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장처 고문서 특징

  • 소장 고문서
  • 소장처 고문서 특징
安承俊(한국정신문화연구원 전문위원),金鶴洙(한국정신문화연구원 연구원)
「水柳川金」이란 말이 상징하듯이 水谷(무실) 全州柳氏는 안동지방의 대표적 士族으로서 자타가 인정하는 가문이다. 특히 영해·영덕의 재령이씨와 이른바 退溪의 영남학맥을 계승한 핵심 가문이며, 그만큼 宗·支派 가문에서 수많은 학자가 배출되었다.
全州柳氏는 16세기 이전에는 在京士族으로서 강력한 재력과 사회적 지위를 누린 가문이었다. 이들의 落南은 당시 妻鄕·外鄕으로의 移住라는 시대적 조류와 그 궤를 같이한다.  1) 유씨가는 16세기 중반 婚姻을 통해 낙남하였다. 낙남이후 전주유씨가는 眞城李氏·義城金氏·豊山柳氏·安東權氏·載寧李氏와 더불어 嶺南學派의 핵심가문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따라서 전주유씨가 소장 자료는 영남으로의 이주·정착·성장과, 영남학파의 중심으로서 성장해 나가는 모습이 생생하게 투영되어 있다. 여기서 우리는 유씨가 고문서의 자료적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
본서에서 언급하는 전주유씨는 ‘安東派’에 국한되며 수록된 고문서는 안동파의 대종택인 水谷宗宅(무실종책) 소장본에 한정된다. 따라서 수곡종택의 지파인 定齋宗宅·三山宗宅 등의 고문서는 수록하지 않았음을 밝혀 둔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국학진흥연구팀(고문서실)에서 수곡종택의 고문서를 최초로 수집한 것은 1994년이며, 정리를 완료한 것은 1995년 5월이다. 이후 처음의 조사에서 누락된 자료를 연차적으로 발굴하여 1997년 9월 〈帖冊分財記〉·〈岐陽書堂關係文書〉·〈東國地圖〉·〈東方五賢筆〉를 마지막으로 수집·정리를 완료하였다. 조사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의 鄭求福·張哲秀 교수, 필자와 김학수 연구원 등 국학진흥연구팀에 의해 진행되었다.  2)
현재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 소장된 수곡종택 고문서는 1차분(1807점)과 2차분(42점)을 합하여 1849점이며, MF 필름번호는 6445~6451(1차분), 8014(2차분)이다. 다만 본서에는 이 모든 자료를 수록하지는 못하고 자료적 가치가 높은 문서를 선별하여 수록하였다.
한편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는 1994년 수곡종택의 지파인 定齋宗宅의 고문서도 아울러 수집·정리하였다. 정재종택은 柳致明(1777-1861)의 종택을 의미한다. 정재파의 파조는 유치명의 고조 柳觀鉉(1692-1764, 號:陽坡)이다. 이 계열은 전주유씨 안동파 중에서 가장 현달한 가계의 하나로서 상당량의 고문서를 소장하고 있으며 자료적 가치도 높은 편이다. 그러나 수곡종택·정재종택의 고문서를 동시에 출간하기에는 제반 여건이 허락하지 않았다. 따라서 금년에는 수곡종택의 고문서를 우선적으로 출간하고 정재종택의 고문서는 추후에 출간하기로 결정하였다.
전주유씨 안동파는 수곡을 중심으로 朴谷(박실)·高川·三山·大坪(한들)·中坪 등 주로 임동·예안면 일대에 분포되어 있다. 따라서 전주유씨 안동파 고문서의 집대성을 위해서는 이 지역의 고문서까지 수집·정리될 필요가 있다. 다만 현재로서는 수곡종택·정재종택의 조사·정리에 그친 상태이지만 추후 이들 지역에 대한 조사를 추진할 계획에 있다.
전주유씨는 본래 전주부의 土城으로서 고려초기 이래 士族·吏族으로 분화되면서 고려왕조의 진전에 따라 계파를 달리한 가문이며 시간적인 간격을 두고 上京從仕의 길을 걸었다.  3) 이 중에서도 濕 - 克恕 - 濱 - 義孫으로 이어지는 家系가 가장 현달하였다. 원래 이 가계는 서울에 세거했으나 의손의 증손 潤善이 영주의 반남박씨 朴承張의 딸과 혼인하는 과정에서 낙남하게 되었다. 여기서 柳潤善의 선대에 대해 간단하게 살펴보기로 한다.
〈圖 1〉 全州柳氏家系(落南以前)
〈圖 1〉에 나타난대로 이 가계는 서울에 세거하며 과거를 통해 벼슬에 종사한 전형적인 사환가문이었다. 柳濕(1367 - ? ) 자신은 벼슬하지 않았지만 五子一壻(克剛·克恕·克修·克濟·克渠·沈孝生)가 문과에 합격하여 가격이 신장되고 사환가문으로서의 확고한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여기에 濱(孫)·義孫(曾孫)·軾(5世孫)이 계속적으로 문과에 합격, 청요직을 역임함으로서 가문의 전통이 지속되었다.
여기서 한가지 주목할 점은 유습이 태종 李芳遠의 동갑계 계원이라는 사실이다.『延安金氏大同譜』(上)에 수록된 〈丁未生君臣甲稧帖〉에는 이방원을 위시하여 모두 21명의 계원이 수록되어 있다. 여기에는 朴礎(吏判)·李揚(工議)·卓愼(左贊贊)·朴實(判書) 등의 공신계열의 高官도 있지만 柳濕과 같은 無官者도 적지 않게 수록되어 있다. 비록 친목 도모를 위한 갑계라 할지라도 이를 통해 柳濕(전주유씨)의 정치적인 성향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후일 그의 자손들이 문과에 급제하여 청요직을 역임한 배경도 여기에 있다. 참고로 〈太宗大王御製甲稧功臣二十員人物評〉에 따르면, 유습은 忠直·寬厚하며 처신에 신중한 사람이었다.  4) 그러나 이 가계에도 정치적 외풍에 따른 부침이 있었다. 柳克恕의 경우가 바로 그러하다. 그는 문과에 급제하여 延安府使·寶文閣直提學을 역임하는 등 매우 현달하였지만 1388년(우왕 14) 우왕에 의해 피살되었다. 유극서의 피살은 바로 고려말 신구갈등의 여파라 할 수 있다. 다만 아버지 유습과 이방원의 관계, 매부 沈孝生과 처남 河崙(1347-1416)의 정치성을 고려할 때 유극서 역시 신흥사대부(혁명파) 계열로 파악할 수 있다. 이는 유습 이래 전주유씨의 정치적 성향과 관련하여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여기서 한가지 주목할 점은 그의 산소가 지금의 안동시 綠田面에 소재한다는 사실이다. 녹전면은 안동과 영주의 접경지로서 후일 유윤선의 영주 이거와 관련하여 시사하는 점이 많다.
