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승준 전문위원을 비롯한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의 고문서조사팀이 안동 법흥동 固城李氏家를 찾은 것은 1993년부터였다. 그 이후 안동지방의 고문서 조사가 있을 때마다 거의 매번 종택인 임청각을 들러보았으나 늘 대문이 잠긴 채 주인이 없었다. 유관 기관 혹은 인물을 통해 수소문해 보아도, 고문서의 행방은 물론이거니와 이씨가 인물들과 면담도 용이치 않았다. 따라서 가문의 수난 과정에서 대부분의 문서를 잃어버렸을 것으로 추정할 따름이었다. 그러나 안동지방에서의 위치를 고려한다면 고성이씨가 고문서를 조사대상에서 빼놓을 수 없었다.
그 이후 안승준은 3, 4년 동안 끈질기게 탐문조사를 계속하였는데, 1997년 여름 드디어 서울 노원구 중계동에 임청각 고문서가 존재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500년 고성이씨가의 삶의 자취가 세상에 공개되는 순간이었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는 이씨가 고문서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즉시 조사팀을 구성하였다. 안승준의 주도 하에, 문숙자 김문택 김학수 등 고문서실 연구원들이 조사 및 수집작업에 착수하였다.
서울 중계동 아파트에서 조사팀을 맞이해 준 분은 임청각 현 종손(이창수)의 삼촌 李恒曾 선생이었다.
그는 우리나라의 대표적 독립운동가였던 石洲 李相龍(1858-1932) 선생의 증손자이다. 그의 어머니는 역시 독립운동가 李炳華(1906-1952)의 아내이자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
라는 책을 구술하여 많은 사람에게 깊은 감동을 준 허은 여사였다. 아쉽게도 당시 허은 여사는 이미 돌아가시고 계시지 않았다.
위의 책에도 자세히 기술되어 있지만, 허여사 자신이 어떠한 남자들보다도 더 철저한 독립운동가였다. 허여사의 재증조부는 바로 旺山 許蔿(1855-1908) 선생이다. 고문서가 온전하게 유지된 것은 허여사의 역할이 지대하였다. 밖으로만 나돌거나 쫓기는 남자들을 대신해 문서를 보관 유지해 왔기 때문이다.
고성이씨가 고문서는 이씨가의 역정만큼이나 깊은 내력을 갖고 있다. 이씨가 인물들은 한말 일제시대이래 독립운동의 중심에 서 있었다. 그 중심 인물이 이석주 이상룡 선생이었다. 6.25를 전후해서는 좌우익의 갈등과 이에 따른 문중 인물들의 수난으로 인해 문서를 제대로 관리할 수 있는 입장이 되지 못하였다. 이같은 사정은 해방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흔히 독립운동가 자손들이 가난하고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해 이중 삼중의 피해를 본다고 하지만, 이씨가 인물들이 바로 이 경우에 해당하였다. 직계 인물 가운데 무려 아홉 분이나 독립유공자로 錄勳되었으나 그 후손들의 삶은 한결같이 가시밭길 그 자체였다. 문서를 대여해 준 이항증 선생 또한 고아원에서 유년기를 보냈음이 이를 여실히 반증해 준다.
이같은 가문의 역경 속에서도 고문서가 거의 온전한 상태로 남아있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웠다. 이씨가의 문장 이항증 선생이 고백했듯이, 그야말로 ‘하늘이 도운 결과’였다.
이항증 선생의 회고에 의하면, 이씨가의 고문서는 조선중기 이래로 임청각에 보존되어 오다가 19세기 이후 시대상의 변화에 따라 임청각과 山齋(월곡면 도곡동)를 두 번이나 옮겨 다니기도 했고, 한국전쟁 이후에는 줄곧 山齋에 보관해왔다고 한다. 1980년대에 들어와 안동댐이 건설되면서 수몰될 위기에 처하자 산재의 서고를 열어 보니, 습기와 좀 등의 원인으로 문서가 박락·마멸되어 도저히 그대로 방치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문집과 경서 등 고서류는 고려대학교에 기증 처리하였고, 간찰 등 그 나머지는 다시 임청각 서고에 보관하였다고 한다.
1990년대 이후 이항증 선생이 가사를 정리하면서, 고문서를 서울로 옮겨 와 정리하기 시작하였다. 1993년 이선생의 퇴직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고전적을 정리하기 시작했는데, 정신문화연구원 조사팀이 방문한 것이 바로 이때였다.
중계동 아파트에 있던 고성이씨 전적은 대부분 고문서였다. 대부분의 고서들은 1973년 이미 이범증 선생(고려대 사학과 출신)에 의해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에 〈石洲文庫〉로 기증된 상태였다. 조사팀은 모든 고문서를 본원으로 옮겨 정리·촬영하기 시작하였다.
1997년 조사·수집 이후 2000년까지 이항증 선생은 수십 번이나 본 연구원을 방문, 정리작업을 도와주는 한편, 그간 흩어져 있어 수집하지도 못한 서적이나 유물들도 직접 갖고 오셨다. 조선초기 李原(1368-1429)의 功臣錄券, 李宗岳(1726-1773)이 직접 사용하였던 거문고, 벼루 등 유물까지도 모두 갖고 오셨다. 공신녹권 등 중요 고문서는 보관이 염려되어 은행 금고에 보관해 왔다. 이처럼 후손들의 지극한 정성으로 조상들의 고문서가 현재까지 고스란히 전해오고 있다. 이 유물들은 모두 고문서와 함께 본 연구원에 寄託, 보관할 예정으로 있다.
