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서를 남긴
사람들

주요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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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조에 활약한 인물로서 충숙왕때 中郎將이 되었다. 그는 충숙, 충혜왕이 교체되는 어지러운 시기에 활동하였다. 충숙왕으로부터 왕위를 양위받은 충혜왕 원년에 조익청은 호군으로서 大靑島에 나아가 원나라 사신을 맞이하였다. 충혜왕의 무도함에 의해 충숙왕이 다시 복위하자 조익청은 대호군이 되었다. 당시 조익청은 尹桓과 함께 충혜왕의 근신들에 대한 처벌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충숙왕이 죽고 충혜왕이 왕위에 오르자 도리어 제주안무사로 좌천되기도 하였다.그 후 1343년(충혜왕 복위 4)에는 원나라에서 李芸․奇轍과 함께 中書省에 글을 올려 충혜왕의 무도함을 진언하였다. 1351년 공민왕이 즉위하면서 찬성사가 되고, 1352년에는 공민왕이 원나라에 있을 때 扈從한 공으로 燕邸隨從功臣 1등에 올랐다. 그 후 좌정승에 올라 夏城府院君에 봉해지고 純城直節同德贊化功臣에 녹훈되었다. 1376년(우왕 2) 공민왕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양평(襄平)이다. 조익청과 관련한 자세한 행적은 󰡔고려사󰡕 세가에 기록되어 있다. 조익청의 중앙정계에서의 활약을 계기로 창녕조씨가의 발흥의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고 하겠다.조익청은 배위 여산송씨 사이에 2남 1녀를 두었다. 이들이 활동하는 시대는 여말선초 왕조교체의 혼란기였다.
  • 고려조에 상호군을 역임하였고 차자 조신충은 우왕 9년(1383)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는 李穡, 曺敏修, 李崇仁, 河崙 등과 교의가 깊었다. 고려말에는 判熙川郡事로 부임하였다가 조선왕조가 개창 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영천의 蒼水里에 우거하였다. 그의 영천 우거 배경에는 영천에서 입지가 유력하였던 영천최씨 최중연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익청의 장녀는 당시 문망이 높은 청주이씨 이거인(? ~1402)과 혼인하였다. 이거인은 고려조에 刑部尙書를 역임한 文簡公 李挺(1297 ~1361)의 아들이었다.
  •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가회(可晦), 호는 취원당(聚遠堂) 또는 죽와(竹窩). 아버지는 윤신(允愼)이며, 어머니는 이조판서를 지낸 장말손(張末孫)의 손녀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며, 성리학(性理學)을 깊이 연구하였다호는 聚遠堂 또는 竹窩로서 창원에서 출생하였으며, 1558년(명종 13)에 생원․진사 양시에 합격하였고, 1564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이후 1569년(선조 2) 형조좌랑, 감찰을 역임하였으며 1576년 重試에 장원급제, 벼슬이 의금부도사에 이르렀다. 그는 퇴계 李滉의 문인으로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한강 정구, 율곡 이이, 고봉 기대승 등과 교의가 두터웠다. 그는 1578년 江東으로 좌천된 아우 조호익을 만나고자 평안도 도사의 직책을 얻어 내려갔다가 그곳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선조는 그 효행과 우애를 높이 사 정문을 내려 표창하고, 󰡔삼강행실록󰡕에 수록하였다. 밀양의 오봉서원(五峰書院)․청효사(淸孝祠)에 봉안되었다. 󰡔취원당문집󰡕이 있다. 특히 그는 밀양박씨 박홍미의 딸과 혼인하는 것을 계기로 처가의 경제적 기반을 바탕삼아 밀양의 오방동으로 이거하였다. 현재 오방동에는 정려각을 비롯하여 江東邱 등 조광익과 관련한 유적이 산재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