柳濱은 1382년(우왕 12) 孟思誠(1360-1438)과 동방으로 급제하여 응교·직제학을 거쳐 영흥부사를 지낸 인물이다. 그의 부인 德山尹氏는 禹倬(1263-1342)의 외증손녀였으며 두 번째 부인 단양우씨는 우탁의 증손녀였다. 이처럼 그는 예안에 거주하던 우탁가문과 연혼·중혼의 관계에 있었다. 그의 산소가 영주의 鐘陵山에 소재한 배경도 여기에 있다. 이처럼 전주유씨는 전형적인 재경 사환가문이면서도 영남과의 통혼을 매개로 柳克恕·柳濱 양대의 산소가 안동·영주에 소재하는 등 영남과의 지역적 연고가 깊은 가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전주유씨의 위상을 더욱 격상시킨 인물이 바로 柳義孫(1398-1450)이다. 그는 南守文·權埰와 더불어 「集賢殿三先生」으로 지칭되고 문과 중시에도 합격한 수재였다. 특히 그는 고금의 전고에 통달하여 문한직을 독점하는 한편 「綱目訓義序」·「無寃錄序」를 찬하는  5) 등 세종조의 문물정비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이런 행적을 바탕으로 후일 「安東派」자손들에 의해 「岐陽里社」에 봉안되었다. 다만 그는 아들이 없어 아우 末孫의 3자 季潼을 후사로 삼았다. 따라서 후술할 「全州柳氏安東派」는 계보상으로는 의손의 후손이지만 혈통상으로는 말손의 후손들이다.
한편 유의손의 백형 敬孫 계열에서는 柳崇祖(1452-1512)라는 걸출한 인물이 배출되었으며, 말손의 2자 季漳 계열에서는 선조조 소북의 영수 柳永慶(1550-1608)이 배출되었다. 이들은 모두 「京派」에 속하지만 후대까지 「安東派」와도 종족적인 유대가 긴밀하게 유지되었다. 이런 정황은 유영경이 柳復起와의 만남을 요청하고, 柳友潛이 경상감사 柳永詢과 더불어 선영의 관리사업을 주선하였으며, 수곡종택에 「柳崇祖請廡上疏」가 소장된 사실에서도 방증된다.
의손의 아들 季潼과 손자 軾은 서울에서 사환에 종사하였으며 산소 또한 서울 인근인 경기도 高陽에 소재하고 있다. 계동은 음사로 부사직에 그쳤지만 식은 金淨(冲庵)·權橃(冲齋)·柳公灌 등과 동방으로 급제하여 부사를 역임하였다. 이처럼 이 가계는 克恕~軾에 이르기까지 5대를 서울에 살며 사환에 종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유식은 파평윤씨와 남양홍씨 사이에서 모두 8남 1녀를 두었다. 이 중 4자 윤선(1500-1557)은 영주에 입향함으로서 안동파 형성의 단초를 마련하게 된다. 윤선은 유식의 두번째 부인 남양홍씨 소생으로서 음직으로 引儀를 지낸 인물이다. 당초 그는 양천허씨 許璫의 사위가 되었으나 허씨가 사망하자 영주의 반남박씨 朴承張의 사위가 되었다. 박승장은 조선 고려말의 유학자인 朴尙衷(133-1375)의 6세손이며, 태종조 좌의정을 지낸 錦川府院君 朴訔(1370-1422)의 5세손이었다. 그리고 이황의 문인으로 대사간을 지낸 朴承任(1517-1586)과는 4촌간이었다.
〈圖 2〉 柳潤善妻潘南朴氏家系圖
반남박씨는 영주일대에 강력한 사회적·경제적 기반을 확보하고 예안김씨 金淡家門·평해황씨 黃俊良家門과 함께 이 지역을 대표하는 명문이었다.  6)
유윤선의 영주 이거는 처가 반남박씨의 경제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전주유씨는 영주 입향 이전에 이미 상당한 경제력을 지니고 있었다. 본 서에 수록된 〈柳義孫兄弟和會文記〉(1450경)를 위시한 각 종의 분재기류가 이런 사실을 방증하고 있다.  7)
이런 선상에서 전주유씨는 혼인을 통해 가세 확장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된다. 유윤선의 아들 柳城과 의성김씨(金璡 長女) 사이의 혼인이 바로 그것이다. 이 혼인은 전주유씨의 향배와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김진(1500-1580)은 안동의 임하 일대에 강력한 기반을 소유한 인물로서 아들 克一·誠一·復一과 사위 李逢春이 문과에 급제하고 守一·明一이 사마시에 합격하는 과정에서 문호가 크게 신장되었다. 유성은 바로 김진의 맏사위로서 선조조 동인의 영수 金誠一(1538-1593)은 그의 손아래 처남이었다.
〈圖 3〉 金璡子女圖
유성은 김진의 사위가 되자 거주지를 영주에서 안동으로 옮기게 된다. 김진은 자신의 방대한 토지 가운데 유성에게는 주로 水谷(무실) 일대의 토지를 분급하여 세거의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8) 전주유씨를 「무실유씨」로 지칭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점에서 수곡은 전주유씨의 발전의 토대이며, 의성김씨와의 400년 세의를 지속하는 중요한 고리였다.
일반적으로 안동의 전주유씨는「全州柳氏水谷派」로 지칭된다. 그러나 본고에서는 이들을 안동파로 명명하고자 한다. 전주유씨의 세거지 水谷·朴谷·高川·禮安(三山)·大坪·中坪 등을 포괄하고 학술적인 시사성을 지닐 수 있는 용어로는 安東派가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안동파의 가계도를 제시하면 아래와 같다.
〈圖 4〉 全州柳氏 安東派 家系圖
한편 안동 입향조 유성(1533-1560)은 28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이런 선상에서 두 아들 復起· 復立9) 은 한동안 외조 김진의 경제적인 지원과 외가의 사회적 기반 위에서 성장하게 되었다. 더욱이 유성의 부인 의성김씨가 단식 자결함으로서  10) 외가에 대한 의존도 역시 높아지게 되었다. 이런 정황은 1574년(선조 7) 김진이 외손부 盈德鄭氏에게 皮穀(110石)과 노비(1口)를 별급하고  11) 유복기가 김성일의 문하에서 수학한 사실에서도 방증된다.
안동 입향 이후 전주유씨의 사회적 성장과 학문적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한 인물은 유복기(1555-1617)였다. 그는 김성일(鶴峰)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이황의 학문을 계승하였으며 임진왜란 당시에는 金垓·裵龍吉·郭再佑 등과 함께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12) 전주유씨 家傳에 따르면 현재 수곡종택에 소장된『東國地圖』도 의병 활동을 위해 제작된 것이라 한다. 그는 영주·예안에 소재한 선영을 지성으로 관리하는 한편 기민 구호에 노력하여 동종과 향리 사이에 인망이 높았다. 그리고 성품이 근검·인후하였으며 柳永慶(10촌 형제)의 접견을 사양할 정도로 처신이 신중하였다. 이에 안동부사 黃暹은 그를 고결한 선비로 평가하였으며, 정구(寒岡:1543-1620)는 ‘유모는 더불어 마음을 논할 만한 사람이다’라고 극도로 칭송하였다.  13)
한편 전주유씨의 사회적·학문적 성장과 岐陽書堂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기양서당은 유복기의 만년에 자손들의 교육을 위해 鵝岐山의 남쪽에 건립한 서당이다. 약수로 유명한 아기산은 주변의 경관이 수려하고 산중에는 黃山寺가 있어 학업 연마와 심신 수양에 매우 적합한 지역이었다.