조사팀은 그 이후에도 여러 번 안동 법흥동의 임청각 종가를 방문, 고문서의 원래 보관처에 대한 조사, 그리고 반구정, 귀래정 등 낙동강 주변의 이씨가의 각처 유적지를 조사·촬영해 왔다.
이씨 가문에는 오래된 고문서 뿐만 아니라 석주 이상룡 선생을 비롯한 李濬衡(1875-1942), 李炳華(1906-1952) 등 독립운동가의 簡札과 詩文 등이 다수 보존되어 있다. 고문서의 사료적 가치, 그리고 독립운동가 가문으로서의 위치를 고려하면 민족적 차원의 가치 부여가 있어야 될 것으로 판단되었다. 이에 본원에서는 이씨가 고문서를 조기에 출간하는 한편, 본 연구원의 한국역사정보화 사업에 고문이씨가 고문서를 포함시켜, 인터넷을 통해서도 이씨가의 고문서를 볼 수 있도록 했다. 이 모든 것이 이씨가 인물들이 국가에 끼친 공덕에 대한 ‘餘慶’이 아닌가 한다.
조상의 음덕으로 고문서가 유지되었다면, 이를 정리하고 보존 연구하는 데에는 안승준 전문위원 등 본원 국학진흥팀의 역할을 무시할 수 없었음을 밝혀두는 바이다.
특히 전 고문서를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 기탁, 보관하게 됨은 문서의 장래를 위해서나 정신문화 계승이라는 국가적 관점에 보더라도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 여겨진다.
고성이씨는 고려 문종 때 鐵嶺君에 봉해진 李璜을 시조로 하며, 그 중 안동파는 세조년간에 李增(1419~1480)이 안동에 入鄕한 이래 대대로 그 지역에 세거한 가문이다. 현재 이들의 세거지인 안동시 법흥동 소재 임청각은 중종대에 李洺이 지은 것이며, 고문서를 다량 간직하여 이 가문 및 지역의 역사를 생생하게 복원할 수 있는 자료가 되고 있다.
안동의 고성이씨 上系는 시조의 6세 瑨(1217~1286)으로부터 그 기록이 자세히 나타난다. 그는 承文學士를 지냈으나 고려 말 원 지배 하에서 隱居하면서 벼슬을 하지 않고 낙향하여 자칭 文山道人이라 칭했다.
아들인 尊庇(1233~1287)는 일찍이 아버지를 잃고 외삼촌 白文節로부터 글을 배워 문장과 隸書로 이름이 알려졌다. 그는 원종 때에 과거에 급제한 후 직한림원, 좌승지, 판밀직사사, 감찰대부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世子元賓으로 있다가 죽었다.
그 아들 瑀는 三重大匡判三司를 거쳤으며 철원군이었다.
李嵒(1297~1364)은 충선왕 때에 17세의 나이로 과거에 급제하였다. 문하시중을 지냈고, 호를 杏村이라 하였으며 시호가 文貞이었다. 특히 이암은 西北面都元帥로서 홍건적을 막는 데에 공을 세워 이 가문의 입지를 다진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홍건적을 평정한 후 扈從功臣 1등에 녹훈되고, 철성부원군을 봉하는 동시에 추성수의동덕찬화익조공신호를 받았다. 이암의 넷째 아들 李岡(1333~1368)은 공민왕조에 밀직부사를 거쳤으며, 추밀로서 졸하자 문경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1품 이상이 아니면 시호를 받을 수 없는 데도 왕으로부터 ‘文敬’이라는 칭호는 오직 이강이 족히 받을 만하다.’는 평을 받고 시호를 얻게 된 것이다.
이강의 아들로 여말선초의 문신이었던 李原(1368-1429) 은 정몽주의 문인으로 1382년(우왕 8) 진사가 되고, 1385년(우왕 11)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는 조선초 왕자의 난에 협력한 공로로 1401년(태종 1) 좌명공신 4등에 책록되었고, 세종대에 좌의정을 지내는 등 관직을 두루 섭렵하였다. 그러나 말년에 그는 노비를 불법으로 차지하였다는 혐의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공신녹권을 박탈당하고 여산에 안치되었다가 4년 만에 그곳에서 죽었다.
그는 시호가 襄憲, 號는 容軒이다. 이원의 아들 增은 현감을 지냈으며, 이조참판에 증직되었다. 靈山 현감직을 버리고 처음으로 안동에 거주하게 된 그는 권자겸 등 지역의 선비 12인과 함께 友鄕稧를 만들어 우의를 다지기도 하였다. 당시 이 가문은 권근 가문 등과 혼인관계를 맺고, 서거정 등과 교유하는 등 중앙의 훈척들과 관계를 맺고 있었다. 즉 서거정의 외조부 권근은 이강의 사위이며, 권람은 이원의 사위였다. 뿐만 아니라 서거정은 李岡・李原이 지은 시를 손자 李陸이 모아 펴낸 鐵成聯芳集의 序文을 썼고, 우향계를 축하하는 시를 남기기도 하였다.
이증이 안동에 입향하기까지의 고성이씨 선세의 가계를 도표로 제시하면 아래 〈圖 1〉과 같다.
〈圖 1〉 安東 입향 이전의 固城李氏世系
李增은 아들 洺을 낳았는데 이조참판에 증직되었다. 이명은 의흥현감의 벼슬을 버리고 형인 이굉과 함께 돌아와서 임청각을 지었으며, 聾巖 李賢輔(1467-1555)가 이를 기리는 시를 남기기도 하였다.
