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서를 남긴
사람들

주요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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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득번은 1507년에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당시 혼란한 정국을 피해 출사에는 뜻을 두지 않고 고향에 은거하였다. 그는 고향에서 오로지 자녀의 훈육과 학문에 열정을 쏟았다. 갈천 임훈 형제가 학문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것은 오로지 임득번에 의해 가능했던 것이다. 그의 학문하는 자세는 향중에 끼친 반향이 컸다. 임득번은 사후에 ‘嶧川祠’에 제향되었으며, 은진임씨가에 있어 基家祖로 일컬어지고 있다. 임득번은 진양강씨와의 사이에서 3남 2녀를 두었다. 임훈, 임영, 임운 세 아들은 학문적으로 현달하여 크게 이름을 떨침으로써 은진임씨의 흥기를 맞이하게 하였다. 장자인 임훈은 1540년(중종 35) 생원시에 합격한 후 1553년(명종 8) 사직서 참봉이 되었다가 이듬해에 집경전 참봉으로 옮겼다. 1555년 전생서 참봉이 되었다가 얼마 후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와서 80세가 넘은 노부 봉양에 극진하였다. 1566년 관찰사의 추천으로 효행 정려가 내려졌다.
  • [해제] 임득번의 장자 임훈은 1540년(중종 35) 생원시에 합격한 후 1553년(명종 8) 사직서 참봉이 되었다가 이듬해에 집경전 참봉으로 옮겼다. 1555년 전생서 참봉이 되었다가 얼마 후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와서 80세가 넘은 노부 봉양에 극진하였다. 1566년 관찰사의 추천으로 효행 정려가 내려졌다. 임훈은 이후 1566년 언양현감에 발탁되었고, 1569년(선조 2) 군자감주부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 후 비안현감으로 잠시 출 사 한 후 지례현감(1573), 宗廟署令이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부임하지 않았다. 얼마 뒤 장악원정을 거쳐 광주목사(光州牧使)를 지냈고, 1582년 장례원판결사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낙향하였다. 안의의 龍門書院에 제향되었다. 그의 문집으로는 󰡔葛川集󰡕이 있는데 1665년(현종 6) 그의 증손의 주도에 의해 권두에 송시열(宋時烈)의 서문을 실어 간행하였다. 1616년(현종 3)에는 치제문이 내려졌으며, 1861년(철종11)에 資憲大夫吏曹判書에 추증되었다. 1885년(고종8)에는 ‘孝簡’의 시호가 내렸다. [안내판] 호는 갈천(葛川), 갈천 임훈은 1573년(선조 6)에 벼슬을 그만둔 뒤, 고향에서 후진을 양성하기 위해 아우 임운과 함께 갈천서당을 건립하였다. 그의 후손이 편집하여 1665년(현종 6)에 4권 2책으로 구성된 『갈천집』이 간행되었다. 서문은 송시열이 썼다. 『갈천집』에는 선생이 쓴 시를 비롯하여 상소문과 잡문 등 다양한 글이 실려 있다. 그 중에서 ‘언양진폐소’는 선생이 언양현감으로 있을 때 고을의 어려운 실정을 조정에 보고하고 해결을 촉구한 글로, 가혹한 세금 때문에 고통 받는 농민의 생활상을 호소하고 있어 당시 언양 지역의 사회 실정을 생생히 전해주고 있다.
  • [해제] 임득번의 셋째 아들 임운은 鄭汝昌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퇴계 이황의 문하에 출입하였다. 1567년 行誼로 천거되어 社稷署參奉에 제수되었으며, 이어 集慶殿․延恩殿․厚陵 등의 참봉에 임명되었다. 용문서원에 제향되었으며, 󰡔瞻慕堂集󰡕이 있다. 한편 임훈을 비롯한 임득번의 세 아들은 부모 상에 있어 삼년상을 독실하게 행하여 향내에서 모범이 되었다. [안내판] 호는 첨모당(瞻慕堂), 그의 후손이 편집하여 1665년(현종 6)에 3권 2책으로 구성된 『첨모당문집』이 간행되었다. 서문은 송시열이 썼다. 『첨모당문집』에는 역사 시와 문장 등 다양한 글이 실려 있으며, 특히 유학을 장려하고 불교를 배척하는 글을 실어 조선시대의 사상적 경향을 잘 전해주고 있다. 두 문집에는 또한 지역 사회에 관한 글들이 다수 실려 있어, 거창 지역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 [해제] 2세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자 어머니 진양형씨의 엄격한 가르침을 받음과 아울러 학문적으로는 백부인 갈천 임훈과 계부인 첨모당 임운에 의해 훈육되어 일찍이 문행이 있었다. 특히 임승경은 霞谷 鄭雲龍(1542-1593), {雨/齊}峯 高敬命(1533-1592) 등과 폭넓은 교유를 바탕으로 학문적 성취가 남달랐다. 말년에는 노직으로 가선대부의 품계가 내려지기도 하였다. 喘翁 鄭重元이 묘지명을, 晩求 李種杞가 묘갈명을 지었다. 임승경의 신도비는 奎章閣副提學 鄭萬朝(1858~1936)가 찬하였다. 글은 同副承旨 李義悳이 쓰고, 判敦寧 閔丙奭이 전서를 썼다. 임승경은 밀양손씨 습독 孫翕의 딸과 혼인하여 두 아들을 두었다. 장자 林眞戇은 道川翁, 차자 林眞惠는 仁善으로 세인들이 호칭할 정도로 덕망이 높았다. 임진당은 지극한 효성으로 향내에 명망을 얻어 포증을 누차 요청한 결과 復戶의 처분이 내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