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장처 고문서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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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承俊(韓國精神文化硏究院 專門委員),金文澤(韓國精神文化硏究院 先任硏究員)
安東 豊川面의 葛田의 順興安氏家 고문서는 영남대학교 李樹健 교수에 의해 본격적으로 발굴, 소개되었다. 그 내용은 여타 경북지방의 고문서와 함께 󰡔慶北地方古文書集成󰡕에 수록되었다.  1) 同書에는 안씨가의 모든 문서가 망라 된 것이 아니라 분재기 위주로 선별된 것이었다. 안씨가에는 분재기 이외에도 16~20세기 중엽에 이르는 다양한 문서가 다수 소장되어 있다. 본서에 揭載한 것은 그간 부분적으로 간행된 안씨가의 문서를 集成한 것이다.
안씨가에는 古書·成冊古文書는 1,100여책, 개별고문서는 1,607점이 소장되어 있다. 古書는 族譜類, 安氏先祖나 名賢들의 문집 등이 주종을 이루고 있으며, 이들 자료 중에는 󰡔大學󰡕과 󰡔春秋󰡕 등 15~16세기에 제작된 古板本들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 成冊古文書는 置簿·記錄類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들 자료는 모두 마이크로필름화되어 있다. 이 가운데 본서에는 성책고문서 9책, 개별고문서 428점이 수록되어 있다.
安氏家 자료의 조사는 1993년 9월과 1995년 3월 두 차례에 실시되었다. 당시 조사에는 필자를 비롯해 鄭求福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 國學振興硏究事業팀 연구원들이 참여하였다. 조사된 자료는 곧바로 韓國精神文化硏究院 藏書閣에 옮겨져 마이크로필름화하였으며, 현재 동 연구원에 기탁 보관중이다. 귀중한 자료를 조사, 정리할 수 있었던 것은 葛田의 순흥안씨종가를 비롯한 문중 어른들의 도움이 컸다. 公私多忙한 와중에서도 문서를 대여해 준 宗孫 安宗植氏, 그리고 동행 답사와 함께 문서정리에 협조해 준 同家의 安哲鎬氏에게 심심한 감사를 드린다.
갈전의 安氏家는 고려조 興威衛保勝別將을 지낸 것으로 알려지는 ‘子美’를 시조로 하고 있다. 子美는 永儒·永麟·永和 삼형제를 두었는데, 이들이 오늘날 소위 順興安氏 一·二·三派의 派祖이다. 一派는 永儒→孚→裕(珦)로 이어지는 安氏家의 宗派로서 경상남북도을 비롯한 전국에 분포되어 있다. 二派는 永麟→貞俊→成哲→文凱→千載·千瑞·千吉·千善·千松으로 이어지며, 주로 영남과 호남 경기지방에 세거하였다. 三派는 永和→得財→希諝→碩→軸·輔·輯으로 이어지며, 경기일대와 현재의 경남일대에 집중적으로 세거하였다.
安東 葛田 順興安氏家系
갈전의 안씨가는 二派인 安文凱(1333-1398)의 후손들이다. 문개는 文科에 급제하고 左政丞을 거치면서 家格이 현저히 격상되었다. 文凱의 四子 千善은 父와 마찬가지로 文科에 급제하고 大提學을 역임하였다. 또한 그의 子 孫柱, 孫子 俊까지 모두 문과에 급제, 四代에 걸쳐 연이어 登科하였다. 천선의 三子 天保는 세종대에 좌의정에 올랐으며, 沈溫(?-1418,領議政)은 그 사위였다. 심온의 딸이 世宗妃(昭獻王后)가 되면서 안씨가는 王后의 外家로서 당대의 명망을 떨치게 되었다. 千善→孫柱→俊 계열이 경상도 醴泉에 거주하게 되면서 영남지방에, 三子 天保의 후손들은 경기 일원에 거주하면서 分派되었다.
孫柱의 아들 俊은 고려말 문과에 급제하여 남양부사와 전라·충청·경상 삼도체찰사를 역임했다. 그러나 안씨가 인물들은 조선의 개국에는 적극적으로 반대하였다. 공양왕 4년(1392년) 이성계가 집권하면서 鄭夢周의 여당으로 몰려 경상도 宜寧에 유배되었다. 조선조에 들어와 태조가 그 절개를 가상히 여겨 유배지를 자유롭게 옮기도록 허락하자 경상도 醴泉에 卜居하였다.  2) 예천에 복거한 것은 이곳에 妻家인 玆山邦氏家의 근거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연으로 安俊은 醴泉 龍宮의 箕川書院에 제향되었다.  3)
安俊의 子孫들은 예천에 거주하다가 1500년을 전후한 시기인 安繼宗 대에 이르러 安東 豊山縣의 池洞(현재 葛田里)으로 移居한다.  4) 그가 이거하게된 것은 安俊의 玄孫 建(1448-?)이 안동 하회에 정착해 있던 豊山柳氏 甲孫家에 장가들면서 豊山(河回)지역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런데 사실상 安繼宗(1477-?)이 안동으로 이거한 가장 큰 이유는 그의 侍養父인 安起의 때문이었다.  5) 안기는 유씨가와 혼인하여 하회 인근에 살고 있었다. 안계종은 후손이 없었던 안기와 시양자 관계를 맺어 많은 재정적 지원을 받기도 하였다.  6) 안계종이 안동 川前에 터전을 둔 義城金氏를 부인으로 맞아들였던 것은 안기와의 이같은 인연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안계종은 혼인 직후, 시양부모인 안기의 도움으로 池洞(현재의 갈전)에 정착하였다.  7)
안계종의 妻 義城金氏는 그 祖父가 金漢啓, 父가 金萬謹이다. 김만근은 金誠一의 曾祖父가 된다.  8) 안계종이 지동에 정착한 이후 이들은 안동의 명문가인 豊山柳氏, 安東權氏 등과 인척관계를 맺으면서 안동의 유력사족으로서의 기반을 다져갔고, 繼宗→洵→景老→聃壽로 이어지는 인물이 대·소과에 합격하고 中外의 관직을 역임하면서 一流士族으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하였다.
