과거급제후 承文院注書, 典籍을 지냈으며, 어머니 봉양을 위해 興陽, 咸平 등을 수령을 지냈다. 그 후 工曹․禮曹正郞, 경상도 전라도 등지의 都事를 지냈으며, 관직이 司憲府掌令까지 이르렀다. 어머니 상복을 벗은 후 다시 坡州, 長興府使를 지냈다. 본서에 수록된 20 여건의 교지류에 그의 官歷이 대부분 나타나 있다.
  • 호는 省齋. 신유일 등과 함께 정유왜란 당시에 향교의 위판과 전적을 피란시켜 표창을 받았고, 沙溪 金長生이 召募使로서 활동할 때 적극 참여하였다. 1603년(선조36)에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牛溪 成渾의 혐의를 벗겨주기 위해 글을 올렸으며, 또한 그 가족을 위해 곡식을 염출, 힘써 도우기도 했다. 이같은 인간적인 유대관계는 이후 이 가문이 노론의 색채를 띄게된 것으로 판단된다. 光海君代에 廢母論이 제기되었을 때는 두문불출하였고, 인조반정이후 이괄 등이 난을 일으키자 倡義하였다. 이로 인해 역대영광군수들에 의해 여러번 천거되었고, 이에 임금이 특명으로 禧陵參奉에 제수하였다.(1634년, 인조 12) 부인 瑞山柳氏는 현감을 지낸 柳亨進의 딸이다. 辛應望에 대해서는 그 자신이 저술한 世譜要略(本書 게재), 그리고 寧越辛氏世德言行錄, 靈光郡邑誌, 湖南義錄, 湖南募義錄 등에 그의 事蹟이 비교적 자세히 전해지고 있으며, 省齋集 省齋漫錄등 시문집이 전한다.
  • 字는 叔欽, 號는 敬直齋, 신응망의 아버지이며, 辛應純의 伯父이다. 정유왜란시 왜적이 몰려온다는 소식을 듣고 丁應璧, 조카 辛應純 등과 함께 향교 대성전에 있던 위패와 祭器, 儀軌 등의 물건을 안전하게 피란시켰다. 이러한 공로와 함께 孝行으로 말미암아 전후 方伯들이 왕에게 啓達, 弘文館副提學에 贈職되었다. 前室은 綾城具氏( ? - 1587)로서 通政大夫 龍潭縣令 具方慶의 딸이다. 2녀 1남를 낳았다. 사위는 李克撥(完山人), 李偉이며, 1男인 應陽은 早卒하였다. 後室는 廣州李氏로서 李安瑭의 딸이다. 역시 2녀 1남을 낳았다. 사위는 丁濟元, 丁蚪鈗으로서 모두 靈光丁氏이다. 1男인 應望이 유일한 血孫으로서 家統을 이었다. 신장길은 성격이 嚴毅 剛直하였다고 전해지며 聖經賢傳과 諸子百家를 좌우에 두고 날마다 그 微妙한 곳을 究明하였다고 한다. 더욱이 易學에 精通하여 일찍이 <易學啓蒙指掌圖>를 저술하기도 했으며 聖步, 曆數, 卜筮, 醫方 등에 두루 능통하였다.
  • 號는 둔와(遯窩). 효성이 지극하여 경술년(1850)에 아버지(신항복)의 병세가 위중해지자 탕약(湯藥)을 손수 다리고 남들에게 맡기지 않았다. 또한 대변을 받아 맛을 보며 병의 차도를 살폈고, 이렇게 하기를 7달 동안이나 시종여일(始終如一)하게 했다. 상을 당하자 땅을 치며 통곡하였으며 기절한 것이 여러번이었다. 이로인해 주위에서 그를 신효자(辛孝子)라 불렀으며, 죽은 뒤 그의 행적을 기려 ‘둔와(遯窩)’란 편액으로 精舍를 지었다. 1887년에 효자로 천거되어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증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