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인물

  • 고문서를 남긴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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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382년(우왕 12) 孟思誠(1360-1438)과 동방으로 급제하여 응교․직제학을 거쳐 영흥부사를 지낸 인물이다. 그의 부인 德山尹氏는 禹倬(1263-1342)의 외증손녀였으며 두 번째 부인 단양우씨는 우탁의 증손녀였다. 이처럼 그는 예안에 거주하던 우탁가문과 연혼․중혼의 관계에 있었다. 그의 산소가 영주의 鐘陵山에 소재한 배경도 여기에 있다. 이처럼 전주유씨는 전형적인 재경 사환가문이면서도 영남과의 통혼을 매개로 柳克恕․柳濱 양대의 산소가 안동․영주에 소재하는 등 영남과의 지역적 연고가 깊은 가문이었다.
  • 전주유씨의 위상을 더욱 격상시킨 인물이다. 그는 南守文․權埰와 더불어 「集賢殿三先生」으로 지칭되고 문과 중시에도 합격한 수재였다. 특히 그는 고금의 전고에 통달하여 문한직을 독점하는 한편 「綱目訓義序」․「無寃錄序」를 찬하는 등 세종조의 문물정비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이런 행적을 바탕으로 후일 「安東派」자손들에 의해 「岐陽里社」에 봉안되었다. 다만 그는 아들이 없어 아우 末孫의 3자 季潼을 후사로 삼았다. 따라서 후술할 「全州柳氏安東派」는 계보상으로는 의손의 후손이지만 혈통상으로는 말손의 후손들이다.
  • 「京派」에 속하지만 후대까지 「安東派」와도 종족적인 유대가 긴밀하게 유지되었다. 이런 정황은 유영경이 柳復起와의 만남을 요청하고, 柳友潛이 경상감사 柳永詢과 더불어 선영의 관리사업을 주선하였으며, 수곡종택에 「柳崇祖請廡上疏」가 소장된 사실에서도 방증된다.
  • 그는 김성일(鶴峰)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이황의 학문을 계승하였으며 임진왜란 당시에는 金垓․裵龍吉․郭再佑 등과 함께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전주유씨 家傳에 따르면 현재 수곡종택에 소장된『東國地圖』도 의병 활동을 위해 제작된 것이라 한다. 그는 영주․예안에 소재한 선영을 지성으로 관리하는 한편 기민 구호에 노력하여 동종과 향리 사이에 인망이 높았다. 그리고 성품이 근검․인후하였으며 柳永慶(10촌 형제)의 접견을 사양할 정도로 처신이 신중하였다. 이에 안동부사 黃暹은 그를 고결한 선비로 평가하였으며, 정구(寒岡:1543-1620)는 ‘유모는 더불어 마음을 논할 만한 사람이다’라고 극도로 칭송하였다. 기양서당은 1852년(철종 3) 追遠祠를 건립하여 유의손․유복기의 위패를 봉안하는 과정에서 서당에서 祠宇(里社)로 발전하였다. 이런 현상은 서당에서 사우로의 승격이 유행하던 시대적 풍조의 반영인 동시에 일문의 정신적 구심점을 지니고자 했던 전주유씨들의 현실적 여망의 반영이었다. 유의손이 재경시절 전주유씨의 문호를 신장시킨 인물이라면 유복기는 안동파 후손들로부터 「起家之祖」로 칭송된 인물이다. 유의손․유복기의 봉안 이후 기양서당(岐陽里社)는 학문의 산실을 넘어 정신적 구심점으로서의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