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서를 남긴
사람들

주요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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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무안(務安). 자는 사강(士剛). 현감 세렴(世廉)의 아들이다. 김언기(金彦璣)의 문인이며 경사(經史)에도 밝았다.박의장은 1555년(명종10) 영해부(寧海府) 원고리(元皐里)에서 태어났다. 그의 자(字)는 사강(士剛), 호는 청신재(淸愼齋)이다. 그는 부친 박세렴과 백부 박세현의 주선으로 유일재(惟一齋) 김언기(金彦璣)에게 수학하였다. 박의장은 한편으로 무학(武學)에도 전념하여 1577년(선조 10) 무과에 급제하였다. 무과 급제 후에도 ‘문무’를 겸비하고자 노력하였으며, 성재(惺齋) 금난수(琴蘭秀) 등과 학문적 교유를 지속하였다.박의장은 무과 급제 후 1579년 훈련원봉사참군(訓練院奉事參軍)을 시작으로 군기시직장(軍器寺直長), 광흥창주부(廣興倉主簿) 등을 역임하였다. 1588년(宣祖 21) 말 외직으로 진해현감(鎭海縣監)으로 부임하였으며, 1592년 임란 발발 당시에는 경주판관(慶州判官)이었다. 그는 경주판관으로서 영천성 수복(7월), 경주성 복성(9월)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3월 10일 대구 파잠전투의 혁혁한 전공으로 이듬해에는 통정대부 경주판관(通政大夫慶州判官)으로 특진되었다가 5월에 경주부윤에 임용된다. 정유재란 당시에는 경주를 중심으로 활약하면서 군향(軍餉)을 지원하는데 진력하였으며, 울산성 전투에 참전하였다. 1599년 윤4월에 경주부윤에서 성주목사겸경상좌도방어사로 이임되었다. 임란시 전공으로 박의장은 1605년(선조38) 선무원종공신 1등에 녹훈되었다. 이 공신책봉은 이 가문의 결속에 대단히 중요한 계기가 되었음을 그의 아들딸들의 화회문기를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전란 후 박의장은 경상좌도절도사(慶尙左道節度使), 인동부사(仁同府使) 등을 역임하였다. 특히 그는 1613년(광해군5) 공홍도수군절도사(公洪道水軍節度使)에 제수되자 노모 봉양을 위해 체직을 요청하였으며, 광해군은 그에게 경상도수군절도사(慶尙道水軍節度使)를 제수함으로써 효를 다할 수 있도록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1614년(광해군6) 경상수영에서 세상을 떠나자, 자헌대부 호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사후에 구봉서원에 향사되었으며, 정조 8년(1784)에는 ‘무의(武毅)’의 시호가 내렸다.박의장의 아우 박홍장 또한 1580년(선조13) 무과에 급제한 무신이었다. 무과 급제 후 평안도(平安道) 벽동군(碧潼郡)에 위치한 아이만호(阿耳萬戶), 북병사(北兵使) 이일(李鎰, 1538-1601)의 군관, 선전관(宣傳官)을 역임하였다. 1589년(선조22) 제주판관(濟州判官)에 제수된 뒤 임란이 발발하자 제주조방장(濟州助防將)으로 전란을 지원하였다. 1594년(선조27)에는 영암군수(靈巖郡守)를 거쳐 대구부사(大丘府使)에 임명되어 전략적 요충지인 대구를 보전하여 군량을 원활히 지원하는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대구부사로서의 공로가 인정되어 군자감정(軍資監正), 장악원정(掌樂院正), 의흥위 상호군(義興衛上護軍)에 제수되었다. 1596년(선조29) 박홍장은 일본에 통신사로 파견되었다. 황신(黃愼)을 상사(上使)로 하고 박홍장을 통정대부로 승진시켜 부사(副使)로 삼았다. 11월 귀국하여 순천부사(順天府使)를 역임하고 이듬해 상주목사겸상주첨병마절제사(尙州牧使兼尙州僉兵馬節制使)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부임하지 못하였다. 박홍장은 1598년 4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1665년(현종6) ‘정충사(구봉서원)’에 형 박의장과 함께 제향(祭享)되었다.박의장과 영천이씨 사이에는 4남 3녀를 두었다. 장자 박유는 그의 고신에 의하면 1593년(선조26)과 1594년(선조27) 무과에 두 번 급제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는 난중의 혼란한 상황에서 무과가 첩설되었던 결과라고 본다. 무과 급제 후 그는 훈련원주부(訓練院主簿), 장기현감(長鬐縣監)을 역임하였으며, 박의장의 명에 따라 박홍장이 일본사신을 갈 때 동래까지 숙부를 배웅하였다. 전란이 종결된 후에는 영산현감(靈山縣監) 등을 지내면서 부친 박의장의 대가(代加)를 통해 통훈대부에까지 올랐다. 밀암(密庵) 이재(李栽)가 찬한 묘갈명이 있다.한편 박의장의 넷째 아들 박선은 전후 선대의 유업을 수습함은 물론 무반가의 전통 위에 문한가로서의 전환을 위한 기반을 마련한 인물이었다. 그는 1592년 박의장의 나이 42세에 얻은 아들이었다. 박유는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수암(修巖) 류진(柳袗)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665년(현종6)에 도백(道伯)의 추천으로 조산대부(朝散大夫)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제수되었으나 출사하지 않고 향리에서 후진 양성과 수신에 진념하였다. 그는 영해 일대에 문명이 높았으며 문집으로 󰡔도와집(陶窩集)󰡕이 있다. 사후에 향인들에 의해 도계사우(陶溪祠宇)가 건립되었다. 박선은 1620년경에 현재의 영덕 축산 도곡리에 이거하면서 ‘충효당(忠孝堂)’을 신축하고 1644년에는 백형 박유를 위해 현재의 무의공 종가를 건립하였다고 한다. 그의 이력과 학문적 행적을 본다면 박의장 사후 문적의 수습과 가내의 기반을 재정비하는데 역할이 지대하였다고 하겠다.