李洺은 아들만 6형제를 두었는데 그 들 중 장자 𦡱의 후손들은 草溪派로 분파하였다. 腠와 股는 無後하였고, 특히 股의 경우 후사가 없어 외손 徐渻이 봉사하였음이 확인되고 있다. 이는 당시 외손봉사의 관행을 입증해 주고 있는 셈이다.
6남 肱은 禮賓寺 別提를 사직하고 돌아와 伴鷗亭을 지었다. 당시 사람들은 四代가 고향으로 돌아오니 한 집안의 명예와 절조라고 여겼다.
당시 이 가문은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들어와 정착하면서 영남 지역의 유명가문과 통혼권을 형성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광산김씨 金緣 가문과 풍산유씨 柳雲龍 가문이다. 李浤의 아들 容은 자신이 김연의 딸과 혼인하였고, 謙菴 柳雲龍을 사위로 맞아들였다.
李容의 손자 李遲(1560~1631)는 고령신씨 申末舟의 후손인 護軍 申大澐의 딸을 아내로 맞아 들였으며, 임진왜란시의 軍功으로 공조참의를 제수받았고 동지중추부사를 지냈다. 아들인 李宗培(1603~1633)는 高敞吳氏 吳澐의 손녀를 처로 맞아 들여 1남 1녀를 두었으나 治喪에 誠敬을 다한 후 이로 인해 早死하였다. 손자 李後榮(1649~1711)은 문과에 급제하고 병조정랑을 역임하였으며, 진성이씨 李溟翼의 딸과 혼인하였다. 李善慶(1705~1733)은 의성김씨 학봉 후손인 金夢濂의 딸과 혼인하였으며, 그 아들 종악은 金邦杰(1623-1695)의 현손녀를 처로 맞아들였으며 호가 虛舟이다.
이렇게 이 가문은 조선초기까지 훈척 가문들과 통혼권 및 사우관계를 유지해오다가 입향이래 안동지역의 명망사족으로 자리잡고 있다. 16세기 이래 18·9세기에 이르기까지 위에 열거한 영남 지역 명가와 혼인관계를 맺으면서 영남 사림파의 주류로서 확고한 입지를 굳혔다. 특히 그러한 사회적 기반을 뒷받침할 수 있는 경제적 기반을 소유하고 있었음이 이 집안에 소장된 분재기 자료를 통해 확인되고 있다.
李增 이후 고성이씨가의 가계는 다음 〈圖 2〉와 같다.
〈圖 2〉 入鄕 이후의 固城李氏 世系
이후 이 가문은 석주 李相龍(1858~1932)이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에 가서 활동하면서 500여년간 유지해 온 경제력을 거의 상실하게 되었다. 그는 독립군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임청각을 비롯한 가옥과 토지를 팔았다. 그러나 집안 후손들의 협조로 이미 매각한 재산을 되돌려 받아 현재까지 유지하고 있다.
이상룡의 출현은 안동 지역 사족 가문에서 임란 의병을 비롯, 한말 을미 의병을 일으켜 활약한 인사들이 다수 배출된 것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따라서 경제적 지위는 다소 위축되었다 하더라도 영남 일원에서 이씨가의 사회적 지위를 더욱 확고히 하는 하나의 요인이 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본서에 수록한 임청각 고문서는 대략 ??종 ???점에 이른다. 그 중 연대가 가장 올라가는 문서는 李原(1368-1429)의 功臣錄券이다. 그 다음으로는 1539년(중종 34)에 작성된 粘連 立案文書이다. 본서에 수록한 임청각 고문서의 종류와 내용을 간략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456년 開國功臣 定社功臣 佐命功臣 靖難功臣 左翼功臣 등 5공신의 親子, 嫡長子孫 등이 北壇에서 동맹할 때 작성한 會盟文과 참석자 명단을 적은 것이다. 고성이씨가에는 좌명공신이었던 李原(1368-1429)의 아들 李增(당시 承義校尉)이 親子로서 참석, 맹약하고 署名하였다.
회맹축에는, 오공신과 그 자손에게 끼친 국가의 은혜를 잊지 말고 동심협력하여 국은을 갚기에 힘쓸 것과, 왕에게 충성을 다할 것을 천지신명께 맹서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회맹축은 규장각 등지에 동시대 다른 인물들의 것이 있기는 하지만, 이씨가 소장본은 상태가 매우 양호하여 문화재적 가치가 크다.
특히 양령대군, 효령대군을 비롯한 종친과 신숙주 정인지 권람 등 조선초기 유명인들의 署押을 생생하게 볼 수 있다.
먼저 이 가문의 財産 관련 문서로는 분재기 21건이 있다. 이씨 家에는 16세기초 李洺 代부터 18세기초 李時成 代에 이르는 9대에 걸친 분재기가 거의 대대로 남아 있어 당시 이 가문의 분재 양상을 연구하는 데에 매우 유용하다고 하겠다. 이들 분재기를 시대순으로 정리한 것이 다음 〈표 1〉이다.