안계종은 그의 동생 承宗과 함께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며, 이 지방에서 명망있는 인물로 활동하였으며,  9) 그 중심지가 葛田 인근의 淸遠亭이었다. 본래 淸遠亭은 안계종의 아버지 安建이 예천군 개포면 劍巖(검바우)에 건립한 정자였다. 뒤에 아들 계종이 안동으로 이사하면서 이곳에 移建하였다. 〈淸遠亭記〉에 의하면 정자가 처음 창건된 시기는 己卯士禍(1519년) 직후인 1520~30년간이며, ‘淸遠’이라고 명명한 사람은 郡守 文敬仝이었다고 한다. 이곳에는 退溪 李滉을 비롯하여, 崔演(1500-1549, 號:艮齋), 楊拜善(進士) 등 당대 名士들이 드나들었다. 이들의 詩文이 懸板, 또는 詩稿형태로 전하고 있다.
계종의 孫 安景老(1527-1592)는 생원시에 입격하였는데, 그는 屛山書院 院長을 역임하였을 만큼 비중있는 인물이었다. 경노의 아들 安聃壽(1552-1627)는 西厓 柳成龍의 문인이었다. 51세의 나이로 文科에 합격하였고(1603년), 掌樂院 僉正을 거쳐 禮安縣監을 지냈다. 그는 光海君 廢母時에 位號의 복구를 청하였다가 삭탈관직 후 낙향하여 10여년간을 두문불출하였다. 屛山書院 원장을 지냈으며, 1613년 병산서원에 祠宇를 세워 서애선생의 位牌를 봉안하는 등 서원 제반사를 주도하였다.  10)
안담수는 1582年(宣祖 15) 道村의 權暐, 九潭의 金允思 등과 함께 壬癸會를 조직하였다. 壬癸會는 안동출신으로서 壬子年(1552)과 癸丑年(1553)에 출생한 11명의 인물들로 조직된 것으로 同甲契의 형식을 띤 모임이다. 이 계회에 참석한 이들은 대체로 16세기말 안동을 대표할만한 사족들인데, 안담수는 이들과 교유하면서 안동사족으로서의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안담수가 그의 朋友와 시문을 짓고 학문을 논하던 곳이 雁湖亭이다. 건물이 처음 세워진 것은 그가 낙향한 때인 光海君대인 1620년 전후였다. 그는 이곳에서 淸陰 金尙憲, 愚伏 鄭經世, 蒼石 李埈, 五峯 李好閔 등 당대의 명사들과 교류하였다. 이들의 시문이 懸板으로 작성되어 현재까지 전해오고 있다.  11)
16-17세기 안씨가 인물들의 행적은 풍산지방 유력사족들의 명단인 󰡔慶老會案󰡕이나 鄕案, 병산서원의 󰡔院任錄󰡕에도 나타나고 있다. 󰡔慶老會案󰡕에는 1555년 安繼宗과 아들 安洵이 동시에 등재되고 1572년에는 安景老가 수록되었으며, 이후에도 자손들이 보이고 있다.  12) 1589년 鄕案(󰡔鄕錄󰡕)에는 安景老, 仁老, 國老, 台老의 사형제가 모두 등재되었다.  13) 또 屛山書院의 󰡔院任錄󰡕에는 院長을 지낸 安景老, 安聃壽, 安仁老, 安貴壽 뿐만 아니라 齋有司로 활동하였던 安遇, 安道全, 安道明 등이 수록되었고, 후에는 道全의 孫 必昌, 필창의 子 井瑞 등도 입록되었다.  14)
안담수의 7세손 安敏修는 佳谷에 거주하는 屛谷 權榘의 문인으로서 학행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15) 그의 子 安爾龍과 姪 安爾鎭은 生員試에 합격하였고, 孫 安愿은 名筆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많은 작품이 현존한다. 안민수의 曾孫 潤羲는 생원시에, 그의 아우 潤蓍는 生員試를 거쳐 文科에 급제한 인물이다. 윤시는 兵曹叅議, 大司諫을 역임하였으며, 1848년 戊申年에는 屛山書院의 원장을 지냈다.
안씨가의 婚班을 살펴보자. 安建이 안동권씨 가문과 혼인한 이후 16-19세기에 이르기까지 안씨가는 河回의 豊山柳氏(有成龍·柳雲龍系), 川前의 義城金氏, 佳谷 및 奉化 酉谷의 安東權氏(權柱, 權橃 系), 九潭의 順天金氏, 素山의 安東金氏, 醴泉의 醴泉權氏(權文海 系)·淸州鄭氏(鄭琢 系), 寧海의 寧海申氏, 榮州의 仁同張氏(長末孫 系) 등과 혼인하였다. 이 가운데 安氏家가 발신하는데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은 16세기 당시 안동의 지배사족으로서 위치를 굳히고 있었던 河回의 豊山柳氏와 川前의 義城金氏였다.
지금까지 언급하였듯이 갈전의 순흥안씨가는 1500년을 전후한 시기에 이 지역에 정착한 이후, 16-17세기에는 풍산 예천 영해 등 경북 동북부 지역의 유력 성씨들과 혼인 또는 사우관계를 맺으면서 안동의 유력사족으로 성장하였다. 안동 풍산의 葛田 池洞 佳日, 醴泉 白松 등지에는 안씨가의 宗宅, 樓亭 齋舍이 밀집되어 있다. 1608년에 편찬된 永嘉誌에는 이들이 거주한 풍산의 葛田 池同 佳日 일대를 비교적 상세히 圖示하고 있다.(〈圖-2〉 󰡔永嘉誌󰡕 豊山縣圖 참조)
〈圖-2〉 「永嘉誌」 豊山縣圖
安氏家는 고려말 이후 慶尙道 順興→上京從仕→醴泉(白松) 落南→安東 豊山 移住 등의 과정을 거치면서 성장하게 된다. 거주지 이동은 그 사회경제사적 의미가 크기 때문에 이동상황을 좀더 자세히 추적해 볼 필요가 있다.
안씨가는 14세기 말 조선개국과 동시에 왕조개창에 반대하여 流配로 인해 예천으로 落南하였다. 약 1세기 뒤인 16세기 초 安繼宗代에는 醴泉 白松에서 安東 豊山縣 池洞(뒤의 葛田里)으로 이주, 안동사족이 되었다.  16) 이후 安洵→景老→聃壽 대까지는 계속 이곳에 살았다.  17) 그후 언제인지 알 수 없으나 豊西面 佳谷里로 이주하였고, 井瑞대까지 이곳에서 살았다.  18) 그러다 그의 아들 敏修가 다시 豊西面 葛田里 元塘으로 이주하였으며,  19) 여러 대에 걸쳐 이곳에 거주하다가 弘烈대에 다시 葛田里 池洞으로 돌아왔다.  20)
안씨가는 16세기 豊山 이주 이래 300여년에 걸처 池洞→佳谷(枝谷)→圓塘→池洞으로 그 거주지를 여러차례 옮기면서 한차례도 풍산 지역을 떠난 적은 없었다. 이들의 宗家, 齋舍, 樓亭, 田畓 사회 경제적 기반이 이곳에 집중적으로 분포하기 때문이었다. 󰡔永嘉誌󰡕 豊山縣圖를 살피면 池洞, 佳谷(枝谷), 元堂은 바로 이 지역에 있는 女子池를 둘러싸고 형성된 자연촌락이다.  21) 女子池는 풍산 앞 들의 灌漑를 목적으로 조성된 것이다. 풍산들은 낙동강이 감싸고 도는 지역으로 평야로 불러도 좋을, 경북에서는 매우 드문 비옥한 땅이다. 풍산읍을 중심으로 안씨가를 비롯하여 邑內의 禮安李氏, 素山의 安東金氏, 佳日의 安東金氏, 河回의 豊山柳氏, 五美洞의 豊山金氏 등 유력 사족들의 경제적 터전이었다. 안씨가의 풍산 이주는 이같은 경제적 이점, 그리고 안계종의 妻·外家, 侍養父 安起로부터 물려받은 안동 재산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이주한 것으로 보여진다.
