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서에 수록된 고문서는 함안지방에 세거해온 순흥안씨 죽계(竹溪) 안희(安憙) 종가의 가장(家藏) 문헌이다. 이 집안의 전적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진 것은 1994년경의 일이다. 당시 본 연구원은 경남지역의 고문서 조사 발굴에 집중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만나게 된 분이 순흥안씨가의 전적을 관리하고 계시던 안수향(安洙香)씨이다.
이후 상술할 가계에 대한 설명에서 다시 이야기되겠지만, 안수향씨는 죽계의 종손은 아니다.
계보상으로 살펴보면 그의 직계 종손은 안승만(安承滿, 1938 - )씨이다. 종가에 보관되어 전하던 이 전적들은 안승만씨의 아버지 안주호(安周鎬)씨에 의해
로 관리가 이전되었다.
만주의전(滿洲醫專)을 졸업하고 의사생활을 하느라 도시에서 생활하게 된 까닭에 종가의 문서 관리가 어려웠던 것이다. 더구나 무후(無後)한 안교학(安敎學)의 양자로 들어가 독자로 성장한 탓에 종가의 관리를 일시 위임할 마땅한 사람이 없었던 점도 이러한 결정에 한몫을 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안주호씨의 장자인 안승만씨는 현재 미국으로 이민 간 상태이고, 그 동생들도 서울 등 타지에 거주하고 있다. 도시화와 산업화의 흐름 속에서 재실로 이전된 문서들이 다시 종가로 돌아가기는 힘들었던 것이다. 순흥안씨의 세거지인 두릉리에 평생을 거주해 왔고, 또 문중일에 발벗고 나서는 안수향씨가 재실관리를 주로 하게 되면서 이 전적들 역시 돌보게 되었다.
1995년에 정리
및 촬영을 마친 안씨 가문의 자료는 다시 안수향씨가 관리하게 되었다. 그런데 1997년경 이 지역에 고전적 전문 털이범이 횡행하여 불행하게도 이 자료도 함께 도난을 당하게 되었다.
따라서 안씨가의 원본 고문서는 현재 그 소재를 알 수 없는 상태이고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보존되어 있는 마이크로필름이 사실상의 원본 구실을 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고문서·고서 등의 고전적의 가치가 그 사료적 가치, 문화적 가치보다는 거래되는 현금의 가치로 인식되면서 이러한 자료에 대한 도난이 전국적으로 횡행하고 있다. 고전적의 주요 소장처인 종가나 서원이 주로 산업화에서 소외된 농촌지역에 위치하고 있는 까닭에 소수의 노인들을 제외하고는 이것을 지켜낼 사람이 없다는 점 또한 이러한 도난의 직접적인 배경이다. 그러나 도난을 당하지 않더라도 전적을 안전하게 보존하는 시설과 시스템을 갖춘다는 것은 개인 혹은 문중의 차원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단기적으로는 도난을 방지하고 장기적으로는 우리의 중요한 문화유산을 잘 관리·보존하기 위하여 국가, 지방자치체, 대학 및 박물관 등이 함께 노력해야 할 것이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안씨가의 문서 전량을 본 연구원에서 마이크로필름화 해두었기 때문에, 지금은 그 소재를 알 수 없는 이 문서들을 이렇게 자료집으로나마 복원할 수 있는 점이다. 자료집의 간행이 학문적 연구에 대한 기여뿐만 아니라 문서의 유실을 가슴아파하시는 문중분들에게도 위로가 되기를 기원하는 바이다. 그러나 원본이 없는 까닭에 지나치게 작은 글씨나 얼룩에 의해 판독이 힘든 부분은 자료집을 편집하는 과정에서 보완할 수 없었다. 이 점에 대한 독자들의 양해를 바란다.
함안의 순흥안씨는 여말의 안향(安珦)의 후손이다. 순흥안씨는 고려조에 흥위위보승별장(興威衛保勝別將)을 지낸 것으로 알려져 있는 子美(자미)를 시조로 한다. 자미는 永儒·永麟·永和 삼 형제를 두었는데, 이들이 오늘날 소위 순흥안씨 一·二·三파의 파조이다. 일파는 永儒→孚→裕(珦)로 이어지는 안씨가의 종파(宗派)로서 경상남북도를 비롯한 전국에 분포되어 있다. 영린(永麟)의 후손인 이파는 주로 영남과 호남 경기지방에 세거하였고, 삼파는 경기일대와 현재의 경남일대에 집중적으로 세거하였다.
함안에는 일파와 삼파 계열이 모두 들어와 조선중후기에 걸쳐 함안의 주요 사족으로 성장하였다. 본서의 주인공인 함안 두릉의 안씨들은 일파인 안향의 후손들이다.