〈표 1〉 固城李氏 분재기의 연대별·종류별 분포
分財時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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分財形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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財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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受給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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分財項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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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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別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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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胖妻金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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侍養子 李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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奴婢, 家舍, 田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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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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衿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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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洺妻文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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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남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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奴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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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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衿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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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肱妻父李自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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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남4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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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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衿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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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肱妻李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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嫡妾자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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奴婢, 田畓, 家代, 瓦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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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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和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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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容妻金氏男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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奴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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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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和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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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容妻金氏男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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土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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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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和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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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復元妻朴氏男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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奴婢, 田畓, 家舍,
銀帶, 明珀纓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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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4~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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和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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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復元男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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奴婢, 田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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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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別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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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復元妻朴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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長孫 宗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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奴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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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란후~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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和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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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遲男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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奴婢, 田畓, 瓦家,
代田, 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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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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別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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外祖母朴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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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손 태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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奴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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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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別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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母 朴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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末女 李宗培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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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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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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別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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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遲妻高靈申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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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女壻 羅星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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奴婢, 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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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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和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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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宗培妻吳氏男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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奴婢, 田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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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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別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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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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長男 李後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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奴婢, 田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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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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別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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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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子婦 李後榮妻 眞城李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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奴婢, 田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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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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和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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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蕡 男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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奴婢, 田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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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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別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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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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長子 李後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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奴婢, 田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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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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和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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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後榮 男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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奴婢, 田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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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8~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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衿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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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後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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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時成男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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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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和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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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李時成男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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奴婢, 田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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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가의 분재기는 모두 안동 입향 이후의 것이며, 이를 통해 16세기 이후 이 가문의 재산 소유 규모와 그 추이를 파악할 수 있다. 분재기를 통해 볼 때 이씨 家의 재산 소유의 특징은 타 가문과 달리 균분에 의해 재산이 쪼개지는 과정이 별로 나타나지 않고, 17세기 이후에도 오히려 재산이 증가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이는 상속 대상자가 1-2인에 불과한 가족 규모에서 비롯된 결과이기도 하고, 자손이 근검 절약하여 재산을 잘 지켰기 때문으로 생각한다. 또 재산은 노비 토지를 불문하고 거의 대부분 안동 인근에 소재하고 있었다. 특히 선대 묘소가 있었던 道谷 주변에 토지를 대규모로 소유하고 있었고, 그 외에도 臨北, 臨東 등에 토지가 있었음이 확인되고 있다.
한편 분재기는 상속 대상자 수만큼 작성하여 각자 같은 내용의 분재기를 나누어 가지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에 李氏 家의 분재기로서 이미 학계에 알려진 안동 지역 다른 가문의 분재기와 내용이 일치하는 것이 발견되고 있다. 먼저 〈李容妻金氏娚妹奴婢和會文記(1559)〉는 광산김씨 김연 가에 동일 분재기가 소장되어 있는데, 김연의 아들인 김부필이 이용의 처남이었기 때문이다. 즉 이 문서는 광산김씨 예안파인 金緣의 재산을 그의 사후 자식 5남매가 和會 분재하는 내용이다. 즉 이용의 처 김씨가 친정으로부터 받은 재산을 기록한 문서이다.
〈李復元娚妹和會文記(1584~1590)〉는 하회 柳雲龍 宗家(양진당)에 동일한 분재기가 소장되어 있다.
이는 유운룡이 이복원의 매부였기 때문이다. 양진당 소장본은 결락된 부분이 많아 내용파악이 어려웠으나 본 분재기를 통해 그 내용을 복원할 수 있다.
또 〈李宗培妻吳氏男妹和會文記(1647)〉는 이종배가 처가인 고창오씨 吳澐 家에서 재산을 분금받은 분재기로서 오씨 가에도 동일 분재기가 소장되어 있다.
이 분재기는 의령·함안·고성·영천 지역에 소재한 오씨가의 재산 분포 양상을 보여주며, 분재 발문에서 제사 윤행에 관한 당부가 실려 있는 문서이다. 특히 기제사와 사명일 제사 중 자녀별로 각기 맡아야할 제사를 지정하여 일일이 기록해 둔 점으로 보아 제사에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당시 재산 제사 상속의 실상을 보여주는 매우 의미 있는 자료이다. 이들 자료를 통해 이씨가와 영남 지역 다른 가문과의 혼인을 통한 결합관계가 확인될 뿐 아니라 다른 가문 연구에도 고성이씨가의 자료가 활용될 수 있다.
위의 표에는 언급하지 않은 분재기 문서 중 특이한 것을 몇 가지 더 소개하면 강희 20년(1681) 신유 5월 22일 장손 虎成에게 별급한 문서이다. 이는 호성이 봉사장손이라는 점과 10세에 비범한 문학의 재주가 있어 기대가 크고, 천연두를 잘 마친 기념으로 비 두 명과 노 1명, 그리고 두 곳의 토지 합 51복의 논을 별급으로 지급하는 내용이다. 재주는 할아버지 선교랑 李후영으로 판단되고 집필은 三寸叔 후식이었다. 이 문서에서 천연두가 어린이에서 어른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갈림길의 역병이었음을 실감하게 하여 준다. 그런데 장손 호성은 그 후 성장하지 못하고 죽은 것으로 이해된다. 왜냐하면 이 집안 가계도에서 장손 원봉은 1686년 생이고, 호성은 1660년대 후반의 출생임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호성은 원봉의 형이었다고 생각된다.
이후영이 문과에 급제하자 고모 이씨가 친정조카에게 자신이 분금 받은 안동에 살고 있는 노 1명을 별급해주고 있는 문서이다. 고모를 동성숙모로 칭하고 있다.
한편 재산 관련 문서로서 이씨 가에는 분재기 외에 호적과 매매명문 각 3건이 있다. 이는 이 가문의 재산 소유 규모에 비해 매우 적은 양이다. 분재기 자료가 온전하게 세전되어 온 반면 호적 매매명문 등의 자료는 상당 부분 유실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가문의 제사 관련 문서로 〈家祭定式〉은 이미 학계에 소개된 바 있다.
