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장처 고문서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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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서에 수록된 고문서는 은진송씨 송병하(宋炳夏) 후손가에 소장되어 온 것이다. 송병화는 조선 중기 유명한 정치가요, 사상가였던 동춘당 송준길(同春堂 宋浚吉)의 둘째 손자이다. 송병하가는 현재 대전광시 대덕구 송촌동에 위치하고 있고, 이 댁의 바로 옆에 송준길의 종가와 문화재로 지정된 동춘당이 있다. 현재 송병하가의 고문서류는 대전시 서구 둔산동 대전시립박물관에 소장 전시되어 있고, 관장은 송병화가의 종손인 송봉기이다.
대전시립박물관의 고문서 및 고전적은 대전지역에서는 익히 알려진 자료이다. 필자는 대전지역의 조사와 관련하여 2001년경에 김영한과 함께 일부자료의 해제를 수정하였고, 그 결과를 대덕의 선비문화에 소개한 바 있다.
註1)
그 당시 조사에 참여하였던 필자는 문서의 양과 질로 보아 개인이 조사·정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판단되어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 통보하여 조사를 의뢰하였다. 그 후 2003년에 조사 일정이 잡혀, 고문서 및 전적 전량을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몇 차례에 걸쳐 수집하여 정리하게 되었다.
조사정리 결과 대전시립박물관의 자료는 고문서·성책고문서와 다량의 전적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자료적 가치도 뛰어남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는 연차적으로 자료집 간행을 계획하였다. 1차로 언간에 대해서는 한국간찰자료선집-회덕 은진송씨 동춘당 송준길후손가편-Ⅵ으로 간행을 하였다. 그리고 일부 고문서에 대해서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개원 25주년 기념 전시회 도록인 고문서에 담긴 옛사람의 생활과 문화에 그 일부가 ‘동춘당 특선’으로 소개 되었다.
대전시립박물관소장 고문서는 자료적 가치가 뛰어나고, 소장된 양도 많다. 따라서 금번 본서에서는 지면의 제약상 모든 고문서를 수록하지 않고, 敎令類·疏箚啓狀類·證憑類·牒關通告類(간찰제외)·置簿類를 중심으로 수록하였다. 본서에 다 수록되지 못한 고문서류는 한국학중앙연구원의 마이크로 필름을 이용하기 바란다.
은진송씨는 호서의 3대족의 한 가문이다. 호서의 3대족이라 하면 宋時烈이 회덕 「鄕案」 ‘序’에서 “내가 생각하건대 湖西에는 옛부터 三大族의 이름이 있었으니, 連山의 金과 尼山의 尹이고, 그 하나는 즉 회덕의 우리 송씨였다.”라는 언급에서처럼 연산의 광산김씨, 니산(조선시대 노성현)의 파평윤씨, 그리고 회덕의 은진송씨를 일컫는다.
회덕의 3대족의 하나였던 은진송씨는 조선 초기에 충청 懷德에 입향하였다. 회덕 입향 이후 자손들이 白達村(下宋村)과 晩翠村(上宋村)을 중심으로 세거하였다. 이곳에서 자손들이 크게 번성하여 마을 이름도 ‘송씨들이 사는 마을’이라는 의미로 ‘宋村’이라 하게 되었다. 회덕에 입향한 은진송씨는 조선전기이래로 사환을 이어 오면서 사회적 기반을 튼튼히 하였다. 조선 중기에는 은진송씨가의 중흥조 3송을 배출하여, 가문을 조선 최고의 명문의 반열에 올려 놓았다. 은진송씨 3송이라 함은 同春堂 宋浚吉, 尤庵 宋時烈, 霽月堂 宋奎濂을 일컫는다. 이들 3송은 조선 중기 정치·사상계를 풍미하면서 은진송씨가를 시대의 중심에 놓이게 하였다.
특히 송준길과 송시열은 호서 예학의 종장이었던 沙溪 金長生과 愼獨齋 金集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기호유학의 종통을 계승하였고, 당색으로는 노론의 중심이었다. 양송이후 조선 말기 까지 은진송씨가는 노론 핵심 정치세력으로 한 시대를 풍미하였다.
본서에 실리는 고문서는 동춘당 송준길 손자였던 송병하가(대전시립박물관)의 고문서이다. 따라서 가계에 대한 설명은 시조에서부터 회덕 입향조인 4세 송명의까지, 그리고 5세 극기에서 은진송씨 최대 번성기를 이룬 13세 동춘당 송준길까지, 송준길가에서 분가한 손자 15세 병하에서부터 현재 본고문서 소장자 송봉기까지로 나누어 설명하되 직계중심으로 설명하기로 하겠다.
註2)
다만 ‘시조에서 4세 송명의까지’의 가계 설명에서는 은진송씨 3송 사이의 관계 등을 파악할 수 있도록 시조에서 15세 병하까지의 가계도를 작성하여 설명하도록 하겠다.
은진송씨의 시조는 은진송씨족보 가운데 가장 오래된 恩津宋氏族譜-二卷譜-에는 고려시대 판원사를 지낸 大原이다. 그러나 여산송씨 족보에는 惟翊과 天翊 두 형제가 있었는데, 惟翊은 여산송씨의 시조가 되고, 그 아우 天翊이 은진에 살아 은진송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즉 은진송씨 시조는 천익으로 이후 몇 대의 후손이 되는지 알 수 없으나 대원으로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천익에서 대원까지 이르는 사적은 분명치 않다. 그래서 은진송씨가에서는 천익보다는 사적이 분명한 고려판원사 宋大原을 실질적인 시조로 삼고 있다. 이러한 저간의 사정에 대해서 송준길은
송준길이 말하기를 “우리집 문헌에서 가히 증거할 수 없는 것으로 선대 碑誌에는 이미 다 判事로 시조를 삼았는데 나의 뜻은 여산송씨 족보가 비록 헛말은 아니나 天翼으로부터 判事(大原)에 이르기까지 또 몇 대인지 자상하게 알지 못하니 지금 聞見이 미치는 바와 文籍에 실려 있는 판사를 놓아 두고 멀리 대수마저 알지 못하는 천익을 찾아 시조로 하는 것일까요?”라 하고 있다
註3)
라 하여 대수마저 알지 못하는 천익보다는 文籍에 실려 있는 대원을 시조로 하자고 하였다.
2세 得珠는 郡事이고, 3세 春敬은 寶城郡事이었다고 하나 이들의 사적은 자세하지 않다. 춘경은 斯敏과 明誼 2자를 두었는데, 사민은 平山府使를 지냈고, 묘가 양주의 西山麓에 있다고 하나 자세하지 않다. 그런데 1666년에 간행된 은진송씨족보-2권보-에 실려 있는 사민의 전기사항에는 7세인 順年을 후사로 삼았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이는 오류이거나 다른 사정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註4)
春卿의 2자 明誼는 은진송씨 가운데 사적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인물이다. 그는 고려 공민왕 11년(1362)에 청주 공북루에서 시행된 문과에 입격하였다. 이때의 문과방목이 은진송씨족보-2권보-에 실려 있다. 송명의와 함께 입격하였던 同年은 33명으로 朴實·李崇仁·金濤·姜好文·金文鉉·楔長壽·鄭道傳·韓理 등 려말선초의 유명한 인물들이다. 그런데 고려시대 과거에서 동년은 형제와 같아서 친밀히 교류하였다. 따라서 송명의도 이들 동년들과 친밀히 교류하였다. 실제로 은진송씨족보-2권보-에는 송명의가 경상도 안렴사로 갈 때 동년이었던 鄭夢周·朴尙衷·李崇仁·姜好文·楔長壽 등이 지어 준 송별시가 실려 있고, 이때 목은 李穡은 宋京尙道按廉宋都官序’란 ‘序’를 써 주기도 하였다. 이처럼 송명의에게 송별시를 써 준 인물들은 명의와 동년이면서 고려 말 신진사대부로 성리학을 새로운 사상적 이념으로 채택하였던 인물들이고, ‘序’을 써 준 李穡도 신진사대부 계열로 성리학을 도입한 인물이다. 이처럼 송명의가 교류하였던 인물들이 고려 말 신진사대부 계열로 성리학을 수용하였던 인물이었음을 볼 때, 송명의도 신진사대부 계열로 성리학을 수용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려말 송명의의 사환과 교류의 폭으로 보아 은진송씨가는 이미 개경에 상당한 사회·경제적 기반을 갖추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명의는 은진송씨족보-2권보- 명의의 전기사항에 “始家於懷德”이라 하여 은진송씨가 회덕에 세거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한 회덕 입향조이다.
註5)
명의가 회덕에 입향하게 된 것은 그의 처가 회덕의 유명한 토성이었던 회덕황씨 黃粹의 따님이었기 때문이다.
註6)
즉 은진송씨가에서는 회덕 입향유래와 관련하여
유씨 조비께서 쌍청당 부군(宋愉)을 등에 업고 송경으로부터 걸어서 懷德 시골(회덕현 주안면 토정리; 현 동구 신촌동)로 와서 오로지 진사부군을 위하여 외가인 황씨에게 의지하였는데 白達村이 예전 때에는 다 황씨들이 살던 곳이었다
註7)
라 하여 명의의 손자였던 쌍청당 宋愉가 외가인 황씨에게 의지하였다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그런데 은진송씨의 예에서 처럼 조선사회에서 외향에 입향하여 세거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이는 조선의 상속제가 17세기 중반까지도 자녀간 균분상속이어서 외가의 분재로 외향에 세거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상에서처럼 은진송씨가는 고려시대에 충청의 은진현(채운향)에서 개경에 상경종사하였는데, 시조 대원에서부터 3세 춘경까지는 그 사적이 자세하지 않다. 4세 송명의부터 구체적인 사적에 등장한다. 그리고 송명의가 충청 공주목 회덕현의 토성이었던 회덕황씨 황수의 딸과 혼인함으로써 은진송씨가 조선시대 공주목 회덕현에 세거하는 계기가 되었다.