안향의 11세손인 안창공(安昌恭)과 동생 안창렴(安昌廉)이 기묘사화로 말미암아 함안으로 낙남하게 된 것이 이곳 안씨 역사의 시작이다. 안창공·창렴 형제의 아버지는 순흥안씨 1파내 다음 분지를 이루는 네 형제 중 세째인 안수(安琇, 1390-?)이다. 직장(直長)의 벼슬을 지내었기 때문에 안수계열을 직장공파로 부른다. 안수는 그 아버지 안종약(安從約, 1355-1424), 조부 안원(安瑗) 양대에 걸쳐 고려에 대한 절의를 지키고자 했던 뜻을 이어받아 벼슬을 버리고 경기도 파주에 거주하였다.
직장공파 계열과 달리 3파 영화의 후손 안축(安軸, 1287-1348)은 여말에 중앙에 진출하였고, 그 손자 안경공(安景恭)은 조선 건국에 직접 참여하여 개국공신 3등에 책훈되었다. 그 후손인 안관(安灌)은 혼인관계를 따라 함안으로 이주해 오면서 함안의 주요 성씨로 자리 잡게 되었다.
〈가계도1〉 함안 순흥안씨의 상대(上代)
안창공과 안창렴 형제가 낙남하게 된 계기가 된 것은 기묘사화로 인해 순흥안씨 가문이 큰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다. 중종(中宗) 14년(1519)에 일어난 기묘사화는 조광조(趙光祖)를 중심으로 한 사림(士林) 개혁세력과 훈구세력이 충돌한 사건으로, 조광조의 사사(賜死)로 상징되듯이 개혁세력에게 큰 피해를 남겼다. 그러나 사사된 조광조를 위시한 기묘사화의 피해자들은 사림정치가 구현되는 16세기 중기 이후에는 유교이념의 구현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바쳤던 순교자로서 존경받게 되었다.
개혁의 실패가 가져온 피해가 역설적으로 이들에게 정통성을 부여한 것이다. 기묘사화와의 연관성을 순흥안씨 가문 내에서 살펴보기 위해 작성한 것이 〈가계도 2〉이다.
〈가계도 2〉 기묘사화와 순흥안씨
기묘사화는 특히 안당(安瑭, 1461-1521)과 그의 아들 처겸(處謙)·처함(處諴)·처근(處謹) 삼 형제에게 큰 피해를 남겼다. 안당은 정난공신(定難功臣) 3등에 책록되었고, 중종 초부터 고관에 올라있었다는 점에서 훈구적 기반을 가진 인물이다. 그러나 동시에 조광조가 성균관을 통해서 천거되었을 때 그의 탁용에 앞장섰고, 또한 안당 자신이 우승지에 임명될 때는 조광조 세력의 지지가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그의 세 아들들 역시 조광조에 의해 추진된 현량과(賢良科)에 급제하였으며, 조광조와 개인적인 교유를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기묘사화의 논의 과정에서 현량과의 파방(罷榜)과 안당의 파직이 지속적으로 거론되었다.
그러나 이보다 결정적인 타격은 중종 16년(1521)에 일어난 안처겸의 옥사에 의해서이다. 이 옥사는 처벌된 사람만 해도 100여 명이 넘는 대옥사일 뿐만 아니라 조광조 세력에게 역당(逆黨)이라는 오명을 안겨준 사건이었다. 사건은 안처겸(1486-1521)이 처가에서 종실 시산부정(詩山副正) 정숙(正叔), 권전(權磌) 등과 국왕의 측근에 있는 간신을 제거하여 국세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을 나눈 것을 송사련(宋祀連)이 고변함으로써 시작되어, 남곤(南袞)·심정(沈貞) 등의 여러 대신을 살해하려 하였다는 혐의로 기묘사화에 이미 피해를 입은 조광조 일파 등
에 대한 대대적인 치죄(治罪)가 이루어졌다. 이로 말미암아 어느 정도 진정국면으로 들어섰던 조광조 세력에 대한 처벌이 다시 재개될 수밖에 없었고, 옥사의 성격이 역모로 발전하게 됨에 따라 피화 범위와 처벌의 정도가 한층 더 가혹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 옥사의 핵심인물인 안처겸과 그 동생 처근은 사사되었고, 안처함은 간신히 죽음을 면했다. 실제 안처겸의 모의를 안당이 개입하여 만류시켰으나 그 역시 불고지죄로 교형(絞刑)에 처해졌다. 안당의 6촌 형인 안기(安璣)의 아들로 기묘명현으로 추앙되는 안처순(安處順, 1492-1534)은 다행히 어머니의 시병을 위해 낙향하였던 연유로 겨우 화를 면하였다. 안당 아들들과 마찬가지로 현량과에 급제한 안정(安珽, 1494-1548)은 안처순의 조카로 안처겸의 옥사 사건으로 혹독한 고문 끝에 유배당하였다. 또 다른 피해자인 안찬(安瓚, ?-1519)은 의관이기는 하나 안당, 조광조와 깊은 교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기묘사화 때 화를 입은 유림들의 신원을 상소하였다가 장류되어 가던 도중 사망하였다.
