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장처 고문서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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려말선초의 혼란한 정국과 조선초기의 연이은 사화 과정에서 사림파의 형성과 이들의 거주지 이동이 있었다. 또한 사족들은 임진왜란을 계기로 사회경제적으로 안정적인 기반을 찾아 거주지를 변경하였다. 이러한 거주지 변동은 사화를 계기로 한 임지에서의 정착과 혼인을 통한 처가·외가의 정착 등 다양하게 전개되었으며, 때로는 두 양상이 혼재되기도 하였다. 특히 조선시대 사족은 혈연, 지연, 학연의 중층적인 구조 속에서 존재할 수 밖에 없었으며, 거주지의 변경과 정착 과정에서 이러한 요소들이 매우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였다.
향촌사회의 구조와 다양한 활동양상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었다.  1) 이를 바탕으로 광산김씨 일파가 호남으로 정착하는 과정과 그 후 사회적 활동을 위한 다양한 전개 양상을 사실적으로 검토하고자 한다. 본고에서 검토하고자 하는 광산김씨는 고창·고부 일원에 세거하고 있는 계열로서 金麒瑞와 金南式을 현조로 하는 계열이다. 따라서 본고는 광산김씨가 고창과 고부(정읍)에 정착하여 사회적 입지를 확대하는 과정과 그 과정속에서 형성된 고문서에 대한 분석에 그 목적이 있다.
고창과 고부에 세거하고 있는 광산김씨가의 고문서에 대한 조사와 수집은 세 차례에 걸쳐 실시되었다. 1차 조사는 2006년 6월 9일 안승준(한국학중앙연구원 전문위원), 정수환(한국학중앙연구원 전문원), 권오정(국학진흥연구사업 연구원)에 의해 수행되었다. 현지조사에 앞서 광산김씨 문중 관계자인 金三鉉선생은 소장 고문서에 대한 학술적 정보를 수 차례 요청한 바 있었으며, 그 과정에서 소장자료에 대한 연구를 의뢰하게 되었다. 고부에 소재한 玉山書院에는 서원관련 뿐만 아니라 문중관련 각종 고문서 자료가 일괄 보관되어 있었다. 1차 조사를 통해 고문서 약 195점을 비롯하여 고서와 필첩 등 약 105책을 대여하였다.
2차 자료 조사는 정읍 김삼현(金三鉉) 선생 주선으로 2008년 5월 14일 이루어 졌다. 당시 자료조사는 안승준(한국학중앙연구원 전문위원)을 비롯하여 권오정(국학진흥연구사업 선임연구원), 정국진(국학진흥연구사업 연구원)에 의해 이루어 졌다. 당시 고창에 소재한 광산김씨 사우인 蘆山祠에 소장되어 있던 고서와 성책고문서 약 77점을 조사하여 대여하였다.  2) 3차 자료 조사는 2008년 9월 26일 정수환(한국학중앙연구원 부연구원), 조창은(국학진흥연구사업 연구원)에 의해 수행되었다. 본 조사를 통해 고창과 고부(정읍) 일대의 광산김씨 유적지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 졌다.  3)
광산김씨는 신라하대의 혼란한 정국을 피해 光州(武州)에 정착한 신라왕자 金興光을 시조로 하고 있다.  4) 이후 광산김씨는 고려조 이른바 8대 평장사를 배출하면서 크게 성장하였다고 한다.
광산김씨의 선계는 光陽金氏와의 관계와 관련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일찍이 허흥식은 󰡔光山金氏族譜󰡕에 수록된 호구자료를 비교 검토하고 고려전기 광양이 광주에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므로, 광양에서 광주로 본관의 명칭이 바뀌었을 가능성을 제기하였다.  5) 이에 대해 이수건은 광양김씨의 세계와 광산김씨의 세계가 거의 일치함으로 광양김씨세계에 광산김씨 선계를 접속시킨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6) 광산김씨는 신라말 고려초에 광주지방에 자리 잡은 토성이었으며, 고려중기까지는 중앙에 진출하지 못하고 있다가 고려 후기부터 진출하여 명문으로 성장한 것으로 파악된다.  7)
광산김씨는 金璉(1215-1291)에 이르러 발신하고 그의 아들 金士元(1257-1319)과 손자 金稹(1292-?)이 명가와 통혼하는 과정에서 사족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한편, 광산김씨는 김진의 아들에 의해 조선시대 크게 세 系派로 성장·발전하였다. 장자 김광리의 후손이 본고에서 언급하는 고창·고부 일대의 광산김씨 계열이다. 차자 김영리의 후손은 충청지방에 세거하면서 조선의 명문으로 성장하였는데, 사계 김장생 계열이 이에 해당한다. 다섯째아들 김천리의 후손은 조선초기 안동으로 낙향하여 ‘광산김씨예안파’가 되었다.  8)
〔그림 1〕 광산김씨 上系 가계도 : 金興光 ~ 金承吉
김진은 정당문학 예문관대제학을 역임하였으며, 그의 아들이 전리판서 김광리이다. 김인우는 공민왕때 홍건적이 침입하였을 당시 왕을 호종하여 1등 공신에 책봉되고 전리판서에 임명되었다. 후에 長沙監務로 좌천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전라도 茂長에 정착하였다.  9)
광산김씨 선계에 대한 위선사업은 고창·고부 일대에 세거하는 계열에 의해 이루어 졌다. 대표적인 사업으로는 신라왕자 김흥광의 유허비를 건립한 사실과 광주 평장동에 사우를 건립하고 김흥광과 金良鑑의 위폐를 봉안한 일 등이다. 고창·고부 일대의 광산김씨가는 위선사업의 과정에서 본 가문이 고려때 8대 평장사를 배출한 명문임을 지속적으로 강조하면서  10) 김영리의 후손인 김장생 계열과 호남 광산김씨 가문의 선대인 김광리가 김영리와 형제인 점을 지적하였다.  11)
金承吉은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호는 沙隱이다. 咸從縣令을 역임할 당시 1374년(공민왕 24) 아버지 金仁雨가 長沙監務12) 로 좌천되자 벼슬을 버리고 따라갔다. 그는 평소 三隱과 더불어 교유가 있었으며, 정몽주의 죽음 소식을 접하고 은거하였다고 전한다. 1751년(영조 27) 영조가 개성을 순시할 당시 그의 절의를 기념하여 비를 세웠다고 한다.  13)
김인우와 김승길 부자에 의해 무장일대에 정착한 광산김씨는 金命元에 의해 고창에 정착하게 되었다.  14) 김명원의 호는 晩雲으로 進士를 거쳐 軍器寺副正을 역임하였으며, 그의 형 梅山 金錫元은 승문원 부정자, 사헌부지평  15) 을 지냈다.
〔그림 2〕 고창 광산김씨 家系圖 : 金承吉 ~ 金南式
고창에 정착한 광산김씨는 敦睦齋 金麒瑞의 학행과 효행으로 가문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김기서는 평소 효행이 남달랐으며, 특히 喪中에 죽만 먹었으며 3년간의 여묘살이도 독실히 행하였다.  16) 당시 그가 여묘살이 하던 마을이 시묘동이라고 일컬어 질 정도로 향리의 모범이 되었다. 그는 효행으로 光陵參奉에 천거되었으나 출사하지 않고 학문에 정진하였다.
김기서는 靜菴 趙光祖(1482-1519)의 문인으로 學圃 梁彭孫과(1488-1545) 학문을 논하였다. 그의 처남이기도 한 양팽손이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능성으로 낙향하자 그도 고창에 은거하며 후학을 육성하였다. 당시 그의 강학처가 돈목재이다.  17)
고창의 광산김씨가는 김기서에 의해 효행을 실천의 근본으로 강조하였으며, 학문적 기틀도 이 당시에 마련되었다. 김기서에 의해 확립된 가문의 기반은 그의 아들 蘆溪 金景熹를 거쳐 확충되고, 손자 白谷 金弘宇에 의해 확장되었다.
김경희(1515∼1575)는 일찍이 기묘사화로 호남에 은거중이던 외삼촌 양팽손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그는 1534년(중종 29) 갑오식년시에 생원 3등 34인으로 합격하였으나  18) 출사하지 않고 향리에 은거하였다. 사화가 거듭되는 혼란한 정국이 이어지자 고창의 醉石亭19) 을 중심으로 圭菴 宋麟壽(1487-1547), 松川 梁應鼎(1519-1581), 竹陰 李萬榮 등과 강론하면서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그의 문인으로는 沙湖 吳益昌 등이 있다.
