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장처 고문서 특징
- 홈
- 소장 고문서
- 소장처 고문서 특징
본서는 함양박씨의 여러 갈래 중에서도 朴世榮(九堂:1480-1552)을 파조로 九堂公派의 종가에 소장된 고문서를 수록한 것이다. 현재 구당공파의 종가는 忠南 扶餘郡 恩山面 佳谷里에 소재하고 있지만 이 가계가 부여로 이거한 것은 1905년 경이다. 그 이전에는 서울(鑄字洞), 이천에 세거한 전형적인 서울·경기양반가문으로서 安山·沔川·始興 등지에 別業을 마련하여 우거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본서에 수록된 고문서는 在京期, 利川居住期, 扶餘移居期에 작성된 고문서가 섞여 있다. 대체로 17세기 중엽 이전의 문서는 在京期에 작성된 것이고, 17세기 중엽에서 1900년을 전후한 시기의 문서는 이천거주기에 작성된 것이며, 1905년 이후의 부여이거기에 작성된 것들이다. 단 박시순과 관련된 문서는 이러한 구분과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닌 바 여기에 대해서는 본 解題를 참고하기 바란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장서각국학팀에서는 1996년 丁淳佑(본원 교수), 安承俊(본원 전문위원), 金文澤(연구원), 金鶴洙(연구원)를 중심으로 부여 함양박씨 고문서를 1차 조사·수집하였다. 당시는 고문서를 대상으로 조사·수집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상당수의 전적류가 조사에서 제외되었다. 이후 1998년 2차 조사에 착수하여 나머지 자료를 총괄적으로 조사·수집하였다. 그 결과 고문서 약 4000여점, 고서 471種 1058冊이 수집되었으며, 그 원본은 현재 본원에서 관리하고 있다.
고문서는 현재 마이크로필름(MF35-8154~58) 촬영이 완료된 상태이며, 고서는 그 분량이 워낙 방대하여 정리작업 중에 있으나 빠른 시일내에 완료될 예정이다. 典籍類의 현황은「咸陽朴氏家 蒐集古典籍의 내용과 자료적 특성」(『藏書閣』제2집, 1999,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을 참고하기 바란다. 그리고 본원에서는 朴始淳의 日記를 모아『韓末 官人 朴始淳日記』(韓國學資料叢書 22, 1999, 한국정신문화연구원)를 출간한 바 있다.
함양박씨 九堂公派는 朴世榮(1508-1552)을 派祖로 하는 가계로서 咸陽朴氏 중에서도 가장 번창한 가계의 하나였다.
註1)
원래 함양박씨는 신라 박씨의 후손들로서 景明王의 3子 朴彦信이 速咸君[속함은 慶南 咸陽의 古名으로 天嶺이라고도 한다]에 봉해지면서 비로소 得貫하게 되었다. 박씨 8本貫 중에서도 밀양박씨·고령박씨와 더불어 자손이 가장 번창하였으며, 高麗~朝鮮을 통해 현달한 인물도 가장 많이 배출되었다.
【圖 1】〈朴氏分派圖〉
그러나 함양박씨는 시조 朴彦信에서 中始祖 朴善 사이의 世系와 事蹟이 전해지지 않아 박선이 사실상 함양박씨의 시조라 할 수 있으며, 대부분의 족보류에도 그를 一世로 표기하고 있다. 朴善은 고려 宣宗朝에 과거에 합격하여 朝淸大夫 禮部尙書를 지낸 인물인데, 九堂 朴世榮은 바로 그의 14세손이다.
『咸陽朴氏族譜』에 따르면, 박세영의 선대는 대대로 한번도 관직이 끊어진 적이 없는 仕宦家의 전통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심지어 직계로 12대가 내리 文科에 합격하는 쾌거를 달성하기도 하였다. 물론 族譜의 기록을 그대로 믿을 수는 없다 하더라도 이 가계가 科擧·官職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음은 분명한 것 같다. 박선 이래 내외 요직을 역임하던 함양박씨는 박선의 10세손이며 박세영의 고조인 朴習(1367-1418) 대에 이르러 기가의 발판을 바련하는 한편으로 극심한 家禍를 겪기에 이른다.
【圖 2】〈咸陽朴氏家系圖1〉
박습은 1383년(禑王 9)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을 시작하였는데, 太宗 李芳遠과는 同甲이며 同榜이었다. 그리고 그는 權近(陽村)의 아들이며 대제학을 지낸 權踶의 딸을 아내로 맞음으로서 相門의 女壻가 되는 영예를 누리기도 하였다.
박습이 조선왕조개창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태종과의 관계, 왕조개창 이후의 환력을 고려할 때 그 역시 역성혁명에 가담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1399년(定宗 1)에는 대장군, 이듬해인 1400년(정종 2)에는 左諫議를 지냈다. 태종 즉위 후에도 그의 관직은 계속 이어져 1409년(태종 9)에는 左司諫, 1411년에는 강원도관찰사, 1412년에는 正朝使로서 명나라를 다녀오기도 하였다. 이후 1416년에는 義禁府提調·戶曹參判, 1417년에는 경상도관찰사·대사헌, 1418년에는 형조판서를 거쳐 병조판서에 올랐으나 그 해 8월 姜尙仁의 獄事에 연루되어 화를 당하게 되었다.
註2)
이 옥사는 태종이 외척의 발호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세종의 장인 沈溫一家를 멸문시킨 정치적 사건으로도 유명하다.
이 때 박습의 아들들도 연좌되어 화를 당했는데, 3자 義甫는 光陽으로 유배되고, 5자 義孫[世榮의 曾祖]은 南海로 유배되어 그로부터 4년 뒤에 客死하였다. 이는 함양박씨 초유의 극심한 가화였다.
그러나 이러한 가화의 와중에서도 의손의 부인 安東權氏는 義甫·義卿의 妻子들이 고향[咸陽]으로 낙향했음에 반해 서울에 남아 자녀들의 교육에 힘쓰며 재기의 발판을 다졌다. 당시 안동권씨 母子가 서울에 남을 수 있었던 것은 친정인 陽村家의 후원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후 신동은 벼슬하지는 않았지만 학행이 있어 참판 柳方敬[瑞山柳氏]의 사위가 되었는데, 유방경은 조선초기의 대표적인 문사였던 柳方善(泰齋)의 친형이다. 서산유씨는 안동권씨[陽村系], 고성이씨[杏村系], 달성서씨[四佳亭系]와 더불어 조선초기를 대표하던 훈구세력이었다. 함양박씨가 가화의 와중에서 재기할 수 있었던 것도 혼맥을 통한 안동권씨와 서산유씨의 강력한 후원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圖 3】〈咸陽朴氏家系圖2〉
信童은 2남 3녀를 두었는데, 장자 孟儉은 문과에 합격하였고, 차자 仲儉은 생원에 그쳤지만 定宗의 부마 李寬植의 사위가 되어 왕실의 일원으로 편입되었으며, 사위들도 대부분 현달하였다. 특히 3녀까지 岳陽副正에게 출가함으로서 2명의 자녀가 왕실과 척분을 가지게 되었다. 이는 朴習의 피화 이래 3대만에 이루어진 신속한 변화였다.