이와 같이 기묘사화 그리고 그에 이은 안처겸의 옥사 사건은 순흥안씨 일파에게 깊은 타격을 주었다. 특히 서울에 거주하며 관력을 이어가던 안종약의 두 아들, 구와 경의 후손이 직접적인 피해를 입었다. 셋째 아들인 안수(安琇)의 아들들인 안창공·창렴·창직이 직접적인 화를 당한 기록을 찾을 수는 없지만,
당시 정황으로 보아 함께 서울에 거주하던 안창공 형제들 역시 기묘명현들과 일정정도 교유관계를 지니고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종질인 안당과 그의 아들들의 연이은 죽음에 직면하여 이들 형제들은 낙남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안창공과 안창렴이 함안으로 이주한 데 비해, 막내인 안창직 후손은 강원도 춘천으로 이주하였다. 안창직의 강원도 이주 역시 기묘사화가 그 배경은 되겠으나, 직접적인 이거 경위는 알 수가 없다.
안창공과 안창렴은 기묘사화를 피해 처향인 함안으로 낙남하였다. 안창공의 처부 이개지(李介智)는 재령이씨로 이맹현(李孟賢, 1436-1487)의 부친이다. 이개지의 아버지인 이오는 고려말에 급제하였으나 벼슬을 버리고 함안 모곡(茅谷)에 은거하였고, 그 아들인 개지가 진주의 대벌족인 하경리(河敬履)의 사위가 됨으로써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여기에 손자인 이맹현이 세조대에 발탁되어 이름을 떨치게 되자, 재령이씨가는 명문가로서의 위상을 굳히게 되었다. 안창렴의 처부인 성주(星州) 이씨 이존인(李存仁) 역시 함안에 기반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창공과 창렴 형제가 화를 피해 함안으로 옮겨 간 것은 이미 그곳에 든든한 재지 기반을 마련하고 있었던 처가의 영향이었다.
기묘사화로 인해 함안으로 낙남한 후, 안창공 → 우({玉+祐}) → 공벽(公璧)·공진(公軫) 대에 이르기까지 과거나 관직과는 거리를 두고 조심스러운 행보를 보였던 순흥안씨가는 공진의 두 아들 안민(安慜)과 안희 대에 이르러 다시 활기를 띠게 된다. 안민(1539-1592)은 1591년(선조 24)에 처음 출사하여 사헌부 감찰을 지내다가, 임진왜란이 나던 해에 김해에 내려와 있었다. 왜란이 나자 승병들을 이끌고 싸우다가 사망하였다.
그 아들 신갑(信甲, 1564-1597)은 아버지의 사망소식을 듣고 의병을 일으켜 복수하였고, 다시 정유재란 때에도 전공을 세웠는데 그 와중에 왜의 대군을 만나 자결하고 만다. 후에 안신갑의 효성과 충심이 조정에 알려져 정표가 내려졌다.
안민의 동생인 안희(1551-1613)는 간송(澗松) 조임도(趙任道), 오봉(梧峯) 신지제(申之悌)와 같은 인물들과 교유가 있었고, 문과에 급제하여 환로에 올랐다. 그러던 중 임진왜란을 만나 의병을 지휘하며 적에게 항거하였다. 난후에도 대구부사를 지내는 등 관직을 계속 이어갔고,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 식암(息庵) 황섬(黃暹) 등과 교유하였다. 또한 남명이 수년간 거주하였던 김해에 신산서원(新山書院)을 건립하는 일에 참여하였다.
김해에 남명이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1530년(중종 25)의 일이다. 친가 및 외가의 세거지인 삼가현(三嘉縣) 토동(兎洞)에서 처향인 김해 탄동(炭洞)으로 이주하여 문인(門人)들과 강학·논도하였으며, 그러한 공간으로서 산해정(山海亭)이 지어졌다. 1545년(인종 1)에는 다시 삼가 토동으로 환거하였으며, 61세 되던 1560년(명종 15)에는 진주목 덕산(德山)의 사륜동(絲綸洞)으로 이주하여 산천재(山川齋)를 짓고 제자들과 함께 강론하였다. 남명이 운명하자 그의 제자들은 남명의 숨결이 묻어있는 산천재 부근에는 덕천서원(德川書院)을, 삼가현 토동에는 회산서원(晦山書院)을, 김해 탄동에는 신산서원을 건립하였다.