〈취석정 전경 : 전북 고창군 고창읍 화산리 소재. 전북 유형문화재 제153호〉
김홍우(1539-1598)는 梧陰 尹斗壽(1533-1601)의 문인으로 임진왜란 당시 金景壽, 奇孝曾과 함께 장성 남문에서 창의하였다.  20) 그는 의병진의 참모장으로 의병을 소모함은 물론 義穀을 행재소로 보냈다. 1592년 11월 24일에는 의병을 이끌고 직산에서 왜적 수 백명을 참하였다. 1593년(선조 26) 정월 전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자 고창으로 돌아왔다. 그해 전주 별시 문과에 병과 7인으로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가 되었다.  21) 이후 1596년 예조좌랑을 역임하였으며, 이듬해 明將과 더불어 왜적을 격파하였으며, 전란후에는 남원부사에 제수되었다.  22)
김경희와 김홍우 부자에 의해 확립된 학행과 절의의 전통은 광산김씨가 인물이 호란에도 적극적으로 현실에 대처하는 정신적 기반이 되었다. 김홍우의 아들 金汝聲(1564-1637)은 沙溪 金長生(1548~1631)의 문인으로 정묘호란당시 소모유사로 의병진에 참여하였다.  23) 특히 義村 金南式(1617∼1683)은 조선후기 절의를 지킨 인사로 명망이 높아 광산김씨가의 가격을 크게 일신하였다.
김남식은 일찍이 아버지 김여성의 명에 따라 愼獨齋 金集(1574-1656)의 문인이 되었다. 그는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小學⌟과 ⌜家禮⌟를 중심으로 실천궁행하였다. 특히 김집은 ‘君의 아버지는 나의 아버지 문하에서 글을 배웠고, 군은 이제 나에게 배우니 이는 백대 종친에 義가 있음이요 다른 사람과 비할 바가 아니로다.’  24) 라고 언급하면서 그의 면학을 독려하였다.
1636년(인조 15)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김남식은 고창을 중심으로 창의하여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의병을 거느리고 남한산성으로 향하던 중 淸州에서 화의가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낙향하여 고부 소성면 계령산 아래(현재의 玉山)에 서실을 짓고 ‘崇禎日月 大明遺界’라 명하고 오직 학문과 후진 양성에만 정진하였다.  25) 김남식은 이른바 ‘崇禎處士’로서 절의와 충신의 표상이 되고자 하였으며, 사후에 충신정려가 내려졌다.
〈김남식 충신정려 : 고부 소성면 애당리 소재 옥산서원 경내〉
김남식은 아들들에게 평소 ‘사람의 행실은 막중하고 크니 효제충신과 인의예지를 명심하라’  26) 는 가르침을 강조하였다. 그도 또한 일생을 통해 이를 실천하였다. 정축년(1637) 부친상에 3년 상을 다하였으며, 경자년(1660) 어머니 상에 여묘살이를 곡진히 하였다. 김남식은 중형 김남익과 더불어 문중규약 10여조를 만들어 위선과 후학교육을 위한 기틀을 마련하였으며, 특히 분묘의 관리를 위한 위토를 마련하여 제사에 정성을 기울일 것을 강조하였다.  27) 형제간의 우애에 있어서도 모범이 되고자 하였다. 1634년 백형 김남수의 상에 힘을 다해 초종의 장례를 치렀으며, 1682년 중형 김남익의 상에도 정성을 다하였다.  28) 이러한 효제의 행적에 따라 1829년(순조29) 도내 유림의 상소에 따라 예조판서 徐俊輔가 상주하여 통정대부 이조참의에 증직되었다.
고창 광산김씨가의 결속과 사회적 활동의 기반은 ‘蘆山祠’였다.  29) 노산사는 최초 고창군 고수면 상평리 전불동에 1781년(正祖5) ‘典洞祠’로 건립되었다. 건립 당시 敦睦齋 金麒瑞를 주향으로 蘆溪 金景熹을 배향하였다. 1826년(순조26)년 內洞에 이건하면서 良簡公 金璉을 주벽으로 함과 동시에 校理 金錫元30) , 壯愍公 沈榗31) 을 추가로 배향하면서 ‘노산사’로 이름을 고쳤다. 이 과정에서 예조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허가 받기도 하였다.  32) 그 후 1868년 서원철폐령에 따라 훼철되었다.  33)
〈노산사 전경 : 전북 고창군 고수면 상평리 소재. 강학당인 돈목재는 지방문화재 제100호로 지정되었다.〉
노산사 소장 자료는 모두 성책고문서이다. 이들 성책고문서는 약 30점이며, 10여점은 해방 후의 문중운영과 관련 자료이다. 광의의 고문서로 규정할 수 있는 1945년 광복 이전에 형성된 자료를 중심으로 검토하고자 한다. 성책고문서는 ‘노산사’의 운영과 관련한 자료, 광산김씨의 宗契 운영자료 그리고 사우 향사 인물의 행적을 정리한 자료로 구분할 수 있다.
① 蘆山祠 운영자료
「祠宇創建經始記」는 1781(正祖5)에 ‘典洞祠’를 건립하게 된 경위를 정리한 내용으로 기미년(정조23, 1799)에서 계미년(고종20, 1883)까지 기록하였다. 내용은 ‘敦睦齋祠宇營建時門任’과 ‘始事願末’ 그리고 ‘財力加用記’로 구성되어 있다.
‘敦睦齋祠宇營建時門任’은 김기서를 향사하는 사우 건립을 위해 1779년(정조3) 11월에 문장인 김기서의 6대손 金德潤을 중심으로 광산김씨 종중인사들이 각기 소임을 분정한 것이다. 여기에는 김기서의 8대종손인 金珏(1742-1794)이 참여하였다.  34) 분정현황은 문장, 次門長, 都有司, 門有司, 成造有司이며, 종손이 公事員을 겸하도록 하였다. 1783년(정조7) 김윤명이 지은 ‘始事顚末’의 기문에는 ‘노산사’의 전신인 ‘典洞祠’를 건립하게 된 경위가 서술되어 있다. 1662년(顯宗3)에 이미 김남식을 비롯한 종원들이 宗稧를 구축하였으며, 그 후 무장의 족숙인 金萬敍가 강당과 庫舍를 수리하였다. 그리고 정축년(1757) 金元祿(1704-1768)에 의해 옛터에 이건 되어 ‘敦睦齋’를 갖추었다. 그리고 1781년에 이르러 종원들이 재력을 모아 김기서와 김경희를 향사하는 사우를 마련하게 되었다.
사우 창건당시의 주요 지원의 출처는 문중 재원의 잔여액과 고창인근의 본손 및 외손의 부조로 충당되었다. 수년전 묘제시 남은 금액 80냥에 丘木 매매를 통해 120냥을 확보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息利하여 253냥 2전을 확보하였다.  35) 그 외에도 本孫別扶助가 55냥, 宗中扶助가 22냥, 外孫扶助 43냥 5전, 他官外孫扶助 38냥 등이었다. 또한 柴草매매, 관련자들로부터 거둔 각종 名下錢 등을 포함하여 총액이 555냥 9전 4푼이었다. 사우 건립에 소용된 지출 현황에는 瓦家매입, 운반비, 기와 구입 등 각종 물품의 구입을 비롯하여 募軍, 木手, 泥匠 등의 임금으로 378냥 5전 5푼을 지출하였다. 사우의 건립은 1780년 1월에서 11월까지 일년 가까이 소요되었다. 뿐만 아니라 선산의 금양지에 있는 材木을 사용하였으며, 인근 8개 면의 軍丁과 3곳의 사찰 승려가 부역에 동원되고 있었다.  36)
「祠宇執事記」는 1819년에서 1823년 사이 노산사의 향사에 관여한 인사들의 업무분장 현황 등을 기록한 자료이다. 자료는 1819년(순조19)의 ‘蘆溪金先生配享時執事記’, 1820년(순조20)의 執事記를 비롯하여 1822년(순조22)의 ‘仲丁還安時執事記’, ‘依尊位次慰安告由執事記’, ‘正位次告由執事記,, ’獻官參祀錄‘으로 구성되어 있다.
‘蘆溪金先生配享時執事記’에는 都有司, 別有司, 都執事, 都執禮로 소임을 분정하였다. 한편 배향례의 절차에 따라 告由, 禮成時 각기 집사를 분정하였다. 1819년의 향례집사에 참여한 인사들의 성관현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密陽朴, 昌寧曺, 高興柳, 靑松沈, 竹山安, 昌寧成, 平澤林, 錦城吳, 錦城羅, 光山金, 利川徐, 迎日鄭, 金堤趙, 晋州鄭, 咸豊利, 礪山宋, 玉川趙, 咸平李, 江陵劉, 彦陽金, 金陵金, 水原白, 義城金, 豊山洪, 河東鄭, 平海黃, 商山金, 羅州羅, 河陽許, 平山申, 延安李
