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장처 고문서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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晉州 晉陽河氏는 고려 초기 이래로 名官·達士를 배출해 왔으며, 조선시대에도 다수의 鴻儒·碩學을 배출하며 名門으로서의 家格을 탄탄하게 유지한 진주지역의 대표적인 土姓이요 大姓이었다. 본서의 주인공인 滄洲派는 滄洲 河忄登(1563-1624)을 파조로 하는 가계로서 진주시 大谷面 丹牧里를 세거의 기반으로 삼아 17세기 중엽까지는 南冥學派의 주요 구성원으로, 그 이후로는 진주지역 老論의 대표가문으로 활동한 가문이었다.
韓國精神文化硏究院 藏書閣國學팀에서 滄洲後孫家의 典籍類를 최초로 조사한 것은 1999년 2월 11일이었다. 本院 藏書閣國學팀에서 근무하는 鄭基斗 과장이 친지를 통해 알게 된 鄭然九씨의 알선으로 滄洲 後孫인 河孝常(澹山孫子) 선생을 만나 자료조사를 시작하게 되면서 하효상의 현거주지인 부산시 동래구 온천동과 선대의 세거지이며 본가가 있는 경남 진주시 대곡면 단목리를 수차례 오가며 자료를 조사하여 동년 7월 대부분의 자료를 본원 장서각국학팀에서 일정 기간 동안 대여하게 되었다. 이후 2000년 3월까지 대략 5차례의 추가 조사를 통해 비로소 모든 자료를 수집·정리하게 되었다. 이 자료들은 400년 유래를 지닌 진양하씨 滄洲派의 家藏文獻으로서 조선 후기 진주지역의 사족 동향은 물론 정치·사회상을 이해하는데 참고가 되는 중요 자료들이다.
창주파의 家藏文獻이라면 그 종가에 소장되는 것이 당연하지만 본원에서 자료를 수집한 것은 지손인 河孝洛(建窩:1942-1996,滄洲13世孫)의 집이었다. 하효락이 이들 자료를 소장하게 된 것은 河益範(6대조) 이래 조부 河祐植(澹山)과 先考 河恂鳳(海醒)에 이르기까지 소중하게 보존되어 온 선대의 家藏文獻과 한국전쟁 그리고 1960년대 이후 산업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산실의 위기에 처한 일가의 문헌을 보존하려는 위선의식에서 시중에 반출된 전적들을 대부분 수거하여 직접 관리하게 된 것이다. 조사 당시 자료들은 하효락의 本家가 있는 경남 진주시 大谷面 丹牧里 海醒精舍와 그가 우거하던 부산시 동래구 온천동 303번지, 그의 伯氏 河孝俊氏(1927-1997)의 집인 부산시 동래구 온천동 1011번지에 분리 보관되어 있었다. 그러나 당시 하효준씨와 하효락씨는 이미 故人이 되었기 때문에 그의 중형 河孝常 선생을 통해 진주·부산에 보관되어 있던 모든 자료를 정리하게 된 것이다.
1999년 8월까지의 자료조사는 丁淳佑, 朴丙鍊, 李鍾黙(이상 本院 敎授), 安承俊(본원 전문위원), 金文澤(연구원), 金素銀(연구원)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동년 9월 이후부터는 金鶴洙(연구원)가 자료조사에 합류하였다. 이 과정에서 河孝常·河孝玹(澹山孫子)·河宅善(澹山曾孫)은 열성을 다해 자료조사에 협조해 주었고, 이 외에도 河尙郁(滄洲宗孫), 河炳先(門中有司)의 적극적인 협조가 있었다. 특히 金東元은 자료 소장처의 안내와 일정 등을 잘 조정하여 자료조사가 보다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있게 하였다.
창주가의 전적류는 古文書가 약 5000여점, 古書가 약 3000책이다. 이 중 고문서는 14롤(Roll) 분량으로 마이크로필름(MF35-9323~9330, MF35-9366~9368, MF35-9399~9401) 촬영이 완료된 상태이며, 전적은 현재 정리·촬영 중에 있다.
본서에서는 고문서 중 학술적 가치가 높은 자료를 선정하여 2책 분량으로 영인 발간하게 된 것이며, 典籍類의 일부는 이미 본원 藏書閣國學팀에서 발간하는『藏書閣』제3집(2000.6)의「晉州 晉陽河氏 滄洲後孫家所藏 典籍(文集類)의 현황과 내용」에서 소개된 바 있다.
일반적으로 진양하씨는 河崙(浩亭)으로 대표되는 河拱辰系列, 河演(敬齋)으로 대표되는 河珍系列, 河緯地(丹溪)로 대표되는 河成系列로 3분된다. 창주공파는 하공신계열로서 고려시대 이래로 진주에 세거해 왔으며, 16세기 중엽부터는 조식과 학문적 유대를 지니면서 조선 후기 남명학파의 핵심가문으로 성장·발전한 가문이었다.
창주공파의 파조인 河忄登(滄洲; 1563-1624)은 17세기 초반 南冥의 현양사업을 주도하고 南冥學派의 결집에 노력한 재야의 선비 학자였다. 그의 선대는 한 번도 진주지역을 떠난 적이 없는 전형적인 진주 토반으로서 고려시대 이래로 다수의 급제자와 현관을 배출하는 과정에서 진주의 명문으로서 확실한 입지를 다지게 되었다. 특히 여말선초의 격동기에 河崙이 조선왕조 개창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함으로서 진양하씨의 가격은 크게 신장될 수 있었다. 비록 하륜은 창주의 직계는 아니었지만 그의 정치적 위상은 진양하씨는 물론 상당수의 진주지역 인사들이 중앙 정계로 진출하는데 커다란 발판이 되었다.
하륜과는 재종형제 사이였던 창주의 7대조 河濂은 역성혁명에는 참여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의 가계는 조부 이래로 관직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진주정씨 鄭信重 가문과 통혼하는 등 사회적 기반도 매우 견실하였다. 정신중 자신은 좌찬성, 아들 鄭以吾는 都摠制, 손자 鄭苯은 우의정을 지내는 등 이 가계 역시 진양하씨와 더불어 당시 진주지역을 대표할만한 仕宦家門이었다. 이런 정황을 통해서 볼 때 창주의 선대는 여말선초까지 사환적으로나 사회적인 지위에 있어서나 진주 굴지의 토반세력으로 자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圖 1】〈晉陽河氏家系圖Ⅰ〉
창주의 선대가 본격적인 성장의 기반을 마련한 것은 창주의 6대조 河淳敬과 5대조 河起龍 때였다. 하순경은 조선왕조가 수성의 시기에 접어들던 1444년(세종 26) 문과에 합격하였으며, 이후 세조조에는 佐翼原從功臣에 책훈되고 성균관 直講을 지낸 비교적 현달한 인물이었다. 나아가 그의 3아들 起龍·起麟·起犀가 문과에 합격하여 비록 고관은 아니지만 상경 종사하는 과정에서 가격이 크게 신장되고 진주일대의 수많은 진양하씨 중에서도 단연 명망 가계로 부상할 수 있었다.
한편 문과 합격에 더하여 하순경·하기룡 부자대에 일어난 특기할 사항은 거주지의 이동이다. 여러 기록에 따르면, 진양하씨는 시조 하공신 이래로 진주 비봉산 아래 中安里에 세거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하순경은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15세기 중엽 무렵에 400년 세거지를 떠나 진주부 남쪽 代如村으로 이주하였고, 그의 아들 기룡 역시 대여촌을 떠나 진주부 북쪽의 단목리로 이주·정착하였다. 단목리는 지금의 경남 진주시 대곡면 단목리로서 조선시대의 행정구역으로는 沙竹里였다.
하기룡의 단목이거는 이후 진양하씨의 향배와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단목리는 주거의 편리함과 물산의 풍부함을 겸비한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지형으로서 하기룡의 이거를 계기로 점차 진양하씨 동성마을이 형성되는 가운데 16세기 중반부터는 진주를 대표할만한 상당수의 문인·학자가 배출되었다. 지금도「丹牧」은 이 지역의 가장 전형적인 반촌으로 불려지고 있으며, 단목리의 진양하씨가 이른바「丹牧河氏」로 예칭될 수 있었던 것은 하기룡의 이주와 그 후손들의 번성에서 기인한다.
단목으로 이거한 하기룡의 자손들은 대대로 사환을 유지하며 사회적인 기반을 강화해 나갔다. 기룡의 아들 하유는 창신교위 忠武衛副司果를 지냈으며, 손자 하우치는 무과에 합격하여 泗川縣監, 礪山郡守, 安州牧使를 역임하는 과정에서 선정을 베풀어 매 임지마다 去思碑가 세워질 정도로 治聲이 자자하였다. 그리고 固城 출신으로서 중앙에서 문명을 떨쳤던 魚得江과 사돈을 맺을 정도로 사회적 지위도 탄탄하였다.
