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장처 고문서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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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丙鍊(본원 교수),정수환(본원 전문원)
본서는 경남 밀양 소재 창녕조씨(오봉서원 및 고 조증식 소장), 의령남씨(고 남상규 소장) 고문서의 합편이다. 이들 자료는 사료적 가치는 높으나 단일 자료집으로 간행하기에는 분량상 부족함이 있고, 또한 자료가 지역적으로 상호 관련성이 깊어 두 가문을 합하게 되었다.
창녕조씨는 聚遠堂 曺光益 가문과 五峰書院(曺致虞·曺光益 제향) 문서, 의령남씨는 枕流亭 南右文 가문의 문서로 구성되어 있다. 밀양지역 고문서 조사·수집 내역은 아래와 같다.
- 밀양지역 조사 내역 -
◇ 창녕조씨
□ 일 시 : 1994년
□ 조사처 : 취원당 종가 및 오봉서원
□ 참가자 : 박병련, 정순우(이상 본원 교수), 안승준, 김학수(이상 본원전문위원), 지정향
□ 조사·수집량 : 49점(고문서)
◇ 의령남씨
□ 일 시 : 1994년
□ 조사처 : 침류정 종가
□ 참가자 : 박병련, 정순우, 안승준, 김학수, 지정향
□ 조사·수집량 : 215점(고문서)
창녕조씨와 의령남씨자료는 비록 분량은 많지 않지만 분재기·명문 등 15세기 후반에서 16세기 중반에 이르는 전형적인 문서가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 수집 당시부터 이들 자료에 대한 출간을 계획했으나 예산 등 제반 사정이 여의치 않았고, 또 출간대상의 지역적 형평성을 고려하는 과정에서 순연 되다 금년에 와서야 간행하게 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소중한 고문서 자료를 대여해 주신 창녕조씨, 의령남씨 관계자 여러분께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본서에 수록된 자료는 밀양의 초동면 오방리에 소재한 창녕조씨 및 오봉서원 소장 고문서이다. 오봉서원은 창녕조씨가의 문중서원의 성격을 지니는 것으로 조씨가의 가계역사와 밀접한 관련성이 있다. 밀양 오방동의 창녕조씨는 聚遠堂 曹光益(1537~1578)을 중심으로 한 그 후손가이다.
창녕조씨의 시조는 조계룡이다. 그는 신라 진평왕의 女婿로 신라시대 사성되었다고 하나 객관적 사실에는 의문이 있다.  1) 현재 밀양 창녕조씨가에 전하는 󰡔창녕조씨족보󰡕에 의하면 고려 大樂署丞를 역임한 조겸을 1세조로 기록하고 있다. 조겸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는 여러 이설이 존재한다. 이는 창녕조씨족보의 간행에 있어 기존의 가승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대수가 일치하지 않는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와 관련하여 잠시 창녕조씨 족보의 간행과정을 살펴본다. 창녕조씨의 초간 대동보는 癸酉譜(1693, 肅宗19)라고 한다. 본 계유보의 간행에는 조신충의 후손인 樂齋 曺殿周, 松菴 曺冕周 당시 가전되고 있던 가승 등을 참고하여 간행하였다. 족보의 간행에는 당시 경상도 도사로 부임한 曺廷亮의 지원에 의해 이루어 졌다.  2) 초간보의 간행과정에서 기존의 가승에서 나타나는 대수 불일치를 일소하기 위해 정해보에서 조송무를 다시 1세로 칭하기로 의결하였다.
창녕조씨의 세계가 지속적으로 확인되는 것은 조송무 이후라 하겠다. 조송무 이후 조준, 조인탁이 少監을 역임하였으며, 조수가 전객령을 지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조송무 이후 그의 증손 조수에 이르는 이들에 대한 자세한 행적은 알기 어렵다.
【圖-1】창녕조씨 가계 : 조겸 ~ 조상명
창녕조씨가의 문명을 크게 일으킨 인물은 曺益淸(?~1353)이다.  3) 그는 고려조에 활약한 인물로서 충숙왕때 中郎將이 되었다. 그는 충숙, 충혜왕이 교체되는 어지러운 시기에 활동하였다. 충숙왕으로부터 왕위를 양위받은 충혜왕 원년에 조익청은 호군으로서 大靑島에 나아가 원나라 사신을 맞이하였다.  4) 충혜왕의 무도함에 의해 충숙왕이 다시 복위하자 조익청은 대호군이 되었다. 당시 조익청은 尹桓과 함께 충혜왕의 근신들에 대한 처벌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충숙왕이 죽고 충혜왕이 왕위에 오르자 도리어 제주안무사로 좌천되기도 하였다.
그 후 1343년(충혜왕 복위 4)에는 원나라에서 李芸·奇轍과 함께 中書省에 글을 올려 충혜왕의 무도함을 진언하였다.  5) 1351년 공민왕이 즉위하면서 찬성사가 되고, 1352년에는 공민왕이 원나라에 있을 때 扈從한 공으로 燕邸隨從功臣 1등에 올랐다.  6) 그 후 좌정승에 올라 夏城府院君에 봉해지고 純城直節同德贊化功臣에 녹훈되었다. 1376년(우왕 2) 공민왕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양평(襄平)이다. 조익청과 관련한 자세한 행적은 󰡔고려사󰡕 세가에 기록되어 있다.  7) 조익청의 중앙정계에서의 활약을 계기로 창녕조씨가의 발흥의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고 하겠다.
조익청은 배위 여산송씨 사이에 2남 1녀를 두었다. 이들이 활동하는 시대는 여말선초 왕조교체의 혼란기였다. 장자 조의충은 고려조에 상호군을 역임하였고 차자 조신충은 우왕 9년(1383)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는 李穡, 曺敏修, 李崇仁, 河崙 등과 교의가 깊었다. 고려말에는 判熙川郡事로 부임하였다가 조선왕조가 개창 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영천의 蒼水里에 우거하였다. 그의 영천 우거 배경에는 영천에서 입지가 유력하였던 영천최씨 최중연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추정된다.  8) 조익청의 장녀는 당시 문망이 높은 청주이씨 이거인(?~1402)과 혼인하였다. 이거인은 고려조에 刑部尙書를 역임한 文簡公 李挺(1297~1361)의 아들이었다.
조신충을 비롯한 그의 네 아들은 향촌에 우거하면서 학문활동에 주력하였다. 조신충은 출사를 고사하였으나 그의 네 아들은 신왕조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배경에는 여말선초 조신충의 교유상과 아울러 이거인을 중심으로 한 청주이씨와의 관계가 일정 작용하였으리라고 추정된다. 특히 이정을 중심으로 한 청주이씨가는 모두 현달하여 고려 후기에 큰 영화를 누렸을 뿐만 아니라, 신왕조의 개창에서 크게 기여한 바 있었다.
