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장처 고문서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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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정(본원 한국학자료센터 전임연구원)
이 책의 주인공이 되는 칠곡의 광주이씨는 15세기 말 성주(星州)로 낙남(落南)하여 이윤우(李潤雨), 이원정(李元禎), 이담명(李聃命) 등을 배출하며 영남학파와 남인계를 주도하였던 영남 굴지의 가문 가운데 하나이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귀암(歸巖) 이원정 종가(宗家)에서 가전(家傳)되던 자료가 본서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귀암종택의 전적(典籍)들도 다른 많은 고전적들과 마찬가지로 순탄하지만은 않은 보전의 역사를 살았다. 귀암의 9세손 이상석(李相奭: 1835~1922)은 한말 성주·칠곡 지역에서 선비로 이름이 높았던 인물이다. 그는 나라가 망하자 집 곁에 정자를 지어 ‘농암정사(聾巖精舍)’라고 명명하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1) 자연히 집안의 전적들이 이곳에 모여들게 되었고, 1970년대까지 여기에 보관되었다. 1970년대에는 문화재 초기 조사가 한창이었는데, 이 조사를 통해 귀암종택의 일부 귀한 자료들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빌미가 되었는지 농암정사 뒷벽이 헐리고 이 전적들이 몽땅 도둑맞는 참담한 일이 발생하였다. 종손이 백방으로 수소문한 끝에 대구 모 대학에 팔려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한 독지가의 도움으로 이 전적들을 다시 돌려받을 수 있었다. 자료 관리에 큰 어려움을 겪은 종손은 고서 및 일기자료들을 당시 효성여대에 기증하기로 결정하였다. 당시 효성여대는 연세대, 고려대, 영남대, 경북대, 계명대 등과 더불어 전국적으로 유실되고 있는 고전적들을 경쟁적으로 수집하고 있었으므로, 광주이씨 자료를 흔쾌히 받아들였음은 물론이다. 이것이 1970년대 중반의 일이었다.  2) 〈용비어천가〉, 〈박통사언해〉 등 다수의 내사본과 희귀본 고서, 이담명의 치부일기 등 약 2,500여 책의 필사본 자료가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구 효성여대) 중앙도서관에 석전문고(石田文庫)3) 라는 이름으로 소장되어 있다.
고서 중심의 자료가 효성여대로 기증된 후, 종택에 남아있던 고문서자료는 2000년경 우리 연구원 고문서연구실4) 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1549년 분재기, 이담명 교서 등 연대가 올라가고 중요 인물들의 문서를 많이 포함하고 있던 이 자료는 연구원을 거쳐 서울역사박물관에 기증되었다. 약 400여점에 달하는 이 자료는 역사박물관에서 지난 해 말 개최한 전시회와 도록 발간을 통해 대중에게 소개되었다.  5) 이외에도 역사박물관에서는 이담명이 승정원 주서(主書) 시절에 작성한 ‘승정원사초(承政院史草)’를 수집하여 간행하였다.  6) 역시 귀암종택에 전해지던 것으로 총 161책에 달하는 방대한 양이다.  7)
한편 1차 자료조사 후에 추가로 발굴된 가전 고문서가 현재 연구원에서 정리를 마치고 보관 중이다. 앞서 서울역사박물관으로 기증된 자료가 보다 핵심이라 할 수 있겠지만, 추가로 발굴한 자료 또한 그 양과 질에 있어 뒤지지 않는다. 무엇보다 약 2,500여 점에 달하는 방대한 양이다.
이렇게 광주이씨 자료는 대구가톨릭대학교, 서울역사박물관, 한국학중앙연구원에 나누어 보관되어 있으며, 그 질과 양에 있어 어느 것 하나 본말을 따질 수 없는 상황이다. 따라서 광주이씨 자료를 󰡔고문서집성󰡕으로 간행하기 위해서는 이 세 소장처 자료에 대한 조사가 필수적이고, 이를 모집단으로 한 선본 혹은 수록자료 선정이 진행되어야 했다. 부족하나마 고문서연구실에서는 이에 대한 1차 조사를 마치고, 현 소장처보다는 자료의 성격과 가치를 중심으로 광주이씨 전체 자료의 정리 및 간행계획을 세웠다.  8) 그 일환으로 이 책이 나오게 된 것이다. 이 책에 수록한 자료범주에 대한 보다 자세한 설명은 3장에서 상술하도록 하고, 아래에서는 칠곡의 광주이씨가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1) 신진사대부 李集
광주이씨의 실질적 시조로 일컬어지는 이집(李集)은 고려 충숙왕 14년(1327)에 광주(廣州)에서 태어나 우왕 13년(1387)에 사망하였다. 이집이 시조로 꼽히는 것은 그의 선대 기록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이집의 아버지 이당(李唐)은 국자감시에, 이집을 포함한 다섯 형제(仁齡·元齡·希齡·自齡·天齡)는 모두 문과에 급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집을 제외한 다른 형제들의 후손은 현달하지 못하여 조선 중기까지 그 기록을 남기지 못하였다. 그런 까닭에, 이집의 후손들은 오래도록 자신들만을 광주이씨의 ‘전체’로 인식하였다. 이는 18세기 말에 간행된 광주이씨족보에 처음으로 이집의 형제 후손들이 부록의 형태로 실린 점에서 잘 드러난다.  9) 이집은 오래도록 광주이씨의 시조로 인식되었다.  10)
한편 광주이씨 족보에서 이당은 향리(鄕吏)였다고 기록되었다. 그는 신라 내물왕 때 내사령(內史令)을 지낸 이자성(李自成)의 후손인데, 칠원(漆原: 현재 경남 함안)에 살던 이 후손들이 935년 경순왕이 고려 태조에게 항복한데 불복하자, 태조가 이들을 삭탈관직하여 회안(淮安: 현재 경기 광주)으로 옮겨 살게 하였다 한다.  11) 이러한 기록을 모두 신뢰할 수는 없겠지만, 이당의 선대가 회안지역의 향리층이었음은 추측할 수 있다. 회안, 즉 지금의 광주지역의 향리층으로 착실한 자기성장을 하던 광주이씨가는 이당·이집 부자 대에 이르러 과거에 급제하고 중앙에 진출하는 일대 도약을 이룩한 것이다.