河禹治의 아들 河淑은 사친에 정성을 다했으며, 부모 사후에는 삼년상을 행하는 등 효행으로 향리의 칭송이 자자한 인물이었다. 비록 출사하지는 않았지만 대사간 어득강의 사위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그 역시 진주지역에서는 당당한 양반으로 행세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러한 배경 위에서 진양하씨는 하숙의 3아들 河魏寶·河晉寶·河國寶에 이르러 가세가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이들은 주로 16세기 중후반에 활동하였는데, 이 시기는 南冥學派의 宗師 曺植이 김해·진주를 중심으로 학문을 연마하고 후학을 양성하는 과정에서 경상우도의 학문적 분위기가 한창 고조되던 시기였다. 이들 3형제는 조식과 학문적인 유대를 형성하는 한편 과거와 관직을 통해 현달을 구가하였는데, 하위보와 하국보는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하진보는 1554년 문과에 합격하여 檢閱·獻納·說書 등 중앙의 요직과 김해·밀양부사, 안주·성주목사를 역임하여 사회적으로는 3형제 중에서 활동이 가장 활발하였다.
『德川師友淵源錄』·『山海師友淵源錄』등 남명의 연원록에 따르면, 하위보와 하진보는 조식의 문인이었다. 특히 하진보는 남명의 현양사업에 열성을 보여 1588년 김해부사 시절에는 新山書院을 건립하여 남명의 위패를 봉안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하위보는 남명에게 執經受業하지는 않았지만 일찍이 그의 문하를 출입하여 학문을 토론하는 과정에서 남명으로부터 신임을 크게 받았다. 그리고 남명의 고제 河沆·崔永慶과 교유하는 한편 후학의 양성에 노력하여 남명의 학문을 전파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처럼 하위보와 하진보 형제를 통해 진양하씨는 당당하게 남명학파의 일원으로 편입될 수 있었는데, 이는 창주를 중심으로 하는 그의 자질들이 남명의 현양사업을 주선하고 덕천서원 운영의 주도세력으로 등장하는 중요한 연결 고리가 되었다.(☞ 학통에 대해서는 후술) 그리고 이들의 자손들이 하기룡에 의해 세거의 기반이 조성된 단목리에 집거하게 됨으로서 17세기 이후 단목리는 진양하씨의 세거지인 동시에 남명학파를 유지하는 건실한 우익으로 자리매김 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河淑의 3아들 중에서 晉寶와 國寶는 후사가 없었고, 장자 위보만이 9남 2녀를 두어 자손이 크게 번성하였다. 창주 하증은 바로 하위보의 5자로 출생하였다. 그러나 숙부 국보·진보가 무후하자 창주는 국보를, 제7자 하성은 진보를 계후하게 되었다. 따라서 단목리의 진양하씨는 계통상으로는 하위보·진보·국보의 자손이 집거하고 있지만 혈통상으로는 모두 하위보의 자손임을 알 수 있다. 다만 위보의 아들 중에서 河忱(2子), 河恪(3자), 河惕(4자)은 무후하고, 河憬(6자)의 자손들은 水谷面 士谷으로 이주함으로서 17세기 이후 단목리에는 河恒(長子), 河忄登(5子: 國寶后), 河惺(7子: 晉寶后), 河忭(8子), 河悏(9子)의 자손들의 세거지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圖 2】〈晉陽河氏家系圖Ⅱ〉
하위보의 아들들은 남명학파의 주역으로서 17세기 초반을 중심으로 사회·학문적으로 왕성하게 활동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하항·하증·하협 3형제의 비중이 제일 높았다. 다른 형제들이 시기적인 한계로 인해 남명의 재전제자 또는 私淑門人이었음에
註1)
비해 하항은 남명으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은 문인이었다. 그는 남명의 만년 강학처인 山天齋에서 남명을 직접 배알하는 과정에서 그의 학덕에 감화되어 爲己之學에 전념하게 되었고, 成汝信·陳克敬 등 남명 고제들과의 교유를 통해 학문의 저변을 확대하였다. 하위보·하진보에 의해 남명과의 학연이 형성되었다면 하항은 이를 더욱 확충하여 자신은 물론 창주를 위시한 그의 아우들이 남명학파의 주역으로 성장하는데 커다란 바탕이 되었다.
하항의 사후 단목리의 진양하씨를 대표한 인물은 역시 창주공파의 파조 河忄登이었다. 그는 비록 남명의 문인은 아니었으나
註2)
남명문인이던 생부 하위보, 숙부 하진보, 백형 하항을 통해 일찍부터 남명학파의 학문적 분위기를 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중년 이후로는 남명의 고제 鄭逑를 사사하여 남명한강으로 이어지는 남명학파의 정맥을 계승하였다.
註3)
하증은 1591년(선조 24) 진사시에 합격한 이후로는 과거·벼슬을 단념하고 학문과 저술로 일생을 보낸 전형적인 선비학자였다. 그는 당시 남명학파의 명사들과 두루 교유하였는데, 河洛·孫天佑·河沆·金大鳴·李瀞·崔琦弼·河應圖·趙㻩·柳宗智·鄭承允·梁應龍·柳萬榮·河受一·李惟諴·鄭聃壽·姜景允·梁漑·鄭大淳·李純勛·韓誡·吳長·朴敏·曺次磨 등은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었다. 이 외 다소 후배이기는 하지만 河弘度·河弘達·河溍 등과도 밀접하게 교유하였다.
진사시 합격 이후 학문에만 몰두하던 하증의 존재가 사림에서 부각되기 시작한 것은 그의 나이 40대를 전후한 1600연대 초반부터였다. 1601년(선조 34) 德川書院의 중건에서부터 시작된 그의 공식적 활동은 1624년(인조 1) 사망하기까지 25년 동안 부단하게 진행되었으며, 그 골자는 역시 남명을 현양하고 남명학파의 외연을 정비하는데 있었다.
덕천서원은 남명학파의 종사 조식을 제향하는 진주지역의 首院이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의 와중에서 원우가 화소되었으나 전란의 여파로 인해 한동안 중건되지 못하였다. 이에 1601년 李瀞(院長)·陳克敬·하증이 중건을 주관하여 1602년에는 사우가 완성되었으며, 1603년에는 李光友·李天慶·河受一 등 약 50여명의 문인과 사숙인들이 회합하여 남명의 위패를 다시 봉안하고 향사를 거행하게 되었다. 당시 서원 중건의 배경과 과정에 대해서는 하증의「德川書院重建記」
註4)
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한편 하증은 덕천서원 중건 이후에는 진주향교의 중건을 주관하여 이를 완수하였고, 1606년(선조 39)에는 이천경·이광우·이정·하수일과 더불어 덕천서원 院錄을 수정하여 덕천서원의 문헌 정비에 착수하였다. 이 연장선상에서 1609년(광해군 1)에는 덕천서원에서 鄭逑와 더불어 院錄을 중수하였는데, 이 때는 朴絪·李光友·李瀞·成汝信·鄭蘊·權濤·李大期·朴而章·權濬·朴文榮 등 남명학파의 명사들이 대거 참여하였다.
남명의 현양을 위한 하증의 노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에 1611년(광해군 3)에는 河弘度·李城과 함께 남명의『學記』를 교정하여 이듬해인 1612년 덕천서원에서 이를 간행하였다.『學記』는 남명의 교육사상이 집약된 편저라는 점에서『학기』의 간행은 남명사상의 확산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하겠다. 그리고 1613년(광해군 5)에는『南冥集』의 교정작업에 참여하였고,
註5)
1614년에는 德川書院 院長이 되어 院務를 주관하는 가운데 1615년에는 조정에 최영경의 덕천서원 배향을 건의하여 재가를 얻는 등 종횡무진으로 활동하였다.
하증이 참여한 남명 현양사업의 극치는 역시 1617년(광해군 9)에 추진된 남명의 文廟從祀疏였다. 당시 사림들은 고령에 소청을 차리고 소사를 진행하였는데, 하증은 〈擇疏〉라는 막중한 임무를 지니고 참여하였다. 이 때 그는 소사를 논의하기 위해 성주의 정구를 방문하였으며 두 사람 사이의 사제관계도 사실상 여기서 시작되었다. 당시 소두는 하증의 장질 河仁尙이 추대되었으며,
註6)
소본은 하증에 의해 한강문인 李舒가 지은 것이 채택되었는데, 실제로는 鄭逑가 지은 것이었다.
