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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계 묘정비 전경
남계묘정비(廟庭碑)는 봉사손(奉祀孫) 덕제(德濟)가 묘정비(廟庭碑)를 세웠으며, 비문은 본암(本菴) 김종후(金鍾厚)가 지었다. 이 비문을 두고 마을의 대성과 사족들의 비판이 거세게 일어났다 한다. 이는 비문 내용에 성리학의 도통(道統)을 열서(列西)하면서 회재선생 이언적의 호를 기록하지 않은 것은 본암의 과실이라 하였다. 이어서 그렇게 쓰도록 종용한 덕제의 허물도 따졌다. 덕제가 부득이 본암에게 개찬을 청하자, 본암이 드디어 제현을 차례로 기록한 것을 삭제하고 다만 "예닐곱 분이 나왔다"고 써서 그대로 비석에 새겼다. 그러나 사론(士論)은 오히려 "예닐곱 분이 나왔다." 고한 "예닐곱" 중에는 또 회재를 넣지 않으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고 여기고 비판의 소리가 더욱 거세져서 노씨 선국이 도끼로 비문을 찍어 본암의 이름을 깎아 냈다고 한다. 정씨는 감사에게 고소하였고, 이어 선국은 함양 옥에 갇혔으며, 두세 명의 감사가 바뀌도록 모두 이 사건의 해결을 보지 못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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