10간 규모의 기양서당은 사실상 전주유씨 안동파의 학문의 모태라 해도 무방하다. 당시의 상량문에는 博文約禮의 선비를 기대하는 유복기의 바램이 잘 표현되어 있다.  14) 후일 전주유씨에서 상당수의 과거 합격자가 배출되고 무려 86명이 文集·著述을 남길 수 있었던 배경도 여기에 있다.  15)
〈表 1> 全州柳氏安東派 科擧合格者

구분

해 당 인 물

文科

柳 榰(1626-1701) 柳挺輝(1625-1695) 柳敬時(1666-1737) 柳升鉉(1680-1746)

柳觀鉉(1692-1764) 柳正源(1702-1761) 柳之源(未詳-未詳) 柳致明(1777-1861)

柳致好(1808-1870) 柳章鎬(1823-1870) (10명)

武科

柳致百 柳 琓 柳星鎬 (3명)

生進

柳 㮨 柳 格 柳振輝 柳元鉉 柳慶輝 柳啓輝 柳宗時 柳昌時 柳憲時 柳顯時

柳命鉉 柳晉鉉 柳晉鉉 柳泰齊 柳長源 柳元源 柳星休 柳川休 柳元文 柳晦文

柳約文 柳龜休 柳覺文 柳致球 柳致敎 柳致游 柳淵博 (27명)

이 점에서 기양서당은 전주유씨의 학문의 産室이요 元氣였다. 이런 선상에서 유복기는 점차 자손들로부터「起家之祖」로 인식되기에 이른다.
한편 기양서당은 1852년(철종 3) 追遠祠를 건립하여 유의손·유복기의 위패를 봉안하는 과정에서 서당에서 祠宇(里社)로 발전하였다. 이런 현상은 서당에서 사우로의 승격이 유행하던 시대적 풍조의 반영인  16) 동시에 일문의 정신적 구심점을 지니고자 했던 전주유씨들의 현실적 여망의 반영이었다. 유의손이 재경시절 전주유씨의 문호를 신장시킨 인물이라면 유복기는 안동파 후손들로부터 「起家之祖」로 칭송된 인물이다.
유의손·유복기의 봉안 이후 기양서당(岐陽里社)는 학문의 산실을 넘어 정신적 구심점으로서의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이런 중요성으로 인해 1716년(숙종 42) 柳顯時·柳奉時 등이 중창한 이래 1860(철종 11)에는 柳嘉鎭·柳止鎬·柳致好·柳渾文·柳致厚·柳漸文이 중수하였다. 그리고 1922년에는 柳鼎熙·柳淵根 등이 다시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본 서에 수록된 「岐陽都錄」·「岐陽書堂重修日記」·「岐陽書堂重倉上樑文」·「岐陽書堂重修上樑文」·「追遠祠重建上樑文」 등은 기양서당·기양리사의 연혁과 운영을 알려 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유복기(岐峯)가 전주유씨의 성장에 토대를 마련한 인물이라면 그의 아들 유잠(陶軒) 형제는 이를 더욱 확충시킨 인물이었다. 지금도 수곡종택에 걸려 있는 〈岐陶遺業〉이라는 현판은 이를 대변하고 있다. 유우잠은 임진왜란·정묘호란에 창의한 인물로서  17) 張興孝(敬堂)·李埈(蒼石)·金是榲(瓢隱)은 그와 교유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리고 1608년(선조 41)에는 權紀의 부탁으로 金得硯·權晤·李爀·裵得仁·李適·李羲遵·權克明·金近·孫浣 등과 함께『永嘉誌』의 정서작업에 참여할 정도로  18) 사림의 명망이 있었다. 그는 비록 벼슬하지는 않았지만 「門中完議」19) 를 통해 전주유씨 일문의 결속·단합에 초석을 마련하였다. 그의 사후인 1641년(인조 19) 得潛·知潛·守潛·宜潛·希潛이 형제가 종가의 번창과 종손의 출생을 염원하며 진휘의 부인 안동권씨에게 田 10두락을 지급한 사실에서  20) 전주유씨의 결속력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그는 1620년(광해군 12) 金璡(=驪興閔氏)의 碑碣을 건립할 당시 아우 득잠·지잠·의잠·희잠·수잠과 더불어 監役有司로 참가할 정도로  21) 의성김씨와의 관계도 각별하였다.
이런 토대 위에서 전주유씨는 義城金氏·盈德鄭氏·羽溪李氏·眞城李氏·延安李氏·順興安氏·丹陽禹氏·東萊鄭氏·安東金氏·安東權氏·漢陽趙氏·載寧李氏·英陽南氏 등 안동·예안·청송·영양일대 명문들과의 혼인을 통해 사회적 지위를 강화하게 되었다. 나아가 1635년(인조 13)에는 柳㮨(百拙庵:1602-1662)이 李珥·成渾의 문묘종사를 반대하는 영남유소의 소수로 선출되고  22) 柳挺輝(1651)·柳榰(1654)가 문과에 합격하는 과정에서 가문의 입지도 한층 강화되었다. 이는 안동 입향 이후 불과 3~4대만에 이루어진 급속한 신장이었다.
한편 전주유씨의 사회적 성장과 관련하여 黃山稧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다. 이 점에서 본 서에 수록한 〈黃寺續稧會錄〉은 황산계의 연혁과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문서라 하겠다. 황산계는 김진(1500-1580)의 내외자손들이 친목을 도모하고 결속을 다지기 위해 조직한 계를 말한다. 따라서 황산계는 의성김씨·전주유씨·진성이씨· 영양남씨23) 로 구성되었지만 계의 골격을 이룬 가문은 역시 의성김씨와 전주유씨였다.
원래 황산계는 1687년(숙종 13) 7월 金邦杰·金泰基·金履基·柳挺輝·柳增輝·柳益輝·柳揚輝·柳椲·柳榰·李簠·李命五·南休에 의해 발족된 이래 동년 9월에는 회원이 25명으로 확대되었다. 1704년(숙종 30) 李簠에 의해 작성된 제명기에 25명의 명단이 상세하게 수록되어 있다.  24) 이들 25명을 가계도의 형태로 재구성하면 아래와 같다.