하증이 정구를 방문한 목적은 남명의 종사소를 논의하는데 있었지만 부차적인 목적이 하나 더 있었다. 바로『拙辨』에 대한 대응문제였다.『拙辨』은 淫婦事件으로 인해 남명과 의절한 李禎의 손자 李鯤變이 자신의 조부를 변호하기 위해 지은 일종의 변론서였다. 따라서『졸변』은 남명을 비방하는 내용이 골자를 이루기 마련이었고, 이를 확인한 남명학파에서는 대응책의 마련에 부심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안이 매우 중대하여 신중하게 대응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정구에게 이를 논의한 것이다. 당시 정구는 이미『拙辨』을 일독한 상태였고, 하증이 이 문제를 거론하자 매우 불편한 기색을 드러낼 정도로 남명학파로서는 초미의 관심사였다.
註7)
정구와 하증 사이에『졸변』에 대한 대응책이 어떤 형태로 강구되었는지는 자세하지 않으나 이로부터 얼마지 않아 남명의 손자 曺浚明이 이곤변을 재반박한 책자를 출간하였으니,『反辯』
註8)
이 바로 그것이다.
이후에도 하증은 하홍도와 함께 덕천서원에서 강회를 열어 후진을 교육하고『二程全書』를 교정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하였으며, 1622(광해군 14)에는 성여신·하변과 함께『晉陽誌』를 편찬하여 진주의 문헌을 크게 정비하였다.
이상에서 살펴본 대로 하증은 임진왜란 이후 약 25년 동안 서원중건,『學記』·『南冥集』·『晉陽誌』등 남명 또는 진주관련 문헌의 출간, 남명종사소의 추진 등 남명의 현양사업을 주도하는 과정에서 자신은 물론 단목의 진양하씨 일문의 남명학파의 주요 가문으로 성장·발전하는데 획기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는 河魏寶·河晉寶→河恒으로 이어지는 남명과의 학연이 하증에 이르러 현격하게 확충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바탕 위에서 하증은 자신의 학행과 사림에서의 공로가 인정되어 1702년(숙종 28)에는 李俊民·韓夢參·姜應台·成汝信과 함께 진주의 臨川書院에 배향되었고, 이른바 「臨川五賢」의 한 사람으로 추앙되었다. 본서에는 〈臨川書院遺錄〉, 〈臨川享祀儀〉, 〈臨川書院節目〉 등 임천서원 관련 문헌을 최대한 수록하고자 하였다. 이는 비록 서원 문서이기는 하지만 현재 창주후손가에 소장되어 있으며, 하증과 임천서원을 이해하는데 필수적인 자료이기 때문이다.
단목의 진양하씨들은 하순경·하기룡에서 하증대에 이르는 7대 동안 진주의 명망 사족으로서의 기반을 탄탄하게 다져왔으며, 비록 소수이기는 하지만 문과 합격자도 여러명 배출되었다. 그리고 관직은 아니지만 사마시 또한 이들의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7대에 한정한다면 문과 3명[淳敬·起龍·晉寶]에 생진 5명[魏寶·國寶·恪·登·惺]이 배출되었으니 작은 수치라 할 수 없다.
사회적 기반의 신장은 혼맥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咸從魚氏·晉陽姜氏·全義李氏·泗川李氏·晉州鄭氏·文化柳氏·坡平尹氏·草溪鄭氏·玄風郭氏·瑞山鄭氏 등 진주일대의 명가들과 두루 통혼이 이루어졌다. 이 중에서도 함종어씨[魚得江系], 진주정씨[鄭承勳系], 파평윤씨[尹茂系], 서산정씨[鄭仁弘系], 문화유씨[柳宗智계]와의 통혼은 진양하씨의 사회·학문적 지위와 관련하여 시사하는 점이 많다.
고성 출신인 어득강(1470-1550)은 하증의 외증조부로서 16세기 중반 경상우도 지역을 대표할만한 문인이요 관료였다. 단목의 진양하씨들은 모두 그의 외손이었는데, 1617년 하증이 그의 유문을 수습하여『灌圃遺稿』(2卷1冊)을 간행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였다. 정승훈·윤무·정인홍·유종지는 남명학파의 주요 인물들이라는 점에서 진양하씨의 학맥을 짐작케 한다.
앞서 언급한대로 하위보·하진보·하항에 의해 남명과의 학연이 형성되고 하증 형제가 남명을 사숙하고 정구를 사사하는 과정에서 曺植(南冥)→鄭逑(寒岡)로 이어지는 학통을 계승하게 되었다. 그러나 단목의 진양하씨, 특히 창주공파의 학통과 관련하여 주목할 점은 정인홍과의 관계성이다. 지금 전하는『滄洲集』·『滄洲遺事』등의 문헌에는 하증과 정인홍과의 관계를 말해주는 기록은 전혀 없고, 오로지 조식과 정구와의 관계만 강조되어 있다. 이는 하증 당대의 실상이기보다는 후대적 인식의 반영이라 하겠다.
여러 문헌이나 당시의 정황을 고려할 때 하증은 정인홍의 문인으로 파악된다.
註9)
남명의 재전제자들은 크게 吳健系列, 崔永慶·河沆系列, 鄭仁弘系列, 金宇顒系列, 鄭逑系列로 구분되는데, 정인홍과 정구계열이 가장 번성하였다. 따라서 인조반정 이전까지는 진주지역 상당수의 인사들이 정인홍의 문하를 출입한 것으로 이해되는데, 현재 확인 가능한 문인만도 약 90명에 이르고 있다.
註10)
단목의 진양하씨로서 정인홍의 문인으로 확인되는 인물은 하증·하성 등이지만 하증의 여러 형제들도 정인홍의 문하를 출입했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사실 진양하씨와 서산정씨는 혼맥으로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는데, 정인홍의 아들 鄭沇은 하증의 숙부 진보의 사위였으며 생가의 친아우인 하성과는 자매간이었다. 이런 정황을 고려한다면 단목 진양하씨는 曺植→鄭仁弘으로 이어지는 학통을 계승하였으나 廢母論·仁祖反正 등 일련의 정치적 격변의 와중에서 정인홍보다는 정구와의 관계성을 부각시킨 것으로 생각된다. 이상의 서술을 바탕으로 滄洲家門의 학통을 도식화하면【圖 3】과 같다.
【圖 3】〈滄洲의 學統圖〉
바로 이러한 바탕 위에서 창주계열을 위시한 단목의 진양하씨들은 덕천서원을 출입함은 물론 원임직을 수행하며 덕천서원의 운영에 적극 참여하였다. 德川書院「院生案」(『古文書集成』25)에 따르면, 창주는 물론 그의 상당수의 직계·방계 자손들이 원생안에 입록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단목의 진양하씨로서 원생안에 입록된 인물을 가계도의 형태로 재구성하면【圖 4】와 같다. 그리고 이해를 돕는 차원에서 진주의 진양하씨로서 단목하씨와 대등한 지위를 가지고 덕천서원 운영에 참여했던 覺齋·松亭系列, 謙齋·台溪·寧無成系列도 함께 도식화 하였다.
【圖 4】〈德川書院 院生案 入錄者 -覺齋·松亭系列, 魏寶·國寶系列〉
【圖 5】〈德川書院 院生案 入錄者 -謙齋·台溪·寧無成系列〉
단목의 진양하씨 중 후사가 없었던 河忱·河恪·河惕을 제외한 하위보의 자손은 대부분 원생록에 입록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창주계열은 하증에서 達道(子)·洺(孫)·潤宇(曾孫)에 이르는 4代가 入錄되었는데, 여기에는 하증의 사회·학문적 배경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覺齋·松亭계열이나 謙齋·台溪·寧無成系列에서도 상당수가 입록된 것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이들 3계열이 조선 후기 진주를 대표하는 진양하씨 가계였음을 방증하는 것이기도 한다. 후술하겠지만 각재·송정계열이나 겸재·태계·영무성계열은 정치적으로 남인을 표방했고, 창주계열은 노론을 표방한 만큼 후기로 갈수록 양자 사이에는 갈등과 경쟁의식이 심화되었고,『南冥集』의 削破와 관련해서는 커다란 분란이 야기되기도 하였다. 본서에 수록된 〈乙巳被誣遺蹟〉은『南冥集』삭파에 따른 갈등과 반목의 전말이 수록되어 있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
창주에 의해 다져진 진양하씨의 사회·학문적 지위는 1622년 창주의 사후에도 여전히 지속되었다. 창주는 아들이 없어 숙부 진보를 계후한 생가 아우 하성의 아들 하달도를 양자로 들였는데, 이 때 작성된 禮曺 立案이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진양하씨 창주공파는 하증의 손자 하명대에 이르러 커다란 변화를 수반하게 되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정치적 행보의 변화로서『南冥集』의 삭파문제가 그 계기로 작용하였다.