안시가의 경제적 터전을 유지하는데는 여자지가 큰 몫을 차지하였다. 여자지가 언제 건축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永嘉誌󰡕에 이 못이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1608년 이전에 이미 수축되어 있었다. 󰡔영가지󰡕에 의하면, 女子池는 豊山縣 서쪽 井山의 서남 2리쯤에 있는데, 길이가 2里이고, 넓이가 300步라고 한다. 제방을 쌓을 때 둑이 터져 못을 막기가 지극히 어려웠는데, 한 女子가 方策을 일러주어 공사를 무사히 끝냈다고 한다. 이로 인하여 못 이름을 女子池라고 이름하였다고 한다.  22)
여자지 일대는 주요한 교통의 요지였다. 조선조에 이 지역은 남쪽으로는 안동과 예안, 북쪽으로는 예천과 서울, 서쪽으로는 의성·상주지역으로 통하는 요충지였다. 특히 안동과 그 아래 지방의 인원들이 상경하려면 반드시 풍산들을 지나 여자지 옆을 통하여 예천, 문경(새재)로 향하였다고 한다. 이 가문 정자인 淸遠亭(安繼宗), 肯構堂(安洵), 雁湖亭(安聃壽)은 上京, 下鄕의 길목에 있어 많은 인물들과 교류하였다. 安繼宗·安承宗 형제의 시문집인 󰡔竹溪聯芳詩稿󰡕은 당시에 唱酬한 시문집이다.  23)
순흥안씨가의 고문서는 紅牌, 白牌, 告身 등 敎旨類를 비롯하여 所志類, 戶籍 등의 疏箚啓狀類와 그외 牒關通報類 등 다양한 문서들이 존재하고 있다. 이러한 문서들은 일단 문서의 양식, 형식별로 구분하였기 때문에 이 가문에 대한 세밀한 연구를 위해서는 문서의 연관성을 고려, 보다 체계적으로 살펴보아야 한다. 먼저 대표적인 문서와 그 문서에 나타난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하고 분재기를 비롯한 주요 문서를 통해서 이 가문의 사회경제적인 양상을 살펴보자.
(一) 敎令類에는 37점만이 전한다. 이를 통해 안씨가의 관력과 그 위상을 짐작해 볼 수 있다. 현전하는 것으로는 安聃壽의 告身敎旨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러나 안씨가 인물들의 면면을 볼 때 이 이외에도 더 있었을 것이다.
(二) 疏箚啓狀類에는 所志類 戶籍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所志類는 21점으로 18, 19세기에 걸쳐서 이 집안의 山訟事件을 다룬 것이다. 이 때의 山訟件은 대개가 안동부 西後面 耳開里에 위치한 선대의 묘소 경내를 某人들이 偸葬한 사실에 대하여 이를 掘移시키는 과정에서 작성된 것이다. 이와 관련된 문서로는 (四) 證憑類의 侤音이 있다. 戶籍은 18세기 전반기부터 일제시대 이전까지의 문서로 19점이 수록되었다. 안씨가의 전성기였던 16, 17세기의 문서가 남아 있지 않아 아쉬운 점이 있으나, 이를 통하여 가문의 사회 경제적 일면과 그 변화과정 등이 드러나 있다.
(四) 證憑類의 完議, (五) 明文文記類의 分財記에는 안씨가 경제규모와 그 세습과정을 생생하게 나타나있다. 이들 문서는 안씨가를 대표하는 문서이기 때문에 뒤에 자세히 분석할 것이다. 명문문기류의 土地文記와 家屋文記는 모두 29점이다. 18세기 초반부터 일제시대 이전까지 토지나 가옥의 매매내역이 반영되어 있다. 이 가운데는 훼손된 문서들이 많아 연대추정을 하지 못한 부분도 많았다.
(六) 書簡通告類는 안씨가 문서 가운데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본서에는 이 가운데 善本만을 가려 수록하였다.  24) 揭載한 簡札 157점은 〈附錄〉에서도 밝혀 놓았듯이 授受者는 대부분 안씨가 인물들과 姻戚관계에 있던 인물들이다.
(七) 置簿記錄類는 家計上 금전 및 물품의 수수, 농사관계 등을 기록한 置簿와, 成冊된 古記錄類를 말한다. 안씨가에는 치부류가 없으며, 낱장문서 상태인 기록물들도 있지만 그외 ‘家學淵源錄’과 같은 成冊古文書도 여러 종을 수록하였다.
(八) 詩文類에는 〈壬癸契會之圖〉 등 契會圖가 2점과 試券, 祭文 등의 종류가 포함되어 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안씨가를 대표하는 문서는 16-18세기의 분재기류이다. 현존하는 분재기는 모두 13점이다. 가장 이른 시기에 작성된 것은 1535年 ‘安繼宗妻金氏分衿文記(분재기 NO.1)이며, 가장 나중 것은 1732년 安必昌에 의하여 작성된 것이다(분재기 NO.8). 이중 1732년 안필창에 의하여 작성된 문서는 6점이나 되는데, 원문기 이외에도 草本이나 寫本들이 함께 보전되고 있었다. 13점의 분재기중 7점은 이전에 嶺南大學校에서 간행한 󰡔慶北地方古文書集成󰡕에 정서로 수록되어 있다.  25) 이중 〈安繼宗妻金氏分衿文記〉 등은 일부 연구논문에서 분석되거나 그 특징적인 내용이 다루어진 바 있다.  26)
이들 문서들은 모두 약간씩 훼손된 상태로 보전되었다. 이중 다소의 훼손이 있더라도 〈安繼宗妻金氏分衿文記〉처럼 내용을 파악하는 데에 큰 무리가 없는 것도 있고, 전체적인 파악이 불가능한 것도 있다. 수록된 문서 중 보존상태가 온전하여 분석이 용이한 세 점의 문서에 대하여 그 규모를 살펴보았다. 이 중 〈安繼宗妻金氏分衿文記〉는 奴婢와 田畓 등 분재의 내역을 모두 분석하였는데, 나머지 두 문서는 전답에 대한 파악이 용이하지 않아 奴婢만을 분석하였다.
〈표-1〉 1535년 安繼宗妻金氏分衿文記