공민왕 4년(1355)에 문과에 급제한 이집은 정몽주(鄭夢周), 이숭인(李崇仁), 김구용(金九容), 전록생(田祿生), 박상충(朴尙衷), 정도전(鄭道傳) 등과 절친하게 지내며 관직을 이어나가 신흥사족으로서 입지를 다졌다. 그러나 그는 당시 개혁을 주도하였던 신돈(辛旽)과 사이가 좋지 못하였다. 고려말 신흥사족들은 신돈을 발판으로 성장하였지만, 그가 점차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자 사이가 벌어졌다. 그러던 중 신돈이 이집의 좌주(座主)인 이공수(李公遂)를 면직시키고 동년(同年)인 정습인(鄭習仁)을 폐서인시키는 일이 발생하였다. 공민왕 17년(1368) 채판서(蔡判書)라는 자가 이집이 신돈을 비판한 것을 고자질하자, 이집은 다가올 화를 피해 부친과 처자를 데리고 동년인 사간(司諫) 최원도(崔元道)가 있는 경상도 영천(永川)에 은거하였다. 그 와중에 연로한 아버지가 사망하여 최원도의 도움으로 영천군 나현(蘿峴)에 부친을 안장하였다.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 피난생활을 하던 이집은 공민왕 20년(1371) 신돈이 축출되고 나서야 개성 용수산(龍首山) 아래 현화리(玄化里) 옛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때 이집은 새로운 삶을 얻었다는 뜻에서 이원령(李元齡)에서 이집으로 개명하고 호연(浩然)이라고 자(字)도 다시 지었다. 그 후 이집은 경상도순문사 전록생을 따라 합포(合浦)에 출진하고 봉순대부판전교시사(奉順大夫判典校寺事)에 제수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여주(驪州) 천녕현(川寧縣)으로 물러나 여말의 혼란한 정국을 피해 독서로 세월을 보냈다.
이렇듯 여말에 문과에 급제하여 당대의 신진사대부들과 교류하였던 이집은 영천 피난생활과 후년의 은거생활을 통해 절의파적 성격이 강한 신유학적 지식인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의 이러한 은거적 성향과는 달리 그의 세 아들 지직(之直)·지강(之剛)·지유(之柔)는 여말에 모두 문과에 급제하고 환로에 나아가 조선왕조의 개창을 돕는 역할을 함으로써 광주이씨를 조선전기 최고의 벌열가문으로 이끌게 되었다.
(2) 훈구파의 대표가문
이집의 자손들은 조선왕조의 개창을 돕고 이어 세조의 집권을 도와 다수의 공신을 배출하며 조선 전기 최고의 명문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집의 세 아들이 모두 여말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장자 이지직의 세 아들과 여덟 손자가 조선 전기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특히 이지직의 둘째 아들 이인손(李仁孫)이 우의정을 역임한 것을 필두로 그의 장자 이극배(李克培)가 영의정, 차자 극감(克堪)이 형조판서, 3자 극증(克增)이 병조판서, 4자 극돈(克墩)이 좌찬성, 5자 극균(克均)이 우의정을 각각 역임하는 등 세조 이후 성종과 연산군 치세 동안 이들 5형제가 정국을 좌지우지할 정도였다.  12) 이러한 광주이씨의 번성은 〈광주이씨 상대 가계도〉에 잘 나타나 있다.
■ 광주이씨 상대(上代) 가계도
(3) 사화(士禍)와 광주이씨가  13)
좌익공신(左翼功臣)과 좌리공신(佐理功臣)을 연이어 배출한 광주이씨가문은 조선 전기 훈구파 가문의 대표격에 해당하였다. 이러한 훈구적 속성은 연산군대에 일어난 무오사화를 이극돈(李克墩) 형제와 조카 이세좌(李世佐)가 주도한 데서 잘 드러난다. 그러나 그로부터 6년 후에 일어난 갑자사화에서는 이극균(李克均) 부자를 비롯하여 이세좌와 그의 세 아들 수원(守元)·수의(守義)·수정(守貞), 그리고 세홍(世弘)·수공(守恭) 등이 화를 입었다. 또한 중종조에 조광조 일파의 개혁정치를 기화로 비롯된 기묘사화에서 이세좌의 손자 이연경(李延慶)과 이세우(李世佑)의 손자 약수(若水)·약빙(若氷)이 화를 입게 되었다. 특히 기묘사화 시기에는 충주에 정착한 광주이씨 후손들이 사림의 한 축을 형성하고 있어 더 큰 화를 당하였다.
명종이 즉위한 후 광주이씨 가문에서는 재차 화를 당한 자가 속출하였다. 을사사화로 인해 직제학으로 있던 약해(若海)가 경원에 유배되었다가 유권(柳灌)과 가깝다는 이유로 사사되었고, 양재역벽서사건이 일어나자 윤임(尹任)과 사돈관계였던 약빙이 사사되었으며, 그의 아들 홍남(洪男)은 영월로 귀양가게 되었다. 또한 이윤경은 을사사화 당시 대사간 직분으로 위사공신 3등에 책봉되기도 했으나, 그의 아들 중열(中悅)이 대윤(大尹)으로 몰려 사사되었고, 이로 인해 그 역시 삭탈관직되었다. 이준경(李浚慶) 또한 을사사화 당시에는 외직으로 나가 있어 화를 모면했으나, 이기(李芑)와의 구감때문에 대윤으로 몰려 보은에 유배되었다.
이처럼 조선 초기 최대 문벌을 자랑하던 광주이씨가는 갑자-기묘-을사사화에 연이어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 이러한 피해는 이들이 훈구적 성향에서 사림적 성향으로 그 면모를 일신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무오사화는 이인손의 넷째 아들 이극돈이 주도하였으며, 그는 사림의 영수 김종직의 부관참시를 극론할 만큼 사림파에 대한 적대의식를 내보였다. 그러나 동시에 영남 사림들과 교류가 있었던 이극배의 손자 이수공은 불고지죄로 창성(昌城)에 유배되었다. 이러한 전환은 일시에 나타난 것이라 보기는 힘들다. 이집이 가졌던 절의파 지식인과의 깊은 교류는 그의 아들 이지직에게 이어져, 지직은 포은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손자 인손은 김종직의 아버지 김숙자의 재우(齋友)로 그의 평생사우(平生師友) 35인 중 으뜸으로 꼽힌다. 또한 인손의 아들 극균은 김숙자의 아들 종석(宗碩)·종직과 함께 독서당에 들어가 공부하였다. 이극배(李克培)의 손자인 수공은 충청도 황간지역을 기반으로 이미 영남 사림세력과 교류하고 있었다. 즉, 광주이씨 가문이 당대의 벌열가문으로 착실히 성장하고 있던 시기에도 이집으로부터 내려오던 학풍과 교류관계가 소극적이나마 신진사류와 연결고리를 만들고 있었고,  14) 이러한 가운데 충주에 정착하여 사림파로 일신한 광주이씨 계열은 기묘사화와 을사사화에서 큰 피해를 입게 된 것이다.
(1) 성주로의 낙남