17세기 초중반까지 남명의 문인 또는 재전제자들이 대부분 사망한 상태에서 17세기 중반 남명학파의 대표격으로 부상한 인물은 정인홍의 문인 정온과 남명문인 이광우의 외손이며 하수일의 문인이던 河弘度였다. 정온은 환력과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의 절의로 명성이 높았지만 후학 양성에는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았다.
여기에 비해 하홍도는 일생 향리에 은거하며 학문과 저술 그리고 후학의 양성에 전념한 전형적인 처사형 선비였다. 하홍도는 조선 초기 정승을 지낸 河演의 아우 河潔의 8세손으로 남명문인이던 외조 李光友을 통해 남명의 학풍을 체험하는 가운데 역시 남명문인이던 하수일과 하항의 문하에서 수업하여 학문을 보다 확충하였다. 이후 그는 남명의 사숙 제자를 자처하며 인조반정 이후에는 분열되어 가던 남명학파의 결집을 도모하며 구심점을 이룬 인물이었다.
註11)
남명의 연원록인 山海師友淵源錄의 편찬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여 跋文을
註12)
쓴 것도 남명학파를 결집, 유지하려는 노력 때문이었다. 그는 일생 향리에 은거하며 학문활동에 주력하면서도 경향의 명사들과 폭넓게 교유하였다. 정구, 허목, 조경, 정경세, 정온, 남구만, 이당규, 윤선도, 정지호는 그와 교유했던 대표적인 인물들이었다.
註13)
그는 예학에 정통하였으며, 중년 이후로는 謙齋로 자호하여 처신의 척도로 삼았고 남명사상의 핵심인 경의를 매우 중시하였다. 이에 누차에 걸쳐 조정의 부름이 있었지만 나아가지 않고 일생 처사로 지내다 1666년에 사망하였다. 1675년(숙종 1)에는 허목의 주도로 덕천서원 배향이 거론되었으나
註14)
무산되었고, 1678년 宗川書院에 제향되었다.
그의 사우·문인록인「師友門徒錄」에는 모두 101명의 명단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 중 문인으로 확인되는 인물은 대략 40명 정도이다. 이처럼 그는 진주를 중심으로 상당수의 문인을 규합하여 이 시기 남명학파의 학문적 구심점으로 인식되는 한편 정치적으로는 진양하씨 각재·송정계열, 태계계열, 염무성계열, 고령박씨 朴絪系列, 청송심씨 沈日三系列, 현풍곽씨 郭世楗系列 등과 함께 진주지역 남인세력을 대표하게 되었다.
사실 하홍도는 하증과의 교유를 통해 창주가문과는 세의가 형성되어 있었다.「師友門徒錄」에도 하증은 師席에 올라 있으며, 이 연장 선상에서 하증의 손자 하명 역시 그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나아가 1666년 하홍도가 사망하자 만사·제문을 지어 제자로서의 도리를 다하였다.
그러나 현종연간인 1665년 경『南冥集』에 정인홍과 관계된 내용을 삭제하는 문제로 하홍도의 문인 河自渾·李集 등과 심한 마찰을
註15)
수반하는 과정에서 하홍도계열과는 결별하고 宋浚吉·松時烈의 문하에 입문하게 되었다. 이때 그는 從叔(生家) 河達漢과 함께 尤春門下에 입문하였는데, 당시의 정황은 〈謁懷川錄〉(『生員公實記』卷1)에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다.
이후 하명은 송시열·송준길은 물론 宋奎濂·李尙逸·宋奎禎·宋奎昌·李埰 등 기호 노론학파의 명사들과 교유하며 세의를 다졌다. 이 과정에서 그는 송시열에게『南冥集』의 釐整 문제를 상의하는 한편 종숙 하달한과 함께 송시열에게 남명의 神道碑銘을 청하여 이를 받아 오기까지 하였다. 하명의 이러한 행적은 후일 그의 자손들이 진주지역 노론세력의 구심점으로 자리하고 宋煥箕·崔益鉉·田愚 등 기호학파 명사들의 문하를 출입하게 되는 실질적인 계기가 되었다.
한편 여기서 한가지 주목할 사실은 창주파를 포함한 단목 진양하씨들의 당색문제일 것이다. 하명과 하달한이 尤春을 사사하여 노론으로 전향했다고 해서 단목의 하씨들이 모두 노론이 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창주파를 제외한 하우보의 자손들의 대분은 남인을 표방하고 있었다.
【圖 6】〈丹牧晉陽河氏의 黨色〉
물론 이는 개략적인 파악에 지나지 않으며, 창주파 외 다른 계파에서도 남인·노론이 병존했을 가능성이 크지만 종손계열에 한정할 경우 위와 같은 도식도 무방할 것으로 보인다. 즉 창주파에서 우암·동춘당을 사사할 때 이들은 겸재계열의 인사들과 교유했고, 창주파에서 송환기·전우·최익현 등과 사승관계를 맺고 있을 때 이들은 鄭宗魯·柳致明·李晩燾·郭鍾錫 등 퇴계계열의 남인들과 교유했던 것이다. 京鄕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경화사족의 경우에도 형제 또는 숙질간에 당색을 달리하는 예가 더러 있기 때문에 단목하씨의 경우도 그다지 파격적인 현상이라고는 할 수 없다.
【圖 7】〈丹牧 晉陽河氏의 德川書院院任 修行現況〉
창주공파는 노론으로 전향하는 과정에서 겸재를 중심으로 하는 남명학통과는 괴리감을 수반하게 되었고, 이런 현상은 덕천서원 원임직의 수행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창주의 행적과 창주 후손들의 사회·학문적 지위를 고려할 때 창주파가 덕천서원 운영의 핵심으로 부각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덕천서원은 인조반정 이후에는 남인의 주도하에 운영되었기 때문에
註16)
노론으로 전향한 창주파가 운영에 참가하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였다. 창주 이후 이 가계에서 단 한 명의 원임도 배출되지 아니한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창주파의 이러한 변화상이 남명에 대한 존경심의 약화나 남명학파로부터의 이탈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하명의 노론전향은 창주파에 있어서나 진주지역 사족의 세력구도에 있어 커다란 변화임에 분명하였다. 사실상 진주지역은 인조반정 이후 정인홍이 몰락하여 북인의 존립기반이 약화되면서 정구를 매개로 退溪學派(정파상으로는 南人) 쪽으로 연원을 돌리는 계열이 속출하였고, 게중에는 서인(노론)과 연대를 모색하는 계열도 생겨나게 되었다. 창주파는 후자의 경우에 속하지만『남명집』의 삭파여부가 그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색다른 면을 발견할 수 있다.
한편 창주파는 17세기 중엽 커다란 변화를 겪으면서도 경제적으로는 비교적 안정된 상황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와 관련하여 본서에는 모두 7건의 分財記가 수록되어 있는데, 시기적으로는 1660년에서 1757년에 이르는 약 100년간이며, 대수로는 河洺에서 河鎭兌에 이르는 5대이다. 이 분재기를 살펴보면 창주파는 비록 방대한 규모는 아니라 할지라도 재지사족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을 정도의 토지와 노비를 소유하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한편 창주파는 河洺의 손자 河應運 대에 이르러 새로운 기가의 조짐을 보이게 되었다. 물론 河應運은 벼슬하지 않은 처사였지만 호학의 선비로서 상당한 분량의 서책을 마련하여 자손들이 학문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해 주었다. 현재 창주후손가에 소장되어 있는 대부분의 고전적[文集·經史類]에는
〈習靜齋〉註17)
라는 그의 수장인이 찍혀 있어 이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하응운 자신은 물론 후일 그의 자손들이 대대로 문집을 펴낼 정도의 학식을 유지할 수 있었던 배경이 되었다. 그리고 “家禮에 따라 奉先하고, 小學에 준하여 齊家하라”는 요지의 유훈을
註18)
통해 자손들을 경계하고 집안의 법도를 세우는데 노력하였다. 1708년 그가 작성한 〈陰陽〉(本書 置簿記錄類 No 1)이라는 제목의 치부도록에는 당시 그가 소유하고 있었던 奴婢·田畓·書冊의 현황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어 참고가 된다.
【圖 8】〈晉陽河氏 家系圖Ⅲ〉
그리고 그는 정치적으로는 노론의 입장을 견지하여 1721년 진주지역 유림들이 송시열·송준길의 문묘종사소를 추진하자 두 아들 載岳[일명 中砥·必濟]·必東을 보내 참여하게 하였다.