구 분

長子 洵(奉祀位)

末女

柳義妻

亡女夫

張應弼

家翁孽女

愛乙

奴婢

家翁別得新奴婢

5

1

6

家翁養母邊新奴婢

1

1

2

家翁養父邊新奴婢

2

1

3

家翁別得新奴婢

4

4

矣母邊新奴婢

1

1

家翁別得奴婢

3(1)

1

1

6

家翁父邊奴婢

1(1)

4

1

7

家翁母邊奴婢

4

4

家翁養母邊奴婢

2

3

2

7

家翁養父邊奴婢

1

1

矣父邊奴婢

7(1)

1

9

矣母邊奴婢

1

1

亡女記上奴婢

6

1

7

家翁決得奴婢

1

1

31(3)

20

4

1

59

田畓

瓦家

214斗落

(35斗落)

189斗落

15斗落

15斗落

468斗落

代田

(13斗落)

4斗落

17斗落

152斗落

(30斗落)

75斗落

328斗落

瓦家

1坐

1坐

2坐

〈표-2〉 1575년 安洵分衿文記

구 분

長女

申霖妻

子 景老

(承重條)

子 仁老

子 國老

申衍妻

子 台老

新奴婢

4

4

4

4

4

4

24

衿給奴婢

9

10(3)

10

10

10

10

59(3)

13

14(3)