명의는 외아들 克己(?~1392)만을 두었는데, 극기는 송준길의 8대조로 進士에 입격하였기 때문에 가문에서는 進士公으로 불리운다. 극기는 고려 말에 진사로 선발되어 성균관에 들어갔으나 젊은 나이였던 1392(조선 태조1)년에 세상을 떠났다. 이때 극기의 처 고흥유씨는 22세였고, 아들 愉는 어린 아이었다. 고흥유씨의 부친은 柳濬으로 고려 말에 문음으로 출사하여 조선 태조 때의 원종공신이었다.
註8)
고흥유씨는 시부모을 잘 봉양하였고, 아들 유를 엄격히 훈육하였다 한다. 유조비의 절행은 훗날 송준길이 발의하고 김경여 등이 공동으로 정문을 내려 줄 것을 품의하여 효종 4년(1653) 5월에 허락을 얻어 쌍청당 앞에 정문을 세우고 “高麗進士 宋克己妻 高興柳氏之呂(계사 5월일 명정)”이라 판각하였다.
註9)
극기는 외아들 雙淸堂 愉(1389~1449)을 두었는데, 송준길의 7대조가 된다. 유는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회덕의 백달촌에 기거하였다. 이곳 백달촌에서 은진송씨 자손들이 번창하여 후인들이 백달촌을 ‘송씨마을’이라는 의미로 ‘宋村’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에 대하여 우암은 “판사공이하 족보에 매어 있는 자는 형제가 드문데 쌍청공 이후부터 번성하고 창대하니 사람들이 이르기를 유씨 모자의 쓰라린 절개와 높은 의리이라”
註10)
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송유 이후 자손들이 백달촌을 중심으로 크게 번성하였다.
愉는 功名을 좋아하지 않아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백달촌에 7칸의 堂을 지어 놓고 매번 時祀나 忌日이 되면 제공은 반드시 深衣를 입고 그 당에 들어가 재계하였다. 그리고 명절을 만나면 반드시 술을 마련하고 손님을 청하여 혹은 시를 짓고 혹은 노래하여, 鄕黨의 환심을 흡족히 하였다 한다.
註11)
유는 이 당의 편액을 中樞 朴堧公에게 부탁하여 雙淸堂이라 하였고, 박연의 시에 안평대군이 시로 화답하기도 하였다.
註12)
愉는 繼祀(?~1407)와 繼中 두 아들을 두었다. 계사는 송준길의 6대조로 1455년(세조 1년)에 主簿로서 정난원종공신 3등에 녹훈되었고, 벼슬은 尙州判官에 이르렀다. 계사의 배위는 判典農寺事를 지낸 順天 金宗興의 딸인데, 김종흥은 육진을 개척하였던 金宗瑞의 아우이다. 순천김씨는 95세(1407~1501)까지 장수하였고, 은진송씨가의 경제적 기반을 확충하는데 기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註13)
계사가 순천김씨와 혼인을 하였으나 계유정난으로 은진송씨가가 영향을 받지 않았고, 오히려 靖難原從功臣 2등으로 책록된 것으로 보아 가문의 기반을 확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2자 계중은 벼슬이 司直에 이르렀으며, 배위는 안동권씨로 예문관 제학을 지낸 權遇의 따님이다.
註14)
권우는 조선 전기 학자요 정치가로 유명한 陽村 權近의 아우이기도 하다. 이처럼 15세기에 은진송씨 가문이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명문이었던 순천김씨 김종서가와 안동권씨 권근가와 혼인을 하였다는 것은 이미 상당한 사회적 기반을 가지고 있었고, 이러한 혼인을 통해서 더욱 그 기반을 확고히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7세 繼祀는 瑤年과 順年 두 아들을 두었다. 1자 요년(1429~1499)은 쌍청당 유의 손자이며, 송준길의 5대조이다. 요년은 1479년에 右軍司勇에 있으면서 단종 1년(1453)에 동생 순년과 함께 사마시에 입격하였고, 성종 10년(1479)에 사위 姜龜孫과 함께 문과 별시에 등과하였다. 외직으로는 西原·沔川·洪州·尙州·善山郡守·목사·부사 등을 거쳐 軍資監正에 이르렀다.
註15)
요년은 成俔(慵齋)·李石亨(樗軒)·洪貴達(許白亭)·徐居正(四佳齋)·曺偉(梅溪)·金宗直(佔畢齋) 등과 교류를 하였다. 이들 제현으로부터 받은 서찰이 덕은가승에 실려 있다. 이처럼 요년은 당대의 문사들과 폭넓은 교류를 하였으며, 이를 통해 은진송씨 가문의 사회적 지위가 더욱 확고해 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요년의 배위는 判官을 지낸 나주 김양의 딸이고, 대학사 臺卿의 후손이다.
註16)
계사의 2자 순년은 幼學으로 단종 1년(1453)에 사마시에 입격하고, 예종 1년(1469)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정랑을 지냈다. 배위는 직제학을 지낸 안동 김맹헌(金孟獻)의 딸이다.
註17)
김맹헌의 조부 김구용은 고려 말 공민왕 때에 시로 유명하였으며, 정몽주·이숭인 등과 성리학을 일으키는데 기여한 인물이다.
註18)
순년의 후손은 汝諧→世良→龜壽→應期→甲祚→時烈 로 이어지는 계통이며 우암 송시열의 후손 가운데는 운평 송능상 한말의 송근수·달수 그리고 송병선·병순 형제 등이 유명하다.
요년은 2자 1녀를 두었는데, 1녀는 선초 학문과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던 진주 강희맹의 아들 강구손에게 출가하였다. 강구손도 1479년(성종 10)에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후 司宰監正으로 출사하여 후에 벼슬이 우의정에 이르렀다. 1자 汝霖(1461~1529)은 쌍청당을 중수하였고, 벼슬은 楊根郡守이었으며, 배위는 호서 연산지역의 유명한 사족으로 우의정을 지낸 광주(광산) 김국광의 딸이었다. 여림의 가계는 世勛→柟壽→希遠→國全→奎濂→相琦로 이어지는 은진송씨 3宋의 한 가문인 송규렴가이다. 송규렴가는 규렴의 사환과 아들 옥오재 송상기가 대제학을 지내면서 가문의 격을 한 단계 높였다.
2자 汝楫은 송준길의 고조부로 생몰년은 미상이고 28살의 젊은 나이에 사망하였다. 관계는 선무랑이었고, 배위는 태조 대왕의 4대손 娥林君 李禎의 딸이었다.
그런데 은진송씨가와 광산 김씨가는 중첩된 혼인관계를 가지고 있다.
다음의 가계도를 통해 확인할 수 있듯이 6세 여림이 광산 김국광의 사위이고, 송준길의 부친 송이창은 사계의 백부인 김은휘의 사위가 되었다. 따라서 송준길에게 김장생은 스승이면서 어머니의 사촌이었다. 이러한 인연으로 송준길은 광산김씨가의 외손으로 김국광의 묘제를 위해 설립된 광산김씨가의 족계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註19)
여즙은 世英과 世雄 두 아들을 두었다. 세영(1491~1532)은 송준길의 증조부로 평생 영리를 구하지 않고 산수 간에 자적하였다고 한다. 관계는 승사랑이었고, 배위로 초취는 세종의 증손자로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정국 2등 공신에 책록되었던 誡의 딸이었으나 후사가 없었고, 재취는 감찰 延仁의 딸로 2남 1녀를 낳았다.
世英은 應祥·應瑞 2남과 1녀을 두었다. 1남 응상은 東洲 成悌元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이후 禮賓寺別提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응상의 배위는 驪興 閔荃의 딸이다. 세영의 1녀는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학자요, 정치가였던 연안 이석형의 현손인 이정현에게 출가하였다.
註20)
그런데 순년의 아들 여해의 배위는 이석형의 딸이었으므로 은진송씨는 연안이씨와 중첩된 혼인관계를 가졌다.
세영의 2남 應瑞(1530~1589)는 송준길의 조부로 형 응상과 함께 성제원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56년(명종 11)에 처음으로 벼슬을 하여 順陵參奉(성종비 恭惠韓氏 능)으로 출사하여, 내직으로는 한성부 판관을 지냈고, 외직으로는 은율 현감 및 임천 군수 등 여러 고을의 수령을 지냈다. 응서의 배위는 병조판서를 지낸 廣州 李潤慶의 딸로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다. 1남 이창은 군수이고, 딸은 부제학 신응시에게 출가하였다. 응서는 부실에서 1남 2녀를 두었는데, 1남은 胤昌이고, 두 딸은 愼孝門과 徐羊甲에게 출가하였다.
그런데 은진송씨와 혼인한 광주이씨는 成俔의 慵齋叢話에서 ‘廣李昌成’이라 하여 창녕성씨와 더불어 조선 전기 대표적 문벌 가문으로 꼽히는 가문이다. 이와 같이 광주이씨가와 은진송씨가는 중첩된 혼인을 하였다. 즉
위의 가계도에서처럼 송준길의 조모와 송시열의 조모는 이윤경의 따님으로 자매지간 이다.
응서의 1남 爾昌(1561~1627)은 송준길의 아버지로 李珥의 문하에서 수학을 하였고, 사마로 영천군수를 지냈다. 이창의 배위는 光山 金殷輝의 딸로 김장생과는 사촌남매 사이였다. 이창은 1561년 한양 연지동에서 출생하였다. 성인이 되어서 김계휘(黃岡)·신응시·송익필(龜峰)에게 수업하였으며, 또한 이이(율곡)의 문하에서도 수업하였다. 1590년(선조 23)에 사마시에 급제하였고, 1600년 연원찰방으로 출사하였다. 1607년에 진안현감에 제수되었으며, 1610년의 癸丑禍獄에 서매부 서양갑이 참여하였으므로 연좌되어 파직되었다. 1623년 반정으로 문의현감에 제수되었고, 이어서 영천군수를 지냈다.
이창은 외아들 준길(1606~1672)만을 두었다. 준길은 김장생·김집의 문인으로 사마 양시에 입격하였고, 인조·효종·현종이 賓師로 대우하였으며 벼슬이 좌참찬에 이르렀다. 준길은 조선 중기 유명한 사상가이며 정치가로 송시열과 학문적·정치적 입장을 같이하였다. 또한 준길은 글씨에도 능해 당대에 이미 명필로 꼽히었으며 특히 행초를 잘 썼다. 그의 글씨는 스승 김집과 한호의 서풍을 따랐으나, 석봉체의 골격을 유지하면서도 肥厚한 획을 가미한 독자적인 서풍을 이루었다고 한다.