신왕조에 출사한 조신충의 아들 중 조상보는 司議, 조상정은 通津縣監 등을 역임하였다. 또한 조상보의 사위 柳洪은 安東지역 豊山柳氏의실질적 시조라할 수 있는 사람으로 柳成龍 兄弟의 선조이다. 조신충의 셋째아들 조상치는 야은 길재의 문인으로 활약하였는데 그는 1419년(世宗1)에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사재감주부가 되었으며  9) 이 후 좌정언(1424년)에 올라 집현전에서 유숙하였다. 조선 초기 세종에서 단종에 이르는 세 왕을 섬기는 과정에서 성삼문, 박팽년 등과 교의가 깊었다. 1455년(端宗 3)년 집현전부제학이 되었으나 세조의 왕위찬탈로 사직하고 낙향하여 후학 양성에 진력하였다. 1791년(정조 15)에 장릉에 배향되었다. 그의 묘비에는 ‘魯山朝副提學曺尙治之墓󰡑라 새겨 세조의 신하가 아님을 밝혔다. 그의 시호는 忠貞이다.  10) 조상명 또한 형 조상치와 정치적·학문적 행보를 같이하엿다. 그는 세종조에 文科에 급제하였으며 이 후 德源都護府使(1450)11) , 承旨를 역임하였다.
【圖-2】창녕조씨 가계 : 조상명 ~ 조윤신
조신충의 영천 우거 이후 창녕조씨는 영천에 세거하며 학문연마와 진퇴를 거듭하였다. 조경무는 무과로 출사하여 참봉을 역임하는데 그쳤으나 선대의 유업을 착실히 계승하면서 자제의 훈육에 힘썼다. 이로서 그의 두 아들에 이르러 선대의 가업을 다시 한번 일으키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조시손과 조말손 형제는 모두 문과에 급제하여 조정에 출사하였다. 조시손은 정랑, 조말손은 군수를 각각 역임하였다. 조말손은 1468년(世祖 14)에 進士, 1472년(成宗 3) 문과에 각각 합격하였다. 이후 翰林, 靈岩郡守 등을 역임하였다. 특히 그는 문명으로 이름이 높았다고 한다. 조말손의 처 의성김씨는 副知承文院事를 역임한 金漢啓(鶴峰 金誠一의 高祖父)의 딸이다.
조말손과 의성김씨 사이에는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모두 입신하였다. 다섯 아들 중 네 아들이 생진과에 입격하였으며, 조치우는 문과에 급제하였다. 특히 조치우는 일찍이 사마시에 입격한 뒤 1494년(성종 25)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문과를 통해 출사한 그는 검열·사옹원정 등을 지냈으며, 연산군대에는 성균관전적으로 춘추관기사관이 되어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그 후 1498년(연산군 4) 정언을 지낸 뒤 낙향하여 학문정진에 몰두하였다. 1506년 중종반정을 계기로 다시 출사하여 대구부사와 예천군수(1519)를 역임하였다. 그는 수령재직시 선정으로 이름높아 청백리에 녹선되고, 송덕비가 세워졌다. 또한 효행이 알려져 왕으로부터 󰡔소학󰡕을 하사 받기도 하였다. 55세에 이르러서는 어머니의 봉양을 위하여 사직하고 낙향한 뒤 70세에 어머니의 상을 당하자 애통 끝에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12) 이후 그의 효행과 학행이 널리 알려지면서 조정에서 옥비 두 좌를 하사하였고 아울러 관직생활의 정렴함을 함께 기렸다.  13) 조치우의 이러한 행적과 영광은 이후 창녕조씨가에 있어 대대로 운위되었다.
여말이래 지속된 창녕조씨가의 흥기는 지속적으로 유지되었으며, 조치우에 의해 가격이 일신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조치우 형제대에 형성된 가격의 신장과 학문의 성숙한 분위기는 창녕조씨 가문의 성세를 유지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한편, 조치우가 창원박씨와 혼인하는 것을 계기로 창녕조씨가는 창원일대에 별업을 형성하게 되었다.  14) 이는 창원박씨로부터 일정한 경제적 지원을 상속받았던 것에 기인한다.  15)
【사진-1】조치우 묘하 재사 遺厚齋
조치우의 아들 조효연은 1513년(중종 8)에 생원시에 입격하고 1519년에는 식년문과에 급제하였다. 그의 문과 급제로 인해 조부 조말손 이후 3대에 걸쳐 문과 급제자를 배출하게 되었다. 이로써 창녕조씨의 문명이 한층 크게 떨쳐지게 되었다. 조효연은 출사 후 학유, 사록, 예문관전적, 호조·형조좌랑 등을 역임하였으며 충청도도사, 선공감판관, 예조·형조정랑 등을 지냈다. 이후 1528년에는 함안군수를 역임하였다. 그는 선대의 가르침을 충실히 이행하였으며, 효행으로 이름이 높았다. 또한 晦齋 李彦迪, 慕齋 金安國, 冲齋 權橃 등과 교유가 깊었다. 조효연의 사후 墓碣銘은 退溪 李滉이 撰하였다. 그의 이러한 학문적 교유에는 진성이씨와의 통혼도 일정한 역할을 하였다. 그의 처 진성이씨는 淸海君 李堣의 딸로 退溪 李滉의 사촌누이였다.
조윤신은 선대에 이룩한 학문적 업적을 착실히 계승하였다. 그는 일찍이 과업을 그만두고 가장 장서 수천권을 바탕으로 독실히 학문수행에 정진하였다. 조윤신은 龜巖 李禎, 葛川 林薰, 龜峰, 周博, 後凋堂 金富弼 등과 학문적 교의가 깊었다. 그의 처는 인동장씨로서 廷福君 張末孫의 손녀였다.
조경무에서 조윤신에 이르는 5대 동안은 문무과 급제자를 4대에 걸쳐 배출하는 등 창녕조씨가문의 문명을 크게 떨치는 것과 아울러 가계의 역사에 있어 최대의 발흥기를 이룩하였다. 이러한 문중의 전성기는 조광익과 조호익이라는 걸출한 선비를 배출함에 이르러 극에 달하였다. 특히 이 당시 영천과 창원을 중심으로 생활하면서 안동권의 유력가문과 통혼관계가 형성되어 학문적 교유의 폭도 확대되었다. 이러한 이들의 활동은 가학적 전통을 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圖-3】창녕조씨 가계 : 조윤신 ~ 조경창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선대에 이룩한 학문적 전통을 발전적으로 계승한 인물은 조윤신의 아들과 손자대에 이르러서 이다. 조윤신은 인동장씨와의 사이에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이들이 모두 현달하였다. 특히 조광익과 조호익의 학문적 성취와 처세는 후세에도 대대로 칭송되었다.
조광익의 호는 聚遠堂 또는 竹窩로서 창원에서 출생하였으며, 1558년(명종 13)에 생원·진사 양시에 합격하였고, 1564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이후 1569년(선조 2) 형조좌랑, 감찰을 역임하였으며 1576년 重試에 장원급제,  16) 벼슬이 의금부도사에 이르렀다. 그는 퇴계 李滉의 문인으로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한강 정구, 율곡 이이, 고봉 기대승 등과 교의가 두터웠다. 그는 1578년 江東으로 좌천된 아우 조호익을 만나고자 평안도 도사의 직책을 얻어 내려갔다가 그곳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선조는 그 효행과 우애를 높이 사 정문을 내려 표창하고, 󰡔삼강행실록󰡕에 수록하였다. 밀양의 오봉서원(五峰書院)·청효사(淸孝祠)에 봉안되었다. 󰡔취원당문집󰡕이 있다. 특히 그는 밀양박씨 박홍미의 딸과 혼인하는 것을 계기로 처가의 경제적 기반을 바탕삼아 밀양의 오방동으로 이거하였다. 현재 오방동에는 정려각17) 을 비롯하여 江東邱18) 등 조광익과 관련한 유적이 산재해 있다. 조광익의 행적을 정리하면 【표-1】과 같다.
【표-1】취원당 조광익 연보