14

14

14

14

86

〈표-3〉 1659년 安道全妻南氏分衿文記

구 분

奉祀位

長子 錫祉

次子 錫禧

新奴婢

3

3

6

衿給奴婢

21

10

8

39

21

13

11

45

〈표-1〉 1535년 〈安繼宗妻金氏分衿文記〉27) 에는 傳來別 재산항목이 列記되고 있다.
이 분재기에서 財主는 안계종의 처인 義城金氏이다. 증인 2명 가운데 ‘同生娚保功將軍行忠武衛副司直 金 아무개는 재주 김씨의 同生兄 金禮範(1479-1570)이다.  28) 또 다른 증인인 三寸姪 成均生員 金 아무개는 재주 김씨의 조카로서, 川前 義城金氏家의 중흥조인 靑溪 金璡(1500-1580)이다. 그는 중종 20년(1525)에 생원시에 합격, 당시 成均生員을 칭하였다. 筆執 「家翁同生弟成均生員」은 재주 김씨의 시동생 安承宗이다. 그 또한 成均生員으로 김진과司馬 同榜이었다.
분재기에는 노비의 所從來別로 그 傳來를 정확히 밝히고 있다. 그 내역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家翁別得新奴婢 : 남편인 안계종이 그 부모로부터 별급받은 신노비
家翁養母邊新奴婢 : 남편의 시양모 豊山柳氏(碩仁의 딸)에게서 받은 신노비
家翁養父邊新奴婢 : 남편 시양부 安起에게서 받은 신노비
矣母邊新奴婢 : 재주 김씨가 어머니 海州吳氏(吳季童의 딸)로부터 받은 신노비
家翁父邊奴婢 : 김씨의 남편 안계종의 생부 安建(1448-?)으로부터 받은 노비
家翁母邊奴婢 : 김씨의 남편 안계종의 生母(풍산유씨 혹은 안동김씨 중의 1인)로 부터 받은 노비
矣父邊奴婢 : 재주 김씨의 아버지 金萬謹(1477 - ?)으로부터 받은 노비
亡女記上奴婢 : 김씨의 죽은 딸(長應弼 妻)이 분재받은 재산을 친정으로 되돌려 준 노비
家翁決得奴婢 : 재주의 남편 안계종이 재판에서 勝訴해 획득한 노비
위 분재기에 나타난 재산의 총량은 瓦家 2坐를 포함하여 奴婢 59口, 전답이 총 813斗落에 달하였다. 재산은 平均分給을 표방하면서도 奉祀者인인 長子 洵에게 더많이 분재되었다. 두 명의 딸 가운데 亡女夫 張應弼은 분재기 서문에서 언급된 것처럼 義絶하였기 때문에 죽은 딸의 奉祀條만이 지급되었고, 末女는 晉州柳氏 柳義와 혼인하여 二男二女의 자식까지 두었는데, 장자보다 상대적으로 적은 재산을 물려받았다. 孽女 愛乙의 경우는 적자가 아니기 때문에 소량만 지급되었다.
〈표-2〉의 1575年 〈安洵分衿文記〉는 安洵(1504-1578)과 그의 妻 安東權氏가 그의 자녀들에게 재산을 분급한 문서이다. 안순 夫妻가 나란이 재주의 자격으로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전기 분재양상의 한 단면이 보여진다. 장자 洵이 부모로부터 받은 奴婢는 34口였으나 이 때에는 총 86口가 분재되었다. 아마도 妻邊으로부터 받은 것, 자연증가분, 매득분 등이 보태어졌던 모양이다. 그런데 6남매에게 균분하다보니 보통 14口로 이전 대에 보다는 적게 분배되었다. 분재 방식은 이전과 같이 노비 3구만 承重條로 두고 나머지는 모두 분재기의 서문에서 밝힌 바와 같이 ‘平均’분급의 원칙이 잘 지켜졌다.
安洵의 子 安景老 역시 1589年 자식들에게 재산을 물려주었다(분재기 NO.3). 이 문서는 훼손된 부분이 많아 정확한 분석이 어려워 표로 제시하지는 못하였다. 토지는 거의 헤아릴 수 없고, 노비의 경우도 정확한 숫자를 파악하지는 못하였다. 장자 聃壽에게 분재된 노비는 약19口, 奉祀秩로는 약6口 정도가 분재된 것으로 보이며, 그외 次女 李樂道妻와 次女 權大壽妻, 그리고 末子 昌壽에게는 대략 15口 정도가 분재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전보다는 奉祀條가 두 배로 늘고, 장자에게 분재된 노비수도 더 많아진 것으로 보아 均分의 원칙이 완화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安景老 이후 聃壽, 遇대의 분재기는 현존하지 않는다. 다만 담수의 처 안동김씨 金慄의 女가 받았던 ‘金慄妻權氏’가 발급한 別給文記와 分衿文記 두 점이 있다.(분재기NO. 4, 5) 김율은 안동인으로 안담수의 初娶 부인의 아버지이며, 권씨는 그 어머니였다. 별급문기는 瓦家 1坐를 許與한 것이고, 分衿文記는 奴婢·田畓을 상속한 것이다. 분재기내 전답에는 이른바 作介전답과 私耕田의 존재가 다수 발견된다. 작개전답이란 자기 소유의 노비로 하여금 전답을 분할, 경작케하여 일정한(비교적 高率) 전세를 수취하는 농업경영방법을 말하며, 私田이란 私耕田의 작개전을 경작, 납세하는 댓가로서 상전이 노비에게 지급한 無稅의 전답이었다.  29) 분재기내의 田畓秩 가운데, ‘侖孫作田一石落只, 連孫私田 二斗落只’에서 作田과 私田이 바로 그것이며, 앞은 侖孫과 連孫은 소유노비였다. 따라서 이 분재기는 경제사적으로 귀중한 내용을 담고 있다.
〈표-3〉 1659년의 〈安道全妻南氏分衿文記〉는 聃壽의 孫 安道全妻 南氏가 자식들 각자 몫의 재산을 상속한 문서이다. 분재 당시에는 안도전 뿐만 아니라 長子 錫祉와 次子 錫禧가 모두 사망한 뒤였다. 더욱이 장자 석지는 「無子女身死」하였기 때문에 서문에도 밝힌 바와 같이 「兄亡弟及」의 관행에 따라 석희가 형을 承重하였고, 석희는 다시 子 夢祥가 承重하였다. 따라서 분재의 명목이 奉祀位, 長子와 次子衿으로 구분되었지만 실재로는 석희의 子 몽상에게 모두 돌아갔다. 당시에는 총 45口의 노비가 분재되는데, 장자 석지에게는 13口 차자 석희에게는 11口가 분배되었고, 봉사위로 21口가 분배되었다. 상대적으로 봉사위의 비중이 매우 커졌음을 보여주고 있다.
지금까지 몇 점의 문서들을 통해서 볼 때, 초기의 분재기에서는 문서의 서문에 「平均分給」의 원칙을 제시하여 그렇게 시행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봉사조는 적게 책정되었다. 그런데 1589년부터는 차츰 변화가 보였으니, 각자에게 나누어지는 몫은 평균분급되었으나, 봉사조의 비율은 두 배로 늘어났다. 그리고 1659년에는 각자의 몫은 역시 평균분급이 유지되나, 봉사조의 경우는 이전보다 다시 두 배가 들어났다. 그리하여 전체 분재량중에서 봉사조의 비중이 반 정도나 되었다. 전체적으로 봉사조의 증가가 두드러진 것이다.
