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서를 남긴
사람들

주요인물

  • 고문서를 남긴 사람들
  • 주요인물
  • 그의 동생 承宗과 함께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며, 이 지방에서 명망있는 인물로 활동하였으며, 그 중심지가 葛田 인근의 淸遠亭이었다. 본래 淸遠亭은 안계종의 아버지 安建이 예천군 개포면 劍巖(검바우)에 건립한 정자였다. 뒤에 아들 계종이 안동으로 이사하면서 이곳에 移建하였다. <淸遠亭記>에 의하면 정자가 처음 창건된 시기는 己卯士禍(1519년) 직후인 1520 ~30년간이며, ‘淸遠’이라고 명명한 사람은 郡守 文敬仝이었다고 한다. 이곳에는 退溪 李滉을 비롯하여, 崔演(1500-1549, 號:艮齋), 楊拜善(進士) 등 당대 名士들이 드나들었다. 이들의 詩文이 懸板, 또는 詩稿형태로 전하고 있다.
  • 계종의 孫 安景老(1527-1592)는 생원시에 입격하였는데, 그는 屛山書院 院長을 역임하였을 만큼 비중있는 인물이었다.
  • 경노의 아들 安聃壽(1552-1627)는 西厓 柳成龍의 문인이었다. 51세의 나이로 文科에 합격하였고(1603년), 掌樂院 僉正을 거쳐 禮安縣監을 지냈다. 그는 光海君 廢母時에 位號의 복구를 청하였다가 삭탈관직 후 낙향하여 10여년간을 두문불출하였다. 屛山書院 원장을 지냈으며, 1613년 병산서원에 祠宇를 세워 서애선생의 位牌를 봉안하는 등 서원 제반사를 주도하였다. 안담수는 1582年(宣祖 15) 道村의 權暐, 九潭의 金允思 등과 함께 壬癸會를 조직하였다. 壬癸會는 안동출신으로서 壬子年(1552)과 癸丑年(1553)에 출생한 11명의 인물들로 조직된 것으로 同甲契의 형식을 띤 모임이다. 이 계회에 참석한 이들은 대체로 16세기말 안동을 대표할만한 사족들인데, 안담수는 이들과 교유하면서 안동사족으로서의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안담수가 그의 朋友와 시문을 짓고 학문을 논하던 곳이 雁湖亭이다. 건물이 처음 세워진 것은 그가 낙향한 때인 光海君대인 1620년 전후였다. 그는 이곳에서 淸陰 金尙憲, 愚伏 鄭經世, 蒼石 李埈, 五峯 李好閔 등 당대의 명사들과 교류하였다. 이들의 시문이 懸板으로 작성되어 현재까지 전해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