1588년(선조 21)에 이루어진 신산서원의 건립은 당시 경상감사 윤근수(尹根壽, 1537-1616)와 김해부사 하진보(河晉寶, 1530-1580)가 향인들과 의논하여 주도하였다. 이때 안희는 실무를 주관했던 것으로 보인다.
왜란으로 말미암아 산해정과 신사서원이 모두 소실되자, 1608년(선조 41) 안희는 황세열(黃世烈), 허경윤(許景胤)과 더불어 산해정 옛터에 신산서원을 중건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안희가 남명학파와 매우 긴밀한 관계를 가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짐작된다.
안민, 안신갑 부자의 의병활동, 안희의 관력 및 명유(名儒)들과의 교유 등으로 인해 함안 순흥안씨는 이 시기에 최전성기를 맞게 되었다. 그러나 현달한 선조를 중심으로 다시 파가 나누어지는 것이 상례이듯, 함안 순흥안씨도 안민과 안희 계열로 분지된다. 이러한 분파를 더욱 구체화시킨 것은 안민 계열의 창원 이주이다. 창원으로의 이주 경위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안민의 둘째 아들 안명갑(安明甲, 1574-1651)의 이주로 말미암은 것으로 추측된다. 안민의 장자인 안신갑은 정유재란에서 순절하기까지 자식을 두지 못하였고, 막내아들인 안영갑(安英甲)은 아들을 두지 못하였다. 따라서 실질적으로 창원의 순흥안씨는 안민의 후손이자 그 2자 안명갑의 직계후손들이다.
이주하지 않고 함안 두릉에서 계속 거주하였던 안희 후손들이 바로 본서의 주인공들이다. 안민 후손과 안희 후손은 지역적 분리에 더하여 안민과 안희의 추향 문제로 대립하면서 한층 더 분파적인 속성을 뚜렷이 하게 되었다. 19세기 전반기에 벌어진 순흥 용연사(龍淵祠) 추향 시비가 그것이다. 안희 추향 논의에서 시작된 것이 안민과 안희 후손의 경쟁으로 말미암아 심각한 감정대립으로 치달았고, 결국 용연사 추향은 모두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 사건은 단순히 문중 내 시비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안민 후손과 안희 후손 사이에 뚜렷하게 분리된 정체성이 존재하였으며,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이것이 더욱 분명해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가계도 3〉
안희 대에 전성기를 맞이하였던 순흥안씨가는 이후로는 과거나 관직에 있어서 특출난 인물을 내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안희의 4대손인 안성흥(安聖興, 1683-1746)은 1728년(영조 4)에 발생한 이인좌의 난에 가산을 풀어 관군의 군량미를 대었다.
이 은혜를 입은 군인들이 난이 평정된 후 여러 차례 안성흥의 포장(襃獎)을 요청하였고, 후에는 인근 유림의 공의로 조정에 알려져 1759년(영조 35)에 안성흥은 통선랑(通善郞)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추증되었다.
안성흥의 아들인 안응서(安應瑞, 1708-1754)는 족보상에 이상정(李象靖, 1711-1781)의 문인으로 기록되었다. 이는 이 시기 죽계가문의 향방을 드러내는 기록이다. 신산서원 건립과정의 참여를 통해 드러나듯이 안희 대에는 남명학파와 긴밀한 관련을 가졌다고 한다면, 이후 남명학파의 몰락으로 많은 남명문도들이 남인의 길을 택한 것과 마찬가지로 죽계가문도 남인과의 친연성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입장변화는 다른 인물의 기록에서도 찾을 수 있다.
안성흥의 둘째 동생인 안무흥(安武興, 1692-1756)의 손자인 안몽백(安夢佰, 1762-1838)은 1803년(순조 3)에 생원시에 입격하였으며, 족보에는 정종로(鄭宗魯, 1738-1816)의 문인으로 기록되었다. 정종로는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의 6대손으로, 중년에 이상정의 문하에 나아가 영남학파의 학통을 계승한 인물이다. 안희, 안응수(安應璲, 1728-1793)의 행장과 묘갈을 정종로가 찬한 것도 안몽백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 외에도 안홍범(安弘範), 안우룡(安羽龍) 등 다수의 순흥안씨가 인물들이 족보에 입재(立齋) 문인으로 기록되었다.
이 시기에 작성되어진 소지류에서 안몽백의 이름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이는 당시 안몽백이 종손과 더불어 가문의 대소사를 함께 주관해 가던 인물이었음을 보여준다. 안희와 안민, 안신갑을 배향하기 위해 두릉서원을 건립하고, 당대의 명유들에게 선대의 묘갈 및 행장을 청하고, 또 스스로 직접 찬하기도 하면서 선대에 대한 현양사업을 주도하였던 것이다.
