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인물

  • 고문서를 남긴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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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언영의 아버지 이등림(李鄧林:1535-1594)이 그 주인공이다. 이등림의 급제는 완석정 가문의 직계 선대에서는 조선조 최초의 과경이라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녔다. 1564년 생원을 거쳐 1573년에 문과에 합격한 이등림은 여러 관직을 거치면서 청백으로 이름이 높았고, 덕계 오건(吳健), 한강 정구(鄭逑), 동강 김우옹(金宇顒) 등 당대 영남의 석학들과 도의지교(道義之交)를 맺고 종유하였다. 비록 그는 벼슬이 공조좌랑에 그쳤지만 그에 의해 다져진 사회적 기반과 학문적 연계망은 아들 이언영이 17세기 초반 영남사림을 대표하는 학자․관료로 성장하는 바탕이 되었다. 양란과 인조반정으로 이어지는 역사의 격동기에 학인(學人)이자 관료로서 치열한 삶을 살았던 이언영은 원칙과 소신을 굽히지 않는 강인함과 학문과 행실의 순독(純篤)함으로 인해 사우들로부터 추중을 받은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는 당쟁의 시대를 살면서도 편협하지 않았던 그의 성품(性品)은 경향을 망라하는 교계(交契) 형성의 바탕이 되었고, 임금을 바르게 보좌하고 백성들의 삶을 윤택하게 하기 위해 노력했던 경세관료로서의 열정과 치적은 관료사회의 미담이자 본보기가 되었다.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벽진(碧珍). 자는 군현(君顯), 호는 완정(浣亭). 공조좌랑 이등림(李鄧林)의 아들이다이언영은 자가 군현(君顯), 호는 완석정(浣石亭)․운계(雲溪)로 1568년(선조1) 공조좌랑․안동부사 등을 지낸 공암(孔巖) 이등림(李鄧林)과 최호(崔湖)의 따님인 월성최씨 사이에서 장자로 태어났다. 그의 출생지인 팔거현 석전리는 증조 이인손(李麟孫)이 복거한 곳이었는데, 후일 이곳은 이언영의 사위 이원정(李元禎)의 자손들이 세거하게 되면서 영남의 유수한 반촌(班村)으로 자리매김되었다.이언영의 선대는 문한이 뛰어나기로 정평이 있었고, 사환가로서의 전통도 면면히 이어오고 있었다. 산화선생(山花先生)으로 잘 알려진 10대조 이견간은 1317년(충숙왕4) 원나라에 사행시 상주 객관(常州客館)에서 ‘창밖의 두견새 소리 밤새도록 들리는데, 울음은 산 꽃은 몇 째 층에서 나는지(隔窓杜宇終宵聽 啼在山花第幾層)’라는 시구를 지어 원나라에까지 문명을 떨쳤고, 7대조 이희경(李希慶)은 경상도 도원수, 6대조 이수지(李粹之)는 감무를 지냈다. 생육신의 한 사람인 이맹전(李孟專)과는 4촌간이었던 5대조 이권(李惓)은 학행이 뛰어나 대유(大儒)의 기국이 있었고, 1432년 생원시에 입격한 뒤 개녕(開寧)․영유현감(永柔縣監)으로 부임해서는 곳곳에 치적(治績)을 남겼다. 증조 이인손(李麟孫)은 1519년 진사시에 입격한 뒤에는 과거와 출사를 단념하고 공암(孔巖) 위에 정자를 짓고 후진양성에 매진하였는데, 이는 완석정 가문이 학자가문으로서의 근기를 다지는 토대가 되었다.
  • 교첩은 모두 1648년(仁祖26) 6월과 7월에 발급받은 것으로, 이언영이 軍資正, 淸州牧使, 善山府使, 密陽府使, 副護軍에 재직해 있을 당시 別加받은 것을 아들 斗鎭이 代加받은 것이다. 이 別代加에 따라 이두진은 2개월 사이에 從仕郞(정9품)→通仕郞(정8품)→務功郞(정7품)→宣敎郞(종6품상)→承議郞(정6품상)으로 승진하였다.
  • 관련된 문서는 敎牒 1점으로 妻父 靈光郡守 姜汝床이 康律縣監으로 재직해 있을 때 別代加로 발급받은 것이다.
  • 관련된 문서에는 1727년(英祖3)武科에 급제하여 발급받은 紅牌 1점과 敎牒 10점이 남아 있다. 교첩의 경우, 그의 妻 羅州丁氏(1705~1755)를 夫職에 따라 淑夫人으로 임명하면서 발급한 것까지 포함하였다. 이수풍의 교첩 가운데 1743년(英祖19) 7월에 折衝將軍으로 임명되면서 발급받은 교첩은 이수풍이 호랑이 3마리를 잡은 공로로 加資받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