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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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경세는 유성룡의 고제로서 李滉⇒柳成龍⇒鄭經世로 이어지는 영남학통의 적전으로 인식된 인물이었다. 그는 주자학 전반에 조예가 깊었지만 특히 예학에 정통하였으며, 영남남인으로서는 드물게 인조조에 이조판서에 올라 일국의 銓衡을 담당하고, 兩館大提學으로서 일국의 文柄을 잡았던 매우 현달한 인물이었다.상주 진주정씨 일문에서 차지하는 정경세의 비중은 실로 막대하다. 정의생에서 정여관에 이르는 8대가 진주정씨가의 점진적인 성장기였다면 정경세는 자신의 학문적․정치적 현달을 통해 가격을 비약적으로 상승시킨 가문의 顯祖요 起家祖였다. 후일 그의 자손들이 嶺南學派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할 수 있었던 것도 鄭經世의 위상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현재 우복종택에 소장된 전적류의 시기적 상한도 정경세가 활동하던 16세기 중후반이며, 선대의 狀碣類 역시 대부분 정경세로 인해 작성된 것들이다.정경세는 유성룡의 고제라는 학맥상의 지위와 실직 이조판서․문형이라는 환력에 걸맞게 교유관계도 경향에 걸쳐 광범위하게 형성되어 있었다. 우선 그는 18세 되던 1580년(선조 13) 상주목사로 부임한 柳成龍을 사사하여 1607년(선조 40) 유성룡이 사망하기까지 약 30년 동안 서애문하에서 제자로서의 도리를 다하였다. 특히 예학과 경세론은 서애의 영향을 크게 받아 후일 그가 禮學의 대가로 성장하고, 經世家로서의 탁월한 식견을 지닐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그는 高祖 鄭蕃 이래의 세거지였던 栗里에서 출생하였으나 중년 이후로는 愚山에 우거하는 일이 많았다. 현재 愚伏宗宅이 있는 愚山里는 정경세의 別業이 있던 곳으로 원래의 명칭은 「于北」이었으나 정경세가「愚伏」으로 개칭하여 自號하는 한편 書室을 지어 입거의 기반을 마련하였는데, 여러 문헌에 등장하는「于北山庄」․「愚伏山庄」․「山庄」이 바로 여기이다.사실 정경세는 중장년기에「荷渠」․「桑成子」등의 호를 주로 사용했고, 한때 「石潨道人」으로 불리기도 했었다. 그러나 書室의 건립과 잦은 우거를 통해 다져진 愚山과의 강한 인연을 바탕으로 점차 그의 아호는「愚伏」 으로 통용되었고, 사후에는 문집의 명칭으로 사용되었다.한편 정경세는 사회적․학문적 지위에 반해 경제적으로는 그다지 안정적이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만년에는 각종의 옥사에 연루된 나머지 제반 여건이 불안정했으며, 거처도 일정하지 않았다. 그가 창녕조씨의 세거지인 梅湖村으로 이거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당시 매호촌에는 우복과 교유가 깊었던 曺友仁․曺希仁 형제가 살고 있었는데, 우복은 이들 형제의 배려 속에 매호이거를 단행했고,1633년에는 여기서 생을 마감하였다.특히 조희인은 옥사 당시에는 옥바라지를 전담하는 등 우복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이런 선상에서 양가 사이에는 굳건한 세의가 형성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점에서 매호촌과 조우인․희인 형제는 우복의 생애와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공간이요 인물들이었다.17세기 초반 중앙 정계와 영남학파에 미친 우복의 영향력은 실로 지대한 것이었다. 우선 그는 학식․문장 그리고 풍부한 정치적 경험을 바탕으로 유성룡의 사후에는 영남남인의 구심점으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학문적으로는 이황⇒유성룡으로 이어지는 학통의 정맥으로서 흔히 이황의 3고제로 불리는 유성룡․김성일․정구 3인이 모두 사망하는 1620년 이후에는 장현광과 더불어 영남학파의 우뚝한 학자로 부상하였다.1610년(광해군 2) 정인홍이「晦退辨斥疏」를 지어 李彦迪과 李滉을 비난하자 이를 변무하였고, 1620년 柳成龍․金誠一의 廬江書院(虎溪書院) 合享 당시 位次 문제를 두고 사림의 논의가 분분했지만 이를 일축하고 유성룡을 東配位, 김성일을 西配位로 결정할 수 있었던 것도 영남학파에서 차지하는 그의 위상에서 기인하는 것이다.당대의 명사답게 우복의 교유관계는 경향을 막론하고 광범위하게 형성되어 있었다. 유성룡․정구․장현광 등 영남학파의 중진들은 물론 김장생․이호민․이덕형․장유․최명길․윤흔․신익성 등 중앙의 명사들과도 두루 교유하였다. 특히 이전․이준․조우인․조희인․전식 등은 동향의 지우들로서 이 중에서도 이준․조희인과의 관계는 더욱 각별하였다. 정경세의 교유관계는 우복종가(山水軒)에 소장된 燕行贈言․愚伏堂 手柬․名賢筆蹟 등의 書帖類에서 보다 선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우복의 학문적 영향력은 그의 門人錄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현재 우복종가에는「愚伏先祖別集營刊時文蹟」이 소장되어 있는데, 여기에 1791년 경에 작성된 문인록이 수록되어 있다. 지금까지 우복의 문인현황에 대해서는 학계에 별로 알려진 것이 없었는데, 이 자료의 발굴로 인해 우복문인들의 규모와 구성을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 우복문인록은 퇴계․남명․한강․여헌 등 다른 문인록에 비해 체제가 완비되지 않은 초본상태이며, 문인들의 인적사항도 매우 소략한 편이다. 그러나 이를 통해 우복의 학문적 영향권을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자료임에는 분명하다.
  • 조선 후기의 성리학자.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사앙(士仰), 호는 입재(立齋)·무적옹(無適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