  • 조선 선조 때의 무관. 본관은 무안(務安). 자는 사임(士任). 현감 세렴(世廉)의 아들이며, 병사(兵使) 의장(毅長)의 아우이다. 박의장의 아우 박홍장 또한 1580년(선조13) 무과에 급제한 무신이었다. 무과 급제 후 평안도(平安道) 벽동군(碧潼郡)에 위치한 아이만호(阿耳萬戶), 북병사(北兵使) 이일(李鎰, 1538-1601)의 군관, 선전관(宣傳官)을 역임하였다. 1589년(선조22) 제주판관(濟州判官)에 제수된 뒤 임란이 발발하자 제주조방장(濟州助防將)으로 전란을 지원하였다. 1594년(선조27)에는 영암군수(靈巖郡守)를 거쳐 대구부사(大丘府使)에 임명되어 전략적 요충지인 대구를 보전하여 군량을 원활히 지원하는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대구부사로서의 공로가 인정되어 군자감정(軍資監正), 장악원정(掌樂院正), 의흥위 상호군(義興衛上護軍)에 제수되었다. 1596년(선조29) 박홍장은 일본에 통신사로 파견되었다. 황신(黃愼)을 상사(上使)로 하고 박홍장을 통정대부로 승진시켜 부사(副使)로 삼았다. 11월 귀국하여 순천부사(順天府使)를 역임하고 이듬해 상주목사겸상주첨병마절제사(尙州牧使兼尙州僉兵馬節制使)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부임하지 못하였다. 박홍장은 1598년 4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1665년(현종6) ‘정충사(구봉서원)’에 형 박의장과 함께 제향(祭享)되었다.
  • 박의자의 장자 박유는 그의 고신에 의하면 1593년(선조26)과 1594년(선조27) 무과에 두 번 급제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는 난중의 혼란한 상황에서 무과가 첩설되었던 결과라고 본다. 무과 급제 후 그는 훈련원주부(訓練院主簿), 장기현감(長鬐縣監)을 역임하였으며, 박의장의 명에 따라 박홍장이 일본사신을 갈 때 동래까지 숙부를 배웅하였다. 전란이 종결된 후에는 영산현감(靈山縣監) 등을 지내면서 부친 박의장의 대가(代加)를 통해 통훈대부에까지 올랐다. 밀암(密庵) 이재(李栽)가 찬한 묘갈명이 있다.
  • 박의장의 넷째 아들 박선은 전후 선대의 유업을 수습함은 물론 무반가의 전통 위에 문한가로서의 전환을 위한 기반을 마련한 인물이었다. 그는 1592년 박의장의 나이 42세에 얻은 아들이었다. 박유는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수암(修巖) 류진(柳袗)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665년(현종6)에 도백(道伯)의 추천으로 조산대부(朝散大夫)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제수되었으나 출사하지 않고 향리에서 후진 양성과 수신에 진념하였다. 그는 영해 일대에 문명이 높았으며 문집으로 󰡔도와집(陶窩集)󰡕이 있다. 사후에 향인들에 의해 도계사우(陶溪祠宇)가 건립되었다. 박선은 1620년경에 현재의 영덕 축산 도곡리에 이거하면서 ‘충효당(忠孝堂)’을 신축하고 1644년에는 백형 박유를 위해 현재의 무의공 종가를 건립하였다고 한다. 그의 이력과 학문적 행적을 본다면 박의장 사후 문적의 수습과 가내의 기반을 재정비하는데 역할이 지대하였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