註19)
이 상소는 정문부의 현손 鄭相虎·鄭相說·鄭相詹·鄭相吉 등의 주도하에 추진되었는데, 이들은 바로 진양하씨 창주파와 더불어 진주지역 노론세력을 유지하는 양대 축이었다.
註20)
이 중 鄭相吉은 하응운과는 남매간으로서 河載岳·必東 형제에게는 고모부가 되었다. 그리고 하응운은 2자 應東을 李縡(陶菴)의 문하에 보내 수학시키는 등 학문적으로 철저히 노론 학통을 고수하였다. 이 때 그는 응동에게 親書를 주며 학업을 권장하고 선비로서의 행신, 사우간 교제의 도리를 당부하였는데, 현재 그 원본이 남아 있으며 본서에도 이를 수록하였다.(本書 書簡通告類 NO6 〈素書〉참조)
한편 창주파는 하명이 노론으로 전행하는 과정에서 혼맥에 있어서도 상당한 변화가 수반되었다. 이는 당내혼을 지향하는 당시의 관행으로 본다면 당연한 귀결일 수 있다. 하달도대까지는 초계정씨 鄭蘊家門 등 후일의 남인가계와의 통혼이 이루어지다가 하명 이후로는 해주정씨 農圃家門, 안동권씨 霜嵒家門, 창녕성씨 浮査堂家門, 청주한씨 釣隱家門 등 노론가계와의 혼인이 단연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한편 창주파는 18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孝烈家門으로서의 명성을 겸하게 된다. 이 가계의 효열전통은 이미 임진왜란 당시에 수립되었는데, 창주의 양모 晉陽姜氏가 바로 상징적인 인물이다. 진양하씨는 창주와 임천서원에 함께 제향된 姜應台(誠齋)의 손녀로서 왜적에 대항하여 절개를 지키다가 순절한 여인이었다. 이후 열행이 알려지면서 조정으로부터 旌閭가 내리고, 그 사적이『三綱行實圖』에 수록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단목리 입구에 세워진 2개의 정려 가운데 왼쪽에 있는 것이 바로 姜氏에게 내린 정려이다.
이후에도 창주파의 孝烈傳統은 면면히 계승되어, 창주의 6세손 河鎭兌에 의해 다시 한번 현창되었다. 하진태는 송시열의 후손이며 기호학계의 거장이던 송환기와 교유한 재야 선비로서 아들 익범을 송환기의 문하에 보내 수학시켰으며, 자신도 문집(『杏亭集』3卷1冊)을 남길 정도의 지식층이었다. 특히 그는 효성이 지극하여 무려 50년 동안 노모를 지극 정성으로 섬긴 출천의 효자였다. 본서에 수록된 〈奉先〉(置簿記錄類 No2) 말미의 〈病床日記〉(1791)에는 그의 효행이 자세하게 반영되어 있다. 이에 1800년 그가 사망하자 그의 孝行을 포창하기 위한 진정운동이 무려 1세기에 가까운 약 90년 동안 진행되어 1891년(고종 28) 마침내 정려가 내렸다.
註21)
본서에 수록된 上書(疏箚啓狀類 NO 2)의 대부분은 그의 효행을 진정하는 내용이다.
하진태 이후에도 창주파는 단목리를 거점으로 기호계의 석학들과 교유하며 진주지역 노론 명문으로서 꾸준하게 입지를 다져 나갔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주목할 사실은 河鎭兌 이후의 창주파를 대표한 가계는 하진태의 장자 聖範系列이기보다는 차자 益範계열이었으며, 그 중에서도 익범의 차자 慶縉系列의 활동이 가장 두드러졌다. 물론 창주파의 종통은 하성범의 직계 자손들에 의해 이어졌지만 문한을 바탕으로 하여 창주 이래의 家聲을 유지한 쪽은 하익범의 자손들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현재 창주파의 대부분의 고문서·고전적류 또한 이 계열에서 소장하고 있기 때문에 이 글에서도 益範-慶縉系列을 중심으로 서술하고자 한다.
하진태의 차자 하익범은 宋煥箕의 문인이었는데, 이는 하명 이래 기호학통을 계승해 온 가문의 학문적 전통을 반영하는 것인 동시에 창주파가 노론세력으로서 굳건하게 뿌리를 내렸음을 의미한다. 하익범과 송환기의 사제관계는 본서에 수록된 〈士農窩手墨(潭行日記)〉(置簿記錄類 No 16)과 〈先契遺墨〉(遺墨書畵類 NO 2)에 잘 드러나 있다.
【圖 9】〈晉陽河氏 家系圖Ⅳ〉
익범-경진계열에서는 경진의 아들 복원에서 啓龍·祐植·恂鳳에 이르는 4대가 문한을 바탕으로 사실상 19세기 창주파의 문장격으로 활동하였다.
註22)
하계룡은 崔益鉉(勉菴)·鄭載奎(老栢軒)·尹用求(海觀) 등 경향의 명사들과 교유하는 한편 창주의 재각인 永慕齋 건립과『滄洲集』의 간행을 주관하는
註23)
등 위선사업에도 크게 노력하였다. 이런 면모는 아들 하우식에게 그대로 이어졌다.
하우식은 宋秉璿·崔益鉉·田愚 등 당시 기호학계의 거장들과 사우관계를 형성하였는데, 특히 전우(艮齋)와의 관계가 더욱 돈독하였다. 그리고 宋炳華·宋秉虁·宋敎淳 등 兩宋 후손들과도 활발하게 교유하며 河洺 이래의 世誼를 유지하였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宋子大全』·『同春堂集』·『勉菴集』·『艮齋集』의 간행에도 적극 참여하며 1900연대 초반 진주지역 노론계의 대표적인 학자로 부각되었다. 그리고 그는 奇正鎭의 문인으로 경상우도 노론학계를 주도하던 鄭載圭는 물론 權載奎(松山)·權昌鉉(心齋)·韓愉(愚山)·鄭衡圭(蒼樹)·權龍鉉(秋淵) 등 老栢軒·艮齋學統의 학자들과 함께 진주일대의 노론학풍을 크게 진작시켰다. 이 중 권재규·한유와는 통혼까지 이루어져 학연과 혼맥의 이중구조를 보여주었다.
그는 당시의 석학답게 성리학 전반에 조예가 깊었으며, 특히 예학에 정통하여 滄洲家門의 祭禮規式을 도식화 한 〈祭禮圖〉와 〈士禮隨錄〉을 저술하기도 하였다.(본서 詩文類 NO 9·10)
한편 하우식은 창주에 대한 위선사업과 창주파의 문헌을 정비하는데에도 커다란 역할을 담당하였다. 우선 그는 河益範(高祖)에서 河啓龍(考)에 이르는 4대의 행장을 닦아 선대의 행적을 정리하는 한편「滄洲年譜」(滄洲),『生員公實記』(河洺),『士農窩集』(河益範),『晉陽河氏族譜』 등 一門의 文獻을 대대적으로 편집·간행하였다.
하우식의 행적과 관련하여 특기할 점은 임천서원의 중건이라 할 것이다. 앞서 언급한대로 임천서원은 소위 臨川五賢[李俊民·韓夢參·姜應台·河燈·成汝信]을 제향하는 서원으로 1702년(숙종 28)에 창건되었다. 비록 사액을 받지는 못했지만 약 200년 동안 진주지역의 대표적인 院宇의 하나로 존속하다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정비령에 의해 훼철되었다. 이후 임천서원은 약 50년 동안 폐허화 되었고, 院址마저 李敎倫·李時若 등에 의해 占奪되는 상황을 맞게 되었다. 이에 하우식은 河淸植·河南植·河萬澤 등 창주의 자손은 물론 임천오현의 한사람인 成汝信·韓夢參의 자손들을 규합하여 원지를 추환하고 임천서당을 건립하게 되었다.
註24)
현존하는 임천서원은 바로 이 때 건립된 것이며, 이런 배경 하에서 그의 자손가에 〈臨川書院遺錄〉, 〈臨川享祀儀〉, 〈臨川書院節目〉 등 임천서원 관련 문서가 소장된 것으로 보인다.
하우식은 연일정씨 鄭喆基의 따님을 맞이하여 슬하에 4남 4녀를 두었다. 長子 河恂鳳(海醒)은 부조 이래의 家學을 계승하여 학행으로 명성이 높았으며, 필법에도 조예가 깊었다. 현전하는『丹坡遺稿』와『澹山集』은 그가 간행한 것이며, 白雲精舍[田艮齋·韓愚山祭享]를 중건하여 家學淵源을 천양하기도 하였다. 그는 비록 20세기에 활동하였고 학문의 토대도 한학에 있었지만 時事問題와 관련하여 예리한 견해를 제시할 정도로 신학과 현실문제에도 관심이 많았다. 이 점에서 그는 구학과 신학을 겸비한 인물이라 할 수 있었다.