칠곡의 광주이씨는 이지직의 여덟 손자인 팔극(八克) 가운데 이극견(李克堅)의 후예들이다. 이극견은 다른 형제들과는 달리 문과에 급제하지 못하고 벼슬 또한 통례원좌통례(通禮院左通禮)에 그쳤다.  15) 광주이씨가 극성하던 시절에도 비교적 약세를 면치 못하였던 이 계열은 극견이 성주목사 재임시절 둘째아들 이지(李摯)를 영천최씨(永川崔氏) 최하(崔河)에게 장가보냄으로써 성주  16) 에 정착하게 되었다. “가법(家法)이 있다  17) ”는 족보의 기록으로 보아 영천최씨는 당시 성주 일대에 탄탄한 재지기반을 가지고 있었던 가문으로 추측된다. 한편 현지답사 과정에서 이지 부처의 묘가 처외가 인물 해평김씨(海平金氏)  18) 의 묘와 더불어 한 국내(局內)에 조성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는 해평김씨의 경제적 기반이 손서인 영천최씨에게로, 그리고 다시 외손서인 이지에게로 옮겨왔음을 추측케 한다.
이러한 경제적 기반의 확충은 분재기(分財記)를 통해 확인된다. 수록된 분재기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1538년에서 1550년 사이에 작성된  19) 신천강씨(信川康氏)의 깃급문기(衿給文記)이다. 이지의 아들 이덕부(李德符)의 두 번째 처인 신천강씨가 이덕부 사망 후 9남매  20) 에게 재산을 나누어 준 것이 그 내용이다. 분재하고 있는 재산의 총량이 노비 182구(口), 상당한 규모의 전답  21) , 와가(瓦家) 3좌(坐)에 달한다. 신천강씨의 처변재산을 따로 알 수 있는 자료는 없으나, 이지와 이덕부 대를 경과하면서 광주이씨가는 영천최씨, 신천강씨의 경제적 기반을 물려받으며 그 경제적 토대를 확고히 하고 있었음을 이 분재기를 통해 알 수 있다.
1549년 김취성(金就成) 부처(夫妻) 깃급문기는 보다 직접적으로 처변재산이 광주이씨가로 흘러들어오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김취성의 맏사위가 바로 이덕부의 장자 이준경(李遵慶)이다. 김취성 부처는 남매와 양손(養孫)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었는데, 이준경은 총 노비 22구, 논 57두락, 밭 136두락(斗落)을 물려받았다.  22) 이는 이준경이 본가로부터 상속받은 재산에 필적하는 것이다.
광주이씨가 이들 가문과 혼인한 것은 이러한 경제적 기반의 전수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덕부의 장인 신천강씨(信川康氏) 강중진(康仲珍)23) 은 김숙자의 외손자로 외숙 김종직에게 수학하여 영남 사림파의 학통을 이은 인물이며, 탄수(灘叟)·소재(蘇齋)학맥에 영향을 준 인물  24) 이다. 이 혼인은 훈구파의 대명사였던 광주이씨와 영남사림파와의 결합이라는 점에서 주목되며, 후일 성주에 정착한 광주이씨 가문이 영남학파의 핵심가문으로 부상할 수 있었던 가학적 토대라 할 수 있다. 혼맥을 통한 영남사림파와의 유대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덕부의 아들 이준경은 김취성의 딸을 배필로 맞았고, 덕부의 동생 인부(仁符)는 딸을 김취문(金就文)에게 시집보내었다. 선산(善山) 출신의 김취성·취문 형제는 송당(松堂) 박영(朴英)의 문인으로 송당학맥을 대표하던 학자들이었다.  25)
이상과 같이 성주로 이거한 광주이씨가는 탄탄한 지역기반을 가진 영천최씨 가문, 그리고 탄수·소재학맥, 송당학맥의 핵심가문들과 통혼하며 사회적, 학문적 기반을 확대해 간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광주이씨가는 스스로의 모습 또한 일신하였다. 그러한 변화가 단적으로 드러난 자료가 ‘ 신천강씨 유서(遺書)26) ’이다.
■ 1572년 신천강씨(信川康氏) 유서(遺書)
隆慶六年十月十二日孫李熙復處遺書
右遺書段 汝矣父兄早歿 吾家宗祀久無主人 至爲未安故 今傳重宗祀於汝矣身 四仲朔薦及忌日祭祀 各別致意盡誠可也 大槪寡婦而奉無主宗祀者 有違禮儀也 玆與子息等立約 以汝矣身立定爲承重子 凡祭祀等節 十分致誠不弛 事死如事生之道爲可 吾家承重位段非他例也 家舍垈田畓幷三石餘斗落只及奴婢元根拾口許多所生亦傳給於承重者 若不顧奉先之義 只以利子孫之心 分析私給於次仲子者如或有之 吾家置重於奉先遺意顧安在哉 當世守此規而勿替也 忌日祭世俗或有仲子書紙牌行祀於其家 而封閉祠堂 不享於神主者 此豈人子愼重奉祀之道乎 汝矣叔父八家若從世俗而行此則 神主享祀必八年一度矣 切勿循此俗例 一遵吾遺意 而忌祭時仲子孫各各加意助祭饌 必淨潔齋肅可也 噫 孝子慈孫之心 一於誠而盡其敬 無忘父祖之遺言 銘記心中 藏此遺書於廟內 永戒于子孫世世遵守勿失 是吾之望也
祖母 康氏 [印]
母 金氏 [印]
叔父 逢慶 [着名署]
奉事 遇慶 [着名署]
逞慶 [着名署]
筆執 進慶 [着名署]
1572년에 작성된 이 유서는 이준경의 장자 이명복(李明復)이 아들을 두지 못한 채 사망하여, 그 동생 이희복(李熙復)을 승중자(承重子)로 세우고 승중자 몫의 봉사조 재산을 상속하는 것이 그 내용이다. 특별히 주목되는 내용은 기일제사의 윤회봉사를 금하고 승중자가 이를 주관할 것을 강조하고 있는 점이다. 이보다 앞서 작성된 신천강씨의 깃급문기나 김취성 부처의 깃급문기에서 승중자의 봉사조를 따로 설정하여 상당량의 재산을 이 몫으로 상속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유서는 이보다 한 발 더 나아가 윤회봉사를 금함으로써 사당을 관리하고 제사를 주관하는 장자 중심의 가족질서를 구현시키고자 한 것이다.
이는 조선후기에 일반화되는 부계친족일변도의, 그리고 적장자 중심의 친족질서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이러한 변화가 17세기 중반을 기점으로 일반화된 데 반해, 광주이씨가에서는 이보다 한 세기나 앞선 16세기 후반에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성주로 낙남한 광주이씨가가 사회경제적 기반을 마련하고 있던 시기는 한편으로는 주자학적 질서를 가풍으로 뿌리내리게 하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 광주이씨 칠곡파 가계도 1
(2) 영남학파의 핵심가문으로 성장 : 석담(石潭) 이윤우(李潤雨)  27)
석담 이윤우는 광주이씨 성주낙남파에게 일대 전환기를 가져온 인물이다. 그 선대가 성주로 낙남한 후 영남학파의 핵심적 가문들과 통혼을 하며 사회적 기반을 다졌다면, 석담 대에 이르러 비로소 그 꽃을 피웠다고 할 수 있다. 석담은 선조 24년(1591)에 진사시에 입격하고, 그로부터 15년 후인 선조 39년(1609)에 문과에 합격하여 중앙정계에 진출하였다. 성주로 낙남한 이후 최초의 문과급제였다.