중검은 3남 1녀를 두었는데, 장자 세영이 바로 본서의 주인공 함양박씨「九堂公派」의 파조이다. 그는 1504년(연산군 10) 진사시에 합격한 뒤 문음으로 출사하여 내섬시주부·사헌부감찰·공조좌랑·형조좌랑·풍덕군수 등을 역임하였으며, 최종 관직은 敦寧府正에 이르렀다. 아우들도 모두 현달하여 세무(逍遙堂)는 문과를 거쳐 군자감정을 지냈는데,『童蒙先習』의 저자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리고 세옹(明軒)은 1519년(중종 14) 사마양시에 합격한 수재로서 1525년(中宗 20)에는 문과에도 합격하여 이조참의를 지냈으며, 謝恩使로서 明나라를 다녀오기도 하였다. 후일 박세무의 손자 박지계는 인조조에 金長生·張顯光과 함께 山林으로 징소되어 元宗追崇論의 이론적 토대를 제시하기도 하였다.
구당공파는 세영의 아들 大立 대에 이르러 가격이 크게 신장되기 시작하였다. 구당공파 종가에 소장된 고문서의 상한도 박대립부터이다. 대립 이전까지는 생진이나 음직으로 출사하는 정도에 그친데 비해 대립 이후로는 문과를 통해 중앙의 요직을 역임하며 仕宦家로 발돋움한 것이다. 大立은 1540년(중종 35) 문과에 합격하여 黃海道·慶尙道·咸慶道 3도 감사를 역임하며 치적을 쌓았으며, 선조년간에는 호조판서·좌찬성을 거쳐 기로소에 들어감으로서 人臣으로서의 최고의 영예를 누렸다. 당시 세간에는 함양박씨 「八立」이라는 말이 있었는데, 이는 박대립 8從班의 현달을 예칭하는 말이다.
【圖 4】〈咸陽朴氏家系圖 3〉
한편 대립은 아들이 없어 아우 希立의 아들 知述을 양자로 들였다. 知述은 문음으로 출사하여 安陰縣監·泰仁현감·龍潭縣令·富平都護府使 등의 관직을 거쳤는데, 본서에도 그의 告身 20여건이 수록되어 있다.(敎令類 (五) 告身. 참조) 박대립에 의해 기틀을 다진 사환가로서의 전통은 아들 지술은 물론 손자, 증손에 이르기까지 그대로 지속되었다. 손자 유공은 직장을 지냈으며, 증손 종형은 인의·형조좌랑·과천현감·횡성현감·종친부전부 등 내외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이들의 告身 또한 현재 전하고 있으며, 본서에서도 전량을 수록하였다.
사환을 통한 가격의 신장은 婚脈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었다. 대립은 장수황씨 黃喜의 현손녀, 지술은 순창조씨 趙天祥의 딸, 유공은 안동권씨 權憘의 딸, 종형은 양천허씨 許恒의 딸과 혼인하였는데, 모두 당시의 대표적인 名家들이었다. 권희는 東興君 權常의 아들로서 문과에 합격하여 장령을 지냈으며, 손자 대항은 선조의 부마가 되어 東昌尉에 봉해지기도 했다. 특히 이 가계는 17세기 중엽 이후에는 남인의 핵심 가문으로 성장하였다. 그리고 박유공은 吳挺緯를 사위로 맞았는데, 오정위는 남인의 명가 同福吳氏 출신으로 아버지는 감사를 지낸 吳端(生父)이었다. 오단은 곧 인조의 아들 麟平大君의 장인이었던 바 오정위와 인평대군은 처남매부의 사이였다. 이런 바탕 위에서 동복오씨는 소위「南人外戚」으로 존재하며 숙종 초기 정국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안동권씨[權憘系], 동복오씨[吳端系]와의 혼맥은 함양박씨가 정치적으로 남인을 표방하게 된 실질적인 계기가 되었다.
한편 함양박씨는 朴習에서 朴宗亨에 이르는 9代 동안 기본적으로 서울을 근거지로 활동하는 한편 경기도 양주에 先塋을 조성한 것으로 나타난다.
註3)
호적류(본서. 疏箚啓狀類. (4) 戶籍. 참조)에 따르면, 이들의 거주지는 南部 薰陶坊 鑄字洞이었다. 그리고 족보에 따르면, 이들은 9代가 내리 楊州 神穴里에 선영을 조성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는 서울에 살면서 서울과 가까운 경기 일원에 선영을 조성하는 서울양반의 전형적인 형태였다.
그리고 각종 기록에 따르면, 함양박씨는 박지술 이래로 지방에도 상당한 농장을 소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註4)
농장은 대체로 沔川·金堤·萬頃·稷山·安山 등지에 분포한 것으로 나타나는데, 그 중에서도 沔川의 赤洞農舍와 安山農舍의 비중이 가장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종형의 아들 상욱은 1651년(효종 2) 생원시에 합격했고, 1657년(효종 8)에는 참봉으로 출사하여 의금부도사·상의원주부·제천현감·공조좌랑·괴산군수·나주목사 등 내외 관직을 두루 거쳤다. 1678년(숙종 4)에는 同宗의 朴恬과 함께 咸陽朴氏族譜 初刊本을 편찬하였는데, 소위「戊午譜」가 바로 이것이다. 그리고 1701년(숙종 27)에는 失傳한 것으로 알았던 시조 朴善의 분묘를 발견하여 새로이 단장하고 石物을 備置하는 등 위선사업에도 정성을 다하였다.
박상욱 대에 이루어진 한 가지 특기할 사항은 분묘 소재지의 변화이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그 이전까지는 양주 神穴里 선영에 안장하는 것이 관행이었으나 박상욱의 산소는 시흥 九老里[지금의 서울시 구로구 구로동]에 소재하고 있다. 이는 시흥지역에 일정한 경제적 기반이 조성되었음을 의미하는데, 그 구체적인 실상은 알 수 없다. 이런 배경 위에서 그의 아들 慶後는 한때 始興 九老里에 寓居하기도 했으며,
註5)
경후와 그 아들 興新의 산소도 여기에 있다.