두릉서원에 안희와 안민·안신갑 부자를 함께 배향함으로써 화해의 분위기를 만들어 낸 안씨 가문은 이후 두릉서원과 족계를 중심으로 문중을 이끌어 나갔다. 이 족계는 현대에까지 이어져 1970년까지 그 운영기록을 남기고 있다.
〈가계도 4〉
임진왜란의 의병활동과 이인좌의 난에 가산을 내어 군량미를 대는 등 그 충절로 이미 이름이 높았던 순흥안씨가는 일본 제국주의를 만나 다시 한 번 그 이름을 드러내게 된다. 3·1운동에 순흥안씨가 인물들이 대거 참여한 것이 그것이다. 안재성, 안재옥, 안재원, 안재형, 안재휘 등이 함안읍에서 3·1운동을 주도하였고 그 결과 징역을 살거나 만주로 피신하였다.
이러한 연유로 안씨가에는 당시 일본 경찰의 신문조서와 재판관련 기록이 전하고 있다.
본서에 수록된 자료는 총 206점이다. 형태상으로 구분할 때 낱장 혹은 낱장을 점련한 형태의 고문서는 192점이고, 간단한 책의 형태를 갖춘 장부류 자료인 성책고문서는 5종 12점이다. 그 외 고문서라고 하기 어려운 문집초본과 가승이 각 1점 실려 있다. 세부 분류 안에서 다시 언급하겠지만, 그 자료적 가치를 고려하여 두 자료 역시 수록하였다. 수록된 자료의 구성과 점수를 간략히 정리한 것이 〈표 1〉이다.
〈표 1〉 수록 고문서의 구성과 점수
대분류
|
소분류
|
점수
|
1
|
敎令類
|
1
|
白牌
|
1
|
20
|
192
|
2
|
告身
|
18
|
3
|
追贈敎旨
|
1
|
2
|
疏箚啓狀類
|
1
|
龍淵祠 追享是非
|
25
|
115
|
2
|
安聖興 襃獎 요청
|
17
|
3
|
咸從魚氏 旌閭 요청
|
10
|
4
|
山訟
|
58
|
5
|
기타
|
5
|
3
|
牒關通報類
|
1
|
關
|
2
|
17
|
2
|
傳令
|
3
|
3
|
牒呈
|
6
|
4
|
書目
|
4
|
5
|
甘結
|
2
|
4
|
證憑類
|
1
|
繼後立案
|
2
|
14
|
2
|
立案
|
1
|
3
|
侤音
|
10
|
4
|
不忘記
|
1
|
5
|
書簡通告類
|
1
|
通文
|
13
|
14
|
192
|
2
|
簡札
|
1
|
6
|
置簿記錄類
|
1
|
置簿
|
6
|
7
|
2
|
賻儀單子
|
1
|
7
|
詩文類
|
1
|
試券
|
3
|
5
|
2
|
祭文
|
1
|
3
|
詩文
|
1
|
8
|
成冊古文書
|
1
|
宗案文簿
|
2
|
12
|
2
|
秋收記
|
1
|
3
|
宗契置簿
|
3
|
4
|
宗契案
|
1
|
5
|
時到記
|
5
|
9
|
文集草本 및 家乘
|
1
|
文集草本
|
1
|
2
|
2
|
家乘
|
1
|
다른 집안의 가전 문서의 구성과 비교해 볼 때, 소지류(所志類)가 유달리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눈에 띈다. 소지류의 내용 가운데 다수를 차지하는 산송 외에도 큰 시비 사건이 있었고, 충신과 열녀에 대한 포장(襃獎)을 요청하는 일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3년마다 작성하는 까닭에 집집마다 많은 수가 전하는 호적은 전혀 보이지 않고, 간찰과 시문이 적은 것 또한 특징이다. 경제적 부를 겸비하기 마련인 양반가는 부의 상속과 관련한 각종 분재기와 이 부의 경영과정에서 발생하는 매매문서, 즉 명문을 많이 소장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순흥안씨가에는 분재기와 명문이 단 한 건도 전하지 않는다. 본서의 말미에 실린 가승에 이에 대한 언급이 보이는데, 화재로 인해 호적, 분재기 등의 문서들을 잃어버렸다고 한다. 이 때문에 여타 양반가 소장 자료와는 좀 다른 구성을 보여주고 있다.