당시 그는 탁월한 문장과 학식을 바탕으로 관계의 촉망을 받아 승정원 주서, 예문관 검열을 거쳐 시강원 설서를 역임하였다. 그러나 광해군의 즉위와 함께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고제(高弟)로서 남인을 표방하고 있던 그의 관로에도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검열로 재직하면서 정인홍을 비롯한 대북 일파의 비리와 죄상을 직필한 일로 광해군 2년(1610)에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기에 이르렀다. 곧 다시 여러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석담은 번번이 사양하여 인조반정으로 북인정권이 몰락하기까지 7년간 일체의 관직을 마다하고 향리에 은거하였다. 이 때 그는 한강과 함께 강학에 전념하는 가운데 한강의 주요 저술을 강정(講定)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또한 선현의 유적지를 심방하거나 『서애집』 교정작업에 참여하는 등 영남유림에서의 활동의 범위를 더욱 넓혀갔다. 그러던 중 1620년 한강이 사망하자 치상에 주력하고, 한편으로 저술의 편간 및 원우의 건립 등 한강추양사업에 몰입하게 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정국이 급반전하고 서인계의 영남조용론이 상주·인동·성주 등 강안지역에 집중되는 상황에서 대북정권에 직필로 맞서다 수난을 겪은 석담의 존재가 부각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그리하여 동년 6월 예조정랑에 전격 발탁되어 입경하였으며, 탁월한 학식을 바탕으로 경연관으로 활동하며 군왕을 계도하는 한편, 부제학 정경세와 함께 『대학』, 『논어』를 교정하는 등 당대의 학술문화를 주도하였다. 문한이 출중하고 직무상의 실사에도 능했던 석담은 정묘호란 당시에는 경상좌도 호소사 정경세의 종사관으로 추천되어 열읍의 의병을 초유하고 군량을 모으는데 적극 노력하였다. 인조 6년(1628)에는 세 번째 외직으로 담양부사로 부임하여, 약 2년 6개월간 봉직하는 동안 향풍진작과 기민구제, 흥학에 열정을 쏟았다. 이러한 선정의 결과 그가 부사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가자 부민들이 청덕비(淸德碑)를, 사림들은 흥학비(興學碑)를 세웠다. 구전에 따르면 담양민들이 칠곡에 까지 와서 웃갓(上枝)에 있던 석담의 구택(舊宅) 담을 새로 쌓아주었다고 한다. 인조 10년(1632) 6월 인목대비의 상에 부곡한 것을 끝으로 관직생활을 마무리하고, 선대의 장갈을 제찬하는 등 자가(自家)의 문헌을 정비하는데 노력하다 1634년에 생을 마감하였다.
이러한 중앙관계에서의 성공에 더하여 석담은 한강학단, 나아가 17세기 초반 영남학파의 석학으로 활동하였다. 한강사후에는 현양사업을 통해 동문의 결속을 강화하며 한강학풍의 계승과 발전에 이바지했던 행적에 힘입어 석담은 사망과 동시에 ‘강문고제’로 인식되어 갔고, 숙종 3년(1677)에 한강이 주향인 회연서원에 종향되기에 이르렀다.
■ 귀암(歸巖) 이원정(李元貞) 계열 1
(3) 남인의 주론자
이윤우의 둘째 아들 이도장(李道長)28) 은 아들이 없었던 재종숙 이영우(李榮雨)를 계후(繼後)하였다. 이윤우 대의 학맥으로 이도장 역시 청년기에 한강을 뵙고 가르침을 청했으며, 이어 장현광을 사사하였다. 이후 여헌 문하의 고제로서 활동한 이도장은 인조 20년(1642) 8월 여헌을 성주 천곡서원(川谷書院)에 추향(追享)하며 스승의 추숭사업을 주도하였다.
이도장의 처부 김시양(金時讓)은 그의 관직생활을 견인해 준 인물이다. 김시양은 선조 말년에 등과하여 남인으로 활동하다가 광해군 7년 전라도 도사로 향시를 주관하다가 제출한 시제가 문제가 되어 유배되었다가 인조반정을 계기로 다시 등용되었다. 인조대에 청현직을 두루 역임하고 판중추부사에 올랐던 인물이다. 이도장은 인조 8년(1630)에 문과에 급제한 후, 친부 이윤우와 처부 김시양의 가문적 배경, 한강과 여헌 학맥의 계승자로서의 입지 등을 바탕으로 사환의 길에 나아갔다. 출사 후 주서와 검열·이조정랑 등 승정원·홍문관·삼사·육조의 낭관직을 두루 거쳤다. 병자호란 발발 당시에는 주서의 직책을 띠고 인조를 남한산성으로 호종하였으며, 조정의 의론이 주화와 척화로 양분되어 가다가 결국 패전의 치욕을 당하는 것을 목도하였다. 이에 이도장은 이후 벌어진 조정의 척화신 공격에 앞장섰다.
이도장을 위시로 한 남인계 대간의 척화신 공격은 패전 이후 척화신에 대한 반감이 강했던 국왕의 뜻을 받든 것이며, 한편으로는 이를 통해 정국의 주요 세력으로 부상하려 했던 남인계의 의도가 반영된 것이다. 따라서 효종대의 북벌추진과 송시열·송준길로 대표되는 서인 산림계가 정국의 전면에 나서는 정치 상황의 변화 속에서 이도장의 정치적 행적은 비난받기에 이르렀다.
이원정(李元禎)29) 은 인조 26년(1648)에 생원시에 입격하고, 31세되던 해인 효종 3년(1652)에 문과에 차석으로 합격하였다. 이원정은 이러한 자신의 실력과 당시 영남을 대표하는 가문으로서의 위광을 바탕으로 예문관 대교·봉교, 즉 한림을 거쳐, 예조좌랑·병조좌랑을 지냈다. 현종 원년(1660)에는 사헌부장령을 역임하었고, 이후로 좌승지·형조참의·호조참의·우승지·공조참판·도승지를 지냈다. 서인계가 집권하였던 현종조에 영남 남인의 일원이었던 이원정이 관력을 지속하기란 쉽지 않았다. 현종 11년(1670) 11월에 있었던 별시에 합격한 이담명에 대한 서인계 대간의 파방요구, 현종 14년(1673) 이원정의 도승지 제수에 대한 반대 상소는 이원정에 대한 정치적 공격의 성격을 짙게 띠고 있었다. 현종 15년(1674) 효종비 인선왕후의 죽음에 즈음하여 일어난 2차예송인 갑인예송이 남인계의 승리로 귀결되자 이원정은 예조참판에 임용되어 왕후의 장례를 진행하는 등 그 역할이 커져 숙종조에는 이조판서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세도 얼마가지 못하여 숙종 6년(1680)에 이르러 경신환국을 맞이하게 되었다. 경신환국은 남인에서 서인으로의 정권교체를 넘어서 고변과 옥사가 이어지며 역모로 확대되었다. 이 과정에서 이원정은 유배를 떠났다가 다시 불려 들어와 공초를 당하고, 끝내는 장살되기에 이르렀다. 뚜렷한 증거가 없는 상황이지만 남인 집권기에 이조판서라는 중책을 담당한 이상 집요한 정치적 공격을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원정의 사후에도 이러한 당쟁의 여파는 계속되었다. 숙종 15년(1689) 기사환국으로 복관되었던 그는 숙종 20년(1694)의 갑술환국으로 다시 관직을 추탈당했다. 이로부터 근 20년이 지난 숙종 38년(1712)에야 손자 이세원(李世瑗)의 격쟁을 통해서 신원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로부터 150여년이 지난 고종 8년인 1871년에야 문익(文翼)이라는 시호를 내려 받을 수 있었다.