광산김씨를 중심으로 고부, 태인, 김제, 장성, 나주, 흥덕, 정읍 일원의 사족들이 모두 관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尋源錄」은 일반적으로 서원 사우를 奉審한 인사들의 내역을 기록한 것이나 본 노산사의 심원록은 봉심현황뿐만 아니라 각종 집사기와 선생안이 혼재되어 있다. 1826년에서 1867년 사이의 내용을 담고 있는 심원록의 중요 봉심인사는 무장, 함평, 고부, 태인, 흥덕, 광주, 부안 등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았다.
1826년에서 1831년의 내용을 담고 있는 「尋源錄」(一)도 ‘蘆山祠營建執事記’와 ‘蘆山祠先生案’으로 구성되어 있다. 노산사 영건도유사는 金性溵이었다. 노산사선생안에는 노산사의 역대 원장현황과 함께 주요 봉심인사도 함께 기록하고 있다. 먼저 원장현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중앙정계의 고관이나 지방수령으로 원장을 선임하였는데 이는 당대 광산김씨 가문의 정치적 입장 및 중앙정계 同族과의 정치적 연대문제와 관련해서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주요 봉심자 현황은 講堂營建都有司 全羅右水使 金相順(丁亥), 고부군수 宋友淵(戊子), 정읍현감 沈獻永(庚寅) 등이 있다.
「西齋案」은 ‘門中別議’와 노산사 소속 유생의 좌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문중별의는 계묘년(1783) 광산김씨 문중에서 묘사와 祠宇의 향사에 소요되는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각 파별로 3년간 1石租를 갹출하여 충당할 것을 결의하는 내용이다. 이는 전동사의 운영을 위한 광산김씨 문중의 대응 모습을 담고 있으며, 이어지는 좌목은 1828년 전동사의 후신인 노산사의 서재에 소속된 유생의 현황이다. 서재 소속원은 모두 13인이다.
「完文」은 고창현에서 1840(憲宗6) 노산사의 수호를 담당하는 戶에 대한 면역 사실을 증명한 자료이다. 士人 金德潤은 김기서와 김경희를 향사하는 사우를 건립하였으나 관의 각종 역으로 인해 춘추향사에 차질을 초래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명현을 향사하는 사우에 면역해주는 관례에 따라 이를 노산사에도 적용해 줄 것을 요청하는 상서를 올렸다. 고창현감은 김덕윤의 상서에 따라 연호잡역과 군정 차출을 면제해 주는 것은 물론 관군 등의 침탈을 금지하는 완문을 내렸다. 본 완문의 작성에는 座首, 別監을 비롯하여 六房 등이 사실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문서를 작성한것은 ‘前戶長 吏房 劉彦直’이었음을 명기하였다. 본 완문을 통해 노산사는 비로소 문중사우이면서도 관의 지원을 받는 사우로서 향중의 기반을 확고히 하게 되었다.
「典佛洞量案」과 「祭畓量案」은 18세기 이후 광산김씨와 연결된 노산사의 전답현황을 정리한 자료이다. 이들 양안의 수록 내용은 토지의 자호, 지번, 등급, 형태, 四標 등이다.  37) 「전불동양안」의 표지 배면에는 결부의 산정과 관련한 ‘解負法’이 정리되어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百與百一結, 百與十十卜, 百與單一卜, 十與十一卜, 十與單一束, 單與單一把
一等不動位, 二等八除五閏, 三等單七置, 四等五除五閏, 五等單四除, 六等三除五閏
「전불동양안에」에는 ‘白字丁殿佛洞’의 내용이 대부분이며, ‘在字丁’, ‘樹字丁眞木坪’, ‘駒字沙器店坪’이 말미에 첨부되어 있다. 5층으로 구성된 양안 중 가장 아래 5欄에 陳主·起主 및 작인의 현황을 기재하고 있다. 작성당시 陳主·起主는 殿佛이던 내용 부분이 후대 첨지를 붙여 辰水, 采斗, 貴仁 등의 변화된 작인현황을 표기하였다. 이들 양안의 토지는 전불동의 노산사에 소속된 토지현황으로 그 소유주체와 작인의 현황을 정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토지의 규모는 제156 田 9負6束이 단일 토지로 생산량이 가장 높으며 그 외에는 대부분 1부 내외의 전답으로 구성되어 있다. 양안상의 殿佛洞 소재의 토지로 올라 있는 것은 480負 7束으로 이들 토지가 노산사 운영과 광산김씨 문중활동의 기반이 되었다.
「祭畓量案」은 ‘古沙洞面殿佛墓位田畓己亥量案’, ‘虎洞墓位田畓’과 ‘殿佛墓位田畓買得文券謄錄’으로 구성되어 있다. 1719년 작성된 기해양안을 기반으로 한 ‘古沙洞面殿佛墓位田畓己亥量案’은 「전불동양안」과 기재양식은 대동소이하나 추가검토가 요망된다. ‘古沙洞面殿佛墓位田畓己亥量案’에 수록된 자호중 ‘朝字丁’38) , ‘戒字丁’, ‘在字丁’, ‘白字丁’은 전불동 소재로 파악되고, ‘奈字丁‘, 薑字丁’은 川南面에 위치한 토지로 볼 수 있다. ‘虎洞墓位田畓’은 천남면 소재의 ‘醎字丁’, ‘河字丁’을 비롯하여 古沙洞面의 ‘章字丁’과 ‘愛字丁’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 광산김씨가 토지는 고사동면과 천남면에 위토가 산재되어 있다. 이 또한 문중소유의 위토현황이나 노산사와 문중의 밀접한 관련성을 참고할 경우 토지의 관리문제는 사우의 운영과 함께 검토 되어야 할 것이다. 한편, 「제답양안」의 말미에는 ‘전불동묘위전답매득문권등록’을 첨부하고 있는데 이는 전불동 소재 선대 묘위의 위토를 매득한 문서를 옮겨 적은 것이다. 등록된 토지매매명문은 1688년에서 1772년까지의 자료 15건이다.
② 光山金氏 宗契 운영자료
「宗稧案」 2점은 각각 1733년과 1749년의 광산김씨 문중계의 창설 및 운영과 관련된 내용으로 1783년의 「宗案」과도 관련이 있다. 1733년의 「종계안」은 ‘重修宗稧序’, ‘墓祭之具’, ‘宗稧案’, ‘門中完議’로 구성되어 있다. ‘중수종계서’에는 광산김씨가문이 김명원에 의해 고창에 낙향하였으며, 김경희에 의해 안정적으로 정착하였음을 지적하였다. 이어서 이미 선대에 위선을 목적으로 종계를 설립한 사실에 근거하여 종원 간의 ‘敦睦’을 도모하기 위해 종계를 재구성 한다고 지적하였다.  39) 이러한 종인간의 결속과 돈목의 강조는 당시 향촌에서의 입지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종원들의 강한 결속력이 요구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묘제지구’는 묘제가 항시 3월과 9월 春秋에 있음을 명기하고 묘제에 있어 각 집사의 배치와 절차를 서술하였다. 이어서 ‘墓祭設饌之圖’, ‘土地祭設饌圖’, ‘墓前敍立之圖’, ‘參禮位設饌圖’, ‘墓祭祝’, ‘土地祭祝’ 등을 도식화 하여 첨부함으로서 예제에 어긋남이 없도록 도모하였다. ‘종계안’은 一宅行·二宅行·三宅行·五宅行까지 구분하여 종원 90명을 기재하고 있다.  40) 종계안의 작성은 계축년(1733) 4월 6일로서 門長 金履素(1657-1737)을 비롯하여 公事員 金萬璉(1670-1737), 門有司 金萬澤·金象德이 주도하였다.
‘문중완의’는 김명석, 김기서, 김경희에 대한 춘추향사에 필요한 위토의 관리와 관련한 것이다. 觀音洞과 鍮店洞의 전답이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것인데 劉氏와 소유권을 둘러싼 쟁송의 결과 이들 토지를 다시 매입하게 되었다. 매입 과정에서 당시의 有司 명의로 문서를 작성하였으나 본 토지는 문중소유임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그 후 추가로 谷五東面 松川坪의 畓 5斗落을 매득한 다음 이를 虎洞 墓下畓 4두락과 상환하였다. 여기에 다시 7두락의 답을 추가로 확보하여 齋室을 마련하였다. 완의에는 이들 문중소유 위토는 사적으로 관리되어서는 안되며 오로지 향사의 밑천으로 활용되어야 함을 명기하였다.  41)
문중완의의 말미에는 ‘壬戌正月門會時別立完議’가 첨부되어 있다. 본 완의는 1742년(영조18) 문장 金萬春·金冑光을 비롯하여 都有司 金萬澤, 公司員 金德謙, 門有司 金大休·金萬潗이 관여하였다. 임술년의 문중완의에는 ‘근자에 문중의 기강이 해이해져 祭畓의 收稅와 사용에 삼가는 자세가 없는’것을 지적하고 종손에 의한 산소의 관리가 어려우므로 문중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언급하였다. 조목에는 향사시 유사가 왕래하면서 酒饌에 지출하지 말며, 傳掌記의 작성, 금양산소의 斫木관리, 祭畓은 사적으로 경작하지 말고 오직 산직만 경작하도록 규정하였다.