교령류는 3종 20점으로, 백패(白牌)·고신(告身)·추증교지(追贈敎旨)로 구성되어 있다. 각 1점씩인 백패와 추증교지는 안몽백의 생원 입격과 무신난에 군량미를 댄 안성흥의 충절을 인정하여 통선랑 사헌부지평에 추증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교령류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고신은 모두 안희의 것으로 1599년부터 1608년 사이에 발급된 것이다. 임진왜란 이전의 것은 없고 모두 난후의 관력기록을 담고 있다. 1599년(선조 32)에 정6품인 승훈랑(承訓郞) 호조좌랑(戶曹佐郞)에 제수된 후 1608년(선조 41)에는 정3품 통훈대부(通訓大夫) 대구도호부사(大邱都護府使)에 임명되었다. 대구부사를 끝으로 안희의 관력이 마무리되므로, 이 고신은 안희가 받은 거의 마지막 임명장일 것으로 추측된다.
소차계장류는 모두 115점으로, 실상 낱장 고문서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호적이나 상소문 등은 전혀 전하지 않고 모두 해당 읍의 수령이나 관찰사에게 시비를 가려줄 것을 요청하는 소지류이다. 문서의 종류로는 상서(上書), 원정(原情), 등장(等狀), 의송(議送), 소지(所志), 도형(圖形) 혹은 이러한 문서의 초본(草本) 등으로 구별될 수 있으나, 문서의 종류보다는 사건을 중심으로 분류하는 것이 독자의 이해를 도울 것으로 판단하였다. 즉 형태분류가 아니라 내용분류를 우선시 한 것이다.
내용분류에서는 먼저 산송(山訟)에 관한 소지류를 분리하였다. 조선후기에는 어느 집안이나 묘지와 선산을 둘러싼 시비가 많았던 탓에 산송이 소지류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경우가 많다. 순흥안씨가도 마찬가지여서 산송관련 소지류가 소차계장류의 절반에 조금 못 미치는 58점이다. 시기별로 시비가 붙은 상대방, 시비의 대상이 된 묘지 및 선산은 달라지지만 산송이라는 비교적 단일한 사안을 다룬다고 생각되어 하나로 분류하였고, 소차계장류 안에서 순서는 기타 소지류를 제외하고는 맨 나중으로 설정하였다.
다음으로는 19세기 초에 순흥안씨가의 최대의 이슈였던 안희 추향 시비 사건이다. 이 사건을 다룬 문서가 25점이나 될 뿐만 아니라, 함안 순흥안씨의 분지와 그 파 사이의 대립을 내용으로 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사안이라 생각되어, 소차계장류 안에서는 가장 먼저 수록하였다. 다음으로는 무신난에서 군량미를 내어 기아에 처한 관군을 먹인 안성흥의 충절을 알리고 이에 합당하게 포장(襃獎)해 줄 것을 요청한 소지류이다. 처음에 이일을 주도한 인물들이 직접 안성흥의 은혜를 입었던 군인이었던 까닭에, 속오군(束伍軍) 등의 신분을 가진 평민들이 소지를 올리고 있다. 그러던 것이 점차 지역 유림의 공감을 얻어 나중에는 유림들이 연명 소지를 올리게 되었다. 평민들이 작성한 문서를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중요한 자료이다. 다음으로는 안성흥의 증손인 안홍헌(安弘憲)의 둘째 아들인 안봉식(安鳳植)의 처인 함종어씨(咸從魚氏)가 요절한 남편을 따라 순절한 사건이 발생하자 함종어씨의 정절을 가상히 여겨 정려를 내려줄 것을 요청한 소지류이다. 이 사건을 다룬 것은 모두 10점이다.
그 외 이 분류에 들지 않는 단편적인 사안의 소지류가 5점 전한다. 모두 각각의 사안을 다루고 있고 또 그마저도 문서의 결락으로 인해 한 사건의 전말조차 제대로 알기 어려운 경우가 있다. 하지만 혼자된 장모의 가산경영을 도와주고자 하는 사위의 의송, 잃어버린 말에 대한 입지(立旨) 요청, 환곡 견감 등 다루고 있는 사건이 이채롭다는 점에서 오히려 더욱 중요한 자료들이라고 생각된다.
5종 17점의 자료로 구성된다. 산송과 관련된 것이 대부분이고, 아닌 경우로는 안성흥의 재포장을 요청하는 유림의 의송과 그에 대한 영제(營題)를 보고하는 첩정 2점과 함종어씨의 정려 요청에 대한 사안을 보고하는 첩정과 서목 각 1점이 있다.