이원정의 장자 이담명(李聃命)30) 은 당쟁이 극심하던 시대상황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생을 살았던 인물이다. 영남 남인을 대표하는 가문의 자제로 현종 11년(1670) 별시에 급제하자 부친 이원정이 시관으로 참여하여 비호한 것이 아니냐는 서인계 대간의 의혹제기가 줄을 이었다. 출사한 직후인 숙종 초는 기존의 서인정권이 몰락하고 남인이 최초로 정권을 장악한 시기였다. 이에 이담명 등은 기존 서인세력 청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송시열 고묘론(告廟論) 등에 동참하였다.
그러나 남인정권이 경신환국으로 종식을 고하게 되자, 이담명 역시 중앙정치에서 소외되었다. 뿐만 아니라 환국이 역모로까지 이어져 결국 부친 이원정이 장살되기에 이르고, 자신은 파직되어 영천 금강리에 은거하였다. 영천에서는 영농방법의 개선과 상행위를 통해 경제력 축적에 주력하며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있던 그는 1683년에 특서되어 기사환국과 함께 재입조의 기회를 맞이하였다. 형조참의에 임명받은 직후부터 이담명은 부친 이원정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신원을 주도하는 한편, 남인측 주론자로서 서인계 인사들을 치죄하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경상도관찰사로 재직하던 시절에는 중앙의 치열한 당쟁을 잠시 잊고 민생안정에 주력하여, 유사 이래 영남의 최대 진정(賑政)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막대한 진휼곡을 조성해 기민을 구제하였다. 그러나 숙종 20년(1694)에 갑술환국이 발생하자 창성으로 유배되었고, 남포 등으로 이배되었다가 숙종 25년(1699) 봄 세자의 환후 완쾌를 기념하여 방환되는 등 그는 말년까지 당쟁으로 얼룩진 삶을 살아가야만 하였다.
이담명 대에 이르러 광주이씨가에 나타난 큰 변화는 한강·여헌 중심의 영남학맥에 그치지 않고 근기남인 학맥과 연결이 된다는 점이다. 이담명이 어려서 연천에 거주하던 미수 허목을 찾아가 학문을 배웠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 귀암 이원정 계열 2
■ 묵헌 이만운 계열
이도장의 입신과 이원정·이담명 부자대 동안 이어진 영남 남인의 주론자(主論者) 역할 등은 광주이씨가가 이 3대동안 정치적으로 큰 성장을 이루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당시 치열했던 당쟁에서 영남 남인계가 패배한 것과 궤를 같이 하여 깊은 고난 역시 함께 겪어야 했다. 이후로 영남 남인이 다시 중앙정계로 진출하지 못했던 것만큼 칠곡의 광주이씨들도 철저하게 중앙정계로부터 소외된 삶을 살게 되었다.
이담명 동생 이한명(李漢命) 역시 비슷한 시기 사환을 시작하며 홍문관교리를 지내는 등 중앙정계에 진출하였으나, 종가로만 국한하면 이후 이 가문에서 문과에 급제하거나 요직에 등용된 인물은 전무하다. 이담명의 아들 이세침이 생원이 된 것과 한말에 이조수(李肇秀)가 말직을 지낸 것을 제외하면 사환은 완전히 끊어지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은 지파에도 벌어져 문과에 급제하였던 이만운(李萬運) 역시 등용되지 못하였다. 칠곡의 광주이씨 가운데 이담명 대 이후 가장 이름난 학자였던 이만운은 김성탁(金聖鐸)의 외손이다. 17세기 말 이후 영남학맥의 주류로 부상한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의 문인인 김성탁과의 혼인은 칠곡의 광주이씨가를 중심으로 영남지역을 주도하고 있었던 성주권의 영향력이 이전과 같지 못함을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전기하였다시피 칠곡의 광주이씨가의 전적은 본 연구원뿐만 아니라 서울역사박물관과 대구가톨릭대학교에 나누어 보관되어 있다. 대구가톨릭대 자료는 고서가 주류를 이루고, 간찰첩과 치부일기 등 일부 고문서가 포함되어 있기는 하나 내용적으로 분리될 수 있다. 반면에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자료는 고문서가 대부분이며, 본원에서 정리한 고문서 자료와 반드시 함께 출간되어야 하는 것들이다. 또 역사박물관에서 소장한 자료 중 핵심적인 것들은 이미 연구원의 조사정리과정에서 마이크로필름으로 찍혀져 있기 때문에, 출간이 용이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자료의 양이 너무 많아 모두 수록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치부기록류(置簿記錄類) 자료를 중심으로 󰡔고문서집성󰡕 광주이씨편 두 번째 권을 다시 내기로 하고, 많은 양을 차지하는 통문(通文)과 간찰, 시문류 중 제문(祭文)과 만장(輓章), 시문(詩文)도 다음 책에 포함시키기로 하였다. 또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교령류 가운데 일부만을 이 책에 싣기로 하였다.
그 외 추가 자료조사 과정에서 문중의 지손들로부터 협조 받은 고문서가 이 책에 수록되었다. 이철(李澈) 교수가 수집한 이윤우 등 선대 관련 고문서와 이중환(李重煥) 씨가 소장하고 있는 이윤우 고신 등의 자료가 그것이다.  31) 더불어 이 과정에서 중요한 고문서 한 점이 발견되었다. 성주 입향조 이지의 아들 이덕부의 처 신천강씨가 그 자녀 9남매에게 재산을 상속한 문서가 그것이다. 비록 복사본이기는 하지만  32) 1538년에서 1550년 사이에 작성되어 광주이씨가 분재기(分財記) 가운데 가장 앞선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문서이다. 그 외에도 중요한 자료들을 협조해 주셨지만, 자료의 성격상 「고문서집성󰡕에는 적합하지 않아 수록하지 못한 점을 아쉽게 생각한다.
수록 고문서의 현황