【圖 5】〈咸陽朴氏家系圖 4〉
한편 함양박씨는 박상욱의 아들 박경후(歸翁) 대에 이르러 다시 한번 가격이 크게 신장되었다. 그는 1674년 증광문과에 합격하여 병조참판, 황해·전라·경기의 3도 감사를 지내고 1682년(숙종 8)에는 尹趾完·李彦綱과 더불어 通信使(從事官)로서 일본을 다녀오기도 했다. 본서에서는 박경후의 고신 전량과 황해도·전라도관찰사로 부임할 당시의 敎書·諭書를 수록하였다. 사실 박경후는 숙종초기 남인정권의 주요 당국자의 한 사람이었으며, 문장과 글씨에 능하여 내직에 있을 때는 주로 사헌부·사간원·홍문관 등 3사의 직책을 수행하였다. 그리고 1675년-1705년까지 30년 동안의 관직생활을 담은「宦海浮沈」(본서 置簿記錄類. N0 7) 이라는 親筆 日記를 남겼는데, 이는 사환일기로서 자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 그리고 그의 遺著로『歸翁文集』이 전한다.
박경후는 정치적인 顯達을 구가하는 과정에서 청송심씨[沈檀系], 원주김씨[金德遠系], 전주이씨[李義徵系] 당대 남인의 명가들과 통혼하게 되면서 함양박씨의 사회적 입지도 크게 강화되었다. 심단은 윤선도의 외손으로 경종조 청남의 영수였으며, 김덕원은 기사당국자로 지칭될 정도로 숙종조 남인정권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이었다. 그리고 이의징 역시 남인의 중견으로서 영조 무신란의 주동자 이인좌는 바로 그의 종손이었다. 이러한 혼맥은 당시 함양박씨의 사회적 지위를 방증하고도 남음이 있다.
한편 박경후는 아우 경승의 아들 흥신을 양자로 들였는데, 족보에 따르면, 당시 경승계열은 이미 경기도 이천지역으로 이주한 것으로 나타난다. 흥신은 아버지와 처부의 사회적 지위에도 불구하고 벼슬하지 않았고, 말년에 감역이 주어졌지만 출사하지 않았다.
이후 흥신의 아들 태갑 대에 이르러 함양박씨는 커다란 변화를 수반하였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거주지의 이동이었다. 즉 함양박씨 구당공파는 박습이 함양에서 서울에 정착한 이래 대대로 사환에 종사하였다. 물론 박종형이 선대의 전장이 있던 면천·안산 등지에 우거하고, 박경후가 시흥 구로리에 일시 우거한 적은 있었지만 이는 완전한 이주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태갑은 서울의 주자동에서 이천의 부발면으로 이주하였는데, 이는 약 400년만에 이루어진 거주지의 변동이었다.
박태갑이 이천으로 이주한 이유는 분명하지 않지만 정치적 상황과 집안의 환경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판단된다. 즉 1694년 갑술환국으로 정계에서 몰락한 남인들은 점차 서울에서 벗어나 경기도 일원으로 분산되는 경향이 있었는데, 남인의 주요 가문이었던 함양박씨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고 생각된다. 그 단적인 예로 남인의 명가였던 여주이씨 성호가문이 갑술환국 이후 서울의 정동에서 안산의 첨성리나 충청도의 예산·덕산으로 이주한 것을 들 수가 있다.
그리고 앞에서 언급한대로 태갑은 혈통상으로 경후의 아우 경승의 손자였는데, 이 가계는 경승 또는 그 아들 창신 대에 이천으로 정착한 상태였다. 이런 정황을 고려한다면 태갑의 이천이주는 생가의 연고와 관련지어 이해할 필요가 있는데, 태갑의 산소[在利川 山村]가 始興 九老里가 아닌 生家 伯父 昌新의 산소 바로 아래에 있는 것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박태갑이 이천으로 이주·정착한 시기는 대략 18세기 중엽으로 파악된다. 현재 남아 있는 박태갑의 호적 가운데 한성부 호적의 하한은 1753(영조 29)이며, 이천 호적의 상한은 1759년(영조 35)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천에 정착한 시기는 1750연대로 잡아도 무리가 없으며, 정확한 지역은 利川府 邑內面 假古前里였다. 이천 이거 이후 함양박씨는 종전까지 사환가로서의 명성과는 달리 벼슬과는 점차 괴리되어 갔다. 이는 당시 남인의 일반적인 상황이었는데, 청남의 영수 심단의 외손자였던 박태갑조차도 아무런 직함도 가지지 못했으며, 그 아들 현록은 通德郞의 품계만 가지고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혼반만은 그대로 유지되어 태갑은 전주이씨 이현치의 딸, 현록은 전주이씨 이제화의 딸과 혼인하였다. 이현치는 이수광(芝峰)의 증손이고, 이제화는 감사를 지낸 이명웅의 증손으로 자신은 문과를 거쳐 형조참의를 지낸 매우 현달한 인물이었다. 그의 이들이며 박현록과는 남매사이였던 李獻慶(艮翁) 18세기 후반 남인을 대표하는 정치가이며 문장가였다. 현재 구당공 종가에는 1761년(영조 37) 李齊華가 자신의 딸 박현록의 처에게 재산을 지급한 분재기가 남아 있는데, 본서에서도 이를 수록하였다.(本書 明文文記類 (一)分財記 N0 4)
【圖 6】〈咸陽朴氏家系圖 5〉
함양박씨가 이천에 거주한 시기는 박태갑에서 박규순에 이르는 6대 120여년간이었다. 이 기간 동안 함양박씨는 정치·사회적으로 선대에 비해 매우 영락하였으며, 경제적인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관직에 있어서는 통덕랑 품계를 가지고 있었던 박현록을 제외하고는 직계로 단 1명의 재관자를 배출하지 못했다. 그리고 遺稿나 文集을 남긴 인물도 없었는데, 박정석이 문명이 있어 사류의 추중을 받고, 필법에 조예가 깊어 鄕薦에 거론되는 정도였다. 결국 이 시기 함양박씨는 서울의 전통있는 仕宦家에서 향촌의 평범한 사족으로 가격이 격하되었지만 남인으로서의 입장은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 참고로 박태갑에서 박규순까지의 산소는 이천 山村과 麻田面 億萬里에 소재하고 있다.
