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인물

  • 고문서를 남긴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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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호윤의 아들 김적(金積)이 어머니 박씨부인의 주선으로 이계의 문하에서 외종숙 이정구와 동문수학하게 된 것도 이러한 혼맥과 무관치 않다. 이러한 인연을 통해 김적은 이정구와 깊이 교유하게 되었고, 인조반정 후에는 이정구가 그를 천거하기도 했던 것이다.김적은 벼슬이 찰방에 그쳤지만 경주김씨, 특히 학주가문이 조선 후기 문벌가문으로 도약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성품이 소탈하여 사람을 대함에 있어 존비나 귀천을 따지지 않고 공경으로서 대하였다고 한다. 중년 이후에는 선대의 전장이 있던 서산 대교촌으로 솔가 이주하여 자녀교육과 가정경영에 주력하는 한편 집 주변에 양성당(養性堂)을 지어 수양처로 활용하였다. 또 그는 사람과의 친목을 중시하여 매년 가족과 친척, 인근의 선비, 고을 노인들과 함께 회합하여 화합을 다져 덕인장자(德人長者)로 칭송이 자자했다.인조반정 직후 이정구가 편지를 보내 부임을 종용하였지만 끝내 사양하였고, 비록 고을원의 부름이 있어도 관청 출입을 삼가한 사실에서 그의 처세와 삶의 신조를 충분히 알 수가 있다.한편 김적은 사회적 지위에 비해 경제적으로는 매우 부유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아들 학주가 찬한 행장에 따르면, 임진왜란 직후인 1593-1594년 사이에 서산 농장에 비축된 곡식이 수천석에 이르렀고, 그 중의 상당수를 기민구제에 활용한 사실이 확인된다. 바로 이러한 경제력이 학주를 비롯한 아들 4형제(弘翼․弘亮․弘弼․弘郁)가 현달하게 되는 바탕이 되었던 것이다.
  • 김홍욱의 형인 김홍익(金弘翼, 1581∼1636) 관련 자료도 많이 수록되었다. 김홍익은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로 자는 익지(翼之), 호는 묵재(默齋)이다. 1614년(광해군 6) 사마시에 합격하고, 1628년(인조 6) 의금부도사, 1630년 장악원직장(掌樂院直長), 1631년 감찰, 1632년 공조좌랑을 거쳐서 연산현감(連山縣監)을 지냈다. 청렴결백하고 정화에 힘써서 군이 태평하였다고 전한다. 1636년 병자호란 때 관찰사 정세규(鄭世規)가 군병을 모집하자 80여세의 어버이가 계셨으나, 군기차사원(軍器差使員)으로 2,400여인을 인솔하고 수원산성에 이르러 감찰사와 논의하고, 남한산성으로 가던 중 험천(險川)에 이르러 적병과 분전하다가 순절하였다. 좌승지에 증직되고, 영조 때 정려를 받았으며, 뒤에 이조판서에 증직되었다.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 자는 문숙(文叔), 호는 학주(鶴洲). 서울 출생. 아버지는 찰방 적(積)이다. 상촌공 이후 사림파의 주요 가문으로 성장해 온 경주김씨의 가격을 한 단계 더 끌어올린 인물은 김적의 4자 김홍욱이었다. 그는 조선 중기(인조-효종)에 간관(諫官)으로 이름이 높았던 인물로, 1635년(인조 13)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檢閱), 시강원 설서(說書), 홍문관 전적(典籍)․수찬(修撰), 사헌부 지평․집의, 사간원 헌납․사간, 이조좌랑, 승정원 승지(承旨), 충청도 관찰사․예조참의․홍주목사(洪州牧使) 등을 지냈다.그는 1654년(효종 5) 황해도 관찰사로 있을 때, 사사(賜死)된 민회빈(愍懷嬪) 강씨(姜氏)와 유배되어 죽은 그녀의 어린 아들들의 억울함을 상소하였다. 효종은 즉위 초부터 그 문제의 논의를 금지하였음에도 김홍욱이 이를 거론하였기 때문에 격노하여 친국(親鞫)하여 결국 장살(杖殺)시켰다. 뒤에 효종은 이를 뉘우쳐 그를 신원(伸寃)하였다. 