〈圖 5〉 黃山寺稧會題名錄
이로부터 55년이 지난 1759년(영조 35) 황산계는 크게 중수되어 구성원이 대폭 증가하였다. 본 서에 수록한 〈黃寺續稧會錄〉은 바로 이 때 작성된 것이다. 문서의 말미에 수장처를 표시하는「水谷」이라는 墨書가 있다. 따라서 여타 3가문에도 계안이 分藏된 것으로 짐작되지만 현재까지 확인된 것은 없다. 이 계안에는 金命錫(당시 85세)으로부터 金光胤(당시 20세)에 이르기까지 모두 136명이 수록되어 있다. 이 중 南聖周·南龍九·南聖泰·李顗·李緯三·李宅三을 제외한 나머지 130명은 의성김씨(51명)와 전주유씨(79명) 출신이었다. 이는 황산계가 의성김씨와 전주유씨의 양대구도로 확립되었음을 의미한다. 金正漢이 서문에서 金氏·柳氏를 황산계의 주도가문으로 언급하는데 주저하지 않고  25) , 김명석이 川前과 水谷을 「朱陳村」26) 에 비유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였다. 이처럼 황산계는 당초 「四姓統合體」로 출발하였지만 점차 김씨·유씨의 영향력이 강화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안동지방에서 유전되는 「水柳川金」의 의미를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다. 진성이씨·의성김씨·풍산유씨가 안동·예안 일대 사림들의 구심점이라는 사실을 고려할 때 황산계에서 드러난 양자의 관계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결국 황산계는 김씨·유씨 사이의 세의를 지속적으로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그리고 이는 향후 전주유씨의 사회·학문 활동에도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27)
여기서 전주유씨의 학통에 대해 간단하게 살펴보기로 한다. 사실 전주유씨의 학통은 유복기가 김성일을 사사하는 과정에서 그 줄기가 확립되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의 학통은 혼맥과의 연관성이 강하고 연원을 매우 중시하는 속성이 있었다. 이런 속성으로 인해 전주유씨는 철저하게 김성일계열의 영남학통을 계승하였다. 일반적으로 김성일계열의 학통은 李滉→金誠一→張興孝→李徽逸·李玄逸→李栽→李象靖→柳致明→金興洛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인식된다. 전주유씨는 유복기가 김성일을 사사하고 유우잠이 장흥효와 교유한 이래 慶輝·敬時·觀鉉·孟輝·錫斗·升鉉·春榮·夏時는 李玄逸(葛庵)을 사사하였으며,  28) 道源·長源·星休·川休·範休·洛休·玄休·晦文·龜休는 이상정(大山)을 사사하였다.  29) 관현·승현은 갈암문하의 드러난 제자이며, 장원은 李宗洙·金宗德과 함께 대산문하의 3高弟로 칭송된 인물이다. 여기에 柳致明이 김성일의 도통을 계승함으로서 전주유씨는 영남학파에서 실로 확고부동한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30)
후일 한말(1896) 安東倡義所에서 각 문중에 義捐金을 분배한 기록에 따르면, 전주유씨(水谷)에게는 무려 1000냥이 배당되었다.  31) 문중 배당금으로서는 최고 액수인 1000냥이 할당된 문중은 전주유씨(水谷)·풍산유씨(河回)·안동권씨(酉谷) 3가문에 불과하였다. 이는 전주유씨의 사회·학문적 입지와 관련하여 시사하는 바가 크다.
여기서는 전주유씨의 대표적 세거지인 수곡 위치에 대해 간단하게 살펴 보기로 한다. 물론 전주유씨 세거지는 水谷 외에도 朴谷(박실)·高川·大坪(한들)·中坪·三山 등이 있지만 본서의 성격상 수곡에 한정하였다. 수곡종택은 현재의 행정구역상 慶北 安東市 臨東面 水谷里 470-43번지이다.
󰡔永嘉誌』에 따르면, 수곡은 원래 안동부의 속현 臨河縣 소속으로서 임하현의 중심지에서 동쪽으로 15리에 위치하였다. 따라서 임하현의 북쪽 4리에 위치한 川前(내앞)과는 매우 가까운 거리임을 알 수 있다.
원래 수곡은 신라시대의 고찰 鳳凰寺가 있던 매우 유서 깊은 지역이었다. 그러나 여기에 반촌이 형성된 것은 전주유씨의 입향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참고로 전주유씨 세거지로서 수곡 다음으로 유서가 깊은 朴谷에는 고려말의 권신 廉興邦의 別墅가 있었다고 한다.  32) 따라서 박곡에는 상당히 오래전부터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생각되지만 이 또한 전주유씨가 거주하게 되면서 민촌에서 반촌으로 변모된 것으로 이해된다.
한편 전주유씨의 대표적 先塋으로서 본 서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林塘(숲당)33) 역시 수곡과 매우 인접한 지역에 있었다. 그리고 유복기의 雅號이며「岐陽書堂」·「岐陽齋舍」의 명칭의 연원인 鵝岐山(해발 591)은 수곡의 동북방에 위치하고 있다. 본 서의「黃山寺續稧會錄」과 관련된 黃山·藥山(해발 583) 역시 아기산과 그 주변에 위치하고 있다. 특히 약산은 임하현의 진산으로 산중에는 안동 선비들의 휴양소로 각광을 받은 仙刹이 있다.
한편 17세기까지만 해도 천전·수곡은 임하현 소속이었지만 이후 면리제가 확대 시행되면서 천전은 임하면, 수곡은 임동면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기존의 임하현이 임하면·임동면·임북면·임남면으로 분리된 만큼 이들 4개면은 사실상 동일한 문화권이었다. 한편 17세기 이후 임하·임동 일대에는 의성김씨·전주유씨 외에도 상당수의 명망사족들이 세거지를 형성하는 한편 廬江書院(虎溪書院)·泗濱書院 등의 원우가 설립되기 시작하였다. 임하리의 안동권씨, 馬洞의 봉화금씨는 그 대표적인 가문이었다. 그리고 여강서원은 이황·김성일·유성룡을 배향하는 안동의 首院이며, 사빈서원은 김진과 그의 5자(극일·수일·명일·성일·복일)을 제향하는 의성김씨의 구심점이었다. 의성김씨와 학연·혈연으로 연결된 전주유씨가 이들 서원을 출입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이런 선상에서 전주유씨는 점차 가세가 확장되어 세거지 역시 수곡에서 朴谷·高川·大坪·三山 등지로 확대되었다. 이는 의성김씨의 세거지가 천전에서 臨河里·新德里·知禮里(臨東) 등지로 확대된 현상과 맥락을 같이하는 것이었다.
예로부터 수곡은 청송·진보·영양·영해·영덕으로 통하는 길목이었다. 이는 전주유씨가 재령이씨(영양·영해)·무안박씨(영해·영덕)·한양조씨(영양)·함안조씨(청송)·안동권씨(진보)·평산신씨(청송)와 더불어 혈연·사회·학문적인 유대를 강화하는데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수곡은 현재의 행정구역상으로 경북 안동시 임동면 수곡리이다. 그러나 임하댐 건설 과정에서 수몰지구에 편입됨으로서 과거의 모습을 확인할 수 없다. 본 고문서의 소장처인 무실종택도 임하댐 건설로 인해 1988년 임동면 수곡동 691-1번지에서 현재의 위치로 이건한 것이다. 이 점에서는 岐陽書堂(追遠祠)·義城金氏旌閭閣(무실정려각)도 마찬가지이다. 현재 무실종택은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47호, 의성김씨정려각은 제48호, 기양서당은 제17호로 지정되어 있다. 참고로 『永嘉誌』에 수록된 〈臨河縣圖〉를 첨부하면 아래와 같다.
