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서를 남긴
사람들

주요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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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수창은 1672년(현종13)에 무과에 급제하여 1674년(현종15)에 부장의 직을 받은 것을 비롯하여 선전관(1677), 울진현감(1682), 사재주부(1684), 훈련주부(1684), 서생포첨사(1684) 등을 거쳐 곽산군수(1688)와 황해병우후(1692)에까지 올랐다. 선전관 당시에는 삭시사(朔試射)에서 성적이 나빠 파면되기도 하였으나, 사재주부 때에는 활을 매우 잘 쏘고 군무에 밝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이를 이유로 왕의 거둥에 장관으로 채택되기도 하였다
  • 1705년(숙종31) 숙종의 즉위 30년을 축하하여 설행한 을유증광별시에 직부로 전시에 나아가 급제한 후 사환에 나아갔다. 임욱은 노론계 인사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것으로 보이며, 이로 인하여 경종 대 신임사화에 연루되어 정배를 당하기도 하였다. 이후 영조가 즉위하면서 복권되어 다시 벼슬길에 나아가 소론과 남인의 과격파가 일으킨 이인좌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원종공신에 책훈되었다. 이와 같은 임욱의 사환이력은 당대 무신관료의 행적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로, 《승정원일기》와 가문에서 소장하고 있는 자료 등을 통하여 알 수 있다. 1705년 26세 때 병과 29인으로 급제하였다. 임욱과 관련한 3점의 지만(遲晩)이 있다. 이 가운데 하나는 1714년 희천군수 재직시 발생한 죄인의 사망사건과 관련하여 제기된 남형의 소에 대한 것이다. 임욱은 여기서 자신의 처벌이 정당하였음을 설명하면서 억울함을 주장하였고, 결국 이에 대해서는 무고로 판명이 났다. 다른 두 건은 창성부사 재임시 어사에 의하여 조사되어 조정에 올려진 관곡의 유용과 관련한 당사자의 입장을 설명한 것이다. 이 사건은 개인의 비리라기보다는 지방의 부세 및 재정의 운영에 대한 중앙의 원칙적 입장과 지방의 운영 현실 사이의 괴리로 인하여 발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 임수창의 장자이자 임욱의 형인 임성(王晟)의 차자이다. 일찍 부모를 여읜 후 다른 형제들과 함께 임욱부부 슬하에서 성장하였으며, 임욱이 사망한 3년 후인 1739년(영조15)에 임욱의 계후자로 입후하였다. 임재대는 영조연간에 활동한 인물이다. 그는 영조7년인 1731년 3월 무과급제를 통하여 벼슬길에 나아갔으며, 가산군수와 장연현감, 용양위부호군 등을 거쳐 1773년(영조49)에 산산진(蒜山鎭)병마첨절제사의 자리까지 올랐다. 산산진에서 근무할 당시 극성(蕀城)의 영축을 위하여 작성한 〈극성기(蕀城記)〉를 비롯하여, 관직수행과 관련한 다수 자료들이 남아있다. 1731년 29세의 나이로 병과 32인에 급제하였다. 분재기와 임재대 당대인 1759년 〈기묘식광주부준호구〉 등을 통해 볼 때, 임재대의 대에 이르기까지는 광주에서 지속적으로 세거해 온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임욱의 무과방목에 거주지가 『京』으로 나타나며, 1739년 예조에서 임욱의 부인 정씨에게 발급한 계후입안에도 정씨의 거주지를 한성부의『南部 薰陶坊 朴井契』로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서울에도 별도의 거소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