이는 1744년에 작성된 것으로 종손 이종악을 비롯한 13인이 화회 형식으로 모여 제사의 형식과 판행 방식에 대해 논의하고 합의된 내용을 상세하게 기록한 문서이다. 이 문서는 家祭定式, 忌祀定式, 墓祭定式, 家廟定式의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家祭定式에는 兄弟 叔姪이 모여 先代祭祀와 父母祭祀의 辦行 방식을 논의하고 이를 일일이 기록하여 두었으며, 忌祀定式에는 주로 기제사 때에 마련할 祭需에 대한 規例를 정하여 이를 기록하였다. 墓祭定式 역시 묘제 때에 마련할 제수에 대한 기록이며, 家廟定式은 墓位田畓의 마련과 打作看儉, 收稅 및 便利(변리) 등에 대해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특히 가묘정식 부문에서 부모의 유산을 일부 떼어 놓고 그 이식을 가지고 공동 재산으로 전답을 마련한 점, 가제정식을 준행할 규약을 만들어 놓았다는 점 등에서 이는 계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므로 소종계 창립문서라고 명명할 수 있다.
〈가제정식〉은 방대한 내용을 담고 있는 문서이므로 여러 장을 粘連하여 붙였으나 한 군데도 파손되거나 마멸된 흔적 없이 완벽하게 보존되었다. 다만 군데군데 글자를 도할하여 오려붙인 흔적이 있다. 이는 이미 써 놓은 글자를 수정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되며, 도할한 자리에는 배면에 반드시 화압으로써 이를 표시해 놓았다. 이들 배면에 있는 화압은 筆執인 李時喆의 것으로 판단된다.
본서에는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에 이르는 60여점의 간찰을 수록하였다. 임청각 소장 간찰은 李蕡 대의 것이 가장 연대가 올라가는 것으로 판단된다. 다음 〈표 2〉는 본서에 수록하는 간찰의 발수급자로서 이씨가와의 교유 사실이 드러나는 중요 인물이다.
〈표 2〉 간찰을 통해 본 李氏家 交遊 人物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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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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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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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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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世濂(1593~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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善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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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과, 홍문관제학·도승지·호조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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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溟集, 海槎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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羅碩佐(1652~16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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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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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浚吉 문인, 북벌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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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時傑(1653~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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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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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과, 승지·대사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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權泰時(1635~1719)
|
安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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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행천거, 장악원주부·회덕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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居官要覽,
山澤齋文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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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九明(1661~1719)
|
英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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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과, 순천부사
|
寓菴集
|
金聖鐸(1684~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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義城
|
문과, 사헌부지평·사간원정언· 홍문관수찬
|
霽山文集
|
趙進道(1724~1788)
|
漢陽
|
문과
|
|
趙述道
|
漢陽
|
學行
|
晩谷集
|
金宗德(1724~1797)
|
安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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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원, 학행천거, 의금부도사
|
川沙集, 聖學入門,
禮門一統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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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來成(1744~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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淸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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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과, 병조참판·한성부좌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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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敦禹(1807~18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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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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肯庵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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柳止鎬(19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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全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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柳致明의 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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柳致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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全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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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과, 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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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2〉를 통해 보면 김성탁, 유치호 등 안동 지역의 명망 있는 학자들과 교유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이외에도 간찰의 상당부분은 가족 혹은 친인척 간에 주고 받은 안부 편지이므로, 발수급자 역시 자호·아명으로 기재하는 경우가 많아 정확한 파악은 어렵다. 송준길의 문인인 나석좌의 경우는 李蕡의 異姓姪이었다.
간찰의 내용을 일별해 보면, 이후영이 김시걸에게 사윗감에 대한 평가를 의뢰하기도 하였고, 조진도·조술도 형제는 외사촌인 이후영에게 작은 어머니의 喪禮에 인력 동원을 부탁하는 등 가정사의 깊이 있는 일까지 논의되고 있다. 李宜秀는 사돈인 鄭來成과 아들 및 며느리의 일을 의논하는 편지를 깊이 있게 주고받았으며, 權泰時는 학행으로 천거되어 掌樂院主簿에 임명되자, 서울로 謝恩·肅拜하러 떠날 때 친우인 이후영에게 자신의 근황을 알리는 등 매우 가까운 사이였음이 드러난다.
본서에 수록한 이씨 가의 소지류는 약 30여 점으로, 대부분 17세기 이후의 것이다. 李氏家 소지의 상당 부분이 偸葬·松楸 남벌 등 산송과 관련된 내용으로 채워지고 있는 점은 조선 후기 다른 가문의 예와 별반 차이가 없다. 산송 소지 이외에 특이한 내용을 간추려 보면, 먼저 17세기 후반에 李蕡이 風憲所에 올린 소지가 있다. 李蕡은 자신의 仲子인 李後植을 再從兄 李光의 養子로 허락하지 않았으나, 일족들이 마음대로 자신의 착명서압도 없이 예조에 문서를 올려 양자로 등재한 사실을 밝히고 자식을 양자로 내보낼 수 없음을 風憲所에 호소하고 있다. 청원을 한 대상이 풍헌소라는 것도 특이한 사실이다. 풍헌소가 당시 의례 혹은 족친 내의 문제들을 변정하는 기능을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하지만 풍헌소에서 내린 판결이 과연 법적 효력을 가졌을 지는 의문이다. 그러나 〈圖 2〉의 家系圖에서 보듯이 이후식은 결국 이분으로부터 다른 집으로 出系하였음이 족보에서도 확인되고 있는 바 李蕡의 청원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경국대전상에 生父와 養父 쌍방 동의하에서만 예조의 계후입안을 받을 수 있음이 명시되어 있는데 어떻게 李蕡의 동의도 없이 그의 仲子가 李光의 養子가 될 수 있었는지 그 경위는 명확하지 않다.