註21)
준길의 배위는 영남의 유명한 학자요, 정치가였던 동래 정경세의 딸이다. 송준길은 사후 문묘에 배향되었으며, 은진송씨 동춘당문정공파의 파조로 불천지위이다. 송준길에 대해서는 호서의 유명한 예학자요 정치가로서 많은 연구가 있다. 구체적인 것은 이러한 연구를 참조하기 바란다.
이상에서 언급한 은진송씨가의 회덕 입향조에서부터 송준길까지의 사환과 혼반은 매우 화려하다. 특히 혼반은 순천김씨의 김종흥(김종서의 아우)가, 안동권씨의 권우(대제학 권근의 아우), 진주강씨 강희맹, 광산 김국광, 안동 김맹헌, 연안 이석형, 광주 이윤경 등의 가문과 혼인하였다. 이러한 혼인은 조선 전기이래 최고의 명문과의 혼인이었으며, 또한 이것은 조선 전기이래 은진송씨가의 사회적 위치를 반증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은진송씨가는 조선 전기 회덕 입향 이후 송준길에 이르기까지 많은 인재를 배출한 명문이었다.
은진송씨 동춘당파는 송준길이 중시조이고, 이어 후손들의 사환이 끊이지 않아 호서의 대표적인 명문가의 하나로 꼽히었다. 동춘당 송준길 이후부터 고문서 및 전적의 소장자인 대전시립박물관 관장인 송봉기까지 이르는 가계를 간략히 요약하여 설명하기로 한다.
송준길은 1남 2녀를 두었다. 1자 광식(1625~1664)은 송봉기의 12대조로 부친 송준길의 스승이었던 김집(愼獨齋;1574~1656)과 송시열(尤庵;1607~1689)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654년(효종 갑오)에 사마시에 입격 후 내직으로는 참봉, 익위사 세마, 종부시 주부, 공조좌랑을 거처 공조정랑에 이르렀고 외직으로는 尼城縣監을 지냈다. 배위는 대제학을 지낸 白川 趙錫胤(樂靜;1605~1654)의 딸이다. 1녀는 안정인 나명좌와 혼인을 하였고, 2녀는 여흥인 閔維重(屯村;1630~1687)과 혼인을 하였다.
민유중은 유력한 사족으로 슬하에 2남 3녀을 두었는데, 2남은 판서를 지낸 閔鎭厚(趾齋;1659~1720)와 閔鎭原(丹巖;1664~1736)이다. 1녀는 이만창과 혼인을 하였는데, 이만창의 아들이 조선 중기의 유명한 예학자 李宰(陶菴;1680~1746)이다. 따라서 이재에게 은진송씨가는 진외가가 된다. 2녀는 숙종비 인현왕후로 이로 인하여 민유중은 여흥부원군으로 봉작되었다. 3녀는 신석화와 혼인하였다.
광식은 4남 1녀을 두었다. 1자 병문은 관은 제천현감이었고, 자식이 없어 동생 병하의 1자 堯卿으로 계후하였다. 2자 병하(1646~1697)는 송봉기의 11대조로 우암 송시열 문하에서 수학을 하였고, 학행으로 천거되어 관에 나아가 掌樂院正을 지냈다. 1녀는 원몽익과 혼인하였다. 3자 병원은 사마를 거쳐 의금부 도사를 지냈으며, 4자 병익은 상주목사를 지냈다. 현재 대전시립박물관의 관장이며 고문서와 전적의 소장자인 송봉기는 송병하의 종손이다.
송준길은 손자 병하를 특별히 아꼈다. 즉 “法泉 종숙 炳夏는 바로 春翁의 손자이다. 언론과 風旨가 실로 시골의 일가들이 돌아갈 바의 마음으로 삼았다. 이로써 조고께서 아주 사랑하고 중히 여기었고, 先人이 襟期(깊은 생각과 회보)를 얻어 일찍이 磷淄(갚아서 얕게 되고 물이 들어 검게 되는것)가 있지 않았다.
註22)
”에서처럼 손자 병하에 대한 송준길의 애정은 각별한 것이었다. 그래서 병하를 자신의 거처인 종가 동춘당 바로 옆으로 분가를 시켰다. 1669년에 써 준 7언 절구 초서 족자 등도 송준길의 손자 병하에 대한 애정과 관련이 있는 듯 하다.
대전시립박물관 소장 자료 중에는 특별히 송준길의 친필 자료들이 많다. 종가가 아닌 지손의 집에서 종가에 있었음직한 친필 자료를 많이 소장한 것이 이채롭다. 이는 송병하가가 종가 바로 옆에 있어 왕래가 쉬웠고, 또한 병하의 1자 요경이 종손이었던 형 병문에게 양자로 들어갔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즉 송준길의 종손 요경과 송병하가의 요화는 형제이고, 거리로도 불과 수십 보의 거리에 위치하였던 때문으로 보인다. 송병하 후손가에 많이 소장되어 있는 동춘의 친필 간찰 및 휘호 등은 서예사 연구 자료로 가치가 있다.
병하는 2자를 두었다. 1자 요경은 백부 병문에게로 양자하였다. 2자 堯和(소대헌;1682~1764)는 송봉기의 10대조로 1730년(영조 6)에 金昌翕(三淵;1653-1722)문하에서 수학하였고, 음사로 출사하여 내직으로는 의금부도사 등을 거쳐 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다. 외직으로는 청산현감, 진산군수, 선산부사, 광주목사 등을 지냈다.
요화의 배위는 안동인 김성달의 딸로 수많은 시문을 남긴 浩然齋 金氏(1681~1722)이다. 호연재는 당호인 동시에 호로 조선 중기 허난설헌에 버금가는 여류시인이었고, 경서와 사기에도 능통하였다 한다. 호연재는 浩然齋遺稿·鰲頭追到·自警編 등의 시집을 남겼고, 그의 시는 주로 친정식구들과의 애틋한 가족애를 그린 것이 많다. 송봉기가의 고문서 가문데 주목되는 것 중에 하나가 언간이다.
註23)
그리고 안동김씨가와 은진송씨가는 중첩된 혼인을 맺고 있다. 선원 김상용의 아우였던 청음 김상헌의 손녀가 제월당 송규렴과 혼인을 하였다. 이러한 혼인 관계 등으로 청음의 손자들였던 김창엽·창읍 등이 송준길·송시열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따라서 안동김씨가는 혼인 및 학연으로도 은진송씨가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으며, 정치적으로 같은 서인이었다. 요화는 1자 1녀를 두었다. 1자 익흠(寤宿齋;1708~1757)은 송봉기의 9대조로 학행으로 출사하여 보은현감을 지냈다. 1녀는 청풍인 金致恭과 혼인하였는데, 후에 참판을 지냈다. 익흠은 1자 4녀를 두었다. 1자 기연은 22살의 짧은 나이로 생애를 마감하였다. 익흠의 1녀는 청송인 沈健之와 혼인하는데 후에 좌랑을 지냈고, 2녀는 평산인 申光蘊과 혼인하였는데 후에 관이 판관에 이르렀고 , 3녀는 청풍인 金致黙과 혼인하였는데 후에 참판이 되었고, 4녀는 나중에 판서를 지낸 연안인 李冕膺과 혼인하였다.
기연은 1자 계래를 두었다. 계래는 송봉기의 7대조로 사마에 입격한 뒤에 양근군수을 지냈다. 계래는 4남 1녀를 두었다. 1남 규희는 송봉기의 6대조로 사마에 입격 후 고령현감을 지냈으며 2자 문희는 남원 도호부사였고, 3자와 4자는 출계하였다. 1녀는 안동 김헌순과 혼인하였다.
규희는 2자 2녀를 두었다. 1자 석노는 출계하였다. 2자 영노는 송봉기의 5대조로 내직으로는 동지돈령부사를 지냈고, 외직으로는 고부군수를 지냈다. 대전시립박물관의 많은 자료 가운데 고부군과 관련된 자료는 이때에 생성된 것이다. 3자 대종숙이었던 敬熙에게 출계하였고, 3자 명희는 삼종숙 啓植에게 출계하였다. 1녀는 안동안 김헌순과 혼인하였다.
영노는 3자를 두었다. 1자 종오는 송봉기의 4대조로 호가 漢蒼이고, 문과를 거쳐 1875년 익위사사직에 임명되어 동궁의 필법을 가르쳤고, 1888년에 문과 장원을 하였고, 이후 동부승지, 성균관 대서성등을 거처 이조참의에 이르렀고, 문집으로 한창유고(漢蒼遺稿)가 있다.
종오는 1남 2녀를 두었다. 1자 교순은 송봉기의 증조부로 생원으로 명릉참봉을 지냈고, 1녀는 안동인 김홍규와 혼인하였으며, 2녀 청풍인 군수 김규명과 혼인하였다.
교순은 2남 2녀을 두었다. 1자 내빈(乃彬)은 송봉기의 조부이고, 2자 낙빈(洛彬)은 출계하였고, 1년는 남원인 윤전(尹{玉+典})과 혼인하였고, 2녀는 벽진인 이우영(李愚泳)과 혼인하였다.
내빈은 4남 4녀를 두었다. 1남 용억(容億)이고, 아들 봉기가 현재의 대전시립박물관 관장이고 고문서의 소장자이다.
대전시립박물관 교령류에는 형태상으로는 문서를 장첩한 첩과 낱장문서 형태로 보존되어 있는 것으로 나눌 수 있다. 교령류는 동춘당 송준길을 비롯한 후손들의 화려한 사환 경력을 엿볼 수 있는 자료이다.
1) 「告身帖」 Ⅰ
「告身帖」Ⅰ은 同春堂 宋浚吉(1606-1672)의 교지를 모아 성책한 고신첩이다. 내용은 송준길이 1657년(順治 14年) 8월에 世子侍講院贊善으로 제수된 것으로부터 1662년(康熙 元年) 11월에 司憲府大司憲兼成均館祭酒까지 42매의 告身이 장첩되어 있다. 이처럼 송준길의 고신을 별도로 모아 장첩한 것은 이 가문에서 송준길이 파조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현재도 이 가문에서는 송준길을 파조로 하는 은진송씨동춘당문정공파보를 별도로 간행하고 있다.