1749년(영조25) 「종계안」은 1733년의 자료와 구성내용이 대동소이하다. 종계의 중수와 관련한 서문에는 丁酉(1717)季春癸亥金德麟修序와 癸丑(1733)孟夏下澣宗孫萬澤重修文案序를 전재하고 있다. 기사년(1749)의 ‘重修文案序’에서 김원록은  42) ‘奉先睦族’에 입각하여 선대에서 이루어 놓은 족계를 계승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門案-生員公’에는 各宅을 구분하여 기재하고 있으며 광산김씨 종원 89명이 등재되어 있다. 문안의 작성은 기사년 10월 2일 문장 金宗光, 公事員 金德裕, 門有司 金元祿·金再承의 주도로 이루어 졌다.
「문계안」에 첨부된 ‘문중완의’는 ‘壬戌正月日別立完議’를 비롯하여 ‘甲子九月日祭享時完議’, ‘己巳十月日祭享時完議’를 수록하였다. 이와 더불어 ‘條約’도 각 ‘문중완의’의 작성시점별로 구분하여 기록하였다. 기사년 완의에는 문계로부터 전수된 虎洞의 畓 16斗落을 둘러싸고 정묘년(1747)과 금년(1749) 봄 연이어 쟁송이 발생하였으나 승소한 그간의 정황을 기록하고 祭典의 관리를 당부하는 내용이다. 한편, 문중완의의 말미에는 ‘庚辰三月初六日別立完議’가 부기되어 있다. 본 완의는 1760년(영조36) 종원간에 세대가 멀어짐에 따라 결속력이 약해진 점을 지적하고 ‘參祀員’을 정하여 향사의 엄격성을 도모하고자 작성되었다. 참사원은 도유사, 공사원, 종손, 兩門有司를 비롯하여 門長 金宗光(1692-1776)·金德裕·金德潤 등이다. 완의에는 이들 구성원이 사유 없이 불참할 경우 告廟하여 치죄할 것을 결의하였다.
1783년의 「宗案」도 「문계안」의 연장선상에서 작성된 것이다. 서문의 전말은 金彦承이 지었으며 이어서 ‘敦睦齋祠宇 蘆溪先祖後孫錄’에 좌목을 열기하였다. 후손록에는 5-9代孫으로 行列별로 구분하여 광산김씨 종중인사 108명이 망라되어 있다. 본 후손록의 작성은 문장 김덕윤, 次門長 金景復, 掌議 金敬德, 公事員 金宇承, 修正有司 金允明, 門有司 金廷玉·金駿吉 등에 의해 주관되었다.
광산김씨의 「문계안」과 「종안」 등은 각각 1733년·1749년과 1783년에 작성된 것으로 김경희의 후손들의 결속을 목적으로 작성되었다. 이들 문중계의 운영상을 담고 있는 자료는 1781년(正祖5) ‘典洞祠’의 건립을 전후한 시기의 광산김씨 문중의 결속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즉, 돈목재 김기서가 아닌 노계 김경희의 후손들을 중심으로 한 문계가 구축되고 있었다. 문계는 노산사의 전신인 전동사 건립의 원동력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이 후 문중활동의 중심이 사우로 이동되면서 문계도 계승되었다고 본다.  43) 또한 김경희의 후손을 중심으로 한 이러한 결속의 움직임은 17세기 후반 김남식, 김이성의 후손들이 고부에 정착하는 것과 관련하여 고창과 고부의 광산김씨가의 연대와 유대의식을 강화할 목적이 있었다는 배경이 작용하였다.
한편, 「寺正公遺昆錄」은 1760년 金五行의 후손들을 중심으로 한 門契의 구성과 그의 행적을 정리한 자료이다. 자료는 역대 서문에 이어서 ‘軍器寺正公遺昆錄’, ‘墓祭之凡例’, ‘完議條約’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문은 ‘甲戌(1694)十一月上澣七代孫前行禮曺佐郞履泰’, ‘庚寅正月望八代孫萬敍’, ‘丙寅季春上澣九代孫鼎一’, ‘甲申三月旣望九代不肖孫允貞’, ‘壬子十月下澣九代孫允明’, ‘壬子十月下澣九代不肖孫夏權’, ‘壬子十月下澣十一代不肖孫琇坤’, ‘庚辰(1760)十月下澣十代不肖孫性濯’의 글로 구성되어 있다.
김인우와 김승길에 의해 무장으로 낙향한 광산김씨는 김오행에 의해 이 일대에 정착할 수 있었다. 이에 본 ‘곤유록’은 김오행의 후손들을 중심으로 한 일종의 문계를 조직하고 그 기록을 남긴 자료로 볼 수 있다. 다만 그 범위는 고창·고부 일대의 광산김씨보다 범위가 큰 무장 일원의 족원들을 그 대상으로 하고 있다. ‘軍器寺正公遺昆錄’에는 김오행의 9대손에서 15대손 까지 모두 287명의 광산김씨 종원이 열기되어 있다. 이들의 거주지는 무장, 고창, 고부를 비롯하여 함평, 영광, 옥과, 부안, 정읍, 흥덕 일원이다.
본 자료는 18세기 후반 고창과 고부일원의 광산김씨뿐만 아니라 무장을 포괄하는 포괄적인 문계를 구축한 것을 반영하고 있다. 이러한 점진적인 종족 범위의 확산과 결속의 토대위에서 18세기 후반 시조 및 려말선초 광산김씨 문중 인물에 대한 현양사업이 이루어 졌으며, 이는 결국 조선후기 광산김씨 종원간의 연결을 모색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門中會計」는 1937년에서 1956년 사이 고창 광산김씨 문중의 수입과 지출 내역을 정리한 자료이다. 본 자료는 초반부에 ‘契約書’, ‘林野寄贈承諾書’ 등이 기재된 이후 ‘丁丑十月十四日會計’부터 시작하고 있다. 금액별 지출 내역을 항목별로 열기하고 있다. 마지막 기록은 ‘丙申十月時祀後用’이다. 일제강점기에서 현대사회에 이르기까지 광산김씨 문중의 재정운영실태를 담고 있다.
③ 先代 行蹟 관련자료
「光山金氏文蹟」은 金弘宇의 임란창의를 중심으로 그 관련 사실에 대한기록과 관련 인물들의 행적을 정리한 것이다. 주요 내용은 임란창의 사실관련 각종 서문과 기문, 창의 제현의 현황을 비롯하여 그 후 광산김씨 선대 관련 인물의 행적들을 정리하였다. 창의 관련 기문은 鰲山南門倡義碑文(洪良浩撰), 長城南門倡義碑閣記(奇學敬), 南門倡義錄序(洪昇源), 南門倡義錄序跋(金麟淳), 倡義稧記(奇學相) 등이 있다.  44) 고창과 고부 일대의 광산김씨 문중에서 선대의 사적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목적에서 작성된 본 자료는 선대 행적에 대한 이해와 문중의 운영에 대한 면을 살필 수 있다.
「蘆山祠諸賢事實」은 노산사에 향사된 인물들의 행적을 비롯하여 노산사의 선생안을 첨부하고 있다. 서두에는 노산사에 향사된 이른바 ‘五賢’의 사실, 묘갈, 열전, 畵像讚, 행장 등을 모두 기재하고 있다. 이와 관련된 자료로 「先世文獻辨說」도 노산사 향사 인물의 각종 행적과 관련자료를 제시하고 있어 참고된다.
고창을 중심으로 기반을 확립한 광산김씨 일파는 이후 김남식과 김이성에 의해 고부에 정착하면서 고창과 고부를 배경으로 사회적 활동범위를 확대하였다.
김이성(1652-1696)은 고창의 백양촌에서 태어났다. 그는 평소 “사람이 사람됨은 효도와 공손에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니, 요순의 道도 효도와 공손뿐이다.”  45) 라고 강조하고 이에 진심을 다하였다. 이러한 수학 신념에 따라 그는 孝悌의 실천에 일생동안 전념하였다. 1674년(현종15)에 아버지의 병환이 깊어지자 지극정성으로 간호하였다. 1683년(숙종9) 정월에 아버지 병환이 재발하여 숨이 끊어질 지경에 이르자 스스로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드려 이틀 동안 연명하였다고 한다. 부친상에 있어서도 규범을 엄격하게 지키는 것은 물론 그 슬픔도 극진하여 주변 사람들을 감화시켰고, 시묘 3년 동안 한결같았다.
뿐만 아니라 1689(숙종15)년 아우 金履綏(1660-1689)의 병환에도 간병을 극진히 하였다. 김이성은 아우가 정성어린 간병에도 회생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자 슬픔을 이기지 못해 열손가락으로 땅을 파다가 피로 물들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고창, 고부 일대의 유명한 일화이다. 그는 평소 신분에 구애되지 않고 어른들을 부모를 대하는 마음으로 공경하였으며, 이웃의 상사소식에도 삼가는 마음을 나타내었다. 그의 이러한 효제에 대한 실천은 집안 노복에게도 영향을 미쳐 龍伊, 命今도 효로서 향중에 알려졌다.