1600년대 이후로는 道全의 孫 必昌이 발급한 6점의 분재기가 있는데, 이들은 모두 동일한 내용을 다룬 것으로, 모두 1732年에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분재기 NO.8~13) 이 때에 이르러서는 전 시기와는 달리 분재기의 양식이 바뀌고, 분재의 형태가 奉祀 위주로 변하게 된다. 필창은 1남 3녀를 두었는데, 재산분배 대상은 아들 井瑞에게만 한정하였고 분재내용은 선대봉사를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동일한 내용의 문서가 여러점 보관된 것은 원문서 이외에도 초본이나 사본, 그리고 유사한 형식의 문서가 있었기 때문이다. 6점의 문서중 원문서는 分財記 NO.8이다. 이 문서는 元財主와 證人, 筆執의 名單과 手決이 완전히 갖추어져 있다. 반면 分財記 NO.9는 앞 문서같은 양식이 갖추어져 있지 않았고, 내용상으로 보아도 교정한 부분이 보이고 있어서 分財記 NO.8이 작성되기 전에 만들어진 草本으로 보인다. 작성 당시에는 먼저 分財記 NO.9가 만들어져 분재의 원칙이 서술 확정되었고, 세부적으로 분재되는 토지의 내역은 「分財記 NO.8」에서 수록하여 놓았다. 그렇지만 分財記 NO.9에도 門長 安命𧶘의 수결이 있어 원문서로의 효력을 가진 것으로 추정된다. 문장 안명뇌는 分財記 NO.9에서는 필집을 맡아 작성한 후 수결하였고, 分財記 NO.8에서는 증인으로 동석하고 실제 필집은 外四寸弟 李載岳이 맡았다.
이들 분재기 중 효력이 있는 정식 문서는 1732年 4月 3日에 작성되었다. 이날은 그가 임종하기 한 달 전이다.  30) 그는 「重患毒疾」로 6개월간을 고생하던 중에 그의 절실한 심정을 담아 그의 獨子인 井瑞에게 내려준 것이다.  31)
必昌이 작성한 문서는 문서의 명칭에서 「男井瑞處許與明文」이라고 분재 대상자를 명시하였듯이 아들 井瑞에게 대부분의 田畓을 奉祀條로 물려주고 있다. 그리고 나머지 三女에 대해서는 1石落只에 해당하는 錢을 주어 소재처의 토지를 買得토록 하였으며, 新奴婢의 경우도 각각 1口씩만 한정하고 있다. 그리고는 先代의 대수별로 세 조목으로 나누어 기록하여 두었는데, 먼저 九代, 八代, 七代祖의 분묘의 위치와 선대봉사를 위한 위토 마련의 경위 및 지목을 기록하고, 이어서 六代祖 분묘의 위치와 봉사의 방법을, 세 번째로는 五代祖와 高祖父母에 대해서는 祭祀를 받드는 방법 등을 기록해 두었다. 그리고 맨 뒤에는 「宗子永世遵守 獨當祭祀 不得私自擅斷條」라는 긴 명칭으로 봉사조에 해당하는 전답과 그 수량을 기록하여 두었다.
이처럼 봉사조 위주로만 전답을 분배하고, 이의 운영에 대해서도 철저한 방침을 마련하여 宗孫에 의한 봉사조 위주로의 운영을 당부하였다. 물론 이전에 필창이 일정량의 토지를 미리 女에게 물려주었는지의 여부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임종하기 직전에는 극히 일부만의 재산만 삼녀에게 물려주고 대부분의 재산을 봉사조로 아들인 정서에게 물려주었다.
分財記 NO.10은 역시 分財記 NO.8의 草本인 것으로 판단되며, 이 문서는 작성 당시의 年月 등이 기재되지 않아 分財記 NO.9가 작성되기 이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문서의 양식은 원문서인 分財記 NO.8과는 달리 전통적인 분재기 형식에 가깝다. 이 문서의 구성은 序文, 祭位條, 墓位條, 承重條, 長子衿, 女衿, 次女衿, 子井瑞衿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이 문서가 작성될 당시만 해도 전통적인 양식에 따라 문서를 작성할 것이 예정되었다. 그런데 실재 분배할 때에는 그 양식이 바뀐 것이다. 이 문서의 양식은 종전과 같은 방법을 취하였지만 실재로 분배되는 양을 따져보면 자녀 개개인에게 몫으로 정해진 양은 매우 적었기 때문이다. 분재 대상인 井瑞男妹는 4남매인데, 이중 子는 정서 1명이고 나머지 3명은 女이다. 이들 3명의 딸에게는 각각 ‘明今’ ‘仁梅’ ‘德伊’ 등 1口의 노비만 지급되었을 뿐이다. 그래서 실제로 분재될 때에는 구태여 각각의 항목을 두지 않고 본문 중에 흡수하여 기재하였던 것이다. 이같은 문서는 문서양식의 변화만으로도 자녀에 대한 재산의 분배가 장자 위주로 변화하는 모습이 잘 나타나고 있다. 分財記 NO.12는 遺書인데 그 자체가 원문인지 아닌지는 구분이 불가능하다. 나머지 분재기 NO.11과 분재기 NO.13은 寫本으로 보여진다.
그런데 이처럼 必昌이 실행한 분재의 변화는 이미 그의 父 夢祥의 奉祀條에 대한 입장과 처리로부터 비롯되었다. 몽상이 작성한 ‘田畓奴婢案’(七, 置簿記錄類)은 1702年(壬午年) 折帖 형태로 만들어진 것으로, 전체 5張 분량이다. 그는 이전 1659년에 祖母인 南氏로부터 봉사위를 포함하여 45口의 노비와 일정량의 토지를 허급받은 적이 있는데, 당시 分衿보다 봉사위 명목으로 훨씬 많은 노비를 받았다. 이후 그는 봉사위를 더욱 강화하려는 취지로 이와 같은 「田畓奴婢案」을 작성하게 되었다. 이 문서는 겉표지에는 ‘壬午十一月二十六日’이라고 명시하여 그 작성시기가 1702년이었음을 알렸으며, 아들 필창에게 준 서문은 그 이듬해인 癸未年 12월에 쓰여졌다. 이렇게 1년여간 차이가 나는 것은 그가 임오년 십일월부터 전답안을 작성하기 시작하여 완성한 다음 아들에게 물려주었는데, 그 날짜가 그 다음 해이기 때문일 것이다. 몽상이 쓴 서문은 성책의 딱딱한 겉장 裏面에 기록되어 있고, 글이 끝나는 부분에는 작자가 手決을 하여, 서문의 내용이 매우 중요하니 명심하라는 당부의 의미를 담아 두었다.
서문의 내용은, 우리 가정의 전래된 田民이 많지 않음이 없었는데, 자손들이 생활을 도모하다보니 제사가 폐하여질 정도까지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스스로 買得하여 田畓을 증식한 후, 이를 오로지 長子에게 주어 영원히 제사를 받들도록 한다고 하였으며, 아울러 이 田畓案에 기록된 것에 대해서는 任意로 放賣하거나 女息에게 許給할 수 없다고 명시하였다.  32) 문서의 본분에는 해당 전답에 대하여 지역명과 지목에 따라서 토지의 등급, 소출량, 정확한 위치 등을 소상히 기록하였다. 전답이 있는 지역은 豊山西面 일대가 많았으며, 그 외에는 豊山南面, 豊山縣內, 그리고 龍宮 九尾 지역이었다.
이처럼 그는 先代奉祀를 철저히 이행하기 위하여 일정한 전답을 마련하여 두고, 그의 의지가 世世토록 지켜질 수 있도록 田畓의 내역을 소상히 기록하여 이를 하나의 책자로서 만든 후, 맨 앞에 서문을 붙여 두었다. 그의 이같은 의도는 아들 必昌에게 잘 이어졌고, 필창 역시 그의 遺書(분재기 12)에서 밝혔듯이 “癸巳年 先君專付於不肖 以爲奉行先代祭祀”한 뜻을 잘 이어 그의 아들인 井瑞에게도 ‘一心奉行’할 것을 강조하였다.