2) 「告身帖]Ⅱ
「告身帖]Ⅱ에는 송준길의 조부였던 宋應瑞(1530~1598)가 1593년(萬曆 21) 林川郡守에 제수되어 받은 교지 1점, 송준길의 아버지 宋爾昌(1561~1627)의 증직교지 2점, 어머니 광산김씨 증직교지, 송준길의 증직교지 1점, 복관교지 1점, 송준길 시호교지 1점, 송준길의 처 진주정씨 증직교지 3점, 송준길의 아들 광식의 증직교지 1점, 광식의 처 배천조씨 증직교지 1점 등 16매의 교지가 장첩되어 있다.
3) 「諭書帖」
「諭書帖」은 송준길이 받은 유서 11점을 잘라서 장첩하였다. 그런데 유서의 끝에 실려 있는 연호가 장첩하는 과정에서 모두 잘려 나갔다. 때문에 유서가 발급된 정확한 일시는 알 수 없고, 유서에 기재되어 있는 송준길의 관직으로 대체적인 시기를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장첩된 일곱 번째 유서의 앞부분에 작은 글씨로 “辛亥十月十四日假注書金時重來宣” 라고 기록되어 있어 이 유서가 송준길이 사망하기 1년 전인 1671년 10월에 승정원의 假主書 金時重와서 준 것임을 알 수 있다.
4) 「批答帖」
「批答帖」은 국왕이 송준길에게 내린 비답 10매를 잘라 장첩한 것이다. 그런데 비답의 끝에 기록된 년호가 장첩하는 과정에서 잘려 나가 정확한 날짜를 알 수 없다.
5) 諭書
1747년(영조 23) 8월 10일에 善山府使 宋堯和(1682~1764)가 軍器를 새로 마련한 것이 많고, 舊軍器를 정비한 공으로 특별히 兒馬 1필을 내린다는 유서이다.
6) 告身(167점)
宋炳夏 15점, 宋堯和 38매, 송요화처 김씨·박씨 4매, 송병화 증직교지 2점, 송병화 처 나씨 증직교지 1점, 宋益欽 고신 12점, 宋啓來 고신 18점, 宋奎熙 고신 7점, 宋永老 20점, 송영노 처 延安李氏 고신 2점, 송규희 증직교지 1점, 송영노 모 청풍김씨 증직교지 1점, 송계래 증직교지 1점, 송영노 조모 청송심씨 증직교지 1점, 송기연 증직교지 1점, 송영노 조비 咸陽呂氏 증직교지 1점, 宋種英 고신 2점, 宋種五 고신 37점, 송종오 처 연안이씨 고신 1점, 송종오 처 양주조씨 교지 1점, 宋敎淳 고신 1점 등을 실었다.
7) 白牌· 紅牌
송종오 홍패 1매, 송계래 백패 1매, 송교순 백패 1매 등이다.
8) 祿牌
No1번 녹패는 1682(肅宗 8) 宋炳夏가 司僕寺主簿 때에 발급받은 녹패로 바로 직전 1681(숙종 7) 12월 25일 정월에 받은 녹봉이 미 1석 3두, 태 6두였다. 이처럼 바로 직전년의 12월 녹과가 기록되어 있는 것은 조선시대 후기 녹과가 선급이었기 때문이다. 녹고 No2·No3·No4번의 녹패 즉 1754(영조 30)·1756(영조 32)·1757년(영조 33)에 발급된 3장의 녹패는 앞부분이 떨어져 나가 누구에게 발급된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녹패는 그 시기에 관료로 활동하였던 송요화(1682~1754) 내지는 송익흠(1708~1757)의 것으로 보이나,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No5·6·7·8·9·10번의 녹패는 송계래(1748~1799)가 받은 것이다. No5번은 1785년(정조 9) 行典性署直長(종7품)시에 발급받은 것으로 米 13斗 太 2斗가 지급되었다. No.7은 1786년(정조 10)에 발급받은 것으로 米 1石 1斗 太行 10두가 지급되었다. No.8은 1791년 掌樂院主簿(종6품)때 발급받은 것으로 米· 1석 2두 태 13두가 지급되었다.行尙衣院僉正(종4품)·尙衣院別提(종6품)때 발급받은 것이다. 송계래가 받은 녹봉은 13두 太 6斗, 1石 1斗 太 10斗 , 1석 1두 태 10 두 정동이었다.
9) 差定帖
1번은 宋炳夏가 1681(숙종 7)에 前行禧陵參奉, 2번은 宋奎熙가 1809년(순조 9)에 童蒙敎官, 3·4번은 宋種五가 1876(고종 13)에 ·前侍直과 繕工監假監役官 등으로 임명될 때 발급된 差定帖이다.
소차계장류에는 소지류와 호적류를 실었다. 호적류는 은진송씨가의 京鄕간에 거주 실태와 재산변동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소지류는 청원의 내용과 산송시비 등을 이해할 수 있는 자료이다.
1) 戶籍類
호적류는 호주가 송병화(1646~1697)인 것이 2점, 송요화(1682~1756)인 것이 11매, 송계래(1748~1799)의 것이 12점, 송규희(1769~1819)의 것이 7점, 송문희(1773~1839) 5매, 송명희(1781~1833) 1점, 송영노(1803~1881) 12점, 송종오(1828~1904) 2매, 미상 1매 등을 실었다. 이 댁의 호적류 중 특히 17세 익흠(1708~1757)과 18세 기연(1727~1809)의 것은 한 점도 없다. 소장한 호적류의 발급지역은 송계래의 한성부 발급 준호구 2매를 제외하는 모두 회덕현의 것이서, 은진송씨 송병하가 회덕에서 세거한 이후 거주지 변동이 없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호적들은 이 가문의 재산변동을 보여 준다. 특히 소유노비 현황을 보면 송병화의 1681년(강희 23) 준호구(문서번호239) 에 노비질이 약 11구이었던데 비하여 송요화의 1720년(강희59)의 준호구(문서번호242)에는 약 39구, 송계래의 1765년(을유)의 호구단자(문서번호252)에는 약 100여구 등이 실려 있다. 이는 이 가문의 비약적인 재산증가를 보여 주는 것이다. 또한 1720년(숙종 46) 송요화가 39세 때 발급받은 준호구(문서번호241)와 호구단자(242)은 정확하게 일치한다. 이는 조선 후기 호적사무의 정확성을 보여주는 사례의 하나이다.
2) 所志類
대전시립박물관 소지류는 51건으로 조선 후기 18세기 전반 이후의 것이다. 대전시립박물관의 소지를 분류해 보면 정사소지 23건, 산송소지 4건, 지방관으로 직무와 관련된 소지 19건, 기타 3건등이다. 이러한 대전시립박물관 소지 가운데 가장 주목이 되는 것은 수령으로 재직시 직무와 관련된 소지들이다. 이러한 직무관련 소지는 조선 후기 지방행정의 실상이나, 관찰사와 군현 수령과의 관계, 조세관계 등의 실체를 알 수 중요한 자료 들이다. 따라서 본 해제에는 주로 지방관으로 업무와 관련된 소지에 대하여 해제하고자 한다.
◆所志(1) 1731년(영조 7) 2월에 四山監役官宋堯和가 집이 회덕이라 편모와 떨어져 있는데, 해가 바뀌었으므로 가서 뵐 수 있도록 급유을 신청한 소지이다. 급유 21일을 받았다.
◆所志(3) 1736(영조 12) 10월에 靑山縣監 宋堯和가 본인의 병증이 위급한 증상은 아니나 종기가 머리와 얼굴에 생기었다. 그래서 行步와 말을 타는 업무, 수령으로 面禀者을 迎拜할 수 없는 등 업무를 수행할 수 없으니 遞罷 시켜 달라고 순찰사에 올린 소지이다. 순찰사는 사직하지 말고 조리하여 소임을 살피는 것이 마땅하다고 결정하였다.
◆所志(4) 1737년(영조 13) 3월에 靑山縣監 宋堯和가 머리와 얼굴의 종기가 나는 증상이 이미 해를 넘기고 관절염으로 말을 타고 진을 돌아보는 등의 일은 할 수 없으니 遞罷해 달라고 순찰사에게 올린 소지이다. 순찰사는 봄이라 조리하여 치료할 수 있으니 사직하지 말고 임무를 살피고, 조리시에 겸임은 黃澗縣監으로 한다고 처분하였다.
◆所志(6) 1742년(영조 18) 6월에 충청도 회덕 宋珍山宅奴三彬이 올린 소지이다. 소지의 내용은 상전 송요화의 農舍가 은진에 있는데, 오래되고 무너져 중수하는 재목을 옥천에서 벌목하였다. 이때 영문에서 만난 어떤 사람이 와서 말하기를 소나무를 다른 용도에 쓰는 것은 엄히 하고, 가재로 쓰는 것은 허락한다고 하였다. 상전이 이를 믿고 한편으로는 옥천에서 벌목하겠고 使道에게 呈狀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題音(데김)을 기다리지 않고 벌목을 하였다. 벌목하는 사람도 반드시 제음을 얻을 것으로 믿었고, 또한 농한기에 지체하면 기회를 잃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사또의 허락하지 않는 데김이 도착하였을 때는 이미 벌목이 끝나 있었다. 이 문제로 주인이 욕되고 노가 죽는 것을 피할 수 없지만 죄가 있는 자가 收贖을 청할 수 있는 것이 법에도 있으니 사또께서 반노 태산의 수속을 허락해 달라는 소지이다.
◆ 所志(7·8) 1743년 4월에 송요화가 부임 이래로 향리들이 營錢取利, 加耕濫徵, 年還濫捧 하는 등의 부정을 저질렀다. 이에 송요화는 순찰사에게 자신이 제대로 조처하지 못하였으니 조처해 달라는 소지이다. 이에 대하여 순찰사는 속히 임무를 다하라고 하였다. 본 소지는 조선 후기 각군현 아전들의 비리의 실제를 알 수 자료로 중요하다.