그는 일찍이 아버지의 유명으로 尤庵 宋時烈(1607-1689)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스승의 가르침을 엄격히 따랐다. 1689년(숙종15) 기사환국으로 인해 서인이 축출되었다. 이 당시 송시열이 장희빈의 소생을 원자로 책봉하는데 대한 반대 상소를 올렸다가 제주도로 유배되었으며, 같은 해 6월 서울로 압송되던 중 정읍에서 賜死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정치적 회오리를 직접 목도한 김이성은 기사환국 이후 벼슬의 뜻을 접고 오직 스승 송시열의 가르침에 따라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그는 고부 鮐城 雲谷에 서재를 ‘華軒’46) 이라고 직접 쓴 편액을 걸고 후학 양성에 열중하였다. 김이성의 이러한 효행과 학행은 1828년(순조28) 어사 魚有龍의 상달로 통정대부 승정원좌승지에 추증되고 효자정려가 내려졌다.
고창과 정읍 일대의 광산김씨는 학통적으로 ‘김장생→김집→송시열’로 이어지는 기호학파의 일원이었다. 광산김씨 일파가 고부에 정착한 것은 김이성이 스승 송시열의 가르침을 실천하기 위해 고부 雲谷에 서재를 마련하면서 비롯되었다. 이 과정에서 송시열이 사사된 고부가 새로운 터전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애당마을 전경 : 전북 정읍시 소성면〉
〔그림 3〕 고부 광산김씨 家系圖 : 金南式 ~ 金箕均
김이성은 45세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슬하에 아들이 없자 동생 김이수의 차자인 김한광으로 계후하였다. 慕村 金漢光(1689-1742)은 栢溪 殷鼎和에게 수학하였으며, 학문과 덕망으로 향리의 명망이 있었다. 김한광의 네 아들이 모두 문명이 있었다. 장자 松塢 金允貞은 은정화의 문인으로 權樞, 靑霞 權克中(1585-1659)와 교유하였다. 차자 茅堂 金允文은 󰡔茅堂遺稿」가 있다. 最適堂 金允重(1719-1777)은 尹鳳九의 문인으로 효성이 지극하여 아버지 병환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였다고 한다.  47) 문집으로 󰡔最適堂集󰡕이 있다.
조선후기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기호학파의 학통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는데 진력한 인물이 김성은이다. 김성은의 학덕과 효행은 고부에 정착한 광산김씨가가 기호사림계의 주류에 접근하는데 계제를 마련하였다는데 큰 의의가 있다. 김성은의 행적은 크게 효행, 학행과 위선으로 구분 할 수 있다.
金性溵(1765-1830)은 김윤중의 셋째 아들로서 자가 聖淵이고 호는 引逸亭이다. 그는 어버이 섬김에 효성을 극진히 하였다. 부친의 상사에 送終의 절차를 엄격히 하였다. 어머니의 병환에는 대변의 맛을 보아 증세를 살피고, 병세가 위중하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드렸다고 한다.  48) 부모의 상사에 6년 동안 여묘살이 하였다. 그는 가내의 가르침에 따라 형제간 우애와 가난한 이웃에 대한 구제에도 성실하였다.
김성은은 13세에 부친상을 당하자 季父 聲湖 金允明을 섬겼다. 부친상 후 頤齋 黃胤錫(1729-1791)의 문하에 나아가 배웠으며,  49) 황윤석이 세상을 떠나자 심상 3년에 정성을 다하였다. 그 후 中洲 李直輔(1738-1811)50) 剛齋 宋稚圭(1759-1838)51) 문인이 되었다. 이직보는 그에게 친히 ‘引逸’52) 이라 호를 지어주었다. 그는 󰡔心經󰡕, 󰡔近思錄󰡕, 󰡔五經󰡕을 깊이 독서하였으며, 송시열의 학통을 이어 주자의 가르침을 익히고 실천하는데 오로지 전념하였다. 美湖 金元行(1702-1772), 過齋 金正黙(1739-1799), 薑山 李書九(1754-1825) 등으로부터 가르침을 받거나 서로 교유하였는데 이들은 주로 서인 노론계로 구성되어 있었다. 김성은의 학덕은 그의 사후에도 趙寅永53) 과 艮齋 田愚에 의해 높이 평가되었다. 김성은을 비롯한 광산김씨가의 학통과 관련한 당대의 분위기와 입장은 김성은의 스승인 황윤석의 다음과 같은 언급에 잘 반영되어 있다.
숙종 경신대출척에 적신 허적 윤휴등이 사형당하자, 처음에는 우암 송시열을 존모하다가 나중에는 변심한 사람들이 ‘적신들이 억울하게 죽었다’고 말하더니만 갑자년에는 윤증도 역시 스승을 배반하고 그들과 합류하였다. 이에 또 다시 적신 목래선, 민암, 유명현 등이 더욱 왕성하게 선동하여 기사환국에 이르러서는 궁내로 들어간 희빈장씨가 필경에 인현왕후의 왕비 자리를 찬탈한 즉 송시열 및 김수항, 민정중, 박태보는 송시열의 문도가 아닌데도 우뚝하게 함께 화를 당하였다. 비록 윤증으로서도 목래선의 한 무리들에게 추대된 바가 되어 대사헌으로서 감히 한마디 말도 꺼내지 못하고 그 이듬해에 은연중에 자신을 속이고 남도 속이었다. 그런데 갑술옥사에 세상이 바뀌어 인현왕후가 복위되니 南九萬은 말하기를 ‘기사환국과 같으니 깊이 염려하지 아니할 수 없다.’하였고, 윤상운과 윤지완은 ‘6-7년 그 동안이 그리 멀지 아니한데 왕자를 두고 못 둔 것이 무엇이 그리 중요하고 중요치 아니 한가’하였으니 최석정도 역시 오십보에서 백보로 별 차이 없으니 백년의 사악함과 정대함이 이에 구별되었도다. 이러한 청의는 궁벽한 시골에 있어서도 오히려 그러하였는데 고 처사 광산 김공 이성 자 성보도 역시 그러한 인물이었다.  54)
김성은은 송시열의 영정 개모작업에 간여 하였으며, 증조부 김이성의 서재인 ‘운곡’의 유허비문을 건립할 당시에도 송시열의 연원을 강조하였다. 1820년(순조20) 司宰監 直長 宋欽命에게 ‘雲谷遺墟碑文’을 받았는데 송흠명은 비문에서 ‘나는 송우암선생의 후예로 義로서 감히 사양치 못하고 짧은 글이지만 (김성은의) 위선하는 성의에 부응하는 것은 공이 우암선생에게 수업한 문인이요, 성은씨의 부탁이 있었기 때문’  55) 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송시열을 주향하고 있는 고암서원56) 의 󰡔考巖書院誌󰡕를 주도적으로 간행하였다.
〈고암서원 전경 : 전북 정읍시 상평동 소재〉
김성은은 「性理辯論」, 「太極解說」, 「華東帝王歷代」 등 다수의 저서를 남겼다. 그의 대표적 저서는 󰡔東國文獻錄󰡕으로, 그가 본 책을 편찬할 당시 내용 중 道統의 연원과 관련된 시비로 잠시 玉溝에 유배되기도 하였다.  57) 이 또한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도통 문제와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그는 평소 ‘奉先裕後’라 하여 선대의 유적과 행적을 정리하는 위선사업에 성과를 남겼다. 우선 󰡔광산김씨족보󰡕를 편찬함은 물론 시조 이른바 ‘신라왕자 金興光’의 광주 평장동 유허에 사당을 세워 향사하였다.  58) 그리고 金稹과 金光利의 실전한 묘소를 경기도 豊德縣 亡浦에서 찾았다. 그는 장성의 鰲山 南門에 임란의병비를 건립하였으며, 양난의 사실을 기록한 󰡔湖南倡義錄󰡕도 편집하였다. 이러한 그의 위선관련 행적은 김장생, 김집 등이 광산김씨로서 그 인연관계를 확립한다거나, 김홍우와 김남식 등이 兩亂에 의병을 창의한 사실을 뒷받침하기 위한 배경이 작용하였다. 그리고 효자, 충신 등을 연이어 배출한 고창·고부 일대 광산김씨의 현양을 목적으로 󰡔海東三綱錄󰡕, 󰡔瀛州三綱錄󰡕, 󰡔旌忠祠三忠傳󰡕59) 등이 편찬되었다.
고부 광산김씨의 사회적 활동의 거점과 배경은 ‘玉山精舍’이었다. 옥산정사는 1661년 김남식이 병자호란 이후 낙향하여 건립한 강학처로서 1786년 증축하였다.  60) 경내에는 ‘광산김씨삼강문’을 비롯하여 김성은의 ‘영당’이 있다. 영당에는 石泉 韓用弼이 그린 김성은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61) 광산김씨삼강문은 1828년 광산김씨 문중에 충신, 효자, 열녀의 정려가 내려지면서 건립되었다.
〈광산김씨삼강문 전경 : 옥사서원 경내에 위치하고 있다.〉
광산김씨가의 정려현황을 정리하면 표와 같다.
〈광산김씨 정려 현황〉