〈圖 6〉 安東府 臨河縣圖(永嘉誌)
본서에 수록된 문서는 시기적인 편차가 매우 심한 편이다. 15세기 중엽에 작성된 〈柳義孫兄弟和會文記〈를 위시하여 10여건의 16세기 분재기류가 수록된 반면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置簿紀錄類】의 대부분은 1800년대~1900년대의 자료이다. 결과적으로 수록된 자료 중에서 〈告身類〉·〈戶籍〉·〈試券〉·〈上樑文〉의 일부와 〈帖冊分財記〉·〈東方五賢筆〉·〈簡札〉·〈分賑文簿〉·〈黃寺續稧會錄〉·〈東國地圖〉를 제외하면 모두 19세기 이후의 자료이다. 수곡종택의 500년 역사와는 매우 대비되는 현상이다. 그러나 이는 각종 전란과 사회변동의 과정에서 기인하는 것으로서 다른 가문에서도 종종 발견되는 현상이다. 그나마 조선시대 상속제도 연구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는「帖冊分財記」가 보존된 것은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라 하겠다. 수록된 문서의 종류별 개황은 아래와 같다.
【敎令類】에서 紅牌는 1건도 없다. 白牌는 모두 3장으로 유원현(生員)의 백패는 누락되어 있다. 고신은 실직보다는 추증 고신이 대부분이다. 1893년(고종 30)에 내려진 유복기(의성김씨)의 추증 고신은 자손들의 단합된 노력의 결과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疏箚啓狀類】에서 〈柳崇祖請廡上疏〉(2번)는 경파와 안동파의 연계상을 보여주는 구체적인 사례이며, 〈啓目〉은 유복기의 추증을 상신·추인한 예조계목이다. 〈單子〉는 사직단자가 주종을 이루고, 〈所志〉는 모두 산송에 관계된 것들이다. 1765년(영조 41)의 柳光宅(1696-1767)의 準戶口는 마모가 심하여 내용을 파악하기 힘들다.
【牒關通報類】에서 〈告目〉은 임당재사와 호계서당에 관련된 것이며, 〈望記〉는 유건우·유동시에게 발급된 것이다. 이 중 〈望記〉(No.2번)은 車氏·柳氏의 合譜 사실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證憑類】는 시기적으로 일제시대에 치중되어 있지만 〈賣渡證書〉·〈借用證〉·〈保管證〉·〈契約書〉·〈領收證〉·〈申請書〉·〈尺文〉 등 종류가 다양하여 시기 경제사를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明文類】에 대해서는 디음 장에서 설명하기로 한다.
【書簡通告類】역시 1800~1900년대 자료가 주종을 이룬다. 통문 중에는 〈全州柳氏世系辨正〉 문제를 언급한 통문(No.3)과 〈中坪門中輪察〉(No.9)·〈輪告州里書〉(No.10)가 주목된다. 혼서는 안동지역의 혼서 작성의 양식을 참고하기에 용이하다. 〈通訃錄〉은 1904년 柳東植의 초상시에 작성된 것으로 양반가문의 통부 권역·범위를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東方五賢筆〉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서술하기로 한다. 현재 수곡종택에는 약 500여건의 간찰이 수록되어 있다. 다만 본 서에서는 학문·정치적 비중이 높거나 자료적 가치가 높은 간찰을 선별하여 수록하였다. 李恒福의 간찰은 유복기와 이항복 사이에 교유가 있었음을 시사하는 자료로서 安信에 더하여 婚簡紙·筆墨 등의 예물을 전달하고 있다. 이 외 權相一(淸臺)·柳觀鉉(陽坡)·李象靖(大山)·李萬運(黙軒)·南漢朝(損齋)·柳致明(定齋)·金興洛(西山)·金道和(拓庵)·柳止鎬(洗山) 등은 영남사림에서 상당한 비중을 지닌 인물들이다. 특히 이상정·남한조·유치명·김흥락은 영남학파의 도통을 이은 인물이라는 점에서 중요성이 배가된다. 김도화는 유치명의 문인으로서 문장과 학식이 뛰어나고 을미사변 당시에는 안동의병을 지휘하기도 했다. 柳止鎬·柳洛永·柳斗永·柳必永 등은 모두 전주유씨 출신들이다. 이들의 간찰은 주로 先代 내지는 문중의 중대사를 상의하는 내용이 많다.
【置簿紀錄類】는 岐陽書堂·林塘齋舍의 운영을 알려주는 都錄類가 주종을 이룬다. 앞서 언급한대로 기양서당은 유복기가 자손들의 교육을 위해 건립한 서당으로 1852년(철종 3)에는 岐陽里社로 승격되었다. 따라서 서당·리사의 운영과 관련하여 상당수의 문서가 작성되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현존하지 않는다. 따라서 본 서에는 1900년대 이후의 자료만 수록하게 되었다. 임당재사는 임당에 소재한 전주유씨의 선영을 관리하기 위해 건립된 재사이다. 임당은 안동 입향조 유성을 안장하는 과정에서 전주유씨의 대표적인 선영으로 자리하였다. 이 또한 모두 1900년대 이후의 자료이다.
시도기 가운데 〈上言時時到〉는 1892년(고종 29) 유복기의 증직을 상언할 당시의 시도기로서 〈啓目〉의 관련 문건이다. 1839년(헌종 5)~1840년(헌종 6)에 작성된 〈岐陽廚舍重修日記〉는 기양주사의 연혁·운영과 관련하여 중요한 자료이다. 1756년(영조 32)에 작성된 〈分賑文簿〉는 문중 차원에서 門親들을 진휼하는 구체적인 사례라는 점에서 사회사적 기치가 높은 자료이다. 〈笏記〉 중에서 冠禮笏記(No.2)가 주목된다. 〈葬具〉는 치상에 필요한 각종 儀物·喪具를 망라하고 있어 치상의 실태를 파악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詩文類】는 墓誌·墓碣·行狀 등의 狀碣類를 중심으로 輓詞·試券·上樑文 등을 수록하였다. 장갈류의 대부분은 草本이며, 만사는 柳廷燁·柳泰永·柳震과 관련된 것들이다. 시권은 비교적 시기가 이른 자료가 많지만 원본의 상태가 좋지 않아 4祖의 성명을 확인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여기에 대해서는 가계도를 참고하기 바란다. 상량문은 기양서당·추원사의 중창·중수 관련 상량문이다. 〈詩稿〉 3번은 임진왜란 당시 팔공산에서 창의한 32義士의 字를 이용하여 지은 시문으로 유복기도 여기에 포함되어 있다.