그의 교유관계는 매우 광범위하여 閔致鴻·權昌鉉·權龍鉉 등 儒林界의 인사는 물론 申翼熙(海恭)·金性洙(仁村)·張澤相(滄浪)·張勉 등 정계의 인사들과도 두루 교유하였다. 현재 그의 집안에는 이들과 왕래한 상당수의 간찰류가 소장되어 있는데, 본서에서는 張勉의 간찰 등 그 대표적인 몇 건만을 수록하였다.
한편 하우식의 3자 하순보는 親病에 임하여 斷指할 정도로 효성이 지극하였는데, 현재 그의 효행을 담은 행적비가 단목리 입구에 새워져 있다. 이러한 하순보의 효행은 晉陽姜氏(滄洲母)⇒河鎭兌(杏亭)로 이어지는 창주가문 효열전통의 연장 선상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하순봉은 河東鄭氏(鄭淳兆女)와의 사이에서 3남 3녀를 두었는데, 위선의식을 바탕으로 단목리의 世居地를 새롭게 정비하여 창주파 일문이 보다 굳건하게 돈목하는데 기여한 효준(晶巖)은 그의 장자이고, 산실의 위기에 처한 滄洲家의 문헌을 보존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한 河孝洛(建窩)은 바로 그의 3자이며,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장서각국학팀에 모든 자료를 제공해 준 河孝常은 그의 차자이다.
【圖 10】〈晉陽河氏家系圖Ⅴ〉
본장에서는 본서에 수록하는 고문서 중 주요 자료만을 대상으로 하여 그 내용과 가치를 간단하게 살펴보기로 한다. 수록 문서 중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것은 서간통고류와 치부기록류이며, 소장 자료의 특성상 낱장 고문서보다는 성책고문서를 주로 수록하게 되었다.
(1) 戶籍
호적은 모두 8건을 수록하였는데, 시기적으로는 1729(영조5)~1895(고종 32)까지이다. 이를 대수로 환산하면 창주의 현손 하응운에서 10세손 하계룡에 이르는 7대에 해당한다. 문서의 내용과 형태상 戶口單子가 주종을 이루고 있으며, 광무 호적이 1건이다. 8건 모두 후손에 의해 배접된 상태이며, 본서에서는 이를 그대로 영인 수록하였다.
호적에 따르면, 창주파의 거주지는 변동사항이 없으며, 沙竹里는 단목리의 행정구역상의 명칭이다.
(2) 上書
상서는 모두 31건을 수록하였는데, 하진태의 효행을 포장할 것을 진정하는 내용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나머지 2건은 書院毁撤令 이후 臨川書院의 수호와 관련된 내용이다.
하진태는 창주의 6세손으로 효행이 특출하였으며, 1800년 그가 사망하자마자 사림들이 그에 대한 포장운동을 전개한 것이다. 이런 노력은 향후 90년 동안 전개되어 1891년(고종 28)에야 정려가 내리고 童蒙敎官에 추증되었다. 상서는 진주목사와 순상에게 진정한 것이 각각 절반씩 차지하고 있다. 본서에 수록된 상서는 1875년(고종 12)에 진주목사에게 진정한 것이 시기적으로 맨 마지막에 해당하는데, 1891년 정려가 내리기까지 약 15년 동안의 상서는 현재로서는 확인할 길이 없다. 원래 이 기간 동안에는 진정한 것이 없었는지 아니면 문서가 분실되었는지 여부를 알 수 없다.
(3) 所志
소지는 모두 26건이 수록되었는데, 진양하씨 선영의 山訟에 따른 것이 대부분이다. 訴訟을 제기한 河啓龍은 창주의 10세손이다.
(4) 稟目
품목은 임천서원 수호와 관련된 내용이 1건이며, 나머지 4건은 진양하씨의 선영인 梧坊洞 산송관련 내용인데 소지와 상호 대비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다.
(1) 傳令
모두 산송과 관계된 傳令이나 2건은 滄洲墳墓와 관계된 것이며, 1건은 오방동 산송관련 문건이다. 참고로 滄洲의 분묘는 大谷面 車峴에 소재하였다.
(2) 書目
하진태의 효행을 천양하기 위해 1791년(정조 15) 沙竹執綱이 진주목사에게 올린 것인데, 하진태 생전에 작성된 문서라는 점에서 그의 효행사실과 관련하여 의미가 크다. 내용상 上書의 관련문기라 할 수 있다.
(3) 手記
역시 河鎭兌의 효행을 천양하기 위해 1791년(정조 15) 丹洞洞長이 沙竹執綱에게 올린 것인데, 書目과 관련문기를 이루고 있다.
(4) 望記
모두 6건 중에서 4건은 河祐植에게 발급된 것이며, 2건은 그의 아들 河恂鳳에게 발급된 것이다. 시기적으로 모두 1900연대 이후의 문서이지만『沙溪愼獨齋全書』·『宋子大全』·『艮齋集』등 노론 명유들의 문집간행과 관련된 사안이라는 점에서 滄洲派와 기호 노론학파와의 학연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1) 立案
1622년(光海君 14) 하증이 아들이 없어 生家 兄 河惺의 3자 河達久를 양자로 들일 때 작성된 禮曺立案이다. 본서에 수록된 고문서 중에서 가장 오래된 문서이다.
河惺과 하증은 친형제 사이지만 각기 河晉寶와 河國寶를 계후했기 때문에 계통상으로는 4촌간이다. 따라서 하증과 하달구는 혈통상으로는 숙질간이지만 계통상으로는 종숙질간이었다.
본 입안에서 한가지 의문스런 점은 하달구와 하달도의 상관성이다. 입안에는 하증의 양자가 하달구로 명시되어 있으나 진양하씨 족보를 확인한 결과 河惺의 아들 중에는 하달구라는 인물은 없고, 3자는 河達道였다.『滄洲派譜』에도 河達道條에 〈系子 達道 生父惺〉으로 표기되어 있을 뿐 改名事實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이 없었다.
(2) 手標
산송관련 수표로서 피고 陳在洪이 移葬을 확약하는 내용이다. 수급자인 〈丹洞墨山宅〉은 원고 河啓龍의 宅號이다.
(3) 完文
모두 4건이 수록되어 있다. 1건은 1814년(純祖 14) 진주목사 徐曾輔가 발급한 흥학 완문이다. 수급처가 명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내용상 臨川書院에 발급한 것으로 추정된다. 나머지 3건은 滄洲墳墓[大谷面 車峴에 대한 禁松을 인정하는 내용이다.
(1) 分財記
분재기는 모두 7건이 수록되어 있는데, 아쉽게도 창주 당대의 문서는 현전하지 않는다. 7건은 시기적으로 1660년(현종 1)에서 1757년(영조 33)에 이르는 약 1세기이며, 대수로는 창주의 손자 하명에서 6세손 하진태까지이다. 17세기 중엽에서 18세기 중엽까지의 창주가의 경제적 상황을 알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참고로 본 분재기 또한 후손에 의해 현재 배접된 상태에 있다.
① 1660년(현종 1) 河洺이 생원시에 합격하자 처부 李琢이 이를 가상하게 여겨 노비 1구와 田 15斗落을 별급하는 문기이다. 이탁은 全義李氏 출신으로 임진왜란에 창의한 李宗文의 손자이며, 문과에 합격하여 현감을 지낸 李之英의 아들이다. 이탁은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는데, 하명이 바로 그의 사위이다. 참고로 이가계의 가계도를 제시하면 아래와 같다.
【圖 11】〈全義李氏家系圖〉
② 河潤宇 妻 海平尹氏男妹 和會文記이다. 즉 하윤우의 처부 尹世揆가 사망하자 그의 자녀들이 유산을 분집하며 작성한 문기인데, 문서의 모두가 박락되어 정확한 기년은 알 수 없으나 대략 1600연대 후반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윤세규는 영의정을 지낸 尹斗壽의 증손이며, 역시 영의정을 지낸 尹昉의 손자로서 자신은 이조참의에 추증되었다. 그는 슬하에 2남 6녀를 두었는데, 하윤우는 바로 그의 차녀서이다. 〈海平尹氏族譜〉와 分財記를 통해 가계도를 구성하면 아래와 같다. 장녀서인 李生員과 6녀서인 韓生員의 인적사항은 미상이다.