함양박씨가 이천을 떠나 지금의 부여군 恩山面 佳谷里에 정착하게 된 것은 1905년 경이었다. 가곡리는 풍수지리적으로 梅花落地形의 福地로 알려져 있다. 부여 이거는 오로지 후술할 박시순에 의해 결정된 것이었으며, 이 과정에서 九堂公派 宗家 자체가 利川에서 扶餘로 옮겨지게 된 것이다. 당시 부여에는 박경후의 아우 朴慶冑·朴慶遠·朴慶彦의 후손들이 세거하고 있었는데,
註6)
박시순의 부여이거도 이런 연장선상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박시순은 비록 종손은 아니지만 본서에 수록된 고문서의 상당수가 그와 관련된 문서이다. 따라서 함양박씨 구당공파의 종통과 고문서의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박시순에 대해 상술할 필요가 있다.
【圖 6】에 따르면, 박규순과 박시순은 계통상으로는 8촌, 혈통상으로는 6촌형제 사이였다. 규순이 무후하자 장자 東翼을 그의 양자로 들여 구당공파의 종통을 잇게 한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박시순·박동익부자는 박세영의 장자 박대립의 후손이 아닌 차자 朴思立의 후손으로 종손계열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술의 양자 유공의 생부가 사립이었기 때문에 구당공파의 종통은 혈통상 사립계열이었다. 결국 박규순과 박시순은 각기 대립과 사립의 후손이라는 차이가 있고 촌수도 멀었지만 혈통상으로는 모두 사립의 후손들이었다. 시순의 장자 동익이 규순의 양자로 들어간 것도 이런 맥락에서였다.
그러나 박규순은 이미 그의 아버지 光錫이 현충의 아들 재리의 양자로 들어간 상태였기 때문에 구당공파 종통과는 촌수상으로 6촌 또는 8촌의 사이를 유지하게 된 것이다. 박광석은 박재리의 양자가 된 이후에도 이천으로 이주한 것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朴思立系列이 세거하던 平山 如珠洞에 살았고, 아들 始淳, 손자 東翼도 평산에서 출생하였다.
이런 흐름 속에서 박시순은 박규순이 무후하자 동익을 양자로 들였으며, 1905년 박시순이 가곡리에 택거할 때 동익이 생부를 따라 가곡에 살게 됨으로서 구당공 종가가 이천에서 부여로 옮겨지게 된 것이다.
【圖 7】〈咸陽朴氏家系圖 6〉
부여로 이주한 박시순·박동익 부자는 한 집에 거주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런 맥락에서 박시순 관련 문서를 동익이 관리하게 되었고, 아들 萬熙, 손자 用璡을 거쳐 현재의 소장자인 증손 柄鎬에게 전해진 것이다.
박시순은 황해도 平山 출신으로 유년 시절부터 문장이 출중하였으며, 1879년(고종 16)에는 31세의 나이로 문과에 합격하였다. 이후 西學敎授를 거쳐 1892년(고종 29)에는 右通禮로서 고종의 尊號嘉上에 참여한 공으로 加資되었으며,
註7)
1893년(고종 30)에는 右承旨로 승진하였다. 그러나 동년 8월 安孝濟의 상소를 접수하는 과정에서 일대 수난을 겪게 되었다. 안효제의 상소는 關王廟의 허구성을 비판하고 궁중에서 성행하던 불교행사의 부당성을 지적한 것이었다. 그러나 정언 金萬濟가 안효제의 상소를 흉소로 지목하여 비판하자 이를 받아 들인 박시순 역시 그의 당여로 매도되어 파직되고 말았다.
註8)
이 때가 1893년(고종 30) 8월 26일이었다. 박시순은 파직된 그날로 洪原에 유배되어 1894년(고종 31) 6월까지 약 10개월 동안 유배 생활하였으며, 1894년(고종 31) 6월 8일 특별사면으로 풀려나 우승지에 복직되었다. 그러나 복직된 지 4개월만인 沔川郡守[1894년 10월-1895년 6월]를 자청한 이래 1895년(고종 32) 6월부터는 任實郡守[1895년 6월-1904년], 1904년 2월부터는 長淵郡守[1904 2월-1905년]로 재직하였다. 그러나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관직을 버리고 고향인 平山으로 돌아 왔다. 그러나 그 즉시 일찍이 점지해 두었던 부여 은산 가곡리로 이주하여 3년을 지내다 1907년 60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박시순의 생애와 관련하여 특기할 사항은 그가 유배 또는 관직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상당수의 일기를 남겼다는 점이다. 그가 남긴 일기는 〈政院日記〉, 〈北征日記〉(流配日記), 〈沔紱日記〉, 〈雲紱日記〉, 〈西紱日記〉(이상 官職日記)와 民狀置簿冊인 〈民訴冊〉, 〈公言聽理〉, 〈官旨冊〉 등이 있는데, 모두 19세기 후반의 사회상을 이해하는데 필수적인 자료들이다. 본원에서는 일기의 대부분을 모아『韓末 官人 朴始淳日記』(韓國學資料叢書 22, 1999)를 간행한 바 있다.
본서에 수록된 稟目·稟告(이상 疏箚啓狀類), 報狀, 軍官座目, 告目(이상 牒關通報類), 量晴較雨, 日記廳儀軌, 長淵郡査案(이상 置簿記錄類) 역시 박시순의 관직생활과 관계된 문서들이며, 이외 所志類·詩文·簡札 중에도 박시순과 관련된 문건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한편 부여로 이거한 함양박씨는 朴東翼 형제와 그의 자질들이 중심이 되어 부여일대의 교육활동을 주도하는 한편 항일운동에도 매우 적극적이었다. 박동익과 장자 萬熙는 信明義塾의 설립과 운영에 깊이 관여하였는데, 본서에 수록된 〈信明義塾發起員錄〉, 〈信明義塾規則〉, 〈賞狀〉(이상 置簿記錄類 참조)은 근대교육과 관련하여 매우 주목되는 자료이다. 동익의 차자 寧熙는 靑山里戰鬪에 참여한 항일운동가로 잘 알려져 있다.
이상의 서술을 종합할 때 함양박씨는 朴習~朴興新에 이르는 재경기에는 비록 일시적인 가화가 있었지만 중앙의 사환가로서 성장·발전하던 시기였고, 朴台甲~朴奎淳에 이르는 利川移居期에는 남인의 정치적 상황과 운명을 같이하며 정치·사회적으로 침체하던 시기였다. 그리고 부여로 이거한 이후에는 박시순을 중심으로 가격의 신장을 도모하는 한편 근대교육을 주도하고 抗日運動에 참여하는 등 民族運動에 적극 노력하던 시기로 규정할 수 있다.