【其他類】에는 〈稧案〉·〈洞約〉·〈日記〉·〈地圖〉·〈書畵〉·〈圖面〉 등을 수록하였다. 비록 기타류로 분류되었지만 자료적 가치는 대단히 높다. 〈稧案〉 4번인 〈黃寺續稧錄〉(1759)은 앞서 언급한대로 전주유씨의 사회·학문적 성장과 밀접하게 관련된 매우 흥미로운 자료이다.
그리고 〈日記〉 4번 〈不祧廟建立日記〉(1922)는 수곡종택의 가묘를 건립하는 과정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참고로 유복기는 1893년(고종 30) 嘉善大夫 吏曹參判 兼同知義禁府事에 추증되었으며, 그 이후 자손들에 의해 不遷位 제향이 논의된 것 같다. 다만 유복기는 공신 또는 실직 현관이 아니기 때문에 국가에서 인정하는 불천위는 될 수 없다. 따라서 당시의 부조묘는 사림의 공론을 바탕으로 하여 건립된 것으로 생각된다. 〈書畵〉 중에는 柳元鉉의 당호「月會堂」글씨와 仙庵·鵝岐山人의 글씨와 난초그림이 있다. 선암과 아기산인의 인적 사항은 미상이다. 단 鵝岐山人은 아호로 보아 전주유씨 출신의 인물로 생각된다.
〈圖面〉 중에 주목할 부분은 지금의 건축설계도에 해당하는 2건의 가택도이다. 이는 1934년~35년의 家役時에 작성된 것으로 판단된다.☞〈家役時日記〉(日記 No.5). 이 외 목판본의 〈龍子靑鶴洞圖〉는 19세기 이후의 작품으로 생각된다.
가. 分財記
여기서 언급하는 분재기는「帖冊分財記」를 말한다. 분재기를 成帖하는 과정에서 관련 문서인 明文·所志·招辭·立案 등을 함께 수록하였다. 따라서 본 첩책분재기에는 분재기 외에도 이들 문서가 함께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시기적으로 간혹 순서가 뒤바뀐 경우가 있지만 첩책된 순서대로 수록하였음을 밝혀 둔다.
본 첩책분재기에는 分財記(12건), 明文(2건), 所志(1건), 招辭(2건), 立案(1건) 등 모두 5종 18건의 문서가 수록되어 있다. 이 중에서 立案(No 9)과 招辭(No 10·12)은 관련 문건이지만 서로 분리된 상태로 성첩되어 있다.
1979년 󰡔慶北地方古文書集成󰡕을 발간할 당시만하더라도 이 帖冊은 비교적 상태가 양호하였다. 그러나 그 이후 후손들의 거주지를 따라 서울·경기 등으로 문서가 옮겨지는 과정에서 다소 손상되었다. 특히 첩책의 하단 10cm 부분이 습기로 인해 곰팡이가 쓸고 있었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최종적으로 수집해 온 지역은 경기도 안산시였다.
배접은 여러 겹의 한지로 되어 있었다. 사용된 韓紙는 白紙가 아니라 서책·첩책 등 다른 고문서였다. 배접한 시기는 적어도 19세기 이전으로 파악된다. 배접할 때 접거나 자름으로서 원형이 변형된 문서가 많다. 예컨대 유의손형제화회문기는 원래 1장으로 이어진 문서를 6등분으로 배접하였다. 이러한 배접 과정에서 문서 일부가 낙장된 경우도 있다.
(1) 柳義孫兄弟和會文記 : 1447~1450년. 柳濱의 四子(敬孫·義孫·信孫·末孫)가 전래 노비를 합의하여 나눈 화회 분재기이다. 현존하는 분재기 중에서 2번째로 오래된 것이며, 회회 분재기 중에서는 가장 오래 되었다. 유경손형제화회문기로 명명하는 것이 합당하지만 당시 경손이 사망하여 장자 盖沂가 분재에 참여하고 본 문서의 소장처 또한 유의손의 후손가이므로 유의손형제화회문기라 불려진다. 다만 유의손의 형제로서 분재에 참여한 사람은 四子 말손에 불과하다. 당시 장자 경손과 3자 신손은 사망한 상태였으며 2子 의손은 생존해 있으면서도 부인 파평윤씨가 대신 분재에 참여하였다.
문서의 冒頭가 탈루되어 작성 시기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는 없다. 다만 유의손(1398-1450)의 관직이 예조판서로 기록되어 있는데, 그가 예조판서에 임명된 연도는 1447년(세종 29)이며 사망한 연도는 1450년(세종 32이다. 따라서 본 문서의 작성시기는 1447~1450년으로 추정할 수 있다. 筆執은 말손의 아들 季漳 또는 季潼으로 추정된다.
380구 가량의 노비 가운데 봉사조로 6구를 지정하고 4형제가 가각 80~90구 정도로 평균 분집한 다음 장손 盖沂에게 10구를 지급하고 그 이하 之盛·季潘·尹愈妻·叔漣·壽妣·從今·壽童·季潼 등 8인에게 1구씩 지급되었다. 이 중 盖沂·之盛·季潘·叔連·季潼은 유빈의 손자로 확인되지만 尹愈妻·壽妣·從今·壽童의 인적 사항은 미상이다. 화회 당사자인 유의손의 형제는 물론 그의 아들들에게까지 일정한 몫이 주어지고 있어 일반적인 화회문기와는 대조를 이룬다. 이 문서는『朝鮮前期古文書集成』(국사편찬위원회, 1997)에 정서되어 있다. 참고로 문서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중심으로 가계도를 작성하면 아래와 같다.
〈圖 7〉 柳義孫兄弟家系圖
(2) 柳軾衿給文記 : 1506년~1521년(추정)  34) . 柳軾이 자녀들에게 재산을 분급한 문서이다. 전주유씨 분재기 중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것이다. 앞 장의 누락 정도를 확인할 수 없으며 현재는 맨 마지막 장만 남아 있다. 따라서 이 문서로서는 당시의 재산규모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렵다. 또한 문서의 배면에 署押이 있는 것으로 보아 분재기의 일부를 뒤집어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분재내용 가운데 경제사적 관점에서 매우 중요한 용어가 등장하는데 ‘作介畓’, ‘私田·私畓’, ‘記上田’ 이 그것이다. 작개답은 노비가 상전 소유의 토지를 경작해 소정의 田稅를 납부하는 논을 가르킨다. 私田·私畓은 상전의 작개답을 경작하는 댓가로서 納稅 의무가 없는 전답을 가르킨다. 記上은 노비가 자식없이 죽었을 때 그 재산을 상전에게 기록해 바치는 것을 말하며, 記上田은 이 때 바친 밭을 말한다.
‘長子奉正大夫守成均館司成’은 柳潤德이며, ‘子承仕郞’은 柳潤福 또는 柳潤弼로 추정되며, ‘女壻進勇校尉前行虎賁衛副司果’는 南彭碩이며, ‘子幼學’은 유윤선이다. 筆執인 ‘子將仕郞’은 미상이다.