대분류

문서명

점수

소장처

비고

敎令類

84점

敎書

1

諭書

2

白牌

2

告身(敎旨)

52

이중환 소장본 36점

이철 소장본 3점

告身(敎牒)

15

이중환 소장본 15점

追贈敎旨

7

이중환 소장본 3점

諡號敎旨

1

역사박물관 1점

差帖

2

이중환 소장본 1점

祿牌

2

역사박물관 2점

疏箚啓狀類

91점

上言

1

上疏(抄)

3

啓文

13

所志類

71

역사박물관 1점

稟報

1

牒關通報類

30점

傳令

1

牒呈

1

牒報(草)

2

이철 소장본 2점

書目

1

諡號望單子

3

역사박물관 3점

抄 2점 포함

諡號署經完議

2

역사박물관 2점

望記

8

指令

7

納入通知書

3

注意書

1

訓示

1

證憑類

145점

馬帖

1

역사박물관 1점

立案

10

역사박물관 1점

戶籍類

79

이철 소장본 2점

역사박물관 6점

完文

7

完議

7

이중환 소장본 1점

節目

1

侤音

5

手標

6

不忘記

1

近代文書

28

誓約書 1점

契約書 1점

領收證 2점

借用證 13점

朝鮮史編修會

借用文件 3점

賣買關聯

一括文書 8점

明文文記類

32점

分財記

22

지파 소장본 1점

明文

7

牌旨

3

書簡通告類

5점

婚書

5

詩文類

16점

聾巖精舍記

1

1

年譜草

1

家狀

1

行狀

2

諡狀

1

墓表

1

試券

8

소계

401

표 〈수록고문서의 현황〉에 제시되었듯이 본서에는 총 401점의 고문서를 수록하였다. 점수로는 많지 않은 듯 보이지만, 결송입안(決訟立案)·화회문기(和會文記)·소송기록 등 매우 긴 문서가 다수 포함되어 있다. 역사박물관 소장 고문서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고신은 싣지 않고 2차조사와 추가조사를 통해 수집된 67점의 고신만을 수록하였다. 서간통고류 가운데 점수가 적은 혼서(婚書) 5점은 혼맥을 통해 칠곡 광주이씨가의 사회경제적 기반을 살필 수 있다는 점에서 이번 책에 포함시켰다. 시문류는 대부분 다음 책에 수록할 계획이지만, 시권(試券)과 같이 고문서 성격이 강한 자료와 행장(行狀) 등 인물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는 성격의 글은 본서에 수록하였다.
이중환 소장본이 56점, 이철 소장본이 7점 수록되었으며, 소장처는 알 수 없는 채 복사본만이 전해지는 분재기가 1점이 함께 실렸다. 역사박물관 소장본은 17점 수록되었으며, 기증되기 전에 연구원에서 마이크로필름으로 촬영한 65점 가운데 63점이 수록되었으나, 위 표에서는 따로 표시하지는 않았다.
(1) 교령류(敎令類)
교령류에는 9종 84점이 수록되었다. 칠곡 광주이씨가의 사환이 이윤우-이도장-이원정-이담명 대에 국한되는 만큼 이 문서의 주인공들 역시 대부분 이들이다. 이윤우의 고신이 67점, 이윤우관련 추증교지가 3점, 처 채씨(蔡氏) 고신이 1점 실렸다. 이도장은 처가 사후에 추증된 교지가 1점 수록되었다. 이원정은 유서가 1점, 그의 할머니를 사후 추증하는 교지가 1점 실렸고, 고종조에 문익(文翼)의 시호를 내린 시호교지가 수록되었다. 이담명은 교서 1점, 유서 1점, 백패 1점, 이담명 처 고신 2점, 녹패 1점이 실렸다. 추증이나 시호교지를 제외하고는 모두 17세기 자료이고, 특히 이윤우 고신은 완전히 새로 발굴되었다는 점에서 주목을 끈다. 그 외 이담명의 아들 이세침의 생원입격 백패가 실렸고, 이윤우의 장자이자 이도장의 친형인 이도창(李道昌)의 고신이 4점 수록되었다. 이담명 이후 유일하게 관로에 나아갔던 고종조 인물 이조수의 차첩 1점, 고신 11점, 그의 처 추증교지가 1점 실렸다. 이조수는 후에 이조연(李肇淵)으로 개명하였다. 이윤우의 숙부인 이광복(李光復)이 사후 추증됨에 따라 그 처가 숙부인에 추증된 교지가 1점 수록되었다.
교령류 문서의 주인공들

문서명

점수

인물

비고

敎書

1

李聃命

諭書

2

李元禎, 李聃命

白牌

2

李聃命, 李世琛

告身(敎旨)

52

李潤雨 38,

妻 蔡氏 1,

李聃命 妻 2,

李肇秀 11.

이중환 소장본 36점

이철 소장본 3점

告身(敎牒)

15

李潤雨 11,

李道昌 4.

이중환 소장본 15점

追贈敎旨

7

李光復관련1,

李潤雨관련3,

李元禎관련1,

李道長관련1,

李肇秀관련1.