산송과 관련된 관문서가 많은 이유는 산송 과정에서 관부 사이에, 혹은 관과 민 사이에 지시·보고 등 추가적인 문서가 많이 생산되기 때문이다. 산송이 많을수록 이와 관련된 문서들도 많아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먼저 산송의 시비를 가리기 위한 현지조사를 하급기관에게 명하는 전령(傳令), 현지조사의 결과를 상부에 보고하는 서목(書目)이 있다. 앞의 소차계장류로 분류된 도형 또한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는 문서이다. 또 산송에 패소한 측에게 이장을 지시하는 감결(甘結), 이장의 지연에 대해 보고하는 첩정, 이장을 연기한다는 전령(傳令)과 이장 명령을 이행하지 않는 패소자 측의 묘를 관에서 강제로 이장하는 독굴(督掘)에 대한 명령문인 전령과 이에 대한 보고서인 서목이 있다. 좀 특이한 문서로는 진해현에서 사헌부로 올린 관문이 있다. 산송 시비 와중에 사람이 죽는 일이 발생하였기 때문인데, 형조가 아닌 사헌부로 관문을 보낸 것이 특이하다. 이 관문을 순흥안씨 집에서 보관할 수 있었던 것은 원문서가 아니라 등서(謄書)한 것이기 때문이다.
증빙류는 4종 14점으로 계후입안과 노비매매입안, 불망기(不忘記) 각 1점과 10점의 다짐(侤音)으로 구성되어 있다. 형태상으로는 다양해보지만, 불망기와 다짐은 모두 산송과 관련된 것이라 그 내용은 단조롭다. 즉, 다짐과 불망기는 모두 산송에서 패소한 측이 언제까지 이장하겠다고 하는 약속의 내용이다. 노비매매입안은 한 건이지만 4점의 문서가 점련되어 완결된 문서이다. 노비를 방매(放賣)하고 난 후 이 매매사실에 대한 공적 확인인 입안(立案)을 내려줄 것을 요청한 소지가 그 첫 번째 문서이고, 이 소지를 제출할 때 증빙서류로 제출한 노비매매 명문이 그 두 번째 문서이다. 다음으로는 매매 사실을 증인과 필집(筆執)으로부터 확인받은 초사가 점련되어 있고, 마지막으로 이 매매 사실을 공증해 주는 입안이 발급되어 붙어 있다. 두 건의 계후입안은 안득남(安得男, 1585-1624)의 양자와 안윤흥(安潤興, 1690-?)
의 양자 건을 관에서 공증해 주는 것이다. 안득남은 안희의 장자로 무자한 채로 사망하여, 그 동생 안대남(安大男, 1599-1660)의 둘째 아들인 안국반(安國磐, 1637-?)을 양자로 세웠다. 안윤흥은 안국반의 셋째아들 안세열(安世說)의 장자이다. 무자한 그에게 종손인 안성흥의 둘째 아들 한징(漢徵)을 양자로 들였다. 한징은 후에 안응호(安應琥, 1712-1745)로 개명하였다. 족보에 실려 있는 것은 개명한 이름이므로, 이 글의 가계도에서도 응호로 표기하였다. 모두 안희의 직계가 양자를 받은 쪽이거나 준 쪽이기 때문에 이 문서들이 종가에 보관되었던 것이다.
서간통고류는 통문(通文) 13점과 간찰(簡札) 1점으로 구성되어 2종 14점이다. 안성흥의 포장을 위한 여론 조성을 위해 순흥안씨 문중 내부뿐만 아니라 다른 문중이나 향교의 유림 사이에서 오고 간 것이 6점이다. 나머지 7점은 모두 안민과 안향을 순흥 용연사에 추향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시비에 관한 것이다. 두릉서원의 건립으로 귀결되는 통문이 있어 소지류에서 벌어졌던 사건의 결말을 이해할 수 있다. 간찰은 재종형제간에 오고 간 것으로 딸의 혼사를 알리는 것이 그 내용이다. 통상 간찰은 집안에서 전하는 고문서 가운데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하는 경우가 빈번한데 반해, 순흥안씨가에는 거의 간찰이 전하지 않는다. 그나마 전하는 1점의 간찰도 1914년에 작성된 근대의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일부는 화재로 소실되었을 것이다. 또한 과거, 관직 등 선대의 영광과 관련되거나 시비나 재산권과 관련되어 보관에 좀 더 신경을 썼던 문서와는 달리 사적으로 주고받은 서신은 그다지 잘 관리되지 못하였던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또한 재실로의 이전 과정에서 가문의 공적 문서로서의 성격이 약한 간찰이나 시문은 대거 누락되었을 가능성도 높아 보인다.
치부기록류는 치부기록이 6점, 부의단자가 1점으로 2종 7점이다. 같은 성격의 자료이지만 그 형태로 인해 성책고문서에 속해 있는 12점과 연관지어 보아야 할 문서들이다. 사망한 남편을 따라 순절한 함종어씨의 상가에 수령이 보낸 부의를 제외하고는 모두 족계(族契) 혹은 종계(宗契)의 치부기록이다. 계금관리가 그 내용인데, 계금의 관리자 선정과 계금의 주요 사용처인 묘사(墓祀) 시에 사용한 내역, 계금 납부와 관련된 내용이다. 모두 일제시대의 것이다.