그 외에 1727년(영조 3)에는 先山의 산직에 대한 잡역 면제 요청이 있었으며, 1763년(영조 39)에는 이영의 처 권씨의 효열을 襃獎하자는 청원이 있었다. 또 소지 곳곳에서 位土의 보전을 위한 노력을 엿볼 수 있다. 즉 18세기 말부터 미열한 자손이 타인과 결탁하여 位田을 함부로 방매할 것을 경계하고 미리 이를 금하는 立旨를 내려 줄 것을 요청한 바 있고, 위토의 방매 금지를 官이 개입하여 明文化해주기를 청원하는 내용이 19세기 말까지 이어지고 있다. 또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李原과 李冑를 서원에 배향해야 한다는 건의도 있었다.
한편 李氏 家에는 1900년을 전후한 시기에 남선면 신석리 일대 주민들과의 송사에 연루되어 이에 승소하였음을 보여주는 관련 소지 7-8점이 남아 있다. 처음에 소송은 이씨 가의 李象羲 등이 제기하였다.
소지를 올리게 된 배경은 李氏家 선대의 분묘가 있는 선산이 烽燧와 가까이 위치해 있자, 신석리 거주민들이 봉수를 빙자하여 이씨 선산에 있는 송추마저 남벌하는 등 피해를 입혔을 뿐 아니라, 봉수 근처의 산록을 樵路로 만들겠다고 호언한 데에 있었다. 官에서는 李氏家의 청원을 받아들이고 洞民들을 조사하겠다는 題辭를 남겼다. 그런데도 신석동민들의 송추 斫伐은 계속되고, 이상희 등은 계속 소지를 올려 송추 남벌을 금하고 남벌한 신석동민들을 처벌하겠다는 판결을 수 차례 받아내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신석리 주민들이 이씨 가를 상대로 겸관에게 等狀을 올렸다. 1900년에 올린 등장에서 주민들의 주장은 ‘고성 이씨 가의 선산은 남선성동 앞 산에 있고 동민의 樵牧은 신석리 봉수터에 있으므로 엄연히 그 장소가 구별되는데 고성이씨 가에서 廣占할 요량으로 작벌했다고 誣告하는 소장을 올렸다’ 는 것이었다. 양쪽의 주장을 토대로 조사에 임한 겸관은 처음에는 동민에게 승소 판결을 내렸다. 그 이유는 고성이씨 측이 摘揀 시에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로부터 이틀 후 재차 양측에 대한 대질 신문이 있었고, 결국은 고성 이씨측에 승소 판결이 내려졌다. 송추를 둘러싼 분쟁 역시 산송의 한 형태이며, 조선후기에 빈번히 일어나는 분쟁이다. 그러나 개인 대 개인의 분쟁이 아니라 이씨 가를 상대로 洞民들이 단체로 쟁송하였다는 점에서 주목할 가치가 있다. 또 결국 이씨 가에 승소 판결이 내려지고 있는 점은 양반가가 先祖의 墳墓를 매개로 山林川澤을 廣占하고 이를 世傳해 갔음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① 友鄕契帖
우향계첩은 1738년에 李晩成에 의하여 작성된 것으로 不分卷 10張으로 이루어진 필사본이다. 그러나 내용은 이로부터 약 250여년 전의 기록을 傳寫한 것이므로 조선전기 이씨 가와 안동 사림들의 결합 양상을 보여주는 기록이라 하겠다. 이 자료는 우향계축, 진솔회, 선대유고 세 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겉장에 ‘友鄕契軸’이라고 쓰여 있고, 그 옆에 ‘附 眞率會, 先代遺稿’라고 기재되어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우선 우향계는 전술한 바와 같이 안동 입향조인 李增(1418-1480)이 靈山 현감직을 버리고 처음으로 안동에 거주하게 되면서 권자겸 등 지역의 선비 12인과 함께 우의를 다지고자 1478년(戊戌年)에 만든 것이며, 특히 서거정이 직접 쓴 서문이 그대로 전해지고 있다. 우향계축에 나타난 당시 우향계원 13인은 權自謙(안동인), 裵孝騫(흥해인), 李增(고성인), 南敬身(영양인), 盧孟信(안동인), 裵孝訥(흥양인), 南致恭(영양인), 權琨(안동인), 南致晶(영양인), 南致仁(영양인), 裵稠(흥해인), 裵禎(흥해인), 權叔衡(안동인)이다.