나이

서력(왕력)

주 요 행 적

비고

1

1537(中宗32)

◦昌原 府北面 출생

8

1544(中宗39)

◦魯齋公(조효연)에게서 小學을 배우다.

13

1549(明宗4)

◦退溪 李滉 門下에서 수학.

18

1554(明宗9)

◦密陽朴氏와 혼인.

22

1558(明宗13)

◦司馬兩試 入格.

23

1559(明宗14)

◦密陽에 ‘竹窩’를 짓고 이거 함.

妻鄕移居(五榜洞)

25

1561(明宗16)

◦아우 曺好益과 李滉을 찾다.

26

1562(明宗17)

◦거처를 ‘聚遠堂’이라 명명함.

27

1563(明宗18)

◦長子 曺以復 出生

28

1564(明宗19)

◦文科 別試 乙科 1人 及第.

10月 8日.

29

1565(明宗20)

◦李滉에게서 󰡔朱子語類󰡕,󰡔近思錄󰡕 등 수학.

◦奇高峯과 問答.

9월

30

1566(明宗21)

◦金蘭契 조직.(族契)

10월

31

1567(明宗22)

◦成均館學諭

33

1569(宣祖2)

◦刑曹佐郞

35

1571(宣祖4)

◦父 曺允愼 喪

36

1572(宣祖5)

◦母 仁同張氏 喪

11月 5日

38

1574(宣祖7)

◦道內 儒林 孝行襃揚 請願.

11月 17日

39

1575(宣祖8)

◦司憲府監察

40

1576(宣祖9)

◦文科 重試 甲科 1人 及第.

◦兵曹佐郞, 刑曹正郞

◦孝行旌閭

10月 10日

41

1577(宣祖10)

◦平安道都事.

42

1578(宣祖11)

◦任所에서 卒하다.

◦󰡔三綱行實錄󰡕에 기록.

5月 5日

1781(正祖5)