다시 1718년(숙종 44)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1721년(경종 1)에는 서산의 성암서원(聖巖書院)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김홍욱은 강직한 간관 집안의 전통을 이어받아 인조~효종 때에 주로 삼사에서 봉직하며, 언관․간관으로 이름을 크게 떨쳤다.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직언을 마다하지 않는 그의 성품이 결국 화(禍)를 초래하였지만, 이 때문에 조선 중기 사림의 표상이 되었다.김홍욱의 정당성은 그의 사후에 인정받았다. 특히 김홍욱과 깊은 우정을 나눴던 허적(許積)과 송시열(宋時烈) 같은 당대의 명유(名儒)들이 앞장서서 김홍욱 상소건에 대한 국왕의 대응과 관련해 국왕의 처사가 ‘올바르지 못했음’을 지적하고 나섰고, 결국 국왕도 김홍욱을 복권시켰다.김홍욱은 2남 5녀를 두었는데, 가화에 따른 여파 때문인지 아들들은 크게 현달하지 못했다. 장자 세진(世珍)은 찰방, 차자 계진(季珍)은 황간현감에 그쳤다. 다만 사위들은 대부분 서인 주요 가문의 자제들이었다. 장녀서 이기직(李箕稷)은 광주이씨 이홍연(李弘淵)의 아들로 조부 이덕수(李德洙)는 송시열의 처부 이덕사(李德泗)와 4촌간이었다. 차녀서 한성열(韓聖悅)은 인조반정공신 구인후(具仁后)의 외손자였으며, 3녀서 조지한(趙持韓)은 조익(趙翼)의 손자였다.비록 김세진․계진 형제는 하급직에 머물렀지만 김홍욱의 직언과 절의가 서인세력, 특히 송시열, 송준길 등 호서계 사림들에 의해 추앙을 받아 신원으로까지 이어지면서 학주가문의 입지도 크게 부각되어 갔다. 이런 바탕 위에서 세진의 손자 흥경(興慶)이 영조조에 영의정을 지내고 영조의 딸 화순옹주(和順翁主)를 며느리로 맞는 과정에서 문호가 크게 신장되었다
  •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 자는 자유(子有)·숙기(叔起), 호는 급류정(急流亭). 서산 출생. 아버지는 두성(斗星)이다. [해제내용없음, 초상화 찾는 사이트(네이트학국학)에서 참고함]1677(숙종 3)∼1750(영조 26).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 자는 자유(子有)·숙기(叔起), 호는 급류정(急流亭). 서산출생. 아버지는 두성(斗星)이다.1699년(숙종 25)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검열·주서·정언·부교리·집의·승지·대사간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경종 때 한성부우윤으로 신임사화에 관련되어 파직되었다가, 1724년 영조의 즉위로 도승지가 되었고, 이듬해 우참찬으로 동지사(冬至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1727년(영조 3) 정미환국으로 한성부판윤에서 쫓겨났다가 이듬해 우참찬으로 복직되었으나, 영조의 탕평책(蕩平策)에 반대하여 다시 파직되었다.1730년 좌참찬에 복직되고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영의정에 이르러 기로소에 들어가고, 판중추부사로 치사하여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시호는 정헌(靖獻)이다.
  •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 자는 유보(幼輔). 아버지는 영의정 흥경(興慶)이며, 어머니는 황하영(黃夏英)의 딸이다. 1732년에 영조의 둘째딸 화순옹주(和順翁主)에게 장가들어 월성위(月城尉)에 봉해졌고, 벼슬은 오위도총부도총관·제용감제조를 지냈다. 키가 크고 인물이 준수했으며 재주가 총명하였다. 특히, 글씨를 잘 썼으며, 그 중에서도 팔분체(八分體)에 뛰어나, 애책문(哀册文)·시책문(諡册文) 등을 많이 썼고, 전각(篆刻)에도 뛰어나 인보(印寶)를 전각하였다. 시호는 정효(貞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