뒤에 기록된 진솔회는 1498년(무오년)에 조직된 것으로, 眞率會員은 李汯, 李洺, 鄭元老, 金永銓, 金允离, 朴塾, 權士英, 權士彬, 權哲經, 權哲從, 具仁貞, 鄭希周, 權叔均, 南八俊, 南敬智 등 15인이었다. 이들 명단 뒤에는 李孝側이 쓴 발문을 실었다. 진솔회원으로서 고성이씨가에서는 李汯, 李洺 2인이 참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先世遺稿 부분에는 尊庇, 杏村 嵒, 文敬公 岡, 좌의정 原, 汯, 孝側, 命貞, 堯臣, 夢台, 誠發, 玎, 汝泌 등의 시문이 실려 있는데, 이들은 모두 고성인이다. 이들이 작성한 시문은 귀래정에 대하여 찬술한 내용이 많다. 歸來亭은 入鄕祖인 李增의 아들 李浤이 안동에 낙향한 이후 이를 짓고 풍류로 만년을 즐긴 곳으로, 李賢輔·李堣·李滉·李植 등의 詩板이 있는 유명한 정자이다. 따라서 적어도 이 선대유고는 歸來亭을 출입하는 인물들과 그 후손들을 중심으로 작성된 것으로 이 정자와 관련된 사료라고도 할 수 있다.
② 疏事始末
1871년에 李承穆(1837~1873)이 작성한 15장 분량의 성책 문서로서, 대원군의 2차 서원 훼철령에 대한 반대 상소를 위해 유림들이 한양으로 가다가 강제 진압으로 좌절되는 일련의 과정을 일기 형식으로 남긴 기록이다.
일기는 1871년(신미년) 3월 19일 서원 훼철령이 도달하면서부터 시작되어, 6월 17일 영남유림들이 서울에 올라가 상소가 실패하여 한강을 건너는 시기까지를 담고 있다. 실제 작성은 본격적으로 활동에 들어가는 5월 20일부터 매일 기재되고 있으며, 그 이전 시기는 사건의 전개과정을 요약형식으로 적고 있다. 일기를 통해 영남 유생들의 상소 전말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3월 19일 서원훼철령이 도달하자, 江左의 선비들은 4월 15일에 安東의 西岳寺에서 모임을 갖고, 江右의 선비들은 4월 20일에 尙州의 道南書院에서 모임을 가졌다. 이들은 각각 通文을 각 지역에 보내고 4월 28일에 義城鄕校에서 道會를 열 것을 결의한다. 4월 28일, 좌우도의 유생들이 의성향교의 광풍루에서 모두 모여 道會를 열고 사람들에게 임원을 정하고 각기 임무를 할당한다. 5월 20일 다시 聞慶에서 도회를 개최한다. 바로 여기서 집결하여 서울로 올라 가려한 것이다. 이 상소 과정은 한성으로 올라가기 위하여 의견을 결의한 4월 28일 義城에서 道會를 개최하는 것으로 전개된다. 그런데 실제적으로 올라가기 위해 결집한 것은 5월 20일 聞慶에서였다. 이때부터는 거의 매일 매일의 상황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임원을 결정하여 일을 할당하고 상소할 준비물인 䟽紙, 먹, 䟽函 등을 갖추고, 상소문을 작성하는 등의 과정을 비교적 상세히 싣고 있다. 여러 상소문 초안 중 논의를 거쳐 酉谷의 生員 權世淵의 것을 채택한다.
6월 4일 鳥嶺을 넘어 6월 13일 한성에 당도하며, 6월 15일 서빙고에 도착하려 직접 남대문으로 향하여 임금께 아뢰려 하지만 알현하지 못하고 물러난다. 성균관으로 갈 것을 결의하고 도성으로 들어가자 사람들이 둘러싸며 嶺南의 士氣를 칭송하지만, 그날 저녁에 대원군으로 부터 영남유생 들의 상소에 대한 완강한 반대의 뜻이 담긴 편지를 전해 받았다. 다시 다음날인 6월 16일 대원군으로부터 물러가지 않으면 엄히 다스리겠다는 뜻을 통고 받고 드디어는 강제로 추출됨에 이른다. 17일부터 25일까지는 고향으로 돌아오는 과정을 묘사하고 돌아오는 길에 함께 고생하였던 사람들의 이름, 관향, 거주지를 열기한 同苦錄을 작성한다. 6월 25일의 기록에서는 이러한 疏事가 실패한 이유를 적고 있다. 우선 서원철폐가 국가의 공공의 일이므로 사사로운 힘으로 어찌 할 수 없었다고 결론짓고 있다. 국가의 논리에 굴복한 대목이다. 그러나 이 소사에 참여하였던 유생들의 뜻이 참으로 높고 뛰어나므로 그 사실을 명백히 기록하여야 한다는 임무를 자임하여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이 자료는 이승목 사후 다시 정서되어 李氏 家에 전해지고 있는 忘湖先生抄稿(李種泰: 이승목의 父)와 先府君遺稿 乾(李承穆)에 실려있다. 忘湖先生抄稿에 나온 것은 1871년으로부터 2년 뒤인 1873년에 이승목이 젊은 나이에 죽자, 그보다 장수한 이승목의 아버지인 李鍾泰(1820~1894)가 이승목의 초고본을 토대로 刪削을 가하여 작성한 것으로 생각된다. 先府君遺稿에는 일기와 함께 전술한 疏廳同苦錄이 수록되어 있다. 동고록에는 疏首 鄭民秉을 비롯 78명이 기재되어 있고,
그 뒤에는 追到 16명이 추가로 기재되어 있다. 이 명단을 통해 보면 특히 안동 지역에 거주하는 유림들의 참여가 두드러졌음을 알 수 있다.
이 일기는 1871년 서원훼철 시 이에 반대한 영남 유생들의 입장과 견해, 그리고 그들의 행동양태, 그리고 참여한 인물들을 통해 영남 지역의 사상사적 맥락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로 판단된다.