◦‘世德祠’ 享祀

한편 조광익은 그가 지니고 있는 도내의 명망과 창녕조씨가문의 가격을 바탕으로 영남의 명가와 통혼하였다. 아들 조이복은 의성김씨 金{土+旦}(丘判曺潤孫의 外孫壻)의 딸과 혼인하였다. 뿐만 아니라 큰 딸은 여강이씨 회재 이언적의 장손자인 무첨당 이의윤, 차녀는 한강 정구의 아들인 晩悟 鄭樟과 혼인하였다. 이와 같은 통혼사실은 조부대 이래 지속된 도내 명문가와의 통혼이 지속됨과 아울러 4대에 이르는 동안 창녕조씨 문중의 가격을 가늠하게 하는 하나의 척도가 된다. 뿐만 아니라 학문적 전통에 있어서도 퇴계학파와의 깊은 관련성을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조호익은 조광익과 함께 李滉의 문하에 출입하였다. 1575년(선조 8) 경상도의 軍籍을 정리할 때 土豪로 지목되어 강동현에 유배되기도 하였다. 이곳에서 계속 학문에 정진, 많은 후진을 양성하여 관서 지방에 학풍을 진작시켰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柳成龍의 천거로 召募官이 되어 활약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다. 후에 대구부사·성주목사·안주목사·성천부사 등을 역임하고, 1597년 정주목사가 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하였다. 1604년 선산부사, 1606년 남원부사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나가지 못하였다.  19)
조광익 형제대에 있어 창녕조씨는 거주지의 분기가 일어나게 되었다. 백형 조계익은 조부대에 창원에 이거한 이후 줄곧 창원에 세거지를 마련하였다. 이에 반해 조광익을 중심으로 한 후손들은 조광익의 처향이거를 계기로 밀양에 세거하였다. 조호익은 창원과 영천을 오가다 말년에는 선대의 유업이 남아 있는 영천에 정주하였다. 이러한 거주지의 분기는 여말선초 조신충의 영천이거, 조치우 이후 창원이거, 그리고 조광익의 밀양이거를 기점으로 발생하였다. 또한 이들 거주지의 변동은 모두가 혼인을 매개로 한 처향을 따라 이거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조이복은 일찍이 한강 정구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부친 조광익이 세상을 떠나자 조이복은 조호익의 훈도에 힘입은 바 컸다. 임난 발발시 조이복은 곽재우의 막하에서 활약하다가 이후 조호익이 소모관이 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숙부의 막하에 들어가 활동하였다. 창녕조씨가에서는 조이복 외에도 조이항, 조이곤, 조이관 등이 모두 임란시 창의하였다. 임란후에도 그는 聱漢 孫起陽과 함께 밀양일대의 사론을 주도하였다. 이로서 창녕조씨가는 선대의 학문적 분위기와 효애에 바탕해 忠을 실현하여 학문과 충효를 겸비함으로써 이름이 높았다.
조이복이 전대미문의 국가적 위기에 적극 대처하는 과정에서 가정사는 우선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조이복이 후사가 없게 되자 조이환의 차자 조은으로서 계후하게 되었다.
【사진-2】조광익 정려각
【사진-3】江東邱 전경
【圖-4】창녕조씨 가계 : 조경창 ~ 조가종
창녕조씨 고문서에는 조광익 이후 조이복, 조은, 조경창, 조세주에 이은 분재문서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이들 문서는 조광익 이후 밀양으로 이주하는 과정과 이주 후 정착기에 있어 기가의 기틀을 마련하는 동안의 경제적 상황을 사실적으로 전해주고 있다. 특히 조이복의 처 의성김씨가 가사를 챙기면서 위기에 처한 조씨가를 일으켜 세우는 과정이 매우 상세하다. 또한 조은의 계후 과정을 비롯하여 전답의 분재양상이 잘 나타나 있다.  20)
조은 이후 조세주에 이르는 삼대의 행적은 밀양의 향안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밀양향안󰡕에 입록된 인물로서 창녕조씨 출신은 8인이다. 이들은 조은, 曺日章, 조경창, 조기창, 조시창, 조세주, 曺冕周, 曺任周였다.  21) 이로 본다면 창녕조씨의 밀양향중에서의 입지를 가히 짐작해 볼 수 있다.
창녕조씨는 임란 이전 조선 전기 사회에 있어서 다소의 굴곡은 있었으나 시종 일관되게 가문의 영화를 누려왔다. 여기에는 사환을 통한 출사 뿐만 아니라 학문적으로, 그리고 충과 효, 우애 등 다방면에 걸쳐 칭송되는 부분이다. 창녕조씨는 학문적으로 정치적으로 중앙정계를 중심으로 활발한 활동양상을 보이고 있다. 학문적으로는 퇴계에서 한강으로 이어지는 퇴계학파의 전통을 고수하였으며, 정치적으로는 남인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가문의 학문적, 정치적 성격으로 인해 조선 후기 사회에 있어서는 중앙정계로의 진출이 용이하지 않았다. 여기에는 1680년 경신환국 이후 남인이 대거 축출되는 까닭으로 인해 영남의 남인이 더 이상 중앙정계에 진출하지 못한 경향과 일치하고 있다.
조경창 이후로는 조세주가 宣傳官을 역임한 것을 제외하면 전혀 출사한 바가 없었다. 이러한 영향으로 인해 밀양지역의 창녕조씨는 향촌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학문활동과 선대의 유업을 유지하는데 진력하였다. 1780년에는 조광익의 밀양이거지지에 사우를 마련하게 되었고 1795년에는 본 사우가 오봉서원으로 사액되었다. 오봉서원은 밀양일대의 창녕조씨의 활동 구심점으로 기능하였으며, 조치우와 조광익을 향사하고 있다. 현재 창녕조씨 고문서에는 서원의 창건과 사액과정에 형성된 문서가 다수 남아 있어 참고가 된다.
창녕조씨는 밀양일대의 재지사족으로 존재하면서 향내의 유림활동과 공론형성에 적극 대처해 나갔다. 이후의 가계는 아래와 같다.
【圖-5】창녕조씨 가계 : 조가종 이후
본서에 수록된 의령남씨 자료는 밀양 丹場面 士村에 세거하고 있는 止足堂 南祦와 枕流亭 南右文, 操庵 南弼文 후손가의 가전 고문서를 그 대상으로 하고 있다. 이들 문서는 의령남씨가의 가계의 역사와 깊은 관련성을 지니고 있다. 본 가계의 역사와 인물을 살펴보기로 한다.
의령남씨의 시조는 남민으로 시호는 英毅이다. 남민과 관련한 자세한 행적은 알 수 없다.  22) 의령남씨의 중시조는 남군보이다. 남군보를 비롯한 남홍보, 남광보 3형제가 모두 고려 충열왕 때에 공이 있어 남홍보는 영양군, 남군보는 의령군, 남광보는 고성군에 봉해져 각기 세 관향의 중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남군보는 고려조에 樞密院副使를 역임하였다. 남군보의 장자 南赫胝는 備巡衛郞將, 차자 南益胝은 豊儲倉副使를 지냈고 남익저의 독자 남천로는 영광군사를 역임하였다. 남군보의 분묘는 宜寧縣에 위치하고 있다. 이로 보아 의령남씨가는 고려조에 출사하는 과정에서 사환기에는 개경에 일시 거주하였으나, 남군보를 중심으로 한 당대까지는 본관지인 의령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23)
【사진-4】밀양 사촌 전경
남천로의 차자 남을진은 여말 선초에 활약한 인물로 충의로서 이름이 높았다. 남을진의 호는 谷隱, 丙齋이고 시호는 文安이다. 1368년(恭愍王 17)에 현량과에 급제한 뒤 여러 관직을 두루거쳐 參知門下府事에 이르렀다. 鄭夢周·吉再와 교유가 있었다. 그는 고려말 1384년(禑王 10) 국정이 어지러워지자 가솔들을 거느리고 楊州의 沙川 鳳凰山에 은거하였다. 조선이 개국되자 태조가 남을진을 沙川伯에 봉하고 그의 출사를 회유하였음에도 끝내 ‘불사이군’의 명문으로 거절하였다. 이후 積城의 紺嶽山 석굴에 들어가 은거하였다. 죽은 뒤 그 석굴을 南仙窟이라 하였으며 영조 때 사천서원에 제향되었다.  24)