◆ 所志(15·16) 15·16번 15번 소지는 實貢奴婢을 마감하였는데. 자신은 잃은 노비가 전혀 없는데도 원총(元摠)이 부족하다 하여 형장을 받은 것은 지극히 원통하여 그 전말을 아뢴다는 것이다. 善山의 실공노비 元摠은 111구 인데, 1740(庚申)년에 定額에 비교하면 부족한 것이 100구라는 것이다. 그런데 1740년(경신) 후에 64구는 移屬하여 원총에서 부족한 것은 36구이다. 이 36구도 여기에다 4구를 더하여 1741년(신유)에 찾아 메워 놓았다는 것이다. 이속한 60구는 원총으로 허락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라고 생각해서 해조에 첩보로 이관하였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16번 소지는 같은 내용을 아뢰고, 아울러 신병으로 許遞를 요구한 소지이다.
◆ 所志(17·18·19·20·21) 17번에서 21번까지 소지는 송요화의 직무에 따른 죄를 변명하는 소지이다. 그중 17번 소지는 1748년(영조 23)에 5월에 선산부사 송요화의 호노 是尙이 순찰사에게 올린 상전 송요화의 ‘將辭에 噴薄’의 죄와 ‘木疋之看品의 罪’을 변명하고, 간품의 죄는 그로 인한 허체를 요구하는 소지이다. 체장18번 소지는
◆ 所志(29)
◆ 所志(30·31·32·33·34)
◆ 所志(36·37)
◆ 所志(40)
◆ 所志(41) 1793년(정조 17) 7월에 고산현감 宋啓來가 직무와 관련하여 순찰사에게 올린 소지이다. 내용은 지금 撿驗을 謹愼치 못하여 막중한 검보를 소루하게 하여 그 직을 다하지 못한 죄가 있으니 그 죄가 어찌 해당 아전에게만 그치겠는가 하면서 체직을 청한 소지이다.
◆ 所志(47)
내용 없음
1) 關
전라도 암행어사가 전라도 관찰사에게 보낸 관문이다(문서번호292). 내용은 宋文化家가 전라도 암행어사에게 呈狀한 내용을 암행어사가 전라도관찰사에게 移文한 관문이다. 송문화가의 증장내용은 송문화가가 전라도 무주 유가면 오동리 후산 餘麓에 緬禮를 하기 위하여 埋標를 하였는데, 오동리 常漢 白樂善·金應瑗 등이 매표한 곳이 자신들의 先塚에 근접해 있다고 매표를 파내어 士夫를 욕보였으니 잡아다 심문하여 처벌해 달라고 한 것이다.
2) 牒呈
(1) 293번 첩정은 진산군수가 전라도관찰사겸순찰사에게 올린 첩정을 전라도관찰사가 다시 비변사에 올린 첩정이다. 내용은 진산군수의 月廩이 같은 山郡이며 같은 조건인 금산보다 작고, 무주는 태봉이 있고 실록을 보관한 곳이라 하여 다른 고을을 분할해 더해 주었고, 회덕은 유현들이 거주하는 곳이라 손님이 빈번하여 월름을 가급해 주고 있다. 그러니 진산도 금산의 예처럼 官需를 加劃해 달라는 첩정이다.
(2) 294·295·296·297번 첩정은 관리들의 체직을 위한 해유첩정이다. 해유문서는 전임관이 담당한 재정, 군정 및 각종 집물들의 임무 전반을 후임관에게 인계하는 인수인계서이다.
註24)
이들 첩정은 조선 후기 관리의 체직에 따른 인수인계가 얼마나 엄격하고 정확하게 수행하였는지를 보여 주는 문서로 연구의 가치가 있다.
294번 첩정은 1745년 진산군수 송요화가 遞職에 따라 후임관 이모에게 해유를 의뢰하는 해유이관을 제출하였다. 이에 후임관 이모는 송요화의 해유이관을 검토하고, 전라도 관찰사에게 송요화의 해유를 위한 첩정을 올렸고, 전라도 관찰사는 진산군수의 첩정을 검토한 다음 호조에 이관하였으며, 호조는 또한 내용에 이상이 없자 이조에 해유문서 발급을 의뢰하는 해유이관을 보내었다. 본 문서는 후임관이 전라도 관찰에게 보낸 첩정, 전라도관찰사가 호조에 보관 관문, 호조에서 이조로 이관한 과정에 발생된 문서들이 점연되어 있으며, 이 점련된 문서의 해유가 끝나자 송요화에게 재발급한 것이다.
註25)
295·296번 첩정은 1797년 고산현감을 지낸 송계래의 체직에 따라 현임 고산현감이 전라도 순찰사에 보낸 해유첩정이다. 두 문서 모두 앞부분만 있고, 해당물건 부분이후 뒤부분이 망실되었다.
297번 첩정은 1815년 전 고령현감 송규희의 해유를 위하여 현 고령현감 윤모가 경상도관찰사에게 올린 첩정과, 경상도 관찰사가 호조에 이관한 해유이관, 배탈문서로 1817년(순조 17)에 호조에서 이조로 이관한 문서가 점연되어 있다. 이 문서는 해유에 약 20개월이 걸리었으며, 該管關物件을 기록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송규희가 별도로 후임자에게 해유이관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잡범연고에 송규희의 實仕期間 계산에 國忌日 73日을 제외하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
3) 告目
298번 고목은 留營營吏 林應煥 등이 丙辰 正月 19일에 啓二度로 계초는 별지에 謄上하며 연유를 告課하는 고목이다.
299-1 고목은 乙丑 6월 28일에 吏房殷芝馨이 官司主에게 알리는 고목이다. 내용은 관사주의 전령으로 後錄한 物種 및 200량을 輸上한다는 것과, 원납전을 내달 초순까지 다 내겠다고 하였다는 내용, 죄인 박성근을 잡아오는 문제 등을 보고한 것이다.
299-2번 고목은 乙丑 6월 19일에 吏房殷芝馨이 書房에게 원납의 일을 營門에서 재촉하고, 유치물종 중에 紙箱子와 硯床은 먼저 보낸다고 보고한 것이다.
1) 尺文
자문 1번에서 10번 문기까지 있다. 자문은 모두 송영노(1803~1881)가 고부군수를 지낼 때 생성된 문서들이다. 시기도 1864(갑자)·1865(을축) 두 해에 걸처서 생산된 문기이다. 자문은 1번 1건, 2번 9건, 3번 2건, 4번 1건, 5번 1건, 6번 11건, 7번 3건, 8번 1건, 9번 12건, 10번 58건 등으로 대부분 몇 건씩 점연되어 있으며, 총 99건이다. 본 자문은 지방수령이 서울 관아에 각종 부가세를 지불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자료로서 중요하다. 이러한 부가세는 자문 1문와 2번 등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경주인을 통해 지불되었고, 고부군에서는 이를 경주에 지불하였다. 2번 문기에서처럼 경주인이 중앙관서 및 관련기관에 예목 등을 지불하고 그때마다 고부군수 및 색리에게 그 사실을 자문으로 통보하고 있다. 중앙관서에서는 물품 내지는 돈을 받으면 5·6번에서 처럼 영수증(자문)을 발급하였다.
자문을 통해 고부군에서 부가세로 납부한 기관을 보면, 宗府(5번)·內閣(6번)·司諫院·司憲府·活人署·景慕宮 등이었고, 중앙관리들의 行下에도 지불하였고, 대왕대비전·왕대비전 司謁·司鑰 등의 帽債 혹은 대왕대비전의 업무별감 등의 食物 등도 지불하였음을 알 수 있다.
본 자문은 조선 후기 지방고을들이 왕실 및 중앙관서의 관리들에게 관행적으로 錢과 식물 등을 부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2) 完文
(1) 전라도 암행어사가 송문화가에 발급해 준 완문이다. 완문의 내용은 전라도 무주 유가면 오동리 후산 餘麓에 緬禮를 하기 위하여 埋標를 하였다. 그런데 오동리 常漢 白樂善·金應瑗 등이 매표한 곳이 자신들의 先塚에 근접해 있다고 매표를 파 갔으니, 劉治九·李以奉·程大福·鄭乭夢·崔石夫 등을 산직으로 정하여 수호하고, 四山局內에서 松楸 및 禁養하고 犯䂨의 폐가 없도록 하라는 것을 결정해 준 완문이다. 이는 관문 1번(292번 문기)에 대한 어사의 결정문이다.
(2) 戊午年 충청도 회덕 송문화댁의 노의 呈狀에 따라 전라도 무주 유가면 오동리에 埋標하고 산직을 정하여 금호토록 하였다. 그런데 법전에 사부의 묘직 군역을 탈면해주도록 되어 있다. 그래서 산직 5명의 탈급을 특별히 허락한다는 완문이다. 어영군 劉治九·李以奉·程大福·鄭乭夢·崔石夫 등을 산직으로 한다는 件記가 점연되어 있다.
(3) 무오년 4월에 충청도 회덕 송문화댁을 면례하고자 무주 유가면 오동리 上王到谷에 매표를 하였는데, 그 마을의 白士宗 등이 파 갔으므로 촌민 가운데 건실한 劉治九·李以奉·程大福·鄭乭夢·崔石夫 등을 산직으로 정하여 수호하고, 四山局內에서 松楸을 심고, 禁養하고 犯䂨의 폐가 없도록 하라는 것을 결정해 준 완문이다. ‘關’ 1번(292번 문기)과 앞의 완문 1·2번과 연관된 문서이다.
(4) 무오년 2월에 무주 유가면 오동리 上王到谷에 회덕 송문화댁 산지 표시를 묻었는데, 오동리 박사종 등 양한이 굴거해 갔다. 도의 관문에 의거해 매표는 근촌 동임 및 두민으로 전에 매표하였던 곳에 완축하고, 건실한 劉治九·李以奉·程大福·鄭乭夢·崔石夫 등을 산직으로 정하여 수호하고, 四山局內에서 松楸을 심고, 禁養하고 犯䂨의 폐가 없도록 하라는 결정해준 완문이다.