【圖 12】〈海平尹氏家系圖-河潤宇妻家-〉
③ 1705년(숙종 35) 하윤우가 자녀 5남매에게 재산을 분급할 때 작성된 衿給文記이다. 모든 분재기 중에서 재산상태가 가장 방대하다. 다만 분재기와 족보 상호간에 인명이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있는데, 〈진양하씨족보〉를 검토한 결과 應龍→應運, 應鯉→應一, 應鱣→應休로 개명한 것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말녀서 姜應時는 족보에 姜公一로 기록되어 있는데, 改名與否를 알 수 없다.
【圖 13】〈河潤宇子女圖〉
참고로 證人 河潤邦·河潤華은 河潤宇의 6寸 아우로 기록되어 있는데, 하윤우는 조부 하달도가 외아들이었기 때문에 6寸兄弟가 있을 수 없다. 다만 생가쪽으로는 6촌이 있는데, 하윤방·하윤화는 하달도의 생가 형 하달원의 손자들이다. 그리고 筆執 河潤冀는 하윤화와 친형제 사이였으나 하달도의 차자 하홍의 양자가 됨으로서 하윤우와는 4촌간이 되었다.
④ 1732년(英祖 8) 河應運이 長子 河必濟에게 봉사위를 전계하는 문기이다. 河必濟는 河載岳으로 初名으로 족보에는 河載岳으로 기록되어 있다. 전계의 대상은 五代祖父母(河國寶夫妻), 高祖父母(하증夫妻), 曾祖父母(河達道夫妻), 祖父母(河洺夫妻), 父母(河潤宇夫妻)의 奉祀位와 新祀位이다. 신사위는 河應運 자신의 夫妻를 위해 마련된 位田으로 파악된다.
⑤ 1736년(영조 12) 河應運이 河載岳에게 남긴 유언으로 원제는 〈長子載岳處遺言〉이다. 본 유서가 작성된 날짜는 1736년 1월 23일이며, 하응운은 이로부터 5일이 지난 1월 28일에 사망하였다.
⑥ 1757년(영조 33)에 작성된 河鑽男妹和會文記이다. 즉 하재악의 사망 후 그의 자녀들이 재산을 분집하는 내용이다. 여기서도 분재기와 족보상의 인명이 일치하지 않고 있다.
【圖 14】〈河載岳子女圖-分財記基準-〉
하재악의 1녀서는 백동욱인데, 분재기에는 그의 아들 백학안에게 대급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족보에는 백동욱의 아들이 白箕鎭으로 기록되어 있어 차이를 보이며, 3녀서 韓墉은 韓堡, 5녀서 禹拓夏는 禹錫夏로 기록되어 있다. 河鑽의 경우는 河鎭兌로 개명한 것이 확인되므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참고로 하진태는 일명 河鎭璧으로도 불렸다) 분재기가 당대의 기록임을 고려한다면 이러한 차이점은 족보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오류로 보는 것이 합당할 것 같다. 관련 연구자는 이 점에 유의하기 바란다.
⑦ 1757년(영조 38)년 河鑽(河鎭兌)의 종형과 서숙이 하찬의 숙부가 관리하고 있던 조부(河應運)의 봉사위를 하찬에게 추환해 주는 내용이다. 종형은 河鍵·河鍊이며, 庶叔은 河崇浩이다. 족보상 하찬의 숙부는 河必東 한사람 뿐인데, 내용상 하필동을 지칭하는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河鍵·河鍊이 하필동의 아들로 추정되는데, 자신의 아버지를 두고 숙부로 호칭할 리 없기 때문이다. 현재로서는 이들의 인적사항을 더 이상 확인하기 어렵다.
(2) 明文
명문은 노비명문 1건과 토지명문 3건을 수록하였다.
(1) 通文類
통문은 개별 통문과 성책 통문으로 대별되는데, 전자는 德泉齋, 遯巖書院, 艮齋門人會 등 노론계 원우 또는 단체에서 河啓龍·河祐植 부자에게 전달된 것이 대부분이다. 참고로 덕천재는 田愚의 재실이고, 둔암서원은 김장생을 제향하는 서원으로 충청도 연산에 있다. 2건의 성책본 통문은『晉陽誌』편찬에 따른 시비 通文綴이다.
(2) 婚書
2건 중 1건은 河炳鶴 혼례시의 納幣文書이고, 1건은 河恂寶 혼례시의 納幣文書이다. 하병학은 하우식의 장자 河恂鳳의 初名[兒名]으로 추정된다. 河恂寶는 河祐植의 3자이다.
(3) 通知表
시기적으로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1950연대 통지표의 양식을 소개하는 차원에서 수록하였다. 하효락은 하순봉의 3자이며, 본서에 수록된 고문서를 수집·관리한 당사자이다.
(4) 簡札帖類
창주가에는 상당수의 간찰첩이 소장되어 있으나 지면의 제약으로 인해 모든 자료를 수록하지는 못하고 〈素書〉, 〈千里面對〉, 〈柬牘〉, 〈千里面目〉 등 4종의 간찰첩만 수록하였다. 18세기 중후반에서 1900연대 전반까지 왕래된 간찰들을 시기 또는 대수별로 구분하여 성책한 것인데, 대체로 河祐植·河恂鳳 부자에 의해 성책된 것들이다. 창주가의 대수로는 하응운에서 하순봉에 이르는 6대의 인사들과 왕래된 간찰들로서 조선 후기 창주가의 교유관계를 알려 주는 가장 일차적인 자료라 하겠다.
(1) 陰陽
1708년(숙종 34) 하응운이 작성한 치부도록으로 奴婢·田畓·書冊 상황이 매우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어 18세기 전반 창주가의 경제적 상황을 알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미침 이 시기의 분재기·호적 등이 남아 있으므로 이들 자료와 상호 대비하여 검토할 필요가 있다.
(2) 奉先
1788년(정조 12) 하진태가 작성한 창주가의 封祀位都錄이다. 이 역시 〈陰陽〉과 마찬가지로 창주가의 경제 상황을 파악하는데 유용하며, 말미의 〈病錄日記〉는 하진태의 차자 河益範이 작성한 것인데, 현존하는 몇 안되는 看病日記 또는 侍病日記의 하나라는 점에서 자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
(3) 稧案類
〈學稧文簿〉는 一門의 자제들을 교육하기 위해 설립한 창주가문의 학계관련 문서로서 일제시대 단목 진양하씨들의 교육 상황과 여건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二以稧案〉은 진주지역 사림들이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 결성한 계의 문안으로 모두 2건이 수록되어 있다. 〈二以〉라는 명칭은『論語』의 “以文會友 以友輔仁”이라는 문구에서 취한 것이다. 1941년에 작성된 權淳長의 서문이 있으며, 좌목에는 權淳長 이하 계원들의 명단이 열서되어 있다. 二以稧는 현재까지도 이들의 자손들에 의해 유지·계승되고 있다.
(4) 參祀錄
창주의 齋閣 永慕齋의 參祀錄이다. 참사한 자손들의 명단과 당해 유사들의 명단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5) 婚需物目
1918년 河恂鳳(=河東鄭氏)의 혼례시에 작성된 물목과 1930년 河恂寶(=安東權氏) 혼례시에 작성된 물목인데, 후자는 하순봉의 부인 河東鄭氏의 글씨이다.
(6) 嶺湖列邑所在冊板目錄
嶺南과 湖南의 열읍에 소재하는 책판의 목록으로 작성 시기는 18세기 후반 경으로 추정된다. 말미에 수결이 있는 것으로 보아 관문서임을 알 수 있으며, 이 문서가 어떤 경로로 창주가에 소장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嶺南은 大邱·慶州·安東·星州·尙州·晉州·宜寧·善山·咸昌·居昌·安陰·山陰·固城·巨濟·金海·玄風·慶山·河陽·榮川·淸道·興海·仁同·禮安·義城·靑松· 奉化·順興 등 27개 군현이 수록되어 있다. 湖南은 全州·淳昌·羅州·光州·綾州·南原·高山·泰仁·潭陽·寶城·南平·礪山·扶安·長興·和順·靈光·昌平·興陽·玉果·務安·右水營·龍潭·錦山·靈巖·海南·順川·左水營·統營 등 28개 군현(水營·統營 포함)이 수록되어 있다.
(7) 藏書目錄
河啓龍·河祐植 부자대에 파악된 장서의 목록이다. 창주가에는 하응운에 의해 서책이 대대적으로 완비된 이래 대를 이어 그 수가 증가하였는데, 하응운의 田畓·奴婢·書冊 도록인 〈陰陽〉의 서책수와 대비해 보면 약 200년 동안의 증감을 알 수 있다.