1) 敎書
敎書는 모두 朴慶後와 관련된 문서들이다. No.1은 1691년(숙종 17) 7월 2일 황해감사로 나갈 때 작성된 것인데, 이 글을 지은 사람은 당시 이조참의(兼知製敎) 權歆이다. No.2는 1693년(숙종 19) 1월 26일 전라감사로 부임할 때 작성된 것으로 찬자는 부제학(兼知製敎) 閔昌道였다. 참고로 박경후는 황해·전라·경기 3도의 관찰사를 지냈는데, 경기감사 부임시의 교서만 현전하지 않는 셈이다.
2) 諭書
諭書 역시 朴慶後와 관련된 문서이며, 모두 3건이다. No.1은 1691년 황해감사 재임시, No.2는 1693년 전라감사 재임시, No.3은 1700년 경기감사 재임시에 작성된 것이다. 찬자와 서자는 알 수 없다. 본서에서는 No.1의 칼라도면을 수록하였으니 참고하기 바란다.(圖面 1 참조)
3) 紅牌
朴慶後가 1675년(숙종 1) 增廣文科에서 丙科 第1人으로 급제할 당시의 홍패이다. 구당공파에서는 직계로 2명[朴大立·朴慶後]의 문과 합격자가 배출되었으며, 한말의 朴始淳까지 포함하면 3인이다. 그러나 현전하는 것은 박경후의 홍패가 유일하다.
4) 白牌
백패는 모두 5건인데, 朴由恭(2건), 朴尙郁(1건), 朴慶後(1건), 朴慶承(1건)이다. No1·2는 1612년 박유공이 司馬兩試에 합격할 당시에 작성된 것이며, No.3은 박상욱, No.4는 박경후의 백패이다. 박경승(No.5)의 백패가 소장된 것은 경후는 아우 경승의 아들 興新을 입후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흥신이 생부 경승의 문서를 가지고 온 것으로 이해된다.
5) 告身
본서에 수록된 문서 중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것이 고신이다. 상한은 1591년(선조 24)이며, 하한은 1902년(광무 6)이다. 宦歷이 가장 화려했던 朴大立은 追贈告身만 남아 있는 상태이고, 실직으로는 박지술의 고신이 시기적으로 가장 앞선다. 인물별로는 박경후의 고신이 절대적인 분량을 차지한다.
본서에서는 고신을 먼저 대수별로 분류한 다음 이를 다시 연대순으로 배열하였다. 부인의 고신은 남편 항목의 맨 말미에 첨부하였다. 내용 파악의 편의상 敎牒(4品 이하의 사령장)도 함께 분류하였다.
6) 差定帖
모두 9건으로 朴由恭, 朴宗亨, 朴尙郁, 朴慶後, 朴慶承 관련문서들이다.
7) 任命狀(附錄 參照)
8) 指令(附錄 參照)
9) 布告文(附錄 參照)
1) 上疏
대부분 草本이며 시기적으로는 모두 한말의 문서들이다. 초본이라 작성자의 이름을 명시하지 않은 관계로 李最承·申泰觀·李南珪의 상소 외에는 작성자를 밝히지 못하였다.
2) 所志類
白活·圖形記·侤音·題音 등 각종의 관련문기를 포괄하는 의미에서 所志類로 분류하였다. 내용적으로는 山訟·畓訟·薦狀이 주류를 이루며, 陳情對象官은 始興·利川·水原·平山·韓山 등 매우 다양하다.
No.1-10의 〈朴監司宅〉은 朴慶後, No.14의 〈朴生員〉은 朴載元, No.102의 〈朴承旨宅〉은 박시순을 지칭하는 말이다.
3) 議送(附錄 參照)
4) 戶籍
朴尙郁(1626-1703) 이전의 호적은 현존하지 않고 박상욱에서 朴鼎錫에 이르는 약 200년 동안의 호적이 남아 있는데, 대부분 준호구이다. 호적에 따르면, 함양박씨는 朴興新까지는 한성부 南部 薰陶坊 鑄字洞에 거주하였고, 흥신의 아들 태갑 대에 서울에서 이천으로 이주한 것으로 나타난다. 한성부 거주기에는 관직이 계속적으로 이어져 노비수도 상당하여 경제적으로 매우 부유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천이거기에는 이와는 대조적인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본 호적은 함양박씨의 거주지와 경제 상황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문서들이다.
5) 稟目(附錄 參照)
6) 稟告(附錄 參照)
1) 報狀
박시순이 임실군수와 장연군수로 재직할 때 南原府使 또는 度支大臣에게 군정을 보고하는 내용의 문서이다. 엄격하게 말하면 관문서이다. 참고로 현재 함양박씨 구당공파 종가에는 박시순이 지방관으로 재임할 때 수발급되었던 관문서의 원본 또는 초본이 상당수 소장되어 있는데, 본원에서 발간한「韓末 官人 朴始淳日記」의 대부분이 그런 내용들이다. 본 보장의 소장내력도 이 연장 선상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2) 軍官座目(附錄 參照)
3) 告目
이 역시 朴始淳이 任實郡守(1895-1897)로 재임할 때 수급된 문서들이다. 모두 당시의 원본 문서들로서 「韓末 官人 朴始淳日記」수록분 가운데 〈雲紱日記〉, 〈民訴冊〉, 〈官旨冊〉 등에 어떤 내용과 형태로 반영되어 있는지 상호 대비해 볼 필요가 있다.
1) 立案
3건 중에서 2건은 粘連文記이며, 나머지 1건은 禁松關聯 立案이다.
立案(N0 1)은 明文, 侤音, 立案이 점련되어 있다. 明文은 1694년 5월 20일 金忠俊(禦侮將軍行萬戶)이 安翼齡(幼學)에게 衿川郡 北面 九老里에 소재의 田 4卜 7束을 錢文 16兩을 받고 방매하는 내용이다. 侤音은 동년 5월 26일 金忠俊이 위 사실을 공초하는 내용이며, 입안은 동년 5월 위 사실에 입각하여 衿川郡守가 安翼齡에게 입안을 발급하는 내용이다.