순번

이 름

旌 閭

시기

비 고

1

金南式

忠臣 崇禎處士 贈通訓大夫司憲府執義

贈通政大夫吏曺參議 金南式 故墟

1828

聖上卽祚28年 命贈

2

金履成

孝子 贈通政大夫 承政院左承旨

兼經筵參贊官

1828

聖上卽祚28年

3

孺人 完山李氏

烈女 學生 金允文妻

1832

聖上卽祚32

4

金允重

孝子 贈通訓大夫司憲府掌令

1956

檀君紀元4289年8月

5

淑夫人 延安金氏

孝女 贈通訓大夫司憲府掌令 金允重妻

1956

檀君紀元4289年8月

6

金允明

孝子 行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

1956

檀君紀元4289年8月

7

淑夫人 星山李氏

烈女 贈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 金國檜妻

1956

檀君紀元4289年8月

8

孺人 新平宋氏

烈女 學生 金瓚榮妻

1832

聖上卽祚32

金瓚榮은 金膺澤의 舊名

한편, 옥산정사는 1956-57년간 인근 유림의 결의에 의해 옥산서원으로 중수되었다. 서원에는 김남식을 주향으로 김이성과 김성은을 배향하였다. 고부 광산김씨 소장 고문서는 옥산정사에 향사된 인물들의 행적, 특히 충·효·열과 관련되어 작성된 것들이다.
〈옥산서원 전경 :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41호. 전북 정읍시 소성면 애당리 소재〉
① 敎 令 類
교령류 자료는 추증교지 3점이다. 1829년(순조29) 김남식과 그의 처에게 내려진 추증교지는 이른바 숭정처사(崇禎處士)인 김남식을 추증하는 과정에서 작성된 것이다. 김남식의 추증교지의 세주는 예조에서 그를 추증하길 요청하는 啓의 내용이 전사되어 있다.  62) 한 문중에서 충신 1명, 효자 4명, 열녀 2명이 배출된 것도 경탄스러운데 특히, 김남식의 경우 병자호란당시 창의하였을 뿐만 아니라 난후에도 귀향하여 숭정처사를 자처한 그 충심을 높이 평가하였다. 앞서 執義로 추증하고 그의 후손이 壽職을 받음에 따라 김남식이 추증되었으나 미진하다고 지적하고 그를 특별히 포양하길 요청하는 사림의 상언에 따라 예조에서 계를 올려 비로서 본 추증교지가 내려지게 되었다. 김남식이 통정대부 이조참의로 추증되자 그의 배위인 고흥류씨도 법전에 의거 숙인에서 숙부인으로 추증되었다.
김남식과 그의처에 대한 추증교지에는 중국(淸)연호를 사용하지 않고 간지로 표기하였다. 이는 대명존주의식(對明尊主意識)에 바탕해 처신한 숭정처사 김남식에게 내리는 사령장인 점이 고려된 결과였다.  63)
1805년(순조5) 유인류씨를 숙인으로 추증하는 추증교지는 그의 손자 김윤명이 나이 70이 넘어 가선대부지중추부사에 추증되면서 발급된 자료이다. 이상의 추증교지는 고부의 광산김씨가 조선후기 忠孝烈을 배출한 문중으로 향중의 입지를 강화하고 있었던 양상을 간접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② 疏·箚·啓·狀類
소·차·계·장류는 所志類, 稟目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 자료는 광산김씨 고문서의 내용을 포괄하는 것으로 이들 문서를 통해 전체 고문서의 내용에 대한 검토가 가능하다.
소지류는 議送, 等狀, 單子, 所志 등을 일괄 분류하였다.  64) 소지류 68건의 자료는 주로 忠孝烈에 대한 포양, 산송관련, 소유권 분쟁 등과 관련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소지류는 광산김씨 관련 고문서의 전체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자료이다.
소지류 중에는 이른바 광산김씨 문중의 1忠臣, 3孝子, 1孝女, 3烈婦에 대한 포양·정려를 요청하는 자료가 41점으로 절반이 넘는다. 김이성의 포양과 관련해서는 1792년(正祖16) 제기된 이래 1804년까지 계속되었다. 이들 소지류의 대표적인 자료로 소지류에 기록된 시은의 행적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시은 김이성은 이미 향중에 효자이자 사우연원으로 명망이 높아 읍지에 올라 있었다. 그는 부모를 섬기는 효가 극진하였다. 여러 달을 床席에 있으면서 한번도 帶를 풀지 않았다. 밤에는 반드시 분향 稽顧하다가 결국 斷指하여 그 피를 드리니 2일만에 회생하였다고 한다. 상중에는 蔬菜도 입에 대지 않고 슬픔을 극진히 하였다. 廬墓에서는 조석으로 제수를 올림에 정성을 다하였으며, 비바람이나 서리가 내려도 변함이 없었고 오히려 죽음으로 극진하고자 하였다. 제사에 있어서는 먼저 3개월 전 부터 소채를 먹고 3제일에는 沐澡하였으며 제수도 정결하게 준비하였다. 우애에 있어서도 그 동생 金履綏가 갑자기 중병을 얻게 되자 직접 약재를 구해 써보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럼에도 회생가망이 없게 되자 슬픔이 커서 10손가락에 모두 피가 났다.
부모와 동갑되는 사람은 비록 천인이라 하더라고 말에서 내려 예를 갖추었고 걸인이라도 음식과 옷을 주었다. 친구의 상을 듣고는 음식을 물리고 함게 곡하기를 극진히 하였다. 집안의 寡嫂와 孤侄도 모두 살펴 한 집안의 표상이 되었다. 그는 石潭 李珥의 󰡔擊蒙要訣󰡕을 일생의 가르침으로 삼았다. 평소 孝悌를 몸소 실천하는 것을 최고의 학문 실천 목표라고 공언하였다. 그리고 仁顯王后(1667∼1701)가 유폐되자 세상과 인연을 끊고 경전에 탐독하였다. 小廬를 짓고 주위에 꽃과 나무를 가꾸었으며 저녁에는 높은 곳에 올라가 참배하고 朔望에는 省掃하기를 한결같이 하였다.
김이성의 사례와 같이 충·효·열과 관련한 행적을 사실적이면서 감성적으로 호소하면서 관에 정려 및 포양을 요청하였다. 이와 관련한 소지류의 자료별 현황을 정리하면 표와 같다.

순번

지역

인원

비고

순번

지역

인원

비고

순번

지역

인원

비고

1

全州

12

朴相一 등

18

興陽

3

丁光宇 등

35

同福

6

羅得周 등

2

光州

13

朴徽鎭 등

19

昌平

12

鄭日煥 등

36

和順

5

曹益鉉 등

3

羅州

19

金之獜 등

20

金溝

4

金仁鐸 등

37

求禮

10

王學曾 등

4

南原

21

趙英祚 등

21

萬頃

3

蔡膺濟 등

38

沃溝

7

高得明 등

5

綾州

5

南煜 등

22

臨坡(陂)

11

文顯道 등

39

咸悅

3

南宮爀 등

6

長城

11

奇泰溫 등

23

興德

7

黃冑錫 등

40

光陽

4

朴聖溵 등

7

潭陽

11

南彦夏 등

24

泰仁

7

李錫疇 등

41

唐津

3

李毅純 등

8

順天

5

趙顯範 등

25

井邑

5

辛性修 등

42

海南

2

金珏 등

9

長興

2

魏白圭 등

26

高敞

8

姜準 등

43

玉果

1

權極達

10

淳昌

8

楊宗煥 등

27

扶安

8

金敬徽 등

44

考巖書院

儒生

11

靈光

12

李以錫 등

28

茂長

7

鄭忠謙 등

45

高阜

1

金聖運

12

寶城

5

任興源 등

29

咸平

9

李箕疇 등

46

光州

2

柳迪 등

13

靈巖

9

愼師俊 등

30

任實

9

洪允昇 등

47

泰仁

2

萬樂眞 등

14

高阜

22

權衍 등

31

高山

10

鄭東忠 등

48

長城

1

金壽祚

15

金堤

10

黃俊成 등

32

南平

4

任昌祚 등

49

高敞

1

金邦魯

16

益山

2

蘇洙喆 등

33

務安

4

尹根 등

50

本邑

5

安鳳胤 등

17

樂安

3

金祿鉉 등

34

谷城

4

洪樂俊 등

51

총합

338

三綱錄의 간행을 둘러싼 논쟁도  65) 충효열에 대한 포양과 관련이 있다. 한편 산송 과정에서 투옥된 선친에 대한 방면을 요청하는 血書로 작성된 소지도(62번) 일면 효행과 관련이 깊다.
한편, 광산김씨가의 포양과 관련한 사회적 활동에 참여한 인근 유림의 현황을 소지류를 통해 파악 할 수 있다. 소지류 4는 進士 朴相一을 비롯한 46명 연명으로 올렸다. 연명에 참여한 인사는 全州, 光州, 靈光, 南原, 羅州, 扶安, 興德, 井邑, 泰仁, 茂長, 金堤, 長城, 高敞에 거주하고 있었다. 대표적인 인물은 전주의 진사 박상일, 광주 진사 朴夏鎭, 영광 진사 李以錫, 남원 진사 房弼禧, 나주 진사 金之獜, 흥덕 유학 黃冑錫, 장성 진사 金文在 등이다.
소지류8은 고부의 金·柳·黃·高·鄭·權·李·安氏 등 37명을 비롯하여 고창의 安·宋·朴·李·曹·柳·姜氏 20명이 김이성의 효행 포양을 청원하며 연명하였다. 이러한 인적 구성은 고창과 고부에 포진하고 있는 광산김씨를 중심으로 연대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소지류 10은 광산김씨가의 포양 활동에 가장 많은 향중 인사들이 동원된 자료이다. 1790년(정조14) 전주 유학 金相眞 등이 연명하여 김이성에 대한 효행증직을 요청하는 소지에는 338명 이상이 연명하였다. 지역분포와 참여인사의 현황을 정리하면 표와 같다.
〈표〉 1790년 소지에 연명된 참석자의 지역별 분포 현황