남을진은 고려조에 대한 충정으로 이름이 높아 절개를 고수하였으나 그의 세 아들은 조선왕조에 출사하였다. 이와 같은 배경에는 남을진의 형 남을번과 아우 남을경의 왕조교체기의 활약이 일면 작용하였다. 남천로의 세 아들 중 차자 남을진이 고려조에 충의를 다한 반면 장자 남을번과 말자 남을경은 신왕조의 개창에 적극 협력하였던 것이다. 특히 남을번을 비롯한 그의 두 아들 남재와 남은은 개국공신에 책훈됨으로서 의령남씨가는 조선초에 족세가 크게 번성하였다.  25) 남을진이 양주에 은거할 당시 태조는 남재로 하여금 그의 출사를 종용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정황으로 보아 남을진 사후에 그의 세 아들은 백숙 남을번을 비롯한 종형들에게 영향받은 바가 컸을 것으로 짐작 할 수 있다.
남을진의 장자 남근은 병조정랑을 역임하였으며, 차자 남이는 持平(1411년), 定州牧使(1430年),  26) 光州牧使 등을 역임하였다. 말자 남규 또한 태종조에 洪州別官을 거쳐 大司諫에 까지 이르렀다. 이들이 조선조에 출사로를 마련함으로서 의령남씨가의 가세는 신왕조에서도 이어졌다.
【圖-6】의령남씨 가계 : 남민 ~ 남규
남규와 밀양박씨 사이에는 5남 1녀를 두었다.  27) 장자 남치효가 吏曹正郞을 비롯하여 아우 남치충, 남치화, 남치신은 牧使, 縣監, 郡守와 같은 지방관을 역임하였다. 남규의 딸은 풍천임씨 임원진과 혼인하였다. 임원진(1423~1500)은 1471년(성종 2)에 좌리공신(佐理功臣) 3등에 녹훈되고 서하군(西河君)에 봉해졌을 뿐만 아니라 당대에 문장으로 이름이 높은 인물이었다.
여기서 잠시 의령남씨가의 거주지 변동현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의령남씨 1세조 남군보의 분묘가 의령에 위치하는 등으로 적어도 당시까지 의령을 중심으로 활동하였음은 이미 언급한 바와 같다. 그러나 여말선초에 이르러서 의령남씨가는 양주를 중심으로 한 근기지역에 주로 거주했음을 알 수 있다.  28) 남을번을 중심으로 한 그의 형제를 비롯하여 남치효에 이르기까지의 분묘는 모두 양주일대에 산재해 있다.  29) 특히 이 시기 의령남씨가는 이곳 양주를 중심으로 상당한 경제적 기반을 형성하고 있었음을 여타 관찬사료에서 확인할 수 있다.  30)
【사진-5】남치효 묘역
【사진-6】사촌 마을앞 전경
【사진-7】침류정(남우문 강학소) 전경
【사진-8】남오·남우문 묘역
양주를 중심으로 정치, 경제적 기반을 공고히 유지하고 있던 의령남씨가는 남오31) 대에 이르러 밀양으로 이거하게 되었다. 남오는 남치충의 차자로서 일찍이 1454년(端宗 2) 별시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예조판서를 역임하였다. 그는 말년에 밀양으로 이거하였다. 그의 밀양이거와 관련한 정확한 배경은 알 수 없으나 당시 지속되던 사화 등으로 인한 정치적 혼란을 피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32) 밀양은 당시 김종직의 출생지로 사림세가 높았고 학문적 풍토가 조성되어 있었기에 남오가 이와 같은 배경에서 복거지로 선택하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된다.  33)
남오는 밀양에 복거한 후 자제들과 학문활동에 전념하였다. 남오의 장자 남유문은 1498(燕山 4)년 진사시에 입격하였으며 慶州敎授를 역임하였다. 그는 枕流亭을 건립하고  34) 이곳을 중심으로 학업에 전념하였다. 그는 밀양 사촌의 침유정을 중심으로 灌浦 魚得江(1470~1550) 등과 도의로서 교유하였다. 셋째아들 남필문은 퇴계 이황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그의 문도로 활약하였으며, 聚遠堂 曹光益(1537~1580) 등과 교의가 깊었다. 그는 1525(中宗20)년 式年 진사시에 입한 후 文昭殿參奉을 역임하였다.
한편, 의령남씨 고문서 중에는 남오가 밀양에 이거한 후의 경제적 상황을 반영하는 16세기 분재기가 남아 있다. 남우문을 비롯해 남이흔에 이르는 분재기는 의령남씨가 밀양에 이거하는 시점의 노비·전답의 규모와 치산이재의 현황을 고스란히 남기고 있어 참고된다.
【圖-7】의령남씨 가계 : 남규 ~ 남이흔
남오와 남우문 부자에 이은 학문적 전통은 이후에도 착실히 계승되었다. 남우문의 장자 남계선은 1555년(明宗 10) 식년 진사시에 3등 45인으로 입격 하였다.  35) 남계선이 출사한 기록은 없으나 그의 장자 남영길이 경주교수를 역임하였으며, 차자 남순길은 1590년(宣祖 23)에 진사에 합격하였다. 남우문의 손자 남이작 또한 군자잠정을 역임하는 등 의령남씨가의 사환은 지속되었다. 그런데 의령남씨가에 있어서 남이작 이후에는 출사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단지 남붕숙이 노직으로 통정대부의 품계를 받은 사실이 확인될 뿐이다. 이는 뒤에 언급하는 바와 같이 조선 후기 정치적 동향에 의해 남인의 중앙정계 출사가 용이하지 않았음과 관련이 있다.
의령남씨가는 고려 중엽경에 발흥한 이래 여말선초의 혼란기에 남을진을 중심으로 절의를 고집하였다. 그러나 신왕조의 개창 이후 출사하여 왕조초기 중앙정계를 중심으로 활약하는 과정에서 가격이 일신되었다. 하지만 중앙정계를 중심으로 정치적 혼란이 가중되자 남오는 밀양의 사촌으로 이거하여 학문에 전념하였다. 특히 그의 아들이 퇴계의 문도로 활동하는 등 대대로 의미 있는 족적을 남겼다. 남오의 밀양복거 이후 그의 현손에 이르기까지 학문과 출사를 거듭하면서 가세를 유지하였고 이러한 과정속에서 의령남씨 침류정 남우문 후손가는 학문적으로 영남학파, 정치적으로는 남인의 성격을 강하게 나타내게 되었다고 하겠다. 그 후로도 이 가문은 昌寧曺氏, 安東孫氏, 驪州李氏, 密陽朴氏 등 밀양지역의 世族들과 連婚하면서 재지사족으로서의 입지를 유지해나갔고 조선 후기 이후에는 출사하지 않고 학문으로서 가학적 전통을 고수하고자 노력하였다.
남이흔의 아들 남두장 이후 남붕숙에 이르기까지 가계전통 계승에 진력하으나 남붕숙의 아들대에 이르러 연이은 가화는 남씨기에 있어 시련의 시기였다. 남붕숙 슬하에는 남수성, 남노성의 두 아들이 있었다. 그런데 이들 부부가 모두 구몰하였으며, 손자인 남처도, 남처중 또한 요절하고 말았다. 특히 이들 부자 대의 연이은 가화로 인해 의령남씨가는 한때 위기에 직면하였다. 가내의 위기상황은 남붕숙과 그의 처가 손자 및 현손에게 남긴 분재기에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36)
【圖-8】의령남씨 가계 : 남이흔 ~ 남국신
남처중이 일찍 세상을 떠나자 후사가 없었다. 이로 인해 남처중의 전민에 대한 소유권 분쟁이 이어지자 남씨 문중에서는 남처도의 장자 남국신으로서 계후하였다. 한편 남붕숙의 장증손인 남국신이 남처중을 계후하게 되고, 남국신의 아우 남국량이 무후하게 되었는데 이로 인해 남국신이 승중하게 되었다. 그 결과 남유문을 중심으로 한 여러 문적은 남국신 후손가에게 전해지게 되었다.
남국신 이후 의령남씨는 중앙정계에서 멀어져 밀양에 세거하며 재지사족으로서의 입지를 강화하였다. 그 과정에서 다수의 산송에 휘말리게 되었으며, 특히 19세기 산송과 관련한 소지류는 향촌내의 산송실태를 잘 보여주고 있다. 남성륜이래 남지용에 이르는 시기는 산송이 특히 끊이지 않은 시기로 이들 삼대는 유업을 유지하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산송과 관련하여 의령남씨가의 분묘분포를 나타내면 【표-2】와 같다.
【표-2】의령남씨가 분묘분포현황

