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인물

  • 고문서를 남긴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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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예는 1373년(공민왕 22)에 읍리에 내려와 살았으며, 조선 개국 직후인 1393년(태조 2)에 문과에 합격하여 주서, 성균관 사성, 면천군수 등을 지냈다. 최예는 최진립의 7대조로서 최씨 가문의 중흥조로서 큰 역할을 한 인물이다. 佳巖派 派祖 崔震立은 慶州府 府北 顯谷村 龜尾洞에서 태어났다. 그는 태어나면서 府南面 伊助에서 성장하였는데, 원래 이조마을은 外家인 평해황씨의 터전이었다. 이 사실은 곧 최진립의 아버지 臣輔가 그의 妻家(丈人: 黃林鍾, 參奉)로 이주해 살았음을 말해 준다. 3살 때에 어머니 황씨 부인이 세상을 떠나고 庶母의 손에서 자라났다. 자라서는 당시 崔氏家의 門長이자 進士를 지낸 崔臣隣에게 나아가 수학하였다.
  •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사건(士建), 호는 잠와(潛窩). 신보(臣輔)의 아들이다. 최진립(1568 ~1637)이 경기수군절도사 겸 교동도호부사 경기・공청・황해도 등의 수군통제사로 있을 때 왕으로 받은 것이다. 교서는 국왕의 命令書․訓諭書․宣布文을 뜻하지만, 현존하는 교서는 공신 교서가 상당수를 차지한다. 告身의 대부분은 최진립이 大小 관직을 역임하면서 받은 사령장이다. 최진립은 1594년 무과에 합격하기 전에도 무관직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연보(󰡔潛窩先生實紀󰡕)에는 그의 무관 경력이 강조되고 있지 않으나, 사실 그는 20대 초반에 세습된 무관 가문의 전통을 이어받아 실제 고급 무관을 역임하고 있었다. 1583년 軍資監奉事의 告身은 최진립의 出仕 경로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그가 軍資監奉事를 받은 것을 실직이 아니라 이른 바 국가에 대하여 ‘納穀’한 것에 대한 반대급부, 즉 影職이었다. 영직이란 근무할 職事는 주지 않고 품계만 주어지는 일종의 명예직이다. 임란이 한창이던 1593년 최진립은 軍功으로 명실상부한 실직의 무관으로 입신하게 되는 데, 이를 증명하는 것이 告身 2번 문서이다. 실질적으로 그의 初仕는 秉節校尉 部將이었다. 그는 1594년 또다시 軍功으로 인해 軍資監 副正에 超敍되어 본격적인 관료의 길을 걷게 되는 한편, 그의 가문의 사회 경제적 위상도 격상되었다. 최진립의 입신의 출발점인 軍功이란 임진왜란 당시 1592년의 경주지역 전투였다. 그는 경주부윤(尹仁涵), 판관(朴毅長, 장기현감(李守一) 등과 합세하여 경주지역을 방어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25세였다. 1594년(선조 27) 27세 때 그는 대망의 武科에 급제하였다. 당시 무과 홍패교지가 본서에 수록되어 있다. 최진립은 公州營將이 최종 관직이나 그 고신은 현전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