立案(No 2)는 侤音(2건), 입안, 명문이 점련되어 있으나 명문(1698), 侤音(1705), 입안(1705) 순으로 배열되는 것이 합당하다. 명문은 1698년 11월 24일 元生員(代奴㗯孫)이 成生員(代奴次先)에게 衿川 北面 九老里 소재의 전답을 방매하는 내용이며, 고음은 財主와 證筆의 공초이며, 입안은 위 사실에 입각하여 1705년 漢城府에서 守生(奴)에게 입안을 발급하는 내용이다. 입안에 나오는 박참판은 박경후를 말하며, 守生은 朴慶後의 노비이다. 이 문서는 박경후가 구로리 소재 전답에 대해 畓訟을 제기하여 승소한 다음 소유권을 인정받는 내용인데, 관련문서로서 明文(本書 明文文記類)을 참고하기 바란다. 立案(NO 1)은 立案(NO 2)의 舊文記이다.
2) 完文
平山 下寶山 燕尾洞에 소재한 朴始淳 先塋 守護軍에 대한 勿侵完文. 완문에 나오는 朴注書는 승정원 주서를 지낸 朴始淳을 말하며, 박시순이 주서를 지낸 것은 1879(高宗 16)~1880년(고종 17)이므로 이 문서는 적어도 1879년 이후에 작성된 문서임을 알 수 있다.
3) 手標(附錄 參照)
4) 侤音(附錄 參照)
5) 和解文書(附錄 參照)
1) 分財記
① 許橄男妹和會文記(1656)
許恒의 사후 그의 자녀들이 모여 재산을 화회분집하며 작성한 문기. 문서의 모두가 마멸되어 1녀 閔震遠 항목이 완전하지 않다. 이 문서는 당시 분재에 참여했던 허항의 3女(朴宗亨妻)에게 지급된 것이다.
허항은 세조조에 병조판서를 지낸 許亨孫의 5세손으로 문과를 거쳐 승지를 지냈다. 그는 슬하에 2남 3녀를 두었는데, 당시 분재에 참여한 사람은 1녀서 閔震遠의 子婦 趙氏, 2녀서 沈度의 딸 沈氏, 장자 許橄, 3녀(朴宗亨妻), 2자 許欖의 子婦 金氏였다. 허항의 자녀관계와 분재대상을 도식하면 【圖 8】과 같다.
【圖 8】〈陽川許氏 許恒子女圖〉
② 朴宗亨男妹和會文記(1666)
朴由恭의 사후 그의 자녀들이 재산을 화회분집하며 작성한 문서. 박유공은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박종형이며 딸은 오정위에게 출가하였다. 당시는 박종형(1602-1659) 역시 사망한 상태라 그의 부인 陽川許氏가 분재에 참여하였다. 필집은 재주 박유공의 장손이며, 박종형의 장자인 朴尙郁이다. 오정위는 吳端의 아들로 문과를 거쳐 判書를 지냈다.
③ 朴台甲別給文記(1721)
1721년(景宗 1) 朴興新이 장자 朴台甲에게 노비 3口를 별급하는 문서. 이 해는 박흥신의 졸년이며, 당시 박태갑은 17세였다. 배면에는 1730년(영조 6)에 작성된 掌隸院 立案이 있다.
④ 朴顯祿妻全州李氏衿給文記(1761)
1761년(英祖 37) 李齊華가 朴顯祿에게 출가한 딸에게 재산을 지급하며 작성한 문기. 이제화는 선조조의 명신 李誠中의 5세손으로 대대로 고관을 배출한 명문 출신이다. 그 역시 문과를 거쳐 영조조에 형조참판을 지냈다. 박현록(1729-1748)은 20세로 요절하였기 때문에 부인 전주이씨의 친정에 대한 의존도가 매우 높았을 것으로 보이는데, 이 문서 역시 그런 맥락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제화의 아들 李獻慶의『艮翁集』에 따르면, 이제화는 서울에 살았고, 박현록의 양자를 鳳赫이라 하였는데, 봉혁은 박재원의 아명으로 보인다.
【圖 9】〈全州李氏 李齊華家系圖〉
2) 明文
대부분 土地明文이고 家舍·松田·柴場明文도 일부 포함되어 있다. 명문의 구체적인 내용은 부록을 참조하기 바란다. 다만 NO.1-12는 立案의 관련문건이라는 점에서 주목을 요하며, 朴參判은 朴慶後를 말한다. NO.25-38의 사실상의 수급자인 朴生員은 朴載元을 말하며, NO.58·59·63의 朴承旨는 朴始淳을 말한다.
3) 牌旨(附錄 參照)
1) 通文(附錄 參照)
2) 婚書
혼서는 모두 11건이 수록되었는데, 시기적으로 이른 문서가 많다는 특징이 있다. 현재까지 본원에서 수집·정리한 혼서는 대부분 18세기 이후의 자료이며, 임진왜란 이전의 자료는 매우 희귀하다. 그런데 본서에는 1572년에 작성된 혼서(NO.1)를 위시하여 17세기 4건, 18세기 3건, 19세기 3건이 수록되어 있어 혼서의 시기적 경향을 이해하는데 참고가 된다. NO.1은 朴知述 혼례시의 납채문서인데, 투식이 18세기 이후의 혼서와는 조금 다르다. 관련 연구자의 검토가 요망되며, 수급자인 淳昌趙氏家는 박지술의 처가인 趙天祥의 집안을 말한다. 본서에서는 이 자료를 칼라사진으로 수록하였다.
한편 혼서에서 주목할 사항은 혼서에 나오는 인명이 족보와 차이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NO.4의 朴慶來는 朴慶後, NO.8의 朴顯東은 朴顯忠, NO.9의 朴永鎭 朴鼎錫, NO.10의 朴英淳은 朴奎淳으로 추정하였는데, 관련 연구자의 세심한 주의가 요망된다.
3) 簡札
간찰은 대부분 朴慶後·朴始淳과 관련된 문서이며, NO.1-4는 원래 〈名賢手牘〉이라는 필첩에 수록된 것이다. 본서에서는 이를 칼라사진 형태로 수록하였다. 박경후는 남인으로 활동하였는데, 송시열·박태보·민유중·민정중 등 노론·소론의 명사들과 교유한 것이 매우 이채롭다. 그 이하 NO.5-27은 박시순이 발급 또는 수급한 간찰인데, 아들 동익을 포함한 李道宰·金宗漢·李朝衡·尹始永·金炳國 등 한말의 명사들과 왕래된 것이 대부분이다.
