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서를 남긴
사람들

주요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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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午(號:矛隱, 成均進士)는 宜春에 있는 그의 처가, 즉 宜寧南氏家를 오가다가 咸安 茅谷洞에 새 터전을 마련하게 되었는데, 이는 午뿐만 아니라 그 아들 介智 등 그의 자손들이 함안에 세거하게되는 직접적 계기가 된다. 17세기 인물인 李栽 당시에도 그 父와 함께 이곳에 성묘를 다녔다고 하는 기록에서도 이는 알 수 있다. 그는 여말에 진사로 입격하게 되지만 고려왕조가 그 운명이 다해가자 폐문불출하고 종신토록 사환을 하지 않고 지냈다. 아울러 정몽주가 그를 ‘우리들이 한 賢士를 잃었다’ 라고 한 사실을 통해볼 때 午는 당시 은둔인사들이 그러했듯이 조선왕조의 개창에 대단히 비판적인 태도를 취했던 인물로 보인다.
  • 조선왕조에 대한 不出仕는 태종대 인물인 그의 아들 介智代에도 이어지고 있었다. 따라서 당시까지는 이 가문의 사회경제적 지위도 그다지 높은 편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介智가 농사까지 짓게 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사정을 잘 대변해주고 있다. 그러나 介智代에는 그가 晋州河氏를 妻로 맞이함으로써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는 시기였다. 그의 妻家는 진주에서 상당한 재력과 사회적 기반을 지닌 문벌가였다. 그의 妻父는 星州牧使 河敬履였으며 妻外祖는 開城府尹을 지낸 姜壽明이었는데 특히 妻父 河敬履는 진주의 대문호로서 대단한 사회경제적 지위를 누리고 있었던 가문이었다. 이러한 처가의 위세와 아울러 그의 처인 진주하씨의 엄격한 자녀교육으로 인해 그의 아들대인 孟賢代에는 당당한 중앙의 문벌가문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맹현이 현달해 관직에 진출하자 거주지 또한 咸安 山翼里 茅谷村에서 서울로 옮겨갔다. 한편 咸安에는 介智의 二男 仲賢이 선대의 가업을 이어받고 자손을 번성시키게 된다. 仲賢은 문과에 급제하여 영해부사 등의 벼슬을 지내지만 그의 자손들이 함안 모곡리에 세거하여 載寧李氏 咸安派를 형성하고 있다.
  • 조선 초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사성(師聲), 호는 근재(覲齋). 아버지는 호조참판 개지(介智)이며, 어머니는 진주하씨(晋州河氏)로 경리(敬履)의 딸이다. 이맹현은 왕으로부터 京第를 하사받았으며, 처가로부터도 막대한 재산을 분재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후 그는 경제적으로 대단한 富를 누리게 된다. 본서에 수록한 분재기 1, 2번의 문서가 바로 그의 경제력을 입증하고 있다. 이는 그의 사후 그의 자식 9남매에 의해 분재된 것으로 노비만이 기록되어 있으나 노비 수가 750여구를 상회하는 것에서 그의 막대한 경제적 기반을 엿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가 소유하고 있는 노비는 전국에 산재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