(3) 柳軾妻洪氏別給文記 : 1535년(중종 30). 유식의 후처 남양홍씨가 아들 潤弼에게 노비 2구를 별급하는 문서이다. 윤필은 유식의 3子이지만 홍씨에게는 장자가 된다. 이에 홍씨는 자신의 장자 윤필이 자녀가 많고 곤궁하게 지내는 것을 가련하게 여겨, 남편 및 어머니인 홍씨가 각각 1구씩의 노비를 별급하였다. 본 문서에 따르면 유윤필의 형제들은 아버지 유식의 임종시에 노비·전답을 균등하게 분급받은 것으로 나타난다. 柳軾別給文記(No.2)가 바로 그 당시의 문서이지만 앞서 언급한대로 문서의 마멸이 심하여 분재량을 확인할 수 없다. 이 문서가 윤선의 후손가인 수곡종택에 보관된 경위는 분명하지 않다. 참고로 재주 남양홍씨의 가계도를 제시하면 아래와 같다.
〈圖 8〉 南陽洪氏家系圖
(4) 土地明文 : 1557년(명종 12). 유윤선(1500-1557)의 처 반남박씨가 柳潤春으로부터 답 3두락을 細木綿 20필을 주고 구입하는 문서. 유윤춘은 유윤선의 4촌 아우이며 박씨는 유윤선의 후처로서 영주의 명문 반남박씨 朴承張의 딸이다. 유윤선은 박씨와의 혼인을 매개로 영주로 이거하였는데, 이 문서의 작성시에는 사망한 상태였다. 본 문서는 財主(柳潤春) 자필이며 증인은 朴彭壽와 柳億良이다. 박팽수는 박승장의 아들로서 반남박씨와는 남매간이며, 柳億良의 인적사항은 미상이다. 배접의 편의를 위해 사방을 칼로 자른 흔적이 선명하다. 따라서 현재의 문서는 원문서에 비해 크게 축소된 상태이다. 이 문서는 󰡔慶北地方古文書集成󰡕에 수록되지 않았다.
〈圖 9〉 全州柳氏 柳潤善·潤春家系圖
(5) 所志 : 1532년(중종 27). 柳潤善이 영주군수에게 立案의 발급을 요청하는 소지. 점련문기를 상고한 다음 입안을 발급해 달라는 소지의 투식으로 보아 전답·노비의 매득과 관련된 사항이 분명하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미상이다.
(6) 許璫妻韓氏別給文記 : 1554년(명종 9). 허당의 부인 淸州韓氏가 사위 柳潤善에게 딸의 奉祀條로 노비 4구를 별급하는 문서. 한씨는 이들 노비를 유윤선의 後室(潘南朴氏)의 重子에게 전계하여 딸(허씨)의 제사를 지속시키기를 당부하고 있다. 유윤선의 전처 양천허씨는 슬하에 자식이 없었으며 유윤선은 허씨가 사망하자 반남박씨와 재혼하여 영주로 이거하였다. 허당은 성종조 정승을 지낸 許琮·許琛과는 4촌간이며, 허목의 증조 許磁의 5촌숙이다. 證人 盧稷의 인적사항은 미상이며, 필집 吳壽億(海州吳氏)은 허당의 외손서이다. 참고로 참고로 허당과 오수억의 가계도를 제시하면 아래와 같다.
〈圖 10〉 陽川許氏 許璫家系圖
〈圖 11〉 海州吳氏 吳壽億家系圖
(7) 柳潤善別給文記: 1550년(명종 5). 유윤선이 新婦 의성김씨에게 田 13두락과 노비 5구를 별급하는 문서. 신부는 장자 柳城(1533-1560)의 아내 의성김씨로서 안동 천전리 김진의 장녀이다. 증인 文繼宗의 인적사항은 미상이다. 필집 李希顔(1511-1563)은 안동 와룡 周村의 眞城李氏이다. 그는 김진의 매부로서 신부(柳城妻)에게는 고모부가 된다.
〈圖 12〉 義城金氏 家系圖
(8) 柳潤善妻 潘南朴氏衿給文記: 1579년(선조 12). 유윤선의 후처 반남박씨가 장자 城과 차자 堰에게 노비·전답을 분급하는 문서. 봉사조를 제외하면 균분의 원칙이 잘 지켜지고 있다. 證人은 財主의 동생 朴彭壽와 조카인 朴伏龍이며, 筆執은 장손 柳復起이다. 참고로 족보에는 柳堰이 柳垣으로 기록되어 있다. 어느 시기에 改名한 것으로 생각된다.
(9) 招辭 : 1594년(선조 27). 崔福(私奴)이 官府에 柳復起에게 노비 1구를 방매한 사실을 다짐하는 문서. 입안을 발급받기 위해서는 재주·증인·필집의 초사가 구비되어야 한다. 본 문서는 재주 초사에 해당한다. 최복은 환곡을 상환하기 위해 婢 貴春을 正租 10석에 방매하였다.
(10) 安東府立案 : 1594년(선조 27). 柳復起가 崔福(私奴)으로부터 貴春을 매득한 사실을 안동부에서 公證해 준 문서.
(11) 金璡別給文記 : 1574년(선조 7). 金璡(1500-1580)이 외손 柳復起의 부인 盈德鄭氏에게 皮穀 100석과 노비 1구를 별급하는 문서. 유복기는 조실부모하여 외조 김진의 경제적 지원을 많이 받았다. 이 문서는 의성김씨와 전주유씨의 인간적 유대를 보여주는 자료이다.
(12) 招辭 : 1594(선조 27). 崔福(私奴)이 婢 貴春을 유복기에게 방매한데 대하여 그러한 사실이 거짓이 아님을 관부에 입증하는 필집·증보의 초사. 필집은 金壽福이며, 證保는 鄭內隱福(私奴)·崔從石(私奴)이다. 이 문서는 招辭(No.9)와 안동부입안(No.10)의 관련문기로서 순서상 招辭(No.9) 다음에 위치해야 한다.
(13) 柳復起別給文記 : 1600(선조 33)-1617(광해 9). 유복기가 손자 柳橚에게 노비 1구를 별급하는 문서. 발급자의 인적 사항이 불분명하지만 전후 문서(No.14번)와 대비하여 내용을 검토한 결과 유복기 별급문기로 확인되었다. 중간 중간 마모로 인해 내용을 파악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작성연도는 柳復起(1555-1617)·柳友潛(1575-1635)·柳橚(1600-1684)이 공존한 시기를 고려하여 1600-1617년으로 추정하였다. 원래 이 문서는 1장으로 작성되었으나 현재는 반절된 상태로 배접되어 있다. 이 문서는 유복기의 별급문기와 유우잠의 추기로 구성된 특징이 있다. 내용상의 특징이라면 종손 우대의식이 강하게 반영된 점을 들 수 있다. 균분상속에서 장자우대로 이행하는 과도기적 성격을 지닌 문서이다.