1) 宗稧傳掌記
咸陽朴氏宗稧의 운영 文簿로서 맨 앞에 立議가 있고, 그 아래로 각 연도별 운영내역과 有司 명단이 기재되어 있다. 입의는 3조항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거주의 원근을 막론하고 敦誼에 힘쓸 것, 매년 11월 15일을 元定日로 삼아 講信하고 敦誼할 것, 회원들은 각 1兩씩 出資할 것 등이다.
2) 和劑
모두 朴東翼과 관련된 醫藥處方箋이다. NO.2-5는 일반적인 화제와 마찬가지로 별다른 양식없이 처방의 내용을 기록하였으나 NO.1은 1910-20연대 처방전 양식을 알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여기에는 우선 처방 대상자의 이름·직업·주소·연령이 기재되어 있고, 그 다음으로는 처방전의 내역을 기재하였으며, 맨 마지막에는 處方日時, 處方者(醫生)의 주소·이름(인장날인)이 명시되어 있어 양식이 매우 합리적이고 근대화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3) 祭式
NO.1은 咸陽朴氏 利川先塋(山村·億萬里)의 祭式인데, 산촌에는 朴台甲·朴顯祿 兩代 墳墓, 억만리에는 朴載元·朴鼎錫·朴奎淳 3대의 墳墓가 조성되었다. 〈三墳上祭需式〉의 〈三墳〉은 억만리 소재의 3대 분묘를 말한다.
NO.2는 함양박씨 曲阜先塋의 祭式으로 〈祭需式〉은 물론 〈祭儀〉·〈規則〉까지 완비되어 있다. 곡부선영은 함양박씨 부여선영을 말한다. 〈규칙〉에는 祭需의 淨潔問題, 祭祀日時, 祭官의 역할 등이 명시되어 있다.
4) 考講記
1895년(高宗 32) 任實郡守 朴始淳이 경내유생 朴基先의 학업정도를 평가하고 작성한 일종의 학업 평가서이다. 주지하다시피 수령이 경내유생을 고강하는 일은 守令7事의 하나였지만 考講文書의 원본이 발견된 예는 많지 않다. 본 문서에 따르면, 고강기에는 講生의 성명, 연령, 본관, 고강대상 書名과 卷數가 기재되고, 맨 마지막에 고강결과로서 성적(大通·通·粗·略)이 기재되었음을 알 수 있다. 본 문서의 주인공인 박기선은 小學을 고강하였으며, 성적은 通이었다.
5) 擇日記(附錄 參照)
6) 花樹契帖(附錄 參照)
7) 宦海浮沈
朴慶後의 仕宦日記로서 수록연대는 著者가 증광문과에 합격하던 1675년(숙종 1) 10월 28일에서 1705년(숙종 31) 10월까지이다. 宦海는 官界를 의미하며, 浮沈은 仕宦 과정에서의 영욕을 비유한 말이다. 명필로 이름이 있었던 저자의 親筆手稿本이다. 중간 중간에 수정·가필한 흔적이 있고, 먹(墨)으로 지운 부분이 있는 것으로 보아 초고본임을 알 수 있다. 시기적으로는 약 30년에 해당하지만 외직에서의 기록은 없고 朝廷에서 왕을 시종하면서 보고 들은 聞見이나 자신이 처리한 政務를 기록한 것이기 때문이 분량이 많지 않다. 물론 여기에 수록된 내용들의 대부분은 朝鮮王朝實錄(肅宗實錄)이나 承政院日記 등과 중복되는 부분이 많겠지만 이들 자료를 보완하는 의미도 적지 않다. 현재 이 자료는 함양박씨문중(대표:朴柄鎬)에서 출간한『歸翁文集』에도 수록되어 있다. 본서에서는 본 일기의 원본상태를 최대한 핍진하게 보여주려는 의미에서 宦海浮沈의 표지와 본문의 일부분을 칼라사진으로 수록하였다.
8) 量晴較雨
박동익의 생활일기로서 수록연대는 1897년(光武 2) 1월 1일에서 동년 9월 19일까지이다. 매일 매일 기록한 것이 아니고 특정한 날짜만 기록하였기 때문에 분량이 많지는 않다. 1월과 2월의 기록은 매우 자세한 편이나 그 이후의 기사는 비교적 소략하다. 일기의 작자를 명시하지는 않았으나 4월 5일자 내용 중에 “與三從叔偕作任衙覲行”이라는 기사가 있다. 이는 任實官衙로 覲親行을 떠났다는 말인데, 당시의 임실군수는 박시순이었다. 따라서 작자는 박시순의 아들 박동익임을 알 수 있다. 일기의 내용은 생활상을 적은 것인데, 날씨, 農事關係, 交遊關係 등이 기록되어 있다.
9) 日記廳儀軌
1890년(高宗 27) 承政院日記를 개수할 당시의 儀軌이다. 이는 原本이 아닌 抄本으로 당시 副司果로서 개수작업에 참여했던 박시순이 등초한 것으로 판단된다. 좌목 제12항에 기록된 朴台淳은 朴始淳을 말한다.
冒頭에 〈庚寅日記廳改修謄錄目錄〉이 있고, 그 아래로 時日·凡例·座目·啓辭·關文·甘結·分年·卷秩·財用·賞典 순으로 기재되어 있다.
〈時日〉은 改修日程을 간단하게 기록한 것이고, 〈座目〉에는 日記廳堂上(行護軍) 朴容大 이하 21명의 관원명단이 열서되어 있다. 〈座目〉 말미에는 〈率屬〉이라 하여 書吏·書寫·使令·陪使令 등의 名單과 숫자도 함께 기재되어 있다. 〈啓辭〉·〈關文〉·〈甘結〉은 개수 과정에서 오간 공문서들이다. 〈分年〉은 朴容大·金宗漢·金炳秀·金春熙·閔泳達 등 5堂上이 담당 연조를 분담한 것인데, 대략 7-9년씩 분담한 것으로 나타난다. 〈卷帙〉은 각 연도별 卷數(분량)를 표기한 것인데, 총 38년 중에서 1년치를 기준하여 가장 많은 경우는 13권이고, 가장 적은 경우는 1권으로 나타난다. 38년치를 합산하면 361권이었다.
〈財用〉은 개수작업에 들어간 비용의 명세서이고, 〈賞典〉은 개수작업 완료 이후 참여한 관원들에 대한 포상 單子(名單)이다.