순번

지역

인원

비고

순번

지역

인원

비고

순번

지역

인원

비고

1

全州

12

朴相一 등

18

興陽

3

丁光宇 등

35

同福

6

羅得周 등

2

光州

13

朴徽鎭 등

19

昌平

12

鄭日煥 등

36

和順

5

曹益鉉 등

3

羅州

19

金之獜 등

20

金溝

4

金仁鐸 등

37

求禮

10

王學曾 등

4

南原

21

趙英祚 등

21

萬頃

3

蔡膺濟 등

38

沃溝

7

高得明 등

5

綾州

5

南煜 등

22

臨坡

(陂)

11

文顯道 등

39

咸悅

3

南宮爀 등

6

長城

11

奇泰溫 등

23

興德

7

黃冑錫 등

40

光陽

4

朴聖溵 등

7

潭陽

11

南彦夏 등

24

泰仁

7

李錫疇 등

41

唐津

3

李毅純 등

8

順天

5

趙顯範 등

25

井邑

5

辛性修 등

42

海南

2

金珏 등

9

長興

2

魏白圭 등

26

高敞

8

姜準 등

43

玉果

1

權極達

10

淳昌

8

楊宗煥 등

27

扶安

8

金敬徽 등

44

考巖

書院

儒生

11

靈光

12

李以錫 등

28

茂長

7

鄭忠謙 등

45

高阜

1

金聖運

12

寶城

5

任興源 등

29

咸平

9

李箕疇 등

46

光州

2

柳迪 등

13

靈巖

9

愼師俊 등

30

任實

9

洪允昇 등

47

泰仁

2

萬樂眞 등

14

高阜

22

權衍 등

31

高山

10

鄭東忠 등

48

長城

1

金壽祚

15

金堤

10

黃俊成 등

32

南平

4

任昌祚 등

49

高敞

1

金邦魯

16

益山

2

蘇洙喆 등

33

務安

4

尹根 등

50

本邑

5

安鳳胤 등

17

樂安

3

金祿鉉 등

34

谷城

4

洪樂俊 등

51

총합

338

전라도내 43개 고을을 망라하고 있으며, 참여 인사들 또한 지역의 대표적 인사들로 구성되어 있어 본 청원 활동은 범 호남유림 차원에서 추진된 것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고암서원의 유생들이 참여 하고 있어 이와 연계된 광산김씨 인사들도 활발하게 참여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역적인 참여 인사의 분포에 있어서도 고부지역의 유림이 22명으로 가장 많이 연명하였다.  66)
소지 중에는 광산김씨의 위선과 관련한 사회적 활동 외에도 송시열의 학통 계승의 목적에서 추진된 송시열 영정 개모관련  67) 소지 및 고암서원의 운영과 관련한 자료가 있다. 1799년(正祖23) 고부 유생 김성은이 정읍에 올린 소지는 송시열의 영정을 개모하는 과정에 작간을 일삼은 奇商俊에 대한 처벌을 요청하는 소지이다. 고암서원을 중심으로 진행된 송시열의 영정개모에 기상준은 고암서원의 李玄三 등과 암약하여 경향의 사론을 분열시킴은 물론 영정을 훼손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더욱이 개모와 관련한 이른바 京錢 200 여냥의 운영에 대한 문제와 연계되면서 복잡하게 전개되었다.
1815년(純祖15) 김성은이 정읍에 올린 소지 42는 고암서원의 운영과 관련한 논란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흥덕에 거주하고 있는 奇秉演이 김성은 등이 서원 院穀의 운영에 불합리한 점이 있다고 정소한 사실이다. 고암서원의 연혁에 대해 언급된 소지의 서두 부분과 서원의 운영 주도권을 둘러싼 이러한 대립 양상은 이 일대의 유림의 학통과 향권의 향배 문제와 관련되어 있었다.
광산김씨가 소장 소지자료 중에는 이상의 문중선양과 관련한 사회활동 외에도 선대 분묘 수호를 위한 산송소지도 다수 남아 있다. 19세기 이후 증대하고 있는 분묘 수호 관련 분쟁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광산김씨가에 있어서는 孝烈을 강조하는 문중의 분위기와 관련하여 매우 민감한 사안이었으며, 이에 적극 대처하지 않을 수 없었다.
품목은 모두 20건으로 광산김씨 인물에 대한 선양을 비롯하여 고암서원의 운영과 관련한 내용이다. 특히 광산김씨 인물에 대한 선양은 1799년(정조21)의 자료이다. 품목 1은 향교재임이 고부군에 올린 품목은 金允明을 才行하는 일을 본손이 사양하고 있다는 사실이며, 품목 2는 임란당시 창의한 鰲川 金景壽, 錦江 奇孝諫, 栗亭 尹軫(1548-1597), 鰲峯 金齊閔, 四梅 李應鍾, 白谷 金弘宇, 隱菴 李守一, 霞谷 鄭雲龍, 梅竹 金景男, 瑞石 金彦勗 등을 향사하는 別祠의 건립을 요청하는 것으로 ‘湖南多士稟目’이다. 참여인사는 長城, 光州, 羅州, 靈光, 淳昌, 金堤, 靈巖, 高阜, 平昌, 興德, 高敞, 金溝, 和順, 南平, 井邑, 務安, 咸平, 任實 등에 분포되어 있으며, 이는 창의에 참여한 인사들의 기반이 있는 고을이었다.  68)
19세기에 형성된 품목자료 17건은 고암서원의 운영에 있어서 송시열의 영정개모는 물론 서원에 부여된 잡역을 면제해 주길 요청하는 내용이다. 품목 16에는 당대 고암서원의 운영을 둘러싼 제반 현안들이 언급되어 있다. 품목에는 서원 사액 현판에 대한 도금문제, 서원지의 간행을 둘러싼 宋彦綏와의 갈등으로 향사가 지연된 사연,  69) 송시열의 영정개모를 통한 봉안과 관련한 논쟁이 언급되어 있다. 이들 품목은 19세기 고창을 중심으로 한 이 일대 사림들의 향권 분쟁의 단상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는 송시열을 정점으로 한 학통의 계승문제와도 일면 연관된 양상이었다.
③ 牒·關·通報類
關文, 諜報, 書目, 望記자료가 첩·관·통보류이다. 관문은 1800년(정조24) 임란당시 장성을 중심으로 창의한 인사들에 대한 유허비 건립을 허가하는 내용이다.  70) 예조에서 전라도 관찰사 앞으로 유허비 건립을 허락하는 관문을 보냈으며, 전라도관찰사는 예조의 관문에 점련하여 장성도호부사 앞으로 그 실시를 당부하는 관문을 재차 발송하였다.
첩보는 1876년(高宗13) 李喜淵과 金相晋과의 산송문제와 관련하여 현감이 전라도관찰사 앞으로 보낸 것이다.  71) 이희연은 기사년(1869) 모친상 후 一南面 月溪村 인근에 權南信으로 부터 산지를 매득하여 入葬하였다. 그 후 古阜의 김상진이 6대 조모 분묘가 있는 선산의 禁養 지역에 투장하였다는 이유로 起送하면서 분쟁이 발단되었다. 이에 대해 현감은 김상진이 주장하는 선산과 이희연의 분묘가 있는 곳이 구분되고 이미 이희연이 산지를 매득한 文券이 있다는 사실을 들어 김상진을 懲治할 것을 요청하였다.
書目1은 1741년(영조17) 서원 소속 사찰에 대한 減役을 요청하며 순찰사에게 올린 것이다. 서원에서는 인근 사찰을 서원에 소속시키고 營에 납입하는 종이(紙)를 특별히 減給받는 完文을 발급받았다. 그런데 해당 고을에서 관찰사의 관문을 근거로 紙 1束, 蜜油紙 2張의 조속한 납입을 독촉하자 그 부당성을 호소하였으며 減給의 결정을 받았다. 書院執綱이 올린 고목에는 掌議 進士 宋受華, 有司 幼學 金雲瑞와 柳光玉이 참여하였다. 서목2는 고부의 聲浦面 風憲 李가 올린 것이다. 풍헌이 慕村에 거주하고 있는 金奎源등에 대한 免役을 요청한 근거는 광산김씨 문중에서 정려받은 사실과 관련된 것이다.
망기1은 1824년(순조24) 道內 班首 幼學 奇日相이 ‘尤菴先生影幀改摹有司’를 천망하는 망기이다. 고암서원에 송시열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는데 이어 門弟인 寒水齋 權尙夏의 영정을 나란히 봉안 하는 것은 禮制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였다.  72) 이어 송시열의 영정 개모를 위한 유사를 선임하였다. 그 현황은 아래와 같다.
別定有司 : 全州判官, 光州牧 , 羅州牧, 金堤守, 任實宰, 鎭安宰, 咸悅宰,
先生本孫 前長水宰(今扶餘倅), 恩津倅
道內儒林都有司 : 金性溵
別有司 : 洪觀周, 金學淵, 趙廷鐸, 沈煥天, 金時彦
本邑別有司 : 柳澤模
陪行西齋堂長 : 林重燦
④ 證 憑 類
증빙류는 立案, 戶籍類, 證書, 圖形으로 구성되어 있다. 1717년(숙종43)의 繼後立案은 김이성이 嫡妾無子女로 세상을 떠나자 그의 동생인 김이수의 둘째 아들 김한광으로 계후하는 것을 허락하는 내용이다.
1829년(순조29) 예조에서 광산김씨 문중에 발급한 입안은 忠孝烈을 배출한 본 문중에 대한 각종 役을 蠲減해 줄 것을 증명하는 내용이다. 전라도의 進士 李源坤 등이 연명하여 올린 청원서의 내용에 이른바 ‘一忠四孝二烈’이 배출된 것은 매두 특별한 일이며 특히 김남식과 김이성의 忠孝에 대해 정려와 증직을 요청하였다. 이에 대해 예조에서 김남식에 대해 증직하고  73) 김이성에게 정려를 내리는 것과 그 외 孝烈에 대해 후일 公議를 기다리는 것이 필요하다는 의견으로 徐英淳이 담당하여 啓를 올렸다. 예조에서는 증직과 관련된 일을 시행하고 정문을 세우는 것은 해당 고을에서 담당하도록 하였으며, 이들 자손들에 대한 煙戶, 還上 등의 각종 徭役에 대해 모두 견감하는 조치를 내렸다.  74)
조선후기 고부 광산김씨가의 경제적 처지를 가늠할 수 있는 자료는 성책고문서 중 일부와 호적류 10건이 있다. 호적류는 1702년(숙종28)에서 1882년(고종19) 사이에 작성된 준호구 혹은 호구단자이다. 이들 자료는 김이성에서 김한광→김윤정·김윤중→金性溫→金瓚榮→金相寬으로 이어지는 광산김씨 가계의 내용을 담고 있다. 호적류에 기재된 거주지는 ‘古阜郡 聲浦面 慕村里’ 혹은 ‘艾堂里’이다. 개명과 관련해서는 김성탁의 舊名이 金性訥임을 알 수 있다.
호적류 자료를 바탕으로 18세기에서 19세기 말의 노비 현황을 파악 할 수 있다. 이를 정리하면 표와 같다.
〈표〉 호적류 자료에 나타난 노비 현황