세대

이름

분묘위치

비 고

세대

이름

분묘위치

비 고

1

南君甫

宜寧縣

11

南以炘

密陽 士村

丹場面

2

南益胝

失傳

12

南斗章

密陽 士村

3

南天老

靈光 森林

13

南鵬䎘

密陽 安法里

丹場面

4

南乙珍

楊州 隱縣面

14

南壽星

密陽 士村

5

南珪

楊州 隱縣面

南老星

密陽 安法里

6

南致孝

楊州 隱縣面

士村移葬(1987)

15

南處道

密陽 士村

7

南祦

密陽 泗淵村

丹場面

南處中

密陽 士村

8

南右文

密陽 泗淵村

16

南國臣

密陽 士村

9

南弼文

密陽 金谷里

山外面

17

南聖倫

密陽 安法里

南繼善

密陽 金谷里

18

南應圭

密陽 丹陽里

丹場面

10

南榮吉

密陽 甘勿里

丹場面

19

南志容

密陽 金谷里

山外面

【圖-9】의령남씨 가계 : 남국신 이후
의령남씨가에는 남국신에서 남하원에 이르는 호적자료가 남아 있어 이 당시의 노비현황과 가계구성의 일면을 살필 수 있는 매우 용이한 자료이다. 이와 관련한 자세한 가계현황 등은 다음장을 참고 바란다. 한편, 해방이후 선대의 유업을 발전적으로 계승함과 아울러 가내 문적에 대한 정리에는 남상규의 유별난 관심과 노력에 의해 가능하였다. 그는 선대의 문적을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 대여하여 촬영함은 물론, 선대의 누정과 분묘에 대한 대대적인 정비사업을 통해 위선사업에 쏟은 정성이 남달랐다.
창녕조씨 고문서는 밀양시 초동면 오방리 소재의 종가소장 고문서 뿐만 아니라 조치우와 조광익을 향사하고 있는 오봉서원 고문서를 함께 수록하였다. 문중소장 고문서는 명문 문기류의 분재기 9점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외 통문과 完文 및 치부 기록류는 오봉서원과 관련한 문서이다. 이들 중 중요 문서를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문중소장 고문서인 분재기 9점 중 8점이 17세기에 형성된 문서로서 사료적 가치가 높다.  37) 분재기 중 가장 시기적으로 오랜 것으로는 조광익 부처가 자녀 3남매에게 분재한 것으로 추정되는 문서이다.(分財記 1번) 본 분재기는 조광익이 세상을 떠난 후 전란을 겪으면서 미처 문서를 이룩할 겨를이 없다가 17세기 초에 남매가 모여 문서를 작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본 분재기에는 남매간에 노비·전답을 평균분집하는 것을 분재서문에 밝히고 있다.
1632년의 분재기는 조은을 중심으로 한 그 사촌간에 이루어진 유루분재 내용이다. 분재서문에는 조광익 당대에는 다수의 노비와 전답이 존재하고 있었으나 잦은 병화와 거주지 변동으로 인해 자녀에 대한 분재가 미처 이루어지지 못했음을 먼저 밝히고 있다. 그러다가 조은의 얼 삼촌인 鄭癸男이 지난 분재시에 평균분집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관에 정소하여 입지를 받아오는 과정에서 다시 분재하게 되었다. 이로서 본 분재기는 조광익이 그의 자녀에게 분재한 뒤 분쟁이 발생하자 법전의 규정에 의거해 유루분을 확인한 후 평균분집을 실시한 문서이다.
1642년 분재기는 조이복의 처 김씨가 장손인 曹應麟에게 별급분재한 문서이다.  38) 분재 서문에는 별급의 사유를 밝히고 있다. 김씨는 그가 이미 80의 연로한 나이였고 계후한 조은이 후사를 많이 두고 있었는데  39) 특히 장손 조응린이 바야흐로 아무 탈없이 장성하자 그 기쁨이 실로 대단하였다. 이에 김씨는 장손에 대한 총애하는 마음으로 노비전답을 분재하였다.
1646년 분재기는 조이복의 처 김씨가 아들 조은에게 분재한 문서이다. 김씨는 조은으로서 계후한 까닭으로 전 재산을 조은에게 분재하게 되었다. 이에 앞서 사실상의 분재는 본 문서의 작성 이전에 이미 완료된 상태였다. 단지 문서의 작성이 뒤따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김씨의 나이가 84세에 이르고 또한 병중에 있어 지금에야 문서를 작성하게 되었다. 분재 서문의 말미에는 김씨가 그녀의 부모에 대한 봉제사를 아들에게 특별히 당부함과 아울러 손자 중에 성실한 자를 택해 계속 香火가 끊이지 않기를 소망하고 있다. 이는 외손봉사를 당부하며 특별히 봉사조를 마련하고 있는 내용이라 하겠다.
1651년의 분재기 두 건은 조은의 처 송씨가 부부의 재산을 네 아들과 장손 및 중자에게 분재할 당시 작성한 분재 都文記이다. 분재기 서문에는 조이복의 처 의성김씨 부모의 제위에 대한 별도의 노비와 전답을 구분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은 1646년 분재시의 유훈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 것이다. 1688년의 분재 두 건은 조경창이 네 자녀에게 재산을 분재하는 문서이다. 본 문서는 아들과 딸들에게 분재한 각각의 분재기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경우이다. 분재시에는 동일한 분재문건, 혹은 각각의 몫에 해당하는 문서를 분재 대상자 수대로 작성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1722년의 분재기는 조세주가 자녀 6남매에게 균분상속하는 내용이며, 出系子 및 賤妾子에게는 차등분재하고 있다.
【사진-9】오봉서원 전경
【사진-10】오봉서원 소장 자료
이상 창녕조씨가의 분재기는 17세기 자료가 주종을 이루고 있으면서 내용상으로는 자녀 균분상속의 양상을 보여 주고 있다. 이러한 균분상속의 관행은 17세기까지 유지되었으며 18세기부터 서서히 차등상속, 장자위주의 상속양상으로 전환하게 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로 본다면 창녕조씨가 분재기는 이와같은 역사적 전개양상을 잘 대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들 자료는 창녕조씨가에 있어서 曹光益 이후 5대에 걸친 분재문서가 고스란히 남아 있어 창녕조씨가의 경제적 상황을 살피는데 매우 용이한 자료라고 하겠다.
오봉서원은 취원당 조광익과 그의 증조 淨友堂 조치우를 합향한 서원이다. 1780년(正祖 4)에 창녕조씨 문중에서 조광익의 시거지인 밀양시 초동면 오방리에 五峰祠를 건립하고 처음에는 조광익을 독향하였다. 1790년(正祖 14)에는 조치우를 병향하고 예조에 정소하여 淸孝祠로 개칭하였다. 청효사는 정우당의 ‘淸白奉公’과 취원당의 ‘孝友出天’의 뜻을 받드는 뜻에서 청우 두 자를 딴 것이다. 1795(正祖 19)에 밀양 사림들의 공의로 사액을 청원하여 이듬해 1796) 正祖 20에 ‘五峯書院’으로 승호되었다. 그 후 1868년(高宗 5) 대원군의 서원훼철령으로 훼철된 후 ‘오봉서당’으로 개칭하였다.  40)
증빙류에 속하는 완문은 한점이 있다. 완문은 밀양향교에서 오봉서원 도서원에게 발급한 것이다. 1815년 8월의 齋會에서 오봉서원 원생이 납부하는 예납정에 대해 내년 봄부터는 면제해 준다는 내용이다. 오봉서원에서는 본 완문을 서원 홀기에 첨부하여 향후에 증빙자료로 사용하였다.  41)
통문은 모두 1924년에 작성된 문서로서 취원당 조광익의 墓碣銘훼손과 관련한 징치를 주 내용으로 하고 있다.  42) 통문은 陶山書院, 屛山書院, 檜淵書院을 비롯하여 대구향교와 도남서원에서 발한 것이다.
오봉서원 관련 고문서 중에는 사액 후 훼철 이전까지 서원 원생안이 남아 있다. 원생안에는 원생의 명단과 함께 개별 거주지를 밝히고 있다. 원생의 거주지는 절대 다수가 五方洞으로 기재되어 있으나 이 외에도 新基, 赤洞, 魚龍洞, 星岩에 거주하는 원생도 일부 수록되어 있다. 오봉서원은 창녕조씨의 문중서원으로 19세기 후반 밀양지역의 사림으로 존재하면서 종중내의 결속을 도모하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치부기록류에는 이들 외에도 오봉서원 홀기 두 점을 수록하였다.
오봉서원 소장 문적에 대해서는 1987년에 1차적으로 조사 된 바 있다. 이에 의하면 오봉서당에는 전적 255冊이 조사 된 바 있는데  43) 오봉서원 운영과 관련한 문서는 현재까지 본서에 수록된 것이 전부라고 하겠다.  44)
경남 밀양시 단장면 미촌리에 전해오는 의령남씨 고문서 중 본 󰡔古文書集成󰡕에 수록된 자료는 163점에 이르고 있다. 자료는 교령류에서 시문류에 이르기까지 고루 분포하고 있다. 개별 고문서 중에는 소차계장류의 소지류와 호적류 그리고 명문류에 속하는 분재기 자료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특히 이들 고문서 중 15세기 白牌 한 점을 비롯한 임란 이전 백패 1점 및 분재기 2점은 사료적으로 매우 가치가 높은 문서이다.
(1) 교령류
교령류에는 백패 2점과 고신 4점이 있다. 이들 중 백패 두 점은 모두가 임진왜란 이전에 형성된 문서로서 가치가 높다. 1498년(燕山君 4) 백패 南右文이 진사시 3등 8인으로 입격하고서 받은 합격증이다. 또한 1555년(明宗 10) 백패는 南繼善이 진사시 3등 15인으로 입격하고서 발급받은 합격증이다.  45) 남우문이 문과급제를 통해 출사하였으므로 홍패 등이 있었겠으나 현전하고 있지는 않다. 고신으로는 南以炘을 軍資監正에 임명하는 문서와 南鵬䎘을 나이 82세로서 노직을 하사하는 문서가 있다. 남우문 백패는 밀양 의령남씨 문서중 가장 오랜 자료이다.
(2) 소차계장류
소차계장류는 소지, 품목, 호적류 자료로 구성되어 있으며, 의령남씨 고문서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이루고 있다.
소지류 중 가장 오랜 1643년 南以炘소지는 노비소유권 쟁송과 관련한 내용이다. 본 소지에는 임란 이후 혼란기의 노비도망현상과 추심과정이 잘 나타나 있다. 쟁송은 남이흔과 鄭岷 형제간에 발생하였다. 정민 형제는 일찍이 남이흔이 사환하던 노비에 대해 소유권을 주장하였다. 정민 형제의 노비 추심 및 형추 과정에서 노비가 거동이 불편할 정도로 상하게 되었다. 이에 남이흔은 이들 노비가 자신의 소유임을 적극 주장하였다. 노비가 임란 이후 이거해와 혼인하였으며 흉년 등을 거치면서 자신이 소유하게 되었음을 주장하였다.
소지 2번과 3번은 입지발급을 요청하는 소지이다. 소지 2는 흉년을 당해 自賣한 비 三德 모녀에 대한 입지발급을 요청하는 내용이다. 남처도는 흉년을 당해 오갈곳 없이 구걸하는 이들 모녀를 구제한 후 사환하고 있었다. 얼마 후 이들이 자매를 요청하자 이를 수락하고 관에 입지발급을 신청하게 되었다. 이처도는 事目 중에 救活奴婢를 사환하다가 이론이 없을 경우 노비로 삼는다는 규정을 제시하며 입지발급을 요청하고 있다.
1784년의 소지 두 점은 의령남씨의 가계역사를 잘 반영하고 있다. 南鵬䎘은 그의 아내와의 사이에서 남수성과 남노성 두 아들이 있었으나 곧 상처하였고, 나이 50이 지나서 후처를 얻어 南得星과 南益星을 얻게 되었다. 그 후 갑자기 가화가 그치지 않아 남수성과 남노성 부부가 일시에 세상을 떠나게 괴었고, 곧 이어 남수성의 아들 남처도 또한 요절하였다. 한편 남노성의 아들 남처중과 그의 두 아들도 모두 일찍 세상을 떠나게 되었는데 이는 남씨 문중에 있어서는 일찍이 전례 없는 가화가 아닐 수 없었다.  46) 특히 이런 소용돌이 속에 남처중이 소유하고 있던 전민은 그 소재가 불분명한 상황에 이르렀다. 이를 감지한 남씨종중에서는 서둘러 공의를 모아 입후를 의결하였다. 이에 문장 南胤星이 남처도의 장자 남국신으로서 남처중을 계후하기로 결정하고 입후를 요청하는 소지를 올리게 되었다.  47) 이 과정에서 남붕숙의 후처소생 손자인 南處箕가 스스로 남처중을 입후하여 전민을 물려받을 계책을 세우기도 하였다. 남국신을 계후하는 입안이 발급되자 남처기가 위의 계후사실에 대한 쟁송을 제기하였다. 이에 남씨문중차원에서 이에 대해 적극 대처해 승소하였다. 본 자료는 계후사실과 아울러 奴婢·田畓의 소유권을 둘러싼 쟁송이 복잡하게 전개되는 양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표-3】쟁송유형과 관련자료