10) 公洞面中里量案冊
1869년(高宗 6) 扶餘縣 公洞面 中里의 量案冊이다. 책자의 형태로 보아 草本 또는 寫本으로 판단된다. 표지에는 〈庚午年秋改量〉으로 표기되어 있고, 본문의 內題에는 〈同治八年己巳九月日扶餘縣改量案一冊〉이라 기록되어 있어 본서의 내용이 1869년의 상황인지 아니면 1870년의 상황인지 혼돈스러운 점이 있으나 일단 內題에 준하여 1869년으로 추정하였다.
표지에는 中里量案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본문에는 古培谷里와 玉佳谷(谷口)의 量案이 기재되어 있다. 附註에 따르면, 고배곡리는 “東으로 琴江里와 접하고, 南으로 公洞里와 접하고, 西로는 方生洞과 접하고, 北으로는 玉佳谷과 접한다”고 하였다. 中里와 古培谷里는 같은 洞里이거나 고배곡리가 중리를 구성하는 자연부락일 가능성이 크다. 관련 연구자의 검토가 요망된다.
양안의 기재방식은 여타 양안류와 동일하다. 다만 맨 하단의 所有主·作人 항목에 변동 사항이 있을 경우 종이를 잘라 붙여 새로운 소유주·작인을 기록하였다. 본서에서는 영인상의 제약에 따라 새로이 변경된 부분만 영인하였으므로 본서의 영인 상태에서는 종전의 所有主·作人 사항을 확인할 수 없다. 관련 연구자는 이 점을 유의하기 바란다.
11) 長淵郡査案(附錄 參照)
12) 信明義塾發起員錄
1908년(隆熙 2) 8월 18일 사립학교인 信明義塾을 설립하기 위해 조직된 발기인의 명단이다. 문서의 제목은 〈信明義塾發起員錄〉이지만 내용상으로는 발기인의 명단은 물론 임원명단인 〈信明義塾任員座目〉과 학생명단인 〈學員錄〉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 인명의 기재방식은 성명을 쓰고 그 아래에 자·생년을 기록하였고, 그 아래에 본관과 거주지를 기록하였다. 이런 방식은 발기인명단, 임원명단, 학생명단 모두 동일하다.
발기인은 李燁·趙秉虁·沈夏鎭·朴東翼·朴東卨·金天圭·康駿顯 등 모두 7명인데, 이들은 扶餘의 公洞·棠坪·曲阜 등지에 거주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임원은 塾長·副塾長·塾監·學監·總務·敎師·幹事長·幹事員·贊成長으로 구성되어 있다.
임원의 교체시에는 해당 좌목 위에 붉은 色紙를 사용하여 교체된 임원의 이름을 붙여 놓았다. 본서에서는 영인상의 제약에 따라 최초의 임원 명단은 제시하지 못하고 색지에 씌여진 신임임원명단만 제시하게 되었다. 본서 영인 대상에서 생략된 부분은 아래와 같다.(⇒最初의 任員)
● 塾長 李兢稙條項⇒李相麟[仁瑞, 丁巳, 丹陽人]
● 副塾長 朴東虁⇒兪致元[景秀, 壬寅, 杞溪人]
● 塾監 朴溶淳⇒趙秉虁[聖瑞, 豊壤人]
● 學監 兪鎭奭⇒閔泳進⇒副塾監 朴東卨[贊一, 己未, 咸陽人] ※원래 副塾監이었으나 學監으로 개정됨
● 敎師 朴東斌⇒許㝢[觀瑞, 丁巳, 陽川人]
● 敎師 金天圭⇒李燁[景晦, 戊申, 丹陽人]
● 敎師 李相麟⇒朴東虁[章一, 丁巳, 咸陽人]
● 幹事長 兪致亨⇒金天圭[景一, 庚午, 安東人]
● 幹事員 許鈺⇒兪璟煥[成玉, 壬子, 杞溪人]
● 贊成長 安弼遠⇒同人
한편 임원명단의 상단에는 〈仙〉를 표기하여 생존여부를 표시하였다. 다만 학생명단(學員錄) 상단의 〈化〉자는 사망표시로 보여지며, 〈退〉자는 퇴학 표시로 여겨진다. 〈出〉자를 표시하고 인명을 도할한 부분이 있으나 자세한 내용은 미상이다.
학원록에는 金升圭 등 모두 35명이 수록되어 있다. 이들의 거주지는 棠坪·鳳岱·曲阜·公洞·檜谷·恩山·坪村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이를 성관별로 구분하면 安東金氏·靑松沈氏·全州李氏·咸悅南宮氏·廣州安氏·杞溪兪氏·咸陽朴氏·信川康氏·金海金氏·丹陽李氏·密陽朴氏·慶州李氏·淸州韓氏·平山申氏·延安李氏·驪興閔氏 등 16개 가문이다. 결국 信明義塾은 부여 은산·곡부일대의 16개 가문이 협의하여 설립한 근대적 사립학교라 할 수 있다.
13) 信明義塾規則
信明義塾 자체의 운영규칙이기보다는 신명의숙을 운영하기 위해 설립된 계의 운영규칙이라 할 수 있다. 요즈음의 學校財團과 유사한 형태이다. 〈規則〉 외에도 〈座目〉, 〈稧員錄〉이 함께 수록되어 있어 운영의 전모를 파악하기에 용이하다.
〈規則〉은 모두 18개 조항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에는 稧의 名稱, 位置, 設立目的, 出資方式, 任員九成, 稧長·副稧長·會計·掌務·監督·評議長 등 任員의 任務, 任員의 交替規定, 修稧日字 등 계 운영의 세세한 규정들이 열거되어 있다.
〈座目〉에는 稧長(李相麟), 副稧長(安弼遠), 會計(金升圭), 掌務(南宮楨), 監督(朴東翼), 評議長(李世永) 등 임원의 명단이 열서되어 있다.
〈稧員錄〉에는 安弼遠 등 36명의 계원 명단이 수록되어 있다. 계원들의 인적 구성은 信明義塾發起員錄의 〈座目〉·〈學員錄〉과 대비해 보면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대동소이하다. 양자를 상호 대비해 볼 필요가 있다.
14) 賞狀
7건 중에서 6건은 신명의숙 관련자료이며, 1건은 은산보통학교 관련자료이다. NO.1-7은 신명의숙에서 박만희에게 발급한 것으로 내용은 성적우수에 따른 포상이다. 이는 단순한 상장에 불과하지만 신명의숙의 학사운영 실상을 알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상장에 따르면, 신명의숙에서는 갑을병의 순서에 따라 반을 편성하였으며, 성적 우수자에게는 상장 외에 종이·연필 등의 부상도 지급하였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