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인물

  • 고문서를 남긴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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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 전기 문신. 본관이 거창(居昌)이다.좌복야(左僕射) 공헌공(恭獻公) 신수(慎修)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증 호조판서(贈戶曹判書) 신인도(愼仁道)이다.신이충은 1410년에 아버지의 상하자 관곽을 거창의 아전 유습에게 전담시켰다. 뿐만 아니라 거창일대에 田園을 광점하고 백성을 사사로이 부린 것으로 큰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이로 본다면 거창신씨는 조선초에 거창내의 가세가 대단하였으며, 경제적 지위 또한 그에 못지 않았다고 하겠다.신이충은 조선왕조에 적극 출사하였다. 그는 일찍이 1377(禑王 3) 감시(監試)에 정전(鄭悛)과 동방으로 급제하였다. 이 후 풍해도(豊海道) 감찰(監察) 양주목사, 판관천현사(判利川縣事)를 역임하였다. 특히 신이충 당대에는 한때 태종이 원윤(元尹) 李裀의 부인으로 신이충의 딸을 물색할 정도였다. 신이충은 한때 양녕대군의 전지 침탈과 병기제조 문제로 마찰을 빚기도 하였다. 또한 세종이 李{言+豈}를 잠시 남대문 밖 신이충의 집에 머물도록 하면서 논란을 일으키기도 하였다.신이충의 이러한 공고한 정치․경제적 입지와 역할은 이후 거창신씨의 발흥에 큰 힘이 되었다. 거창신씨가 신이충을 「상하 수백년을 이어오고 또한 열어 가는 중흥조」로 묘사하고 있는 것은 모두가 이러한 데에서 연유한 바가 크다고 하겠다. 그의 묘는 산음(山陰) 생림촌(生林村)에 있다.신이충은 순창설씨(淳昌薛氏)와의 사이에는 3남 1녀를 두었다. 장자 신기(愼幾)는 號가 경재(景齋)이다. 그는 1411년(太宗11)에 진사시(進士試)와 문과에 합격하였다. 이 후 승문원정자(1415), 예조좌랑․충청도관찰사(1426) 형조참의(1444), 전라도관찰사(1445) 등을 역임하였다.1455년에는 정난원종공신(靖難原從功臣) 3등에 녹훈되었다. 묘소는 양주 수락산에 위치하고 있다. 두 딸은 조선초기의 훈척이자 대명문인 창녕성씨 성양(成抑 : 1386~1448)의 아들, 청송심씨 심온(沈溫)의 아들과 각각 혼인하였다.
  • 음직으로 집경전직(集慶殿直)을 역임하였다. 그는 연촌(烟村) 최덕지(崔德之 : 1384~1455)의 사위가 되어 세조조의 혼란한 정국을 피해 장인을 따라 영암에 우거함으로써 다른 형제들과 정치적 행보를 달리하였다. 영암으로 내려갈 당시 김종직이 이별시를 지었다고 한다. 신후경과 전주최씨 사이에는 2남 3녀를 두었다. 장녀는 순천박씨(順天朴氏) 박석명(朴錫命 : 1370~1406)의 손자와 혼인하였다. 신후경의 장자 신영수(愼榮壽)는 1474년에 진사시에 합격한 후 아버지와 함께 영암으로 낙향하였다. 영암에 있는 그에게 당시 전라도감사 김종직이 누차 행의(行誼)로 천거하였다고 한다. 또한 그의 종숙인 영의정 신승선(愼承善)이 출사할 것을 종용하였으나 고사하였다. 특히 그는 부모상에 여묘살이를 극진히 하여 향중에 효행으로 이름이 높기도 하였다. 1826년(純祖26)에 송양사(松陽祠)에 향사되었다.
  • 팔계정씨(八溪鄭氏) 부사(府使) 정옥형(鄭玉衡)의 사위가 되어 안음의 황산촌으로 이거 하였다. 이를 계기로 신우맹의 후손들은 황산촌을 기반으로 세거하게 되었다. 신우맹이 낙향할 당시 그의 형 신우평과 함께 이거 하였으며, 이들의 분묘는 모두 안의(安義) 초첩(草岾)에 위치하고 있다.
  • 본관은 거창(居昌). 자는 언중(彦仲), 호는 요수(樂水).
  • 거창신씨의 학문적 저력을 드러냄과 아울러 향후 정치성향의 향배와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이다. 그는 취한당(就閑堂)이라 자호하고 학문에 정진하였으며, 도암 이재의 문하에 출입하였다. 향인들은 이러한 그를 황고선생(黃皐先生)이라 칭송하였다. 동몽교관(1749), 첨추(1767)에 제수되었으나 출사하지 않고 향리에서 학문에 힘썼다. 신수이가 이재의 문하에 출입하는 것을 계기로 거창신씨는 영남의 노론가문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특히 그의 이러한 행적을 기반으로 이재, 유척기, 송치규의 글과 글씨를 받아 요수 신권의 묘표를 갖추는 등 위선에도 정성을 기울였다. 그는 81세의 나이로 아들 신인명(愼認明)의 임소인 경북 자인에서 세상을 떠났다. 사후에 사천(沙川) 김종후(金鍾厚), 노호(鷺湖) 홍직필(洪直弼)이 그의 행장과 문집의 서문을 지었다. 신도비는 용전(龍田) 송래희(宋來熙)가 찬하고 홍직필이 전서를 쓰고 삼계(三溪) 김낙현(金洛鉉)이 글을 썼다. 1808년에 구연사(龜淵祠)에 신권과 함께 배향 되었다. 신수이가 도암 이재의 문인으로 활약한 이후 그의 아들 손자가 연이어 문과급제를 통해 중앙정계에서 활약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거창신씨는 안의일대의 향론을 주도함과 아울러 중앙정계의 동향을 안의를 중심으로 한 거창 일대에 투영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 신병우(愼炳佑)에 의해 다시 한번 발현되었다. 그는 본 자료집에 수록한 자료의 대부분을 형성한 인물이다.신병우는 신재모(愼在謨)의 차자로서 신익구(愼益九)를 계후하였다. 그는 1870년(高宗7) 식년문과에 갑과 3등으로 급제하였다. 홍문관부수찬(弘文館副修撰)을 비롯하여 승정원과 홍문관에서 사환하였다. 특히 1884년 갑신정변 당시 신병우는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으로 입직하여 왕을 호위한 공으로 승정원우부승지(承政院右副承旨)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이를 계기로 고종의 신망이 두터워 특명으로 1892년에 낙안군수(樂安郡守)가 제수되었다.신병우는 낙안군수로 재직할 당시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나자 이를 수습하는데 노력하던 중 조정에서 개화파가 재집권하려는 것을 계기로 벼슬을 버리고 안의로 돌아와 유유자적하였다. 안의에서 그는 인근 창선리(昌善里) 천석(泉石)에 귀래정(歸來亭)을 짓고 대(臺)의 이름을 낙선대(樂善臺)라 명명하고는 종신토록 소요하였다. 그의 호 단사(丹士)와 어천(魚川)은 사환기와 귀향후의 그의 행적을 단적으로 대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