(5) 무오 4월 宋文化宅 墓直身役頉下 件記이다. 즉 위의 완문 2번에서처럼 사부의 묘직노비로 어영군의 역에서 탈역하는 劉治九·李以奉·程大福·鄭乭夢·崔石夫 대신에 어영군에 입역할 인물의 이름, 父의 이름, 거주지 등을 기록한 件記이다.
(6) 임오(1822)년에 宋村의 宋高靈宅이 一道面 冷泉 米山에 표를 묻고 山直을 정하여 守護케 하였다. 그런데 충청도 文義 義嘉灘에 사는 吳正猷가 자신의 선산 근처라고 標器를 파 갔다. 그래서 오정유를 잡아다가 엄히 다스리고, 표기를 다시 묻고, 局內에 禁養하여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도 감히 베지 못하게 하였고, 主峰의 전후좌우를 산직으로 하여금 금양토록 한다고 결정하여 준 완문이다.
3) 完文(성책고문서)
(1) 갑오 3월에 3월에 西上面 墨坊에 있는 동춘선생 立案之所라 수호군 2명의 戶布 煙戶雜役을 면해 준 것을 침범하지 말라고 성문출급해 준 완문이 이미 있으므로 준행하여야 한다고 결정해 준 완문이다.
(2) 갑오 12월에 위와 똑같은 취지로 다시 발급해준 완문이다.
4) 考音
무자 4월 초 3일에 회덕 송문화가와 산송에 패소한 戊朱 柳加面 王到谷의 金膺瑗 白昇永 등 3인이 제출한 다짐이다.
5) 慰狀
1671년(현종 12) 12월 9일에 송준길이 민진사 댁의 영제이매이씨부(令弟二妹李氏婦)의 갑작스런 죽음을 위로하면서, 송준길 자신은 병들고 시골에 있어 가서 위로하지 못한다고 하면서 보낸 위장이다.
6) 婚書
婚書(1)은 1660년(현종 1) 2월 3일에 송준길이 둘째 손자 炳夏와 海州牧使 安定 羅星斗의 姪女(羅星遠의 女)와 혼인시 사돈댁에 보낸 혼서이다. 이때 송병하의 부친 송광식(1625~1664)이 생존해 있었으나 혼서는 조부인 송준길에 의해서 보내졌다. 이는 당시 풍속에 혼서는 부모가 생존해 있다고 하더래도 그 집안의 가장 어른에 의해 작성되어 상대집안에 보내는 관행에 EKfms 것이다.
註26)
특히 본 혼서는 조선 후기 명필로 석봉체의 골격을 유지하면서도 비후한 획을 가미한 독자적인 서풍을 이룬 송준길의 친필이라는데 가치가 있다. 또한 사돈댁에 보내는 혼서였기 때문에 정성을 다한 송준길의 단아한 글씨체를 볼 수 있는 고문서로 의미가 있다.
婚書(2)는 1660년(현종1) 2월 3일에 안정 나성두가 질녀(나성원의 녀)를 송준길의 둘째 손자와 혼인할 시 보내온 혼서이다. 혼서(1)·(2)에서처럼 한 가문에서 동일한 혼인에 대하여 양가에서 주고 받은 두 건의 혼서가 남아 있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婚書(3-16)은 부록을 참조하기 바란다.
1) 23·24·25번 大同稧座目(1)·大同稧帖·大同契座目(2) 등 3권의 계첩은 宋村洞의 동계첩이다. 송촌동은 조선 초기에 은진송씨들이 입향 세거하여 송씨마을 즉 宋村으로 불리운 곳이다.
송촌동에 세거하였던 은진송씨의 번성은 조선 후기 宋俊吉(同春堂;1606~1627)에 이르면 절정에 달하였고, 은진송씨와 혼인 관계로 연결된 경주김씨 金慶餘(號 松崖;1596~1653)의 일족과 연안이씨 李時稷(號 竹窓;1572~1637)의 일족도 이곳에 세거하였다. 따라서 송촌동은 전형적인 사족 중심의 마을이었다.
大同契座目(1)은 가장 오래 된 것으로 1739년(己未) 11월에 설립된 대동계를 1748년(戊辰) 10월에 改修整하면서 작성된 계첩이다. 大同稧座目(1) 계첩의 구성은 「座目」과 「立議」로 구성되어 있다. 좌목에는 개수정시의 좌목 上契員 23명의 명단이 문서의 상단에 기록되어 있고. 그 다음에 상계원 追入이 1754년 1754년(甲戌)에 2명이 추입한 이후 1768년(戊子)년까지 8차례에 걸쳐 13명의 追入者의 명단이 있다. 그리고 상계원 가운데에서도 李世興과 高奉天의 경우에는 한 단 낮추어 기록하였다. 이러한 좌목의 기재 방식은 族契 등에서 庶子를 한 단 낮추어 기록하고 있는 것과 같은 경우이다. 상계원의 追入은 전혀 새로운 인물이 들어오기도 하지만 아버지를 이어 그 아들이 동계에 추입으로 들어온 경우이다.
大同稧座目(1) 下契員의 座目은 26명이다. 그리고 追入 및 代入으로 1749(己巳 3명)의 추입이 있은 후 1768년(戊子)등 19년 동안 11회에 걸쳐서 27명의 追入과 代入者의 좌목이 기록되어 있다. 하계원에서 代入은 먼저 改修整時 하계원의 자손으로 부친을 대신하여 입계하는 경우이거나, 아니면 특정인을 대신하여 입계하는 경우이다. 대입의 경우에는 누구를 대신하여 입계하게 되었는지를 기록하였다. 이는 동계의 경우에 정규 계원이 호주이었기 때문에 父가 年老하거나 사망하면 그 아들이 대신 입계한 경우이다.
大同稧座目(1)의 立議는 16개 조항으로 되어 있다. 입의 1조에 “此契之設 已之十年之久(中略)立議則仍舊而略加刪定焉”라 하여 동계가 설립된 1739(己未) 11월 이후 9년이 지나 수정한 것으로, 옛것에 따라서 약간 더하고 빼서 입의를 정한 것이다. 이는 현전하지는 않지만 송촌동의 대동계 설립시 작성한 좌목 및 입의가 별도로 있었고, 설립 당시의 입의도 大同稧座目(1)의 입의와 크게 다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大同稧座目(1) 입의의 주된 내용은 喪家에 대한 부조 물품과 사역규정, 불참시 처벌규정, 강신회 규정 등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입의 내용에서 볼 때 송촌동 대동계는 일종의 喪契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조선 후기에는 동계에서 신분적 지배 기구의 성격이 약해지고, 다만 喪事의 경제적인 부담을 해결해야 하는 필요성으로 동계에서 상계가 분리되는 경향이었다. 그런데 송촌동의 대동계는 시기가 18세기 중반이었음에도 아직 대동계가 상계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大同契帖은 1748에 개수정되었던 大同稧座目(1)을 다시 수정한 것이다. 다시 작성된 시기는 裏題의 앞부분에 “己未(1739)中冬初設立 己丑(1769)中冬改修整”라 되어 있어 1769년에 수정한 계첩임을 알 수 있다. 大同契帖은 座目과 立議 2개조, 丙辰完議, 大同契完議 등으로 되어 있다.
大同契帖의 座目은 상계원과 하계의 좌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수정시 상계원 좌목은 9명이고, 추입으로 1754년(甲戌) 2명을 시작으로 1775년(乙未)에 이르기까지 21년 동안 11차례에 걸쳐 16명의 추입이 있었다. 이 가운데 1754년(甲戌)에서부터 대동계첩을 개수정하였던 1769년(己丑) 이전까지의 추입자 좌목은 大同稧座目(1)의 올라 있는 상계원 가운데 大同契帖의 작성시 살아 있던 사람의 좌목이다. 따라서 1769년 개수정시 이전의 상계원을 확인하면 20명이므로, 이들이 곧 1769년 개수정시 상계원이다.
大同契帖 하계원은 3명이고, 추입 및 대입은 1749년(己巳) 1명으로 시작하여, 1772년(壬辰; 厚義稧와 合하여 43명)등 11년 동안 10차에 걸처 64명이다. 그런데 1749년(己巳)에서부터 1768년(戊子)까지의 좌목은 大同稧座目(1)의 하계원 좌목 가운데 개수정시까지 살아 있던 사람들의 좌목이다. 따라서 1769년 개수정시의 하계원은 18명이다. 그 후 다시 하계원의 추입·대입이 1774년(甲午) 2명에서부터 1796년(丙辰) 6명 등 8차에 걸처 21명이 있었다.
그 후 大同契帖의 1777년 이후 다시 상하계원의 추입이 있었다 상계원은 1777년(丁酉) 2명에서부터, 1796년(丙辰) 2명 등으로 1777년에서부터 1796년에 이르는 19년 동안 8차에 17명이 추입을 하였다. 하계원은 1797년(丁巳) 4명, 1800년(庚申) 4명 등 2차에 4명이 추입을 하였다. 大同契帖 하계원의 좌목에서 가장 특이한 점은 임진년(1772)에 厚義稧員 43명이 하계원으로 가입한 사실이다. 이 후의계가 어떠한 성격의 계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
다음으로 大同契帖에는 「立議」 2개조와 「完議」 2개가 있다. 「立議」 2개조는 大輦 및 상물의 출납에 관한 내용이다. 이처럼 입의가 2개조 밖에 안되는 것은 大同契帖의 「입의」가 大同稧座目(1)의 16개조가 줄어서 2개조가 된 것이 아니라 2개조만을 추가한 것으로 생각된다. 2개의 완의 가운데에 ‘丙辰完議’는 大同契帖이 작성된 이후의 병진일 것이므로 1796년의 완의이다. 주요 내용은 ‘喪物’의 출납과 ‘新入條’에 대한 규정이다. 이처럼 병진년(1796)에 완의를 작성한 것은 이해에 6명의 하계원이 대거 추입하게 되면서 상물의 출납 및 신입조에 대한 새로운 규정이 필요해서 새로 작성된 완의로 보인다. 두 번째 완의인 「대동계완의」는 戊子年 12월에 작성한 것으로 되어있는데 이 무자년은 1796년의 이후의 무자년이므로 1828년 일 것으로 생각된다. 무자년의 대동계완의는 계의 재산을 유사가 마음대로 매도하지 못하도록 한 결정이다.