③ 案錄
1748년에 작성된 향안의 초본으로 14張이 성책되어 있으나 작성자는 미상이다. 表題에는 ‘案錄-戊辰九月 日改正’으로 기재되어 있고, 內題에는 ‘戊辰(1748年)六月日鄕案草’라고 되어 있다. 표지와 내제 사이에 석 달 차이가 나는 것은 6월은 前案을 베낀 날이며, 9월은 향안을 개정한 날로 생각된다. 향원의 명단을 기록한 다음 장에는 전임과 후임의 명단이 기재되어 있다. 먼저 ‘前案座首 金夢洙, 別監 權協, 別監 柳匡鉉, 別監 鄭宜棟’이라 하였고, 그 다음에 ‘改案座首 李景翼, 別監 權昌宇, 別監 李台佑, 別監 李尙和’라고 기재되어 있다. 그리고 그 뒷장은 떨어져 나갔으나 ‘前案 六百十三員, 改案四百六十一員’이라는 기사가 보이고 있다. 이는 전안에 기재된 향원수가 613명이고, 개정된 향원 수는 461명임을 의미한다. 그러나 개정된 향원 명단은 추가로 붙어 있지 않고 전안의 대상자 이름 아래에 붓으로 점을 찍어 표시하였다. 점을 찍어 표시한 수는 모두 152명으로 이를 제외하면 총 461명이 되므로 개정 대상자에 점을 찍어 표시하였음은 분명하다. 이는 초본이기 때문이며, 새로 개안을 정서할 때 참고하기 위하여 붓으로 표시만 한 것으로 판단된다.
각 면에는 10명 단위별로 그 인원숫자를 표기하였다. 첫장의 ‘十, 卄, 卅, 四十’ 으로 시작하여 맨 마지막장에 ‘六百十’이라는 숫자까지 기재되어 있다. 또 각 명단에는 해당 인물의 직역과 생년을 기록하였는데, 직역으로는 ‘생원, 진사, 감찰, 좌랑, 통덕, 집의, 급제, 정자, 학생’ 등이 나오고 있다. 다른 자료와 차이가 있다면 ‘유학’이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자료에서는 특별한 직역이 없는 경우를 ‘학생’으로 기재하였기 때문이다.
이 향안 초본을 이용하여 만들어진 향안 원본은 현재 어디에 소장되어 있는지 확인되지 않고 있다. 다만 당시 향안에 기재된 인물과 향안의 개정 과정을 엿볼 수 있는 자료로 생각된다.
그리고 이 집안 고문서에는 伴鷗亭接完議라는 구체적인 講學 규정이 있어 교육사의 중요한 자료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며 이런 완의는 두 세 종이 있다. 반구정은 임청각의 한 정자이름이다. 接이란 居接의 뜻으로 이는 강학하는 학생이 기숙과 식사를 뜻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6) 近代 抗日運動關聯 文書
이 가문은 독립운동가 이상룡(이상희)을 배출하여 그를 비롯한 이씨가의 직계 방계 인물 11인이 건국훈장을 비롯한 각종 훈장을 수령하였다. 16세기 이래 19세기까지 엄청난 재산을 소유하였던 이 가문이 이상룡의 독립운동 자금 마련을 위한 재산 매도로 경제적 기반을 상실하였음은 전술한 바와 같다. 그러나 일족들의 도움으로 임청각과 주변 토지를 환퇴받아 현재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임청각을 비롯한 가옥 및 토지 매매문기가 남아 있어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하나는 家屋賣買證書이고 또 하나는 택지 및 산지 매매증서이다. 모두 1913년에 작성된 것으로 매도자는 李象羲이고 매수인은 李鍾夏·李{王+奭}·李{王+泰}이다. 즉 가옥과 토지를 같은 이씨 일문의 방계 친족에게 방매하고 있다. 족친내에서 매매하였기 때문에 나중에 환퇴받기가 쉬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賣渡人인 이상희는 주소가 中華民國 懷仁縣 恒道川으로 되어 있다.
또한 이 문서는 조선시대이후 일제를 거치면서 변화된 명문(계약서) 양식이 반영되어 있다. 우선 문서 명칭이 명문에서 ‘證書’로 고쳐서 사용되고 있으며, 家舍를 家屋으로, 放賣人을 賣渡人, 買得人을 買受人으로 지칭하고 있다. 연대표시에 ‘大正’이라는 일본 연호를 사용한 것도 주목할 만한 변화라 하겠다.
한편 이상룡 뿐 아니라 그 아들인 李濬衡(1875-1942) 역시 아버지를 이어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그는 1908년 대한협회 안동지회를 결성하여 구국운동을 펼쳤고, 道東義塾·協同學校·普文義塾·東華學校 등을 설립하여 신학문 교육과 애국사상 고취에 힘썼다. 한일병합 이후에는 父 이상룡을 따라 만주로 가서 무장독립운동 단체인 西路軍政署에서 교육과 군사훈련을 맡아보았으나, 1942년 일본이 말레이지아 싱가포르 등 동남아국가를 병탄했다는 소식을 접한 후, 광복의 희망이 없다고 판단, 이를 비관한 나머지 자결하였다.
그가 자결하면서 아들 李炳華(1906-1952)에게 남긴 유서가 남아 있다. 유서는 ‘兒子大用見之’로 시작되고 ‘父臨死書’라는 표현으로 끝을 맺고 있는 바, 大用은 李炳華의 兒名이다. 내용은 다른 유서와 마찬가지로 門中의 일, 緬禮 등 의례절차에 관한 당부 사항이 들어 있고, 節酒 등 생활 태도에 대한 훈계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또 유서에는 〈臨絶韻〉이라는 율시가 첨부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