이중환 소장본 3점

諡號敎旨

1

李元禎

역사박물관 1점

差帖

2

李道昌, 李肇秀

이중환 소장본 1점

祿牌

2

李聃命

역사박물관 2점

(2) 소차계장류(疏箚啓狀類)
소차계장류에는 소지류가 71점으로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 외에는 사직요청 상언 1점, 고종조 상소를 베껴 둔 것이 3점, 계문 초본이 13점, 품보가 1점 수록되었다. 계문 초본은 이담명이 승정원 주서(主書) 시절에 올라온 계문을 초해둔 것으로 추정된다. 품보는 문서상의 제목을 그대로 따랐는데, 그 내용은 관에 올린 진정서이다. 1903년 경부선 철도 건설을 위해 종가가 소재한 왜관읍에도 측량공사가 한창이었다. 헌데 측량을 위해 마을에 들어온 이들이 민가에 함부로 유숙하는 등 민폐가 많았다. 이에 마을 주민 대표가 이를 관에 호소하기 위해 이 문서를 작성한 것이다. 근대화의 상징인 철도의 부설과 민폐로 드러나는 건설과정의 전근대성이 조선시대와 근대 공문서의 과도기적 특성을 보여주는 이 문서 속에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다.
소지류는 18세기 초부터 19세기 말까지 나타나며, 역시 산송(山訟)이 44점으로 그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 외에는 노비소유권을 둘러싼 소송 관련 문서가 9점 수록되었다. 이중에서 특히 노(奴) 의창(義昌) 남매의 소유권을 둘러싼 싸움이 오랫동안 계속되어 원문서보다는 여러 문서를 베껴 써 둔 형태로 많은 기록이 남아 있다. 이씨가 입장에서는 자신의 노와 혼인한 순당(順堂)은 양처(良妻)이므로 그 소생이 모두 이씨가 종이라는 것이고, 그 소생인 의창 등은 애초에 비(婢)였던 순당이 속량과정에서 그 후소생까지 모두 속량했으므로 자신들은 이씨가의 종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싸움은 순당의 옛 주인과 이씨가의 소유권 소송, 승패가 여러 번 뒤바뀌는 과정, 의창의 아비이자 이씨가 종인 진성(進成)의 속량과 의창의 다른 형제들의 타비(他婢) 소생 소유권 문제 등 매우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18세기 사노비들이 속량을 위해 상전인 양반가를 상대로 힘겨운 싸움을 벌이는 과정을 상세히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그 외 소지류 15점은 특권의 확인을 요청하는 것으로, 문익공 종가의 세전노비 및 묘직노의 면역 요청 및 확인, 문익공 신도비 건립을 위한 석재운반을 위한 인력 요청, 개간지나 선영의 독점적 관리권 확인 등이 그 내용이다. 이렇게 끊임없이 특권을 요청하고 확인받는 과정은 조선 후기 양반 사회의 운영원리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며, 중앙정계로부터는 멀어졌을지라도 지역사회에서는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었던 광주이씨가의 위상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3) 첩관통보류(牒關通報類)
첩관통보류는 주로 관문서를 말하는 것이나, 본서에서는 근대문서가 포함되면서 성격이 좀 불분명해졌다. 대표적 첩관통보류 문서인 전령은 1점 수록되었는데, 이씨가와 나현수(羅顯洙) 사이에서 지루하게 벌어졌던 산송과 관련된 것이다. 서목 1점 역시 이 산송 과정에서 풍헌(風憲)이 올린 것이다. 1점 실린 첩정은 원문서가 아니라 등사(謄寫)한 것으로, 앞서 소개한 의창 남매의 소유권 분쟁과 관련된 것이다. 첩보 2점도 마찬가지로 노비소유권과 관련된 것으로 역시 원문서는 아니다.
시호망단자와 시호서경완의는 모두 1871년 이원정의 증시(贈諡) 과정에서 작성된 것이다. 교령류에 분류된 시호교지와 함께 이원정이 겪었던 당쟁의 소용돌이가 드디어 마무리되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들이다.
그 외 수록된 망기, 지령, 납입통지서, 주의서, 훈시는 모두 근대자료들이다. 현재 다수가 전해지는 조선 후기의 관직이나 서원·향교의 직에 후보자를 추천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이러한 일반적 망기와는 달리 한말이나 일제시대에 작성된 본서 수록 망기는 추천하고자 하는 직임이 새로운 시대를 반영하고 있다. 1909년 유학자들이 공자의 가르침을 높이기 위해 설립한 태극교종(太極敎宗)이나 훼철된 서원을 대신하여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던 각종 단소(壇所)나 서당(書堂)의 직에 추천하고 있는 것이다.
(4) 증빙류(證憑類)