시문류는 앞에서 언급하였다시피 매우 소략하여 3종 5점에 불과하다. 시문류 가운데 고문서의 성격을 갖는 시권은 3점이 전하는데 2점은 결락이 심하거나 명지(名紙) 부분이 할거되어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다. 1803년 안몽백이 생원시에 입격한 시권이 연대와 작성자가 뚜렷한 유일한 것이다. 그 외 제문과 시문이 각 1점 전한다.
성책고문서는 형태상의 분류로 고문서의 내용을 지니지만 그 형태가 책과 같이 묶여있는 것을 말한다. 주로 장부류의 문서들이다. 종계 운영에 관련된 것이 대부분이다. 그 표지의 이름에 따라 종안문부(宗案文簿), 추수기(秋收記), 종계안(宗契案) 등으로 구분해 두었지만, 종계의 운영과 관련된 치부기록이라는 점에서 모두 같은 성격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7점이 이에 속한다. 이와는 조금 다른 성격의 자료는 시도기(時到記)인데 모두 5점이 전한다. 문상객이나 제례의 참석자들을 기록한 것이지만, 작성주체가 순흥안씨 종계와 다르지 않고 참석자 명단 외에 그들이 납부한 부의금, 납부금 등이 기록되기도 한다는 점에서 치부기록과 그리 다르지 않다. 시도기와 종계의 치부기록 모두 20세기 초부터 1970년대에까지 이르는 근현대 자료이다. 이 집안의 족계관련 기록이 일제시대에 국한되기 때문에 그와 연결되는 현대의 자료까지 함께 실었다. 고문서집성이라는 성격에 다소 부합되지 않는 측면이 있기는 하지만, 집안을 연구함에 있어 계가 가지는 중요성을 고려하여, 그 연장선상에 있는 현대의 자료를 함께 실었다.
통상 고문서에 포함되지 않는 문집초본과 가승을 여기에 실은 이유는 다음과 같다. 본 문집은 죽계선생유고로 그의 친필일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또한 초본인 까닭에 편집된 문집과는 대조를 보이는 부분도 있을 것으로 생각되어 함께 수록하였다. 죽계의 5대손인 안응서(安應瑞, 1708-1754)가 순흥에 있는 서파공(西坡公) 종택에서 죽계의 친필유고가 영천 이재익(李載翊)의 집에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가 어렵사리 구해 와서 진장(珍藏)하던 것이라는 간단한 글이 덧붙여져 있다.
가승은 상하권 2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본서에는 하권만을 실었다. 상권은 주로 순흥안씨 상대의 내용을 다루어 족보 등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는데 반해, 하권은 죽계후손만을 다루고 있어 함안의 순흥안씨 집안을 이해하는 데 매우 도움이 된다. 부록으로 실은 가승의 목차에서 드러나듯이 가장(家藏) 서책목록, 분재기, 호적, 입안 등의 다양한 고문서를 함께 싣고 있다. 원문서의 내용을 완전히 수록하지 않은 한계가 있기는 하지만, 가전하지 않는 많은 문서의 내용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고문서집성의 성격을 함께 가지고 있는 가승이므로 이 책에 수록하기로 하였다. 고문서는 문집이나 세고(世稿) 성격의 가승에 실리지 않은 것이 통례이나, 이 가승의 작성자는 화재로 인해 소실된 고문서가 많음을 안타까이 여겨 그 내용을 남겨 두고자 기록해 둔 것으로 보인다. 가승의 편집자 혹은 작성자는 안효섭(安孝燮, 1846-1921)이다. 안효섭은 죽계로부터 자기 선대 안두식(安斗植, 1812-1867)까지 10대의 행록, 유고, 부인에 관한 기록 등을 모아 두었다. 안효섭 계열은 안성흥의 3자인 안응리(安應理, 1724-1796)의 직계이다. 가장 상권의 첫 부분에는 1984년에 집안 어른인 안용호(安龍鎬) 씨가 쓴 서문이 있다. 본서에 실린 가장은 복사본이라 상태가 매우 좋지 못하다. 심지어 군데군데 복사 과정에서 누락되어 복사본의 소장자가 손으로 직접 쓰기도 하였다. 가장은 애초에 조사과정에서는 누락된 것으로 출판과정에서 발견한 것이다. 짧은 출판일정 속에서 원본의 소장자에게 협조를 얻기가 힘들어 복사본이나마 싣기로 결정하였다. 독자들의 양해를 부탁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