1732년 5월 4일 필창은 임종하였다. 생전에 봉사조를 극대화하려는 그의 의지는 분재기나 유서 속에서 분명하게 나타났다. 또한 분재기를 작성하는데도 門長인 安命𧶘가 증인으로 참석하였고, 이전에 초문기를 작성하는 데에는 안명뇌가 직접 筆執을 담당하고, 수결을 하여두었다. 이러한 사정으로 보아서 필창의 분재시 그의 의지도 중요하였지만 이는 門中의 입장과도 일치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같은 문중의 입장은 필창 사후에 작성된 한 完議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이 完議는 그가 죽은 지 며칠되지 않은 시점(5월 11일)에서 문중의 어른들이 모여서 작성하였다. 이 完議文은 ‘右完議爲奉先盡誠以爲萬代不爲變動事’ 라고 하여 문서 작성의 목적이 ‘奉先’을 만대까지 공고히 하자는데 있음을 밝히고 있다. 이 때의 모임에는 당시 門長이었던 安命𧶘를 비롯한 16명이 참석하여 논의하고 이를 의결한다는 뜻으로 각각 수결해 두었다. 문서의 내용은 七代祖父母(起. 豊山柳氏),  33) 六代祖父母(繼宗, 義城金氏), 五代祖父母(洵, 安東權氏)에 대하여 매년 드리는 ‘奠掃之禮’가 자손들의 빈한함으로 지극히 어려웠는데, 종손 필창이 새로 약간의 전답을 마련하여 그 부족분을 채웠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종가에서 매년 奠掃之禮를 치른 이후에 남은 餘穀을 잘 간수하여 두고, 종가에서 급히 쓸 일이나 여러 자손 중 貧寒하여 장사지내지도 못할 자가 있거든 이를 쓸 것이라고 하면서 이를 명문화하였다. 그리고 뒤에는 해당 전답으로 ‘元來田畓(豊西)’ ‘新備田畓(豊西)’ ‘仙原山直位田’ ‘朔丹墓直位田’의 내역을 차례로 기록하여 두었다.
요컨대 안씨문중에서의 재산관리는 1700년도에 들어오면서 1702년 夢祥에 의한 ‘田畓奴婢案’의 작성으로 宗家로 奉祀位를 중심으로 하는 재산통합의 현상이 시작되고 이어서 1732년 宗孫 必昌의 임종을 전후로 하여 필창에 의한 分財記의 작성, 그리고 필창의 사후 문중에 의한 完議의 작성 등으로 종가재산의 철저한 관리와 운영을 명문화하게 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17세기 전반부터 18세기 전반까지에 걸쳐 이 집안의 재산에 대한 상속의 변화상을 알려준다. 이러한 현상은 당시 안씨문중에서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조선조 17세기 후반 이후 지방사회에서 장자중심으로 사회경제적인 여건이 변화하는 한 사례라고도 할 수 있다.
본 장에서는 성책고문서류 및 그 외 기타고문서 중에서 선본들을 가려 소개하고자 한다. 이들 자료들은 각각 고유한 특성을 지니기 때문에 분야별로 구분하여 언급하였다. 대상은 日記類, 家學淵源錄, 壬癸契會之圖 및 관련문서 등이다.
○ 日記類(七. 置簿記錄類 (七) 日記類)
이 가문에서 나온 日記는 모두 4種이 있다. 이중 1종이 성책으로 되어있고, 나머지 3종은 낱장본이다. 성책본은 그 양이 많지는 않지만 통상적인 일기체 형식으로 작성된 문서이고, 낱장문서는 일상적인 기록이기보다는 어떤 특정한 경험을 순서대로 서술한 것으로 그 양이 많지는 않다.
성책고문서로된 ‘日記類 1’은 전체 19張이며, 각 면마다 10행씩 해서체로 써 나아갔다. 이 일기는 현 종손의 고조가 되는 安弘烈(1837-1876)이 아동기인 8세부터 10세 때까지 기록한 것이다. 10세가 되지 않은 아동에 의해 작성된 일기라는 점에서 매우 흥미있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내용 중 글자의 모양이 어느 부분에 가서는 정형화되어 있지 않다든지, 또한 쉬운 글자가 오자로 기록되는 등의 예로 보아 작자의 어릴 적 친필본인 것으로 여겨진다. 작성된 시기는 1844년 12월 10일부터 1846년 4월까지 매일매일 기록된 생활일기이다. 그런데 앞부분 일부가 누락되어 실제 내용은 12월 26일부터 시작되었다.
일기의 내용은 아동에 의해 작성된 점에서 알 수 있듯이 대체로 간결하게 구성되었으며, 주로 어른들의 활동내용을 보고 들은 것을 적었다. 그렇지만 얼핏 보면 성인에 의하여 작성된 것처럼 일상 속에서 작성자의 주관성은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주된 내용은 날씨를 기록한 것 이외에는 奉祭祀 接賓客, 그리고 집안의 大小事 등을 간략하게 적고 있다. 그 외에 특징적인 사실로는 매일매일 공부한 사실이 표기되어 있다는 것이다. 내용 중에 하루도 빠짐없이 “受課十三行” 등으로 공부한 분량이 기록되고, 간혹 “習書一行” 등과 같은 표현도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전체적인 일기의 구성은 일상적인 유학자가 쓴 일기형식을 띄고 있으며, 여기에 아동으로서 매일매일의 공부한 분량이 적혀있다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日記類 2’는 누구에 의해서 작성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기록된 시기도 ‘乙未年’에 작성되었다는 것만 알 수 있었으며, 서술된 기간은 정월 초이일부터 2월 10일까지였다. 내용은 都城으로 과거시험을 보러 갔다 오는 중에 작성된 것으로 正月 初二日에 發行하여 都城에 가서 시험을 치르고, 2월 10일에 집으로 돌아왔다. 꼭 두 달 열흘이 걸렸다. 행로 중에 만났던 인물들 그리고 행로 중 일어난 일 등이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다. 또 당시에 다녔던 길과 거리 등을 ‘西征路程’이란 이름으로 앞부분에 부기하여 두었다.
‘日記類 3’은 ‘西征日錄’이란 제목으로 되어 있다. 작자는 현 종손의 曾祖父 載駿(1860-1930)이며, 수록기간은 1919년 閏7月 19日부터 8月 15日까지이다. 내용은 質齋先祖碑役(文懿公, 文凱)으로 全羅道 金堤와 그 인근지역을 다녀오면서, 여정 중에 일어난 일을 유람기 형식으로 기록하였다. 당시는 일제시대여서 金堤를 다녀오는 데에는 주로 汽車로 여행하였는데, 철로는 충청도 黃澗에서 大田을 통해서 裡里까지 가는 길을 이용하였다. 일기의 전개는 필자가 지방 사족으로서 일제시대 이후 건설된 철로로의 여행 중 느끼는 놀라움과 大田과 같이 새롭게 건설된 도회지를 보고 느낀 감상 등을 적고 있다. 또한 김제지역에 이르러서는 이 지역의 경관과 인근 지역인에 대해서도 소개하고 있다. 호남의 넓은 평야에 대해서는 커다란 놀라움을 표시하였으며, 지역을 소개하는 내용 중에는 해당 지역에 전해오는 설화 등도 담고 있다.
○ 家學淵源錄