호적이 79점으로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호적은 호구단자와 준호구로 나뉘어지는데, 실상 구분이 모호하고, 자료의 성격상 함께 있는 것이 유용하므로 구분하지 않고 호적류로 묶어 증빙류로 수록하였다. 각호에서 관에 보고하여 올리는 문서로서보다는 각호의 인구현황을 관에서 확인해 주었다는 점을 더 중요하게 고려했기 때문이다. 1681년 이담명의 준호구로부터 1885년 이상석 호적까지 실려 있으며, 이씨가 호적 외에 소유 노비가 별호를 세워서 발급받은 호적이 함께 전한다.
10점이 수록된 입안에는 이씨가에서 매득(買得)한 노비에 대한 소유권을 공증한 점련문기가 4점, 이씨가에서 방매(放賣)한 노비의 소유권 공증 문서가 1점, 전답입안이 1점 전한다. 앞서 소개한 의창과의 노비소유권 소송과 관련된 결송입안 1점과 의창의 할아버지인 김상일(金尙一)이 매득한 노에 대한 소유권 공증 입안이 1점 전하여 흥미롭다. 또한 이담명이 녹을 받기 위하여 향가(鄕家)에 두고온 교지를 대신할 입지를 요청하여 내려받은 입안이 있어, 교령류나 입안 연구에 흥미로운 사례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이씨가의 특권을 인정하여 각종 역부담을 면제해주고 이미 입안을 받은 지역에 대한 배타적 특권을 인정해준 완문 6점과 문중운영에 관한 합의사항을 담은 완의 7점이 수록되었다. 이중 완의 7번은 앞서 소개한 것으로, 성주입향조 이지의 처, 영천최씨의 외가 해평김씨 문중에서 이씨가로 보낸 약속문서이다. 이지의 처외조부로 추정되는 해평김씨의 묘역 석물공사를 앞으로 다시 하지 않음으로써 같은 국내에 있는 이지의 묘역을 어지럽히지 않겠다는 해평김씨 문중의 약속이 그 내용이다. 절목 1점은 문집간행시의 규칙에 대한 것이다. 다짐(侤音) 5점과 수표 6점은 모두 산송의 부산물로 낙과(落科)한 측에서 언제까지 이장하겠다는 다짐을 기록한 것이다. 비슷한 성격의 문서인 불망기는 이씨가가 의창 남매와 벌인 노비소유권 소송의 결과물로 낙과한 김선강(金善江) 등이 자신을 포함한 7구(口)의 속가전(贖價錢)을 바치는 내용이다.
계약서, 차용증, 영수증, 계약서는 모두 근대문서로 묶어 수록하였다. 조선사편수회에서 이씨가에서 소장하고 있는 책을 빌리고 또 반납한다는 내용의 문서도 근대문서로 분류하였다. 빌려간 책은 승정원일기 4책, 남한일기 1책, 선현필첩 1책인데, 당시에도 이미 이씨가에서 중요한 문적들을 소장하고 있다는 것이 널리 알려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5) 명문문기류(明文文記類)
분재기가 22점으로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하고, 토지나 노비매매명문이 7점, 패지가 3점 수록되었다. 그 외 근대 매매문서가 8점 실렸다. 부모 생전에 자녀들에게 각각 그 몫을 나누어준 깃급문기(衿給文記)나 부모 사후 자녀들이 합의하여 재산을 분할상속한 화회문기(和會文記)가 7점 전하는데, 이는 칠곡 광주이씨가의 경제력의 추이를 살필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특히 16세기 중반 분재기 3점은 광주이씨가가 낙남한 초기 정착과정을 드러내는 귀한 자료들이다. 다만 아쉬운 것은 화회문기 가운데에는 1차 분재(分財) 후 남은 재산을 분할상속하는 유루분 분재가 많아 그 재산의 전모를 살피기 어렵다는 점이다. 18세기 자료들은 대부분 별급문기인데, 초본과 원본이 함께 전하고 있어 흥미롭다. 이씨가의 것이 아닌 분재기가 3점 들어있는데, 전답이나 노비의 매매과정에서 흘러들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전답매매명문은 모두 5점으로 1703/4년에 집중되어 있다. 그 외 1점은 1900년에 개간한 논을 방매하는 명문이다. 1720년에 이세침(李世琛)이 노비를 사들이는 노비매매명문도 1점 전한다. 광주이씨가의 경제력을 고려하면 수많은 명문이 전하여 할 것으로 생각되나 현전하는 것이 이에 불과하여 아쉬움이 남는다. 또한 근대매매문서가 8점 수록되었다.
패지는 주로 수노(首奴)나 가노(家奴)에게 토지의 매매를 대행하는 위임장으로 쓰인 경우가 많은데, 본서에도 이러한 위임장 성격의 것이 1점 수록되었다. 반면 나머지 2점은 공적 성격의 편지와 같은 것이다. 계정회중(溪亭會中)에서 실 수신처인 경암재(景巖齋)에 보내지 않고 경암재 고자(庫子) 앞으로 보내면서 ‘상전에게 전하라’는 의미에서 패지의 형식을 띠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6) 서간통고류(書簡通告類)
서간통고류의 대종을 이루는 통문과 간찰은 본서에 모두 수록할 수 없어 다음 책에 싣기로 하고, 이 책에서는 혼서 5점만을 수록하였다. 광주이씨가의 혼맥 기록을 통해 가문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7) 시문류(詩文類)
시문류 역시 소수의 자료만을 이 책에 실었다. 다른 시문류와 확연히 구분되는 고문서 성격의 자료인 시권 8점은 모두 싣고, 행장이나 가장 등 인물에 관한 자료들은 함께 실었다. 마찬가지로 가문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여겼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