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서를 남긴
사람들

주요인물

  • 고문서를 남긴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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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자수의 손자인 李禎은 善山府使를 지냈으며, 世祖代에 佐翼原從功臣 3등에 책록되는 등 세조의 왕위찬탈 과정에 적극 동조하면서 중앙의 양반관료로서 입신하였다. 이는 이 가문의 사회적 지위를 높이고, 노비 및 전답의 증가 등 경제적 발전을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16세기 중반까지 그다지 현달한 인물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分財記 상에서 많은 재산이 확인되고, 또 안동지역의 유력사족가문인 安東金氏, 義城金氏 등과 혼인관계를 맺고 있음에서 확인되고 있다. 李禎은 후에 曾孫 李滉으로 인해 호조참판에 증직되었다. 이정의 아들인 李遇陽은 퇴계의 伯祖로서 무과를 거쳐 仁同縣監을 지냈다. 다음 代인 李哲孫은 음직으로 承義副尉를 제수 받았으며, 李壎은 護軍을 지냈다.
  • 아버지는 李希顔으로서 일찍이 遺逸로 徵召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어머니는 안동의 大姓인 의성김씨 鶴峯 金誠一의 祖父인 金禮範의 딸이었다. 이정회는 어려서 퇴계 문하에서 수업하였고, 親喪에 廬墓살이 하면서 禮를 다하였다. 宣祖代인 1590년에는 大明會典에 잘못 기록된 왕실의 계통을 바로잡는데 공을 세운 댓가로 주어지는 光國原從功臣 3등에 책록되었다. 임진왜란 시에는 橫城縣監으로 있으면서, 동생인 庭柏을 안동으로 보내 의병을 창의하게 하였다. 또 정유재란 시에는 義興 지역 방어에 힘쓰는 한편 天兵을 접대하고, 백성을 撫恤하는 등 공을 세웠다. 이후 眞寶 지역으로 들어와 鳳覽書院을 세우고 퇴계 이황을 배향하였다. 그리고 芝南書堂을 세워 한강 정구가 부사로 부임하자 함께 田土를 구획하여 선비를 양성할 기반으로 삼고자 하였다. 이정회의 立身은 사회적 경제적으로 진성이씨 주촌파의 입지를 더 확고히 하는 데에 큰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이 가문이 이후 안동지역의 막강한 사족가문인 豊山柳氏, 安東權氏, 義城金氏 등과 계속적인 통혼관계를 맺고 있음에서 확인된다. 한편 이정회는 李氏家의 선대 사적을 정리하는 등 차후 族勢의 확장에도 중심적인 인물이었다. 진성이씨가의 世傳遺錄을 친필로 작성하였고, 족계에도 깊이 관여하여 관련 문서를 남기고 있음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이정회 이후 이 가문은 중앙에서 크게 현달한 인물은 내지 못하고 안동지역을 비롯한 영남 일원에서 在地士族으로서 그 족세를 다져 나갔다. 한말에 와서는 李兢淵이 의병으로 활약함으로써 한말 의병사 뿐 아니라, 임란 이래 영남지역 의병의 명맥을 잇는 인물 중 한 사람으로서 부각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