이 자료는 하회에 거주하는 풍산유씨가문의 가학연원을 밝힌 것으로, 1911년경 柳膺睦(1841-1821, 號 鶴山)에 의하여 작성되었다. 이 문서는 필사본 형태로 되어 있는데, 유응목이 작성한 원본인지 아니면 순흥안씨에 의하여 원본을 필사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구성은 家學淵源世系圖와 家學淵源錄, 그리고 거기에 諸子錄이 부기된 형식이다. 맨 첫장에 ‘家學淵源世系圖’가 그려져 있고, 다음에 본문으로 ‘豊山柳氏家學淵源錄’이 소개되었으며, 뒤에 ‘厓門諸子錄’이 실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후손 柳膺睦이 작성한 ‘跋及門諸子錄’이 있고, 또 ‘正學淵源圖說’이 부기되어 있다. 豊山柳氏家學淵源錄에서는 앞의 家學淵源世系圖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하여 간단한 이력을 소개하였으며, 西厓諸子錄에서는 李輔, 裵龍吉 등 67명의 문인들에 대하여 역시 간략하게 기록해 두었다.
이 문서의 내용 중 ‘家學淵源世系圖’는 기존에 유씨집안에 있었던 것을 유응목이 베낀 것으로 보이며, ‘豊山柳氏家學淵源錄’은 이전의 자료를 참고하여 스스로 정리한 것이다.  34) 그리고 이처럼 그가 가학을 정리한 것은 가문의 학문적 전통을 내부적으로 정리하고 대외적으로 알리려는 취지에서였을 것이다. 그는 발문에서 풍산유씨 가문의 학문적 전통은 立巖 柳仲郢과 세 從弟들이 함께 家學을 연마함에서 비롯되었고, 그 이후 謙庵 柳雲龍과 西厓 柳成龍 형제에게 전하여지고 이후 一世의 간격도 없이 10世에 걸쳐 이어졌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한편 家學淵源錄 뒤에 厓門諸子錄을 부기한 것은 유씨 가학의 대표자라고 할 수 있는 유성룡이 퇴계의 학문을 계승하여 이를 가정에서 가르치고 遠近의 英才들에 전수하였음을 드러내고자하는 목적에서였을 것이다. 그리하여 문인 67명을 기재하여 두었고, 은연중에 유씨들의 가학이 결국 원근의 타가문에 전파되었음을 강조한 것이다. 이 자료에 소개된 가학연원 세계도를 이름을 중심으로 재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壬癸契會之圖(八. 詩文類. (二) 契會圖 1) 및 관련문서
본 문서는 안동에 거주하는 11명의 사족들이 1613년(계축년, 광해군 5) 廣興寺에서 계회를 하는 장면을 그린 것으로, 그 성격은 동갑계의 형식을 띤 것이다. 참석한 11명은 權暐(1552-1630), 朴洽, 최집, 金允思, 安聃壽(1552-1627), 河遇聖, 孫慶弘, 李瑚, 趙承先, 許應吉, 權行可(1553-1623) 등이며, 그외 정식 계원이 아니면서 참석하여 ‘敬次’한 인물은 辛弘立, 金允安(1562-1620), 金是柱(1575-1617)이다.  35)
문서는 軸의 형태로 보관되어 왔으며, 그 상태는 비교적 양호하다. 그러나 문서의 우단 일부분이 마모되어 후손 중 누군가가 이를 수선한 흔적이 있다. 당시 이 계회도는 적어도 11점이 작성되어 각자 나누어가졌을 것이다. 본 계회도 이외에 같은 것으로는 1점이 더 있는데, 安東 松坡의 晋州河氏家에서 소장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별도의 계회도는 안씨소장의 계회도와 그 내용은 일치하나, 그림은 완전히 다르다. 이들 두 계회도가 같은 날, 같은 장소, 같은 화공에 의하여 그려졌다면 그림의 모양도 같거나 비슷하여야 하나 이 경우는 확연히 틀린 모양이다. 별도의 1점은 ‘八. 詩文類. (二) 契會圖 2’로 수록하였다.  36)
문서의 구성은 상·중·하단으로 크게 구분되는데, 상단은 그림을 배치하였고, 중단에는 참여한 이들이 작성한 詩가 수록되었으며, 하단에는 계원 11명에 대해서 직위와 자, 호, 본관, 거주지, 출생년월일을 기록하였다. 계원의 기재순서는 정확하게 태어난 연월일 순서대로 하였다.
중단에는 참여한 이들의 시가 수록되었는데, 정식 계원이 지은 詩 5首와 이들 시를 ‘敬次’한 시 3首가 실려 있다. 계원 11명 중 5명의 시만 실렸는데 그 이유는 알 수 없다. 시를 작성한 인물은 權暐(漫叟), 權行可(梅湖), 金允思(松陰), 河遇聖(松灘), 李瑚(曲江) 등인데, 시의 기록순서는 座目처럼 태어난 순서대로 하지는 않았다. 회원의 명단은 태어난 연월일 순서로 기록하였지만, 일단 참가자들이 모여서 시를 지어 읊고 이를 즐길 때에는 굳이 이러한 순서를 지켜야할 필요성이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정식 회원이외에 ‘敬次’한 3명 중 金允安은 김윤사의 弟이고, 金是柱는 권위의 사위로 존장자들의 모임을 慶賀하는 의미로서 참석하여 차운하였을 것이다.
계회를 할 때 참가자들의 나이는 62세와 61세이다. 이들의 거주지는 안담수가 거주하는 池洞을 비롯하여 九潭(김윤사), 河回(허응길), 松坡(하우성, 권행가) 등 豊山과 그 일대에 거주하는 이들이 많지만 비교적 먼 거리에 있는 이들도 참여하고 있다. 참석자들 가운데는 김윤사, 안담수, 이호, 김윤안 등 서애의 문인들이 다수 끼어 있다. 참가한 이들의 거주지나 모임의 장소(광흥사) 등을 고려해 볼 때, 이 계회는 풍산인근 사족들의 주도로 안동에 거주하는 임자·계축년생들의 모임으로 파악할 수 있다.
그외 이와 관련된 자료로서 廣興壬癸會唱酬(八. 詩文類), 廣興寺續稧詩帖(八. 詩文類) 등이 있다. 廣興壬癸會唱酬는 맨 앞부분에는 1613년 당시의 시 8수가 수록되어 있고, 이어서 1694년 權以時의 廣興舊稧重修記事와 당시에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完議, 그리고 李鴻逵, 權以時 등이 작성한 시 5수가 있고, 마지막으로 1695년 이홍규의 서문이 있다. 廣興寺續稧詩帖은 1907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權世永, 安明烈 등 25인의 시가 실려 있다.
이들 자료를 통해 볼 때, 1613년에 11명에 의하여 설행된 임계회는 이후 오래 동안 그 잊혀졌다가 1694년경 다시 重修되었다. 중수할 때에는 이를 보다 지속적으로 운영하기 위하여 회원간에 完議를 작성하여 두었는데, 완의에 따르면 매년 9월에 실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임계회는 이후로 매년마다 실시되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지금까지 그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