爭 訟 內 容

관련자료

비 고

입지발급요청

2번, 3번, 5번, 6번

노비쟁송

1번, 2번

山訟

權銖吉

25~38번

金之鐸

10번

金在洪

40~42번

金達均

40~44번

南繼倫

39번.

朴光祚

14~19번, 21번, 22번

朴基興

20번, 23번.

朴允鉉

24번.

族人

呂龜明

8번, 9번

李龍周

3~5번, 12번, 13번.

李演·李廷燮관련

張賢臣

11번, 13번

기타

7번

계후쟁송

소지3은 1759년 南老星과 李龍周간의 산지소유권 분쟁이다. 의령남씨가는 일찍이 한양에 거주하다가 남우 대에 낙향하면서 沙淵里에 분묘를 마련하였다. 이 즈음 의령남씨는 이 일대의 산지에 대해 孫驗石으로부터 買得하여 禁養해 오고 있었다. 그런데 1759년 경에 李龍周가 횡점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이에 남노성은 손험석으로부터 매득한 명문을  48) 첨부하여 산지소유권을 증명하는 立旨 발급을 요청하게 되었다. 이용주와의 산지 소유권 쟁송은 1762년까지(所志 4번) 지속되었으며, 의령남씨의 소유권이 확립되는 방향으로 결정되었다.
남씨와 이씨간의 산지소유권과 관련한 쟁송은 이후 1837년 이들의 손자 대에 이르러서도 재발하였다.(所志 12-13번) 이용주의 손자인 이정섭이 남씨의 선산에 소재한 송추를 베어 파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에 南柄倫 등은 예전 1759년의 소지를 근거로 들면서 자신의 산지 및 송추에 대한 소유를 주장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정섭으로 하여금 남벌한 재목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는 소지를 올리게 되었다.
소지의 대부분은 산송과 관련한 자료들이다. 산송의 대상자는 李龍周, 朴光祚, 權銖吉 등 13인과 전개되었다. 산송 과정에서 투장의 대상이 된 것은 남오, 남필문, 남계선의 분묘가 중심이었다.  49) 이들 중 특히 남필문의 분묘에 대한 투장이 가장 빈번하였으며, 남씨일가에서는 이에 대해 수 차례 等狀을 올리는 등 적극 대처했다.  50) 산송 중에는 남지용이 아들 南啓衡의 분묘에 투장한 洪取大와의 쟁송이 있다. 본 산송은 남지용이 아들의 분묘 마련을 위해 홍취대로부터 산지를 이미 매득하였음에도 후에 홍취대가 방매산지에 분묘를 마련한데서 그 요인이 있었다. 이에 남지용은 아들의 분묘에 투장한 홍취대에 대해 7년간에 걸친 긴 쟁송을 거치게 되었다.
산송소지 중 특히 權銖吉과 관련한 산송이 가장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권수길은 邑吏로서 권세를 업고 의령남씨가의 기송에 적극 대처하였다. 그 결과 본 산송은 1859년에서 1862년에 걸쳐 3년 동안 전개되었다. 본 쟁송에 대해 남씨가에서는 4회에 걸쳐 순찰사에게 의송을 올려 권씨 분묘의 조속한 이굴을 요청하여 제사를 발급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수길 측은 조속한 이굴을 행하지 않고 있었다.
품목 7건은 모두 권수길과 의령남씨간의 산송과 관련한 내용이다. 권수길이 南弼文의 분묘 인근에 투장한 사실로 인해 산송이 진행되었다. 그 과정에서 권수길은 남씨측에서 주장하는 남필문이 退溪 문도라는 사실을 부정하게 되었다. 이는 산송의 본질에서 벗어난 문제이기도 하였다. 권수길은 邑吏로서 권세를 이용해 이굴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쟁송과정에서 官案을 조작하려 하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권수길은 操巖 南弼文이 退溪諸子錄에 올라 있지 않다는 주장과 함께 본 사실에 대한 입지를 청구하는 소지를 관에 올리게 되었다. 이에 남씨측에서는 밀양 사림의 공의를 발의하여 禮林書院, 五峯書院, 德南書院, 七灘祠 등 유림의 명의로 품목을 올리게 되었다. 품목에는 권수길이 주장하는 남필문이 퇴계문도가 될 수 없다는 주장에 대한 반론을 강력 제기함과 아울러 권수길의 조속한 移掘을 요청하는 내용이다.
호적자료 중 가장 오랜 것은 1759년(英祖 35) 南老星 密陽府 準戶口이다. 호적류는 모두 67점으로 의령남씨 소장 단일자료로는 최다이다. 호적자료는 준호구, 호구단자, 호적표로 구분될 수 있으며,  51) 본 의령남씨 호적자료에는 호구단자가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52) 호구단자의 기재형태에 있어서는 1831년 南應規 戶口單子에서부터 거주지기록에 더하여 작성연도를 연호로 표기하고 있는 차이점이 있다. 호적자료의 분포현황을 가계도로 통해 나타내면 【圖-10】과 같다.
【圖-10】호적자료 분포 현황
호적에는 호주 뿐만 아니라 子·弟 등 남성에 대해 매 식년별 개명현황을 남기고 있다. 그 내용은 표와 같다. 개명현황에 나타난 개명횟수에 의하면 최소 2회에서 많게는 5회에 이르기까지 개명사례가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전통사회에 있어 개명이 비교적 빈번한 일이었음을 반영하고 있다. 호적자료에는 호주를 중심으로 한 가계기록 뿐 아니라 호에 소속된 노비현황도 함께 기록하고 있다. 호적자료에 기재된 노비현황은 10구 내외로 소수에 불과하다. 이는 의령남씨가 호적자료의 절대다수가 19세기 자료인 까닭에서 기인한다고 하겠다. 이들 노비는 부모의 성명과 직역 등의 기록 뿐 아니라 솔거·외거 여부와 도망 등을 구분하여 기재하고 있다.
【표-4】호적류 자료에 나타난 개명현황

항열

이름

개 명 내 역

개명횟수

17

南聖倫

◦景煥→指晦(1804,35歲)→明倫(1807,38歲)→聖倫(1813,44歲時)

4

南赫倫

◦奇澤(1799,23歲)→起煥(1801,26歲)→赫晦(1804,29歲)→

赫倫(1807,32歲)

