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인물

  • 고문서를 남긴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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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말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光州). 찬성사 신호(臣扈)의 손자이다.개성부윤을 지낸 정윤부는 아들 둘[麟晉․龜晉]을 두었는데, 차자정구진은 1382년 생원․진사시에 입격하고, 1386년 문과에도 급제한 수재였다. 출중한 문재를 바탕으로 조선왕조에서도 중용되어 1407년 강원도관찰사, 1414년 이조참의․대사성, 1423년(세종 5)에는 좌사간을 역임했다.정구진의 상경종사는 사실상 광주정씨 京派의 출현으로 이어졌다. 정신호․윤부 부자가 사회․경제적 기반을 향리에 두고 사환을 유지하였다면 정구진은 사환을 매개로 거주지를 옮긴 경우였다. 현재로서는 정확한 이주지를 알 수는 없으나 분묘[楊州 泉川]의 위치로 보아 양주 일대에 전장을 마련하고, 서울과 양주를 왕래하며 종사한 것으로 추정된다.정구진은 문신으로서의 탄탄한 지위와 명문 동래정씨 가문의 여서라는 인적 배경을 바탕으로 당당히 成家할 수 있었고, 자손도 크게 번창했다. 특히, 사헌부장령을 지낸 장자 鄭之唐은 고성이씨 집안의 참판 李鐫을 사위로 맞았는데, 이 혼인은 광주정씨의 문호가 신장되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였다. 이질은 고려말의 명재상 李欄(杏村)의 증손으로 조부 李岡(平齋)은 대제학, 아버지 李原(佐命功臣)은 좌의정을 지냈다. 이 가문은 안동권씨 權近 가문, 서산유씨 柳方善 가문, 파평윤씨 尹三山 가문 등과 통혼하며 당대 최고의 문벌가문으로 꼽혔다.차자 정지하는 문과 출신은 아니었지만 1414년 생원시에 입격하였고, 문음으로 출사하여 연천현감․사헌부지평․황해도찰방․사헌부장령 등 내외 요직을 거쳤다. 성격이 강직하고 경세관료로서 실무능력을 인정받았던 그는 1434년(세종 16) 사헌부지평 재직시 御馬를 타는 불경을 범한 홍유근의 탄핵을 주도했고, 1447년에는 염전 관련 敬差官으로서 호남을 순찰하기도 했다.
  • 정이주는 정경의 차자로 태어났지만 계통상 鄭純仁→鄭褧으로 이어지는 가통의 계승자가 되었다. 당시는 종법질서가 뿌리를 내리기 이전이었기 때문에 입양제도가 활성화되지 않았고, 딸만 있을 경우 외손봉사의 관행이 오히려 일반적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정순인의 장자 정유는 평릉정[李濠]에게 시집간 딸만 있었기 때문에 가계계승이 어려웠다. 또 정경의 장자 鄭以虞 역시 아들 鄭志湖에게 아들이 없었고, 족보상 입양한 기록도 없기 때문에 가계계승이 사실상 불가능했다. 이런 상황에서 정이주는 관료로서 현달하였고, 자손들 역시 번창함으로써 자연히 鄭純仁(牙山公) 계통을 대표하는 가계로 자리 매김된 것이다. 화곡가문 직계에서 배출된 최초의 문과합격자는 정이주였다. 정이주는 1558년 사마 양시를 거쳐 1568년 문과에 합격했다. 문한이 있었던 그는 예조좌랑에 재직하던 1567년에는 실록청(『明宗實錄』)의 기사관으로 참여했고, 1569년에는 사림의 극선인 한림에 임명되어 사필을 잡았다. 이어 그는 1573년 사헌부지평, 1574년 사간원정언 등 양사의 직책을 맡아 간관으로서의 책무를 다했다. 또 1576년에는 경기어사, 1578년에는 순무어사로 파견되어 이도쇄신과 기강확립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는 벼슬하는 동안 치적이 많았고, 특히 청직한 인물로 명성이 자자했다. 사후에는 양주 북면 안흥리에 묻혔는데, 후일 이곳은 양주 광주정씨의 대표적 세거지로 자리하게 된다
  • 1553년(명종 8)∼미상.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몽여(夢輿), 호는 화곡(禾谷). 아버지는 장령 이주(以周)이며, 어머니는 봉원부원군(蓬原府院君) 정창손(鄭昌孫)의 5대손으로 부사과 응서(應瑞)의 딸이다. 1573년(선조 6) 사마시에 합격하고, 1577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주서로 있었으나 1582년 경망(輕妄)하다는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1586년 안동부사가 되었고, 1599년 호조참의로 구관당상(句管堂上)을 겸직하였다. 대사헌으로 진하사은사(進賀謝恩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뒤 이조참의·동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1607년 황해도관찰사가 되었으나 정철(鄭澈)의 아들 종명(宗溟)을 안성군수로 삼은 책임을 지고 파직되었다. 그러나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병조참판에 복직되었고, 곧 이조참판에 올라 동지춘추관사가 되어 《선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뒤 한성부우윤을 거쳐 1611년(광해군 3) 대사헌·지의금부사를 지냈으며, 1612년 평안도관찰사가 되었으나 김직재(金直哉)의 무옥(誣獄)에 연루되어 파직되었다. 이듬해 서인으로서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金悌男)의 역모에 관련하였다는 혐의를 받았으나 죄가 없어 경기도관찰사·형조판서 등을 지냈다. 일찍이 임진왜란 때 군량을 관장하여 보급에 힘썼으며, 소를 올려 정인홍(鄭仁弘)·이이첨(李爾瞻) 등을 논책하였다. 글씨를 잘 썼으며, 작품으로는 연성대첩비(延城大捷碑)가 있다. 청주 수락서원(壽樂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민(忠敏)이다.
  • 정후기는 의령남씨와의 사이에서 4남[姬柱․姬輔․文柱․漢柱] 2녀[李海祚․李壽駿]를 두었다. 이 시기에 이르러 광주정씨는 노론 기호학파의 일원으로 편입되기에 이른다. 정사호와 김장생의 관계, 정성원․의창 부자와 송시열과의 세의를 고려한다면 매우 자연스런 귀결일 수도 있지만 사승관계를 통한 학통상의 고리는 이때부터 만들어졌다. 네 아들 중 장자 김희주와 차자 김희보는 權尙夏(寒水齋)․蔡之洪(三患齋)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학문과 행의를 인정받았는데, 특히 김희보는 孔門의 子夏로 일컬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