大同契座目(2)은 1769년(己丑)에 다시 수정되었된 송촌동 대동계가 어떤 연유에서인지 1803년(癸亥)에 계가 파하였다가 1889년(己丑)에 다시 設契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계첩의 서문을 송종오(號 漢蒼;1828~1904, )가 썼는데, 송종오의 생몰년대를 참고하면 여기서 기축년은 1889년이다. 즉 대동계좌목은 1803년에 破契하였던 계를 1889년에 다시 설립한 것이다. 대동계좌목(2)은 서, 좌목, 입의로 구성되어 있다. 서는 송종오가 지었는데 송촌동 대동계의 연혁을 간단히 적고, 다시 설계하게 된 사실을 적은 것이다. 좌목은 상계원 10명과 하계원 88명의 명단이다.
大同契座目(2)의 立議는 8개 조목으로, 주 내용은 상·하계원의 기금출자, 契會日, 殖利 등에 관한 규정이다. 그리고 좌목이 한번 작성된 이후 추입이나 대입이 전혀 없다. 이는 대동계가 다시 설립된 후 그 동계로서의 기능을 하지 못한 것이 아닐까 한다. 왜냐하면 동계가 살아서 그 기능을 하였다면 자연스럽게 계원의 추입이나 대입 등 계원의 출입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2) 金蘭契帖
1921년에 유생 12명이 친목을 도모하고 학업에 힘쓰기 위하여 조직한 것이다. 金蘭稧라는 이름은 친구간의 우정이 金石과 같이 굳으면서 그 향기는 蘭草와 같이 향기롭다는 중국의 고사에서 따온 것이다.
계첩은 서문·좌목·입의로 구성되어 있다. 서문은 서로 절차탁마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좌목」에는 金大鎭 등 12명으로, 은진송씨가 8명이고, 김대진은 은진송씨가와 연혼관계에 있는 것으로 보아 은진송씨 중심의 금란계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좌목의 인물들의 거주지가 회덕현 및 회덕의 송촌지역의 인물들이므로 계의 지역적 기반은 회덕 일대이다. 그 좌목의 출생간지로 계산하면 설계시 년령은 35살에서 17살까지로 상당히 나이 차이가 많음을 알 수 있다. 「입의는 모두 15개조로 修契日, 정기회일, 기타 출자·식리·계물의 운영 등에 관한 것이다. 입의 가운데에 4조는 “朋友務相勉學事”라 하여 계의 설립 목적의 하나가 면학임을 알 수 있다.
3) 童蒙座目帖
본서는 동몽좌목첩으로 좌목과 송기연(1727~1809)의 서문으로 되어 있다. 서문에 의하면, 동몽좌목첩은 송기연의 舅氏 閔公이 辛酉年(1741) 동몽교관에 임명되어 가르친 사람들의 명단이다. 여기서 舅氏 민공은 송기연의 외조가 현감을 지닌 여흥 閔承洙인 것으로 보아 그의 아들 즉 송기연의 외숙이었던 閔百亨을 가르키는 것으로 보인다. 閔百亨(1707~?)은 영조 16년(1740)에 증광시에 진사 2등 8위를 한 다음해인 신유년(1741)에 동몽교관에 임명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데 처음에 배움을 청하는 사람이 없어 사퇴하려 하였다가, 훈도들을 열심히 가르쳐 한 달여 만에 십여명이 되었다. 좌목에 올라 있는 16명 가운데 송기연이 제일 연장으로, 함께 공부한 의리가 형제와 같았다. 그런데 송기연이 남쪽으로 돌아가게 되어 다시 볼 수 없게 되어 同學의 성명을 列書하여 때때로 볼 수 있게 작성한 것이다.
4) 玉溜閣契帖
옥류각은 동춘당 송준길(1606∼1672)이 34세 때인 1639(인조 17)에 세운 건물로서 2층 누각형이다. 건물의 이름은 골짜기에 사시사철 옥같이 맑은 물이 흘러 내려오고 있다는 뜻으로 옥류(玉溜)라고 하였는데, 송준길의 시구에서 차용한 것이다. 건물의 ‘옥류각’현판은 처음에는 우암 송시열의 글씨였으나, 현재의 것은 곡운 김수증 선생의 글씨이다. 현재 옥류각은 대전 광역시 유형문화재 7호로 지정되어 있다. 옥류각은 현재 대전광역시 비래동 산1-11에 있으며 은진송씨 대종중의 소유로 되어있다.
玉溜閣契帖은 ‘玉溜閣講會契帖序(宋琦用 撰)’, 玉溜閣契座目(79명), 學規(9條目), 立議(10개조), 玉溜閣講會序(蘇輝冕)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계의 설계시기는 1883년이고, 계의 결성 목적은 학계이다. 그러나 학계인 옥류각계는 1883년에 처음 실시된 것은 아니고, 문서번호 30·31·32번의 飛來書堂座目(1·2·3)을 계승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본 「옥류각계첩 서문에 “是契中廢 而遺案視岩弁髦 委諸緇徒之筴笥 而莫之省焉 上下二百年之間”라 하여 비래서당이 중도에 폐지되어 遺案을 옥류각 곁에 있는 비래암에서 찾아져 약 200년간 중단되었던 학계를 1883년에 다시 설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좌목에 입록된 사람은 79명으로 그 가운데 은진송씨가 48명인 약 61%로 옥류각계가 은진송씨 중심의 계임을 알 수 있다. 학규 9개조는 율곡의 은병정사 학규(19개조)에 약간의 增損을 한 것이라 하나, 그 일부만을 수용한 것이다.. 입의는 10개조로 계원의 계전 각출과 식리, 강회 일시, 계물의 운영, 추입의 규정 등에 관한 것들이다.
본 계첩은 조선 말기 서당 운영의 실제를 알 수 있는 자료이다.
5) 盡心契座目
진심계는 업의에서 “契以盡心 必欲爲盡其心於事親”이라 한 것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부모에게 효를 다하기 위해 설계한 것으로, 계의 명칭인 ‘盡心’도 맹자의 ‘盡心章’에서 따온 것이다. 계첩의 구성은 「진심계서」, 「좌목」, 「입의」로 되어 있다.
18명의 좌목 가운데 12명이 은진송씨이므로, 은진송씨 중심의 계였다. 좌목 가운데 崔敬善은 한 단 내려 기입하였는데, 이는 통상의 계첩에서처럼 서자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리고 본 ‘좌목’을 작성시 사망한 3명은 좌목의 제일 끝에 기입하였다. 입의는 12개조로 계회일, 매원 출자금, 계전 식리 규정 등으로 되어 있다.
‘진심계’의 설계 시기는 좌목의 제일 앞에 실려 있는 宋弼淳이 1843년에 출생하였고, 제일 뒤의 李存誠이 1879년에 출생한 것으로 보아 19세기 후반 내지는 20세기 초반에 설계한 것이다.
6) 飛來書堂座目
문서번호 30·31·32번의 飛來書堂座目(一)·(二)·(三) 3책은 옥류각계첩 서문에 “是契中廢 而遺案視岩 弁髦委諸緇徒之筴笥 而莫之省焉 上下二百年之間”라하여 옥류각계첩 작성시보다 약 200년전 ‘옥류각’에 있었던 비래서당의 좌목이다. 이 좌목은 옥류각의 곁에 있던 배래암(사)에 보존되어 오던 것을 발견하여, 옥류각계첩과 함께 서궤 보존하여 온 것이다.
飛來書堂座目(一)은 宋光柱(1613-?)에서 송광림(1662-1711)까지 119명의 좌목, 立議 11개조, 罰目 3개조로 구성되어 있다. 입의 11개조는 식리한 곡식의 사용, 유사·장의의 임기와 역할, 강신회와 관련된 규정, 서당 서책의 사유금지 규정, 불참자 처벌 규정 등이다. 飛來書堂座目(一)은 좌목의 구록과 신록의 구분 없이 119명의 계원의 명단이 적혀 있는 점, 본 좌목에 있는 인물 가운데 飛來書堂座目(二)·(三)에는 등재되지 않은 인물들이 있는 점 등으로 보아 3개의 좌목 중 가장 오랜 것으로 보인다. 좌목의 작성 시기는 좌목에 등재된 인물로 보아 17세기 중반에서 말까지로 보인다. 좌목에 오른 119명 가운데 81명이 은진송씨이다. 이는 비래서당 즉 옥류각을 송준길이 세운 것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飛來書堂座目(二)은 「비래서당좌목 구록」, 「비래서당좌목」, 「서당입의」, 「벌목」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구록」은 飛來書堂座目(一) 宋光柱(1613-??)에서 金益善 까지 38명. 비래서당좌목은 宋時范(1618-??)에서 宋夏元(庚子1660-??) 116명의 좌목이 실려 있고, 13차에 걸처 132명이 추입하였다. 「書堂立議」는 11개조로 飛來書堂座目(一)에 실려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飛來書堂座目(二)의 개정은 첩의 제일 뒤에 기록된 1686년(숭정병인)이다.
飛來書堂座目(三)은 舊錄과 飛來書堂座目으로만 구성되어 있고, 입의는 없다. 舊錄은 宋時范(1618-??)에서 宋光榮(1671-??) 까지 96명이다. 구록은 飛來書堂座目(二)의 좌목에서 사망한 자를 제외한 생존자와 새로 입록한 사람의 좌목이다. 飛來書堂座目 : 송덕신(1638-??)에서 宋相澤(1694-??)까지 137명. 追入 송필소(1670-??)에서 송광정(1668-1734)·宋奎爀(1671-??)까지 31명이다.
7) 崇賢書院 儒案
문서번호 33·34·35·36·37·38·39·40번은 숭현서원의 각종 유안이다.