문서번호

작성시기

내 용

비 고

호적류 1

1702(숙종28)

6

13

19

賤口秩, 買得2口, 逃亡 3口

호적류 2

1735(영조11)

9

7

16

賤口秩, 率·收貢秩·逃亡秩

호적류 3

1744(영조20)

20

24

48

賤口秩, 率·收貢秩·逃亡秩

호적류 4

1789(정조13)

-

1

1

호적류 5

1789(정조13)

-

1

1

호적류 6

1864(고종1)

2

1

3

賤口逃亡

호적류 7

1870(고종7)

1

-

1

호적류 8

1873(고종10)

1

-

1

호적류 9

1876(고종13)

1

-

1

호적류 10

1882(고종19)

1

-

1

18세기 중엽까지의 자료에는 노비현황을 솔거, 수공, 도망으로 구분하여 기재하였다. 1735년 자료는 솔거 노비가 3구, 수공노비가 3구이며, 도망노비가 10구이다. 1744년의 준호구에는 솔거 노비가 2구, 수공노비가 27구이며, 도망노비가 19구이다. 1744년 48구의 노비를 소유 및 관리하고 있었으나 이들 중 도망노비가 점진적으로 증대하고 있는 경향이었다. 특히 19세기 공노비 해방의 영향에 따라 노비 현황이 급격히 감소하였다. 1870년 이후의 호적자료에 등장하는 ‘賤口’는 奴 貴德 1口 뿐이다. 노비현황만으로 광산김씨가의 경제적 상황을 가늠하기에는 한계가 있으나 18세기 중엽의 상황으로 보건데 40구 이상의 노비를 소유하면서 사회적 활동을 위한 경제적 기반을 확보하였다고볼 수 있다.
⑤ 書簡·通告類/詩文類/書畵類
서간·통고류에는 通文이 주요자료이다. 통문은 김이성의 효행에 대한 포양을 청원하기 위해 도내 유림들의 공의를 모으는 과정에서 작성된 것들이 대부분이다. 김이성의 효행 포양을 위해 장성, 영광, 고창, 고산, 정읍, 고암서원, 河西書院, 함평 紫陽齋會所, 옥구, 김제, 무장, 임실, 임피, 태인, 구례, 금구, 담양, 부안, 남원 등에서 고부향교로 보낸 통문이다. 그 외에도 金國檜의 처 성산이씨의 열행에 대한 포양과 관련된 자료도 참고된다.
影幀으로는 송시열과 김성은 관련 자료가 있다. 송시열 관련 자료는 그의 영정을 개모하는 과정에서 제작된 것으로 개모를 위한 油紙草本에 해당한다.  75) 한편 김성은 영정은 한용필이 제작한 완성본으로 옥산정사 경내의 영당에 봉안하기 위해 제작된 것이다.
⑥ 成冊古文書
고부 광산김씨 성책고문서의 대부분은 해방 이후 족보개수, 喪葬禮, 옥산서원의 중수 등과 같은 문중활동 과정에서 형성된 자료이다.  76)
이들 외에 1796년에서 1900년 門稧의 운영 사실을 담고 있는 「禾谷記」를 비롯하여 일제 강점기 광산김씨 문중의 각종 활동과 관련한 재정지출의 기록을 담고 있는 󰡔現金出納簿󰡕는 문중의 활동상을 반영하고 있다.
蘆山祠의 운영상을 담고 있는 「雜置簿」(가칭)가 있다. 「잡치부」는 김성은이 도유사로 참여한 관계로 고부의 광산김씨가에 가전하게 되었다. 김성은의 유고 간행과 관련한 문중내의 기금모금과 간행비용의 지출 현황을 남긴 기록으로 「引逸亭遺稿 刊印始末錄」(가칭)이 있다. 그리고 김성은이 선대의 행장과 묘지 등을 기록하여 둔 「述先誌」를 비롯하여 광산김씨의 상례와 관련한 輓詞를 모은 「輓詞」가 있다.
광산김씨의 고려조 계보와 관련해서는 당대의 호적자료를 이용하여 학술적인 검토가 이루어진 결과 계보의 불완전성에 대한 변정작업이 이루어 졌으며 이는 土姓의 성장추이 속에서 이해 될 수 있었다. 호남의 광산김씨는 일찍이 조선초기 김인우와 김승길 부자에 의해 무장으로 낙향하였다. 16세기를 전후한 시기 김명원에 의해 고창에 정착하여 성장하였으며, 이후 17세기 중엽 김이성에 의해 다시 고부에 정착한 일파가 있었다.
고창과 고부의 광산김씨는 18세기 이후 족계·문계를 통해 지속적으로 연대를 강화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1781년(正祖5) ‘典洞祠’의 건립이 이루어졌으며 이는 1826년(순조26) ‘蘆山祠’로 확대되었다. 노산사는 정읍과 고부일대의 광산김씨가 이 일대 향촌사회 활동에 참여하는 거점이 되었다.
광산김씨는 역대로 ‘忠孝烈’을 배출하였다. 이러한 가문 전통은 ‘김장생→김집→송시열’로 이어지는 학통과 결합하면서 이 일대 사론을 주도할 수 있게 되었다. 송시열이 정읍에서 세상을 떠나게 됨에 따라 그 문인인 광산김씨 문중인사, 특히 김성은에 의해 고암서원을 중심으로 송시열에 대한 향사 및 현양에 적극 참여하였다.
고창 광산김씨 자료는 성책고문서가 중심이다. 자료는 노산사의 건립 기반이 되었던 광산김씨 문중의 문중계(族契)의 운영상을 사실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그리고 서원의 건립 및 운영과 관련한 자료에는 문중서원의 운영상이 잘 반영되어 있다. 그리고 고부의 광산김씨 고문서는 선대 ‘충효열’에 대한 포양활동이 중심을 이루고 있으며 학통에 기반한 향촌활동의 자료도 다수 있으므로 참고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