4

南綏倫

◦揆澤(1799,17歲)→陽晦(1804,23歲)

2

18

南應奎

◦應規(1816,25歲)→應規(1828,37歲)

2

19

南志容

◦奎碩(1825,10歲)→周碩(1828,13歲)→根(1834,19歲)→

志容(1837,21歲)

4

南志錫

◦志淑(1852,21歲)→志錫

5

20

南啓衡

◦斗權(1855,25歲)→錫璣→碩振(1866,36歲)→啓衡(1870,40歲)

→啓老(1872,42歲)

5

南啓翼

◦啓珽(1870,25歲)→啓翼(1872,28歲)

2

21

南夏元

◦亥成(1876,25歲)→敬元(1882,31歲)→夏元(1891,29歲)→

敬元(1894,32)

4

南尙元

◦次成(1876,23歲)→柄元(1885,32歲)→炳元(1888,35歲)

3

22

南廷守

◦廷哲(1891,12歲)→廷雲(1894,15歲)→廷守

3

南廷麒

◦且出(1894,11歲)→廷麒

2

(3) 첩관통보류
전령과 첩보로 구성된 이들 문서는 모두 산송과 관련한 내용이다. 전령 3점은 의령남씨가와 李廷燮, 朴光祚, 洪取大와의 산송과 관련한 내용이다. 본 전령에서는 밀양도호부사가 해리에 관련자를 조속히 잡아 올릴 것을 통보하는 내용이다.
첩정 또한 남씨가와 김달균, 洪取大간의 상송과 관련한 내용이다. 첩정 1은 穿火面 錦溪里 두민이 수령에게 올린 첩보이다. 두민에는 피송자인 김달균이 확인되고 있다. 첩정에 의하면 금계리에서는 남지용의 분묘 설치를 인정하기로 합의한 사실 중심으로 하고 있다. 아울러 향후 이와 관련해서 다시는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것임을 밝히는 내용이다. 첩정 2는 홍취대와 남지용간의 산송과 관련한 내용이다. 본 산송에 대해 수령이 丹場面 풍헌에게 사실확인을 지시한데 대한 단장면 풍헌의 회신이다. 풍헌은 홍취대를 직접 찾아가 확인한 결과 그가 산지를 남씨에게 10냥에 팔았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그 결과 남지용이 주장하는 산지매득의 사실이 인정됨을 보고하고 있다.
(4) 증 빙 류
증빙류는 立案, 完文, 侤音, 手標로 구성되어 있다. 입안은 노비매매에 대한 소유권을 증명하는 奴婢賣買立案이 3점이며 繼後立案이 1점이다. 남붕숙은 1712년(肅宗 38)에 자인(경북 경산)에 사는 成時命으로부터 奴 正命을 매득하였다. 이후 1726년에 다시 밀양에 사는 張順杰에게 정명을 방매하였다. 노비 정명을 매득한 장순걸은 입안발급을 요청하는 소지와 아울러 매매명문을 점연하여 관에 제출하였고 그 후 관에서는 방매자 및 증인, 필집에 대한 사실확인 후 입안을 발급해 주었다. 의령남씨가에 남아 있는 3건의 노비매매입안은 모두가 이와 같이 입안발급 요청소지, 매매명문, 관의 초사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관에서 발급안 입안을 완전히 갖춘 문서이다. 계후입안은 남처도의 장자 남국신으로서 남처중을 계후함을 증명하는 문서이다. 본 계후사실과 관련해서는 본 계후입안 외에도 계후사실과 관련한 입지와 소지가 함께 남아 있어 참고가 된다.  53)
완문은 남택륜과 이씨문중간의 산송 관련 자료이다. 의령남씨에서는 이씨 문중에 대해 현재 설치된 당해 분묘에 대해서만 묘지 설치를 인정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러한 내용을 골자로 상호 양해하기로 하고 이정섭을 비롯한 이씨가에서 이후로는 분묘를 마련하지 않을 것을 다짐하는 내용이다.
다짐(侤音) 또한 산송과 관련한 것이다. 고음 1번은 남응규와 박기흥과의 산송에 있어 박기흥이 낙과한 내용으로 이에 박흥기는 자신의 분묘를 내년 3월까지 移掘할 것을 다짐하고 있다. 나머지 다짐(侤音)도 南必倫, 南應奎 등과 朴光祚와의 산송관련 내용이다. 수표 또한 산송과 관련한 내용으로 남국신, 남지용 등과의 산송에서 낙과한 金之鐸 등이 조속히 분묘를 이굴할 것을 증명하는 내용이다.
(5) 명 문 류
분재기 8점은 南右文이래 南處道에 이르는 재산의 분재내역과 관련된 문서이다. 이들 분재기에는 노비 뿐만 아니라 전답의 소유관계도 자세히 밝히고 있어 의령남씨가의 경제적 처지를 살필 수 있는 용이한 자료이다. 또한 이들 분재기에는 의령남씨가의 시련의 역사도 반영하고 있다. 대표적인 문서가 8번 문서이다. 분재 서문에서 南鵬䎘의 처 박씨는 일찍이 남편을 여의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네 아들이 모두 요절한 절박한 심정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그녀의 나이 90에 이르는 동안 장자 부부가 요절한 후 부득이 南國臣으로서 계후하게된 사정을 적고 있다. 그 결과 그녀는 가전 田民을 증손자 남국신을 비롯한 증손녀에게 분재하게 되었다. 본 분재에서는 아들 南老星과 孫子 南處中의 재위조를 별도로 마련하고 있다.
명문 한 점은 1759년 남노성과 李龍周 사이의 산송에 있어서 산지소유권을 증명하기 위해 함께 제출한 산지매매명문이다.(所志類 3번)
(6) 서간통고류, 치부기록류, 시문류
통문은 남필문과 퇴계와의 교유사실에 대해 도산서원에서 밀양향교로 보낸 문서이다. 이후 1861년에 邑吏 權銖吉과의 산송에서 남필문의 학행과 관련한 시비가 일어난 바 있었다. 복제는 남지용의 初終時 작성된 문서이다. 이 외에도 간찰을 초한 것으로 추정되는 「簡牘」이 한 점 있다. 본 간독의 작성시기와 주체는 수록된 인명기록 중 1674년 경에 밀양부사로 재직한 바 있는 李喜年의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남두장이 작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하의 내용은 목록 참고 바람.)
본서에 수록한 자료는 밀양에 거주하는 창녕조씨, 의령남씨 소장 자료이다. 이들 문중별 가계전통을 살펴보면 대체로 임란이전에는 상경종사를 통해 다수의 사환자를 배출하는 등 사회경제적으로 상당한 지위를 점하고 있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는 창녕조씨의 조말손·조치우·조광익·조호익, 의령남씨의 남을진, 남오, 남우문 등이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 밀양에 정착한 이후 중앙정계와 연결되지 못하고 재지사족으로 학문활동에만 전념하면서 한편으로는 밀양의 사론을 주도하는 위치를 견지하고 있었다.
각 가문별로 가전하는 고문서에는 각기 특징적인 면이 있다. 창녕조씨 고문서는 17세기 초에서 18세기에 이르는 분재자료와 오봉서원 운영관련 치부류가 중심이다. 분재기에는 밀양 이거기를 전후한 경제적 상황을 대변하고 있다. 오봉서원관련 자료는 문중서원운영을 통한 문중내 결합양상을 잘 나타내고 있다.
의령남씨 고문서 중에는 15세기 남우문 백패를 비롯하여 다수의 16세기 분재기가 있다. 특히 이들 분재기는 가계의 역사뿐만 아니라 경제적 실상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