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서를 남긴
사람들

주요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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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경부(敬夫), 호는 잠계(潛溪).章山書院은 회재 이언적의 아들 李全仁(1516-1568)을 제향하기 위해 1780년(정조 4) 一鄕 및 문중이 중심이 되어 건립되었다. 서원이 건립된 곳은 경주지역이 아니라 永川市 臨皐面 守城洞이다. 행정구역이 바뀌기 전에는 경주부 北安谷 天章山 아래이며, 1780년에는 廟宇(書齋) 출발하였다. 장산서원의 모범이 된 것은 안동의 西澗祠(김상헌 제향)와 같은 경주지역인 仁山書院(송시열 제향)이었다. 다시 말해 장산서원은 출발 당시에는 18-19세기 영남지역의 노론계와 당시 노론정부의 도움, 그리고 경주부윤의 지원하에 설립․운영된 서인․노론계 서원이라고 볼 수 있다. 장산서원은 1868년 대원군 당시 묘우가 훼철되어, 현재 현판 등 그 유물만이 종가에 전하고 있다
  • 이순은 그의 형인 이준과 행적이 상당부분 중첩됨에 따라 그 형에 가려져 있는 부분이 많다 그리고 38세라는 비교적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그 행적이 알려진 것이 별로 많지 않다.이순은 그의 형과 함께 아버지 李全仁 이래의 遺業인 회재의 顯揚에 전력을 다하였다. 퇴계 이황을 찾아가 행장을 받아오거나, 소재 노수신에게 편지를 보내 회재의 저술(大學補遺) 가운데 곡해된 부분을 바로 잡는 등이 그러한 노력의 일종이었다. 따라서 이전인이 회재 宣揚을 선도하였다면, 이들 두 형제는 부친을 받들어 실행에 옮기는 일을 담당했던 것이다.이순은 어려서부터 총명해 일찍이 학문에 뜻을 두었는데 특히 大學에 심취해 善惡에 대해 궁구하였다. 형 이준을 따라 퇴계 이황의 문하에 출입하였으며, 28세에는 관직에 천거되기도 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향리에서 林泉을 벗삼다가 38세에 세상을 떠났다. 부인 경주최씨와의 사이에 자녀가 없자 형의 둘째 아들 容을 양자로 삼아 家系를 이었다.
  • 9세에 出系하여 양부 淳의 뒤를 이었다. 아버지 李浚이 高官을 역임함에 따라 蔭敍로 習讀官의 벼슬에 나아간 뒤 武科에 급제, 直長, 主簿, 束伍營將, 堂上인 折衝將軍 龍驤衛 副司直에 올랐다. 8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嘉善大夫漢城府右尹에 증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