(8) 鄕案
모두 2건이 수록되어 있는데, 원본은 아니고 초본이다. 香案(1)에는 1617-1712까지의 11회분이 수록되어 있고, 鄕案(2)에는 1617-1712년까지 6회분의 향안이 수록되어 있어 鄕案(1)이 더 완본임을 알 수 있다.
【鄕案(1) 수록분】
* 萬曆四十五年丁巳案: 1617(光海君 9)
* 崇禎十二年己卯案: 1639(仁祖 17)
* 戊子案: 1648(仁祖 26)
* 戊戌案: 1658(孝宗 9)
* 辛巳重修案: 1701(肅宗 27)
* 己未重修案: 1679(肅宗 5)
* 辛卯重修案: 1711(肅宗 37)
* 庚午重修案: 1690(肅宗 16)
* 壬辰重修案: 1712(肅宗 38)
* 丙辰重修案: 1676(肅宗 2)
* 己丑北面書齋案: 1649(仁祖 27)
【鄕案(2) 수록분】
* 萬曆四十五年丁巳案: 1617(光海君 9)
* 崇禎十二年己卯案: 1639(仁祖 17)
* 戊子十月案: 1648(仁祖 26)
* 戊戌十月案: 1658(孝宗 9)
* 己未案重修: 1679년(肅宗 5)
* 壬辰三月案: 1712년(肅宗 38)
(9) 臨川書院 關聯文書
임천서원 관련문서는 모두 3건인데, 〈臨川書院遺錄〉은 奉安文·常享文·沿革과 배향인물의 행적을 수록한 일종의 書院誌이며, 〈臨川享祀儀〉는 院享에 따른 제반 의절의 규범집으로서 省牲儀· 行禮·初獻禮·亞獻禮·終獻禮·飮福·受胙·春秋告享文·陳設圖·奉安文·謁祠時笏記 등이 수록되어 있어 진주지역 원우의 향사형태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그리고 〈臨川書院節目〉은 사원 운영을 위한 完文·節目·規式 등이 수록되어 있어 임천서원 연구에는 필수적인 자료라 할 수 있다. 수록된 내용을 대략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 完 文: 河復院 等(1868)
* 節目序: 成致德(1867)
* 官家·院長致膰規式
* 文書器物致付都錄
* 節目: 秋收, 享祀, 致齋日, 定齋日, 罷齋後分脯, 牟軍, 講堂守直, 院中作者, 養山에 관한 節目
* 敦請狀: 院長
* 享祀時會中節目: 河鎭國 等(1867)
* 己卯八月享祀時追節目: 河鎭達 等(1879)
* 丁亥八月日院中器物: 1867
* 丙申二月日追節目: 河銋 等 (1896)
10) 士農窩手墨[潭行日記]
河益範(1767-1813)이 性潭 宋煥箕를 방문할 당시의 일기로서 1799년에서 1800년에 걸쳐 작성된 것이다. 士農窩는 하익범의 아호이다. 이 일기는 하익범의 문집『士農窩집』에도 수록되어 있으나 본 문서가 그 원본이 된다.
(1) 墓文·行狀
수록된 고문서와의 관련성을 고려하여 河禹治·河魏寶·河國寶·河晉寶·하증·河達道·河鎭兌·河慶縉·河啓龍·河祐植 등의 行狀·墓表·家狀·墓碣·墓誌를 수록하였는데, 分財記, 各種 置簿記錄과 관련이 깊은 河潤宇·河應運·河益範의 묘문·행장은 고문서 형태로 남아 있는 것이 없어 수록하지 못하였다.
(2) 記文·序文·跋文
대부분 1800연대 후반 이후의 문서이며, 記文(1), 記文(6)은 탁본을 영인하여 수록한 것이다. 내용적으로는 창주가 소관의 재각·정사의 記文이나 文集·遺稿 등의 서발문이 주류를 차지한다.
(3) 輓詞祭文類
〈滄洲輓祭錄〉(NO 5)은 1624년 창주 喪葬禮時의 輓詞·祭文綴로서 후손에 의해 성책본으로 정리된 것이며, 〈輓誄〉(NO 6)는 河鎭兌·河聖範父子, 그리고 하성범의 배위 靑松沈氏의 喪葬禮時에 수급된 輓詞·祭文·誄文을 합철한 것이다. 시기적으로는 1800년·1809년·1814년의 문서가 합철된 셈인데, 이 또한 후손에 의해 일괄 정리된 것으로 보인다. 이외 낱장의 제문·만사는 河啓龍·河祐植·河恂鳳 3대와 관련된 문서가 주종을 이룬다.
(4) 禮書類
〈祭禮圖屛〉(NO 9)1931년 河祐植이 찬정한 창주가문의 제례규범으로 모두 10圖로 구성되어 있으며, 글씨는 그의 아우 河淸植이 썼다. 비록 1900연대에 제정된 것이기는 하지만 河祐植의 예학적 소양과 창주가의 제례 형태를 알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제례도의 원본은 병풍으로 제작되어 하우식의 장손 河孝俊을 거쳐 증손 河宅善이 소장·관리하고 있다. 수록된 내용은 아래와 같다.
【第1圖】〈家禮祠堂全圖〉
【第2圖】〈龕室及神主圖〉
【第3圖】〈祭具及謁告圖〉
【第4圖】〈參獻及敍立圖〉
【第5圖】〈四時正祭上圖〉
【第6圖】〈四時正祭中圖〉
【第7圖】〈四時正祭下圖〉
【第8圖】〈三虞卒哭祭圖〉
【第9圖】〈祔祥禫吉祭圖〉
【第10圖】〈忌祭及墓祭圖〉
〈士禮隨錄〉(NO 10) 역시 河祐植이 찬한 禮書인데, 1940년 경의 저술로 추정된다. 자신의 학통을 반영하듯 沙溪 金長生의 예설에 토대를 두고 있다.
〈先世遺墨〉(NO 1)은 滄洲(簡札), 河達道(戶籍草本), 河鑽(河鎭兌: 簡札), 河益範(簡札), 河載岳(制門), 河中柱(河必東: 制門)의 遺墨帖이다. 성첩자 하순봉이 그 직계의 유묵을 중심으로 작첩한 것인데, 방계는 하중주 한사람 뿐이다. 이 중에는 河潤宇 또는 河應運의 유묵으로 추정되는 詩文이 있으나 인명이 기록되지 않아 주인공을 파악하지 못하였다.
〈先契遺墨〉(NO 2)은 송환기·하진태·하익범의 유묵첩으로 간찰이 주종을 이룬다. 이들 3인의 유묵을 모아 작첩한 것은 송환기와 하진태·하익범 부자의 사우관계를 부각시키기 위해서라고 생각된다. 성첩자는 하종식이며, 말미에 1918년에 작성한 그의 발문이 있다.
〈筆帖〉(NO 3)은 宋近洙(1818-1903)·李趾秀(1779-1842)·鄭尙圭·權秉軾의 간찰 유묵첩이다. 1919년 河祐植이 성첩한 것이다. 표지에 立齋·重山齋·墨洞內舅鄭公·校洞權公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입재는 宋近洙, 중산재는 李趾秀(延安人), 묵동내구정공은 河啓龍의 장인 鄭尙圭(河東人), 교동권공은 權秉軾을 말한다.
〈師友往復帖〉(No 4)은 하우식이 사우들에게 보낸 簡札帖이며, 〈臼山心畫〉(No 5)은 田愚·崔益鉉·崔永祚·崔永卨·宋欽人·宋綺老·宋秉珣·尹用求의 필적으로 簡札, 慰狀, 記序跋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尹用求필적〉(NO 6)은 〈无忝軒〉과 〈永慕齋〉의 편액글씨인데, 〈无忝軒〉 글씨는 河孝常이 소장하고 있다. 〈李三晩筆跡〉(NO 7)은 〈光風霽月凈無氛埃〉라고 쓴 족자글씨와 2책의 초서첩이 수록되었는데, 후자는 이삼만의 초서 연구에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
〈愚山書帖〉(NO 8)은 韓希甯(1868-1911, 艮齋交遊)의 필적으로 내용은 朱子의 武夷棹歌를 次韻한 것이며, 〈金昌沃筆跡〉(No 9)은 1921년 담산정사를 방문한 김창옥이 河祐植에게 증정하기 위해 쓴 글씨로 전반부는 교본용의 楷書體 글씨이고, 후반부는 草書體 글씨이다. 〈虎嵒書帖〉(No 10)과 〈湖隱書帖〉(No 11)은 동일인의 필첩으로 생각되지만 書者의 인적 사항은 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