註27)
숭현서원은 현재 대전광역시 서구 대덕구 원촌동에 있는 서원이다. 숭현서원의 정확한 건립 연대는 알 수 없고, 대체로 16세기 후반에 건립된 것으로 추측된다. 처음에는 정광필(1462-1538), 김정(1486-1521), 송린수(1487-1547) 등 3인을 배향한 삼현서원이었고, 그 해에 이시직등 유생들이 건의하여 ‘崇賢’이라고 사액을 받았다. 그후 1646년(인조 24) 김장생을 추향, 1681에 송준길, 1695년(숙종 21)에 송시열, 그리고 별묘에 이시직(1572-1637)과 송시영(1588-1637)을 추향하였다. 이때부터 8현을 배향한 서원이라 하여 팔현묘라 불리우기도 한 서원이다.
註28)
(1) 崇賢書院靑衿錄(一)
崇賢書院 유생의 명단이다. 표지의 서명은 “숭현서원청금록” 이나 내제는 “회덕숭현서원청금록”이다. 1쪽에서 29쪽까지는 舊案에서 전사한 것으로 군수 宋應瑞, 군수 宋柟壽 등 148명이 기록되어 있다. 뒤부분 31쪽에서 58쪽 까지는 본 유안의 작성시 유생들의 명단이고, 59쪽부터는 14차례에 걸처 追入 143명이 실려 있다.
舊案은 1쪽의 송남수가 1537년(정유)에 출생하여 1626년(병인)에 사망한 것을 고려할 때 16세기 말경에 작성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新案은 첫째 장에 실려 있는 강백년이 1603년(계묘)에 출생하여 1681년(신유)에 사망한 인물임을 미루어 보아 17세기 중반에 작성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와 관련하여 송인협은 崇賢書院靑衿錄(一)의 작성이 1674년(현종 15년)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았다.
註29)
(2). 崇賢書院靑衿錄(二)
崇賢書院에 소속되었던 유생들의 명단이다. 1쪽에서 26쪽까지는 舊案을 등사해 놓은 것으로 154명이 실려 있다.. 그리고 27쪽에서 32쪽까지는 구안을 戊戌 8월에 개수정한 것으로, 35명이 실려 있다. 33쪽에서부터 70쪽까지는 숭현서원청금록으로 본 문서를 작성할 당시 유생 226명이 실려 있고, 70쪽 이후에는 모두 1회에 걸처 349명이 실려 있다. 구안은 1711년(숙종 37), 구안을 개수정한 것은 1718년(숙종 44)에 실시한 것이며, 본 崇賢書院靑衿錄(二)은 추입을 통해서 보면 1751년(영조 27)이나, 1762(영조 38)까지 존속했던 것으로 보인다.
註30)
(3) 靑衿錄(一)
표지서명은 靑衿錄이나 내제는 崇賢書院靑衿錄이고, 모두 132명의 명단을 실었다. 1636년과 1637년 사이에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註31)
(4) 靑衿錄(二)
표지의 서명은 ‘靑襟錄’으로 되어 있으나 내제는 ‘崇賢書院儒籍’,이다. 본록 55명, 추록이 23회 49명으로 모두 104명의 유생들의 명단이다. 작성시기는 첫째 쪽 첫행에 “萬曆四十二年甲寅八月日”라 되어 있어, 1614년 8월에 작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표지서명의 글씨와 내제의 글씨가 다른 것으로 보아 표지는 후에 개장된 것으로 보이고, 개장시기는 표지에 ‘丁巳’라 되어 있어 1614년 이후의 ‘정사’로 보이나 정확하게 언제인지는 알 수 없다.
의 .
(5) 崇賢書院東齋齋任錄
崇賢書院東齋齋任錄은 甲戌 掌議 金重錫, 有司 宋來慶·宋必炯에서부터 시작하여 戊戌 掌議 宋載祜, 有司 宋顯增·宋台鎭 까지의 東齋 齋任을 기록한 것이다. 본 문서의 작성 연대를 알아보기 위하여 갑인년에 장의를 맡았던 송사흠의 생몰 연대를 찾아보면 1700년(경진)에 출생하여 1746년(병인)에 사망하였다. 따라서 그가 장의로 있던 갑인년은 1734년(갑인)이 된다. 이를 기준하면 본 재임록이 작성되기 시작한 갑술년은 1694년이 되고, 본 문서의 마지막 무술년은 1778년이다.
(6) 崇賢書院序次錄
崇賢書院의 序次錄으로 책의 앞 뒤 표지가 떨어져 나갔다. 숭현서원의 유생들의 명단을 나이순으로 기록한 것으로 同敦寧 宋堯卿으로 시작하여 幼學 金光灝까지 70명의 명단에다가 8번의 추입이 있다. 명단 작성 후에 사망자는 성명 위에 종이를 붙이고 그 위에 선(屳)이라 썼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이름 위에 종이를 붙이고 출적(黜籍)이라 기록하여 유안에서 삭적된 표시를 하였다.
본 숭현서원서차록이 언제부터 기록된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첫째 쪽 宋堯卿이 1668년에 출생하여 1748년에 사망한 것으로 보아 17세기 후반에서부터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7) 崇賢書院序次錄
숭현서원 유생 25명의 명단을 나이순으로 기록하고, 이어 8차례에 걸쳐 226명의 추입이 있다. 서차록이 작성된 이후에 관직에 오른 경우에는 유학이라는 글자 사이에 관직명을 추기하였다. 서차록의 작성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첫째 쪽에 실려 있는 宋堯和가 1682(임술)에 출생하여 1764(갑신)에 졸하였고, 金德運은 1687(정묘)에 출생하여 1767년(정해)에 졸한 인물이었음을 고려할 때 18세기 초에 작성되기 시작한 것임을 알 수 있다.
(8) 崇賢書院序次錄
본 서차록은 표지 이면에 “序次錄 卽靑衿錄謄書 而置于外笥”라 하여 청금록을 등서하여 서원 밖에 두었던 것이다. 이처럼 청금록을 등서한 것은 표지 이면에 “望出齋任時 必以此錄中 先生子與孫薦出”이라하여 재임을 선출할 때 반드시 본 서차록 가운데에 선생(숭현서원에 봉안된 선현)의 자와 손으로 천출하기 위한 것이었다.
본 서차록이 정확히 언제 등서된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좌목의 첫 번째 인물인 宋道天의 생년이 1642년이고, 좌목의 끝에서 둘째 장에 실려 있는 송정흠이 1715년에 출생하여 1755년에 사망한 인물이다. 따라서 본 숭현서원서차록은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초까지 사용된 좌목임을 알 수 있다.
8) 懷德鄕校 儒案
41·42·43번의 자료는 회덕향교 유안이다. 회덕향교의 유안이 어떻게 송봉기댁에 세전되어 오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현재 회덕향교에는 각종유안을 비롯한 조선 후기의 사회사 자료들이 소장되어 있다.
註32)
이들 자료들은 회덕향교 소장자료들과 함께 조선 후기 향촌사회사 및 신분병을 이해할 수 있는 자료로 가치가 있다.
(1) 鄕校東齋靑衿錄
회덕향교의 동재청금록 즉 양반 유생 314명의 명단이다. 이처럼 대규모의 유생 명단이 작성된 것은 조선 후기 청금록에 입안되는 유생은 定額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본 鄕校東齋靑衿錄이 작성된 시기는 첫째 쪽의 송시인이 1804년 출생이었고, 끝에서 두 번째 쪽에 등재되어 있는 송종하가 1856년에 출생하여 1927년에 사망한 인물임을 감안하면, 대체로 19세기 초중반에서부터 작성되어 20세기 초반까지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본 청금의 좌목의 성명 위에 직역뿐만 아니라 누구의 후손인지를 적고 있다. 이는 청금록에 입안을 할 시에 문벌자제를 천거하는 형식을 따랐기 때문으로 보인다.
(2) 東齋靑衿錄新件
東齋靑衿錄新件의 구성은 「鄕校東齋靑衿錄舊券」 171명, 「舊券」 22명, 「新件」 83명, 追入 9회 304명, 「崇賢書院靑衿錄」 追入 9명, 「鄕校東齋靑衿錄」 184명으로 되어 있다.
이 가운데 「鄕校東齋靑衿錄舊券」 171명, 「舊券」 22명은 舊券에 실려 있던 인물을 전사한 것이다. 이 구권은 첫째 장에 입록되어 있는 金昌錫이 1648에 출생하여 1724년에 사망한 인물임을 감안하면 17세기 후반에 작성된 ‘회덕향교동재청금록’을 옮긴 것으로 생각된다. 본 「동재청금록신건」의 특징은 52쪽의 “崇賢書院靑衿錄 與此件以上皆同 而下有追入諸員 故吾家先世諸位敬書于左”라 한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다시 말하여 본서 52쪽 이전은 ‘崇賢書院靑衿錄’과 동일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회덕지역의 경우 17세기 후반에서부터 18세기 말에 작성된 회덕향교청금록과 회덕지역의 대표적 서원이었던 숭현서원의 유생이 같았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본 東齋靑衿錄新件은 작성시에 동춘당 송준길 후손들이 중심이 되어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 위 인용문에 “追入 諸員 가운데 우리집 先世 諸位을 좌측에 삼가 쓴다”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실제로 ‘追入 丁卯五月十二日修整舊薦’이라 하여 정묘년(1884)에 克欽·起淵·肅欽과 다시 追入同日新薦 이라 하여 約欽·志淵·達淵·致淵·時淵·溥淵 등이 청금록에 입록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는데, 모두 송준길의 후손들이다. 「鄕校東齋靑衿錄」 184명의 좌목은 1884년에 현 소장자의 증조부 敎淳이 쓴 것이다.
(3) 東齋靑衿錄舊件
본 東齋靑衿錄舊件은 宋啓昌에 송휴영까지 모두 150명이 입록되어 있다. 입록된 인물의 시기를 보면 첫째 장에 입록된 송이창이 1561년에 출생하여 1627에 사망한 것을 감안하면 16세기 후반의 인물부터 입록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끝에서 두 번째 쪽에 실려 있는 宋一源의 출생은 1664년이고, 몰년은 1712년이었으므로 18세기 초의 인물까지 입록된 것임도 역시 알 수 있다. 그리고 제일 끝 쪽에 좌목의 작성이 완료된 것임을 보여주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미완성의 문건으로 보인다. 본 東齋靑衿錄舊件은 대전시립박물관 소장 회덕향교유안 3건중 가장 이른 시기의 인물이 입록된 청금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