(14) 柳復起妻鄭氏衿給文記: 1620년(광해 12). 유복기의 부인 영덕정씨가 아들 友潛·得潛·知潛·守潛·宜潛·希潛과 사위 鄭榮邦(1577-1650)·李明遠(1583-?)·金遠에게 재산을 분급한 문서. 17세기 초반 전주유씨의 재산규모를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이음매 부분을 제외하면 거의 완벽하게 보존되어 문서의 전문을 판독할 수 있다. 분재기 서문의 취지대로 균분의 원칙이 잘 지켜졌으며, 노비의 경우는 망녀서 金遠을 제외하면 철저하게 11~12구씩 지급되었다. 3인의 증인 중에서 金涌(1557-1620)·金瀹은 김진의 손자로서 유복기와는 외종간이며, 鄭以愼은 재주 영덕정씨의 아우이다. 필집은 장녀서 鄭榮邦이다. 문서에 등장하는 인물을 중심으로 가계도를 작성하면 아래와 같다.
〈圖 13〉 義城金氏·全州柳氏家系圖
(15) 柳友潛別給文記: 1621년(광해군 13). 유우잠이 장자 柳橚의 처 趙氏에게 노비 1구를 별급하는 문서. 조씨가 아들을 생산하자 여기에 대한 사례로서 별급한 것이다. 趙氏는 영양일대에 강력한 기반을 지닌 한양조씨 趙佺의 딸이다. 이 문서는 유우잠의 자필로서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하다. 참고로 이 때 태어난 아들은 요절한 것으로 생각된다. 족보상에 유숙의 장자로 기록된 挺輝는 1623년(인조 1)에 출생했기 때문이다.
〈圖 14〉 柳橚妻家 漢陽趙氏家系圖
(16) 土地明文: 1641년(인조 19). 柳友潛의 아우 得潛·知潛·守潛·宜潛·希潛이 從孫 振輝의 처 安東權氏에게 田 10두락을 지급하는 문서. 종가의 번창과 종손 출생에 대한 염려와 관심이 반영된 문서이다. 권씨는 이로부터 9년이 지난 1650년(효종 1)에 장자 宗時, 1654년(효종 5)에 차자 奉時를 출산하였다. 전주유씨 안동파의 현달한 인물 중에는 宗時·奉時의 후손들이 매우 많다. 권씨는 金誠一의 문인 權暐(1552-1630)의 손녀이다. 이 문서는 제목 중간의 날짜 부분과 명문의 [文]자가 마모되었지만 내용을 파악하는데 어려움은 없다. 필집은 유희잠이다.
〈圖 15〉 柳振輝妻家 安東權氏家系圖
(17) 柳元鉉兄弟和會明文: 1700(숙종 26). 柳元鉉·昌鉉 형제가 합의하여 외가전래 노비를 나누어 가진 문서. 3구 가운데 원현이 2구, 창현이 1구를 소유했다. 유종시는 昌寧成氏(前妻)와 全義李氏(後妻) 사이에서 元鉉·昌鉉·夏鉉·廷鉉의 4자를 두었다. 이 중 원현·창현은 전처 소생으로 문기상의 외가는 창녕성씨를 말한다. 따라서 같은 형제이지만 이씨 소생의 하현·정현은 여기에 대한 상속권이 없다. 이 문서는『慶北地方古文書集成』(414쪽)에 〈柳元鈞兄弟和會文記〉로 수록되어 있다. 鈞은 鉉의 오자이다. 참고로 창녕성씨의 가계를 제시하면 아래와 같다.
〈圖 16〉 柳宗時妻家 昌寧成氏家系圖
(18) 柳橚傳重文記: 1684(숙종 10). 유숙(1600-1684)이 장손 柳宗時(1650-1700)에게 전중하는 문서. 당시는 장자 振輝(1623-1675)가 사망했기 때문에 장손 종시에게 전중한 것이다. 전래 봉사조[답 16두락, 田 1석락 49부 4속]는 물론 先代祭位條[田 94부 7속]와 유진(안동권씨)의 제위조[畓 21부 1속]에 더하여 노비 5구를 지급하고 있다. 문서의 보존상태가 매우 양호하여 전문을 판독할 수 있다. 필집은 挺輝(柳橚 次子)의 아들 聖時이다.
나. 啓目(疏箚啓狀類 N0.2)
1892년(고종 29) 이조에서 유복기의 증직을 요청하는 啓目. 이와 관련하여 동년 8월 20일 柳東植·李重三 등은 高宗의 明陵(肅宗陵) 행차를 기하여 유복기의 추증을 上言한 바 있다. 본 계목은 바로 상언에 따른 결과라 할 수 있다. 본 서에 수록된 유동식일기에는 상언의 전말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본 문서에 따르면 상언의 대표자(言頭)는 이중삼이며, 당시 이조판서는 閔泳奎, 동부승지는 宋鍾億, 도승지는 金春熙였다. 유동식의 일기에는 상언 이후 누차 이조판서의 집을 방문하여 결과를 탐문하고 승정원 서리에게 일종의 격려금을 지급하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이런 노력의 결과 유복기는 1893년 8월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동지의금부사에 추증되었다. 추증의 사유는 〈忠節卓異〉였다. 본 문서는 전주유씨 안동파의 유복기 현양사업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관련문서는 告身(No.10)과 日記(No.2)이다.
다. 輪告州里書(通文 N0. 12)
신학문과 신학교의 폐단과 병통을 설파한 글. 저자는 柳鼎熙(1867-1933)이다. 정확한 시기는 미상이나 1920-30년대로 파악된다. 저자는 신학문을 亡國·無倫의 조짐으로 배척하는 한편 주변의 인사들에게 신학에 물들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다. 저자는 신학을 주창하는 인물에 대해 〈隣里三五子〉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이를 통해서 볼 때 이들은 전주유씨 출신의 자제들일 가능성이 크다. 사실 전주유씨에서는 柳寅植(東山)과 같은 신학자로 인해 신학·구학의 갈등에 따른 상당한 불화가 초래된 것도 사실이다. 본 문서는 바로 유학적 가르침을 묵수하려는 가문내 기성 세대들의 입장을 천명한 글이라 할 수 있다.
라. 東方五賢筆(書簡通告類 N0.5)
동방오현·사림오현으로 칭송된 金宏弼·鄭汝昌·趙光祖·李彦迪·李滉의 필첩이다. 동방오현필로 표제되어 있으나 성첩의 시기와 주인공은 미상이다. 필적의 내용은 모두 간찰로서 5현의 친필로 보아 무방하다. 각 필적의 상단에 해당자의 성명·사승관계를 간단하게 기록하였다. 서체는 간찰의 일반적인 형태인 초서체이다.
마. 岐陽廚舍重修日記(置簿紀錄類 N0.13-1)
1839년(헌종 5)~1840(헌종 6) 기양주사를 중수할 당시의 공사 일정과 경비 내역을 기록한 문서. 본 문서에 따르면, 기양주사는 1834년(순조 34)의 수재로 인해 소실되자 1839년 5월의 문회에서 중수가 결정된 것이다. 기양주사는 재사 성격을 지닌 기양리사의 부속 건물이다. 중수의 책임자인 성조도감에는 柳琢文·柳泰文이 선정되었다.
일기에는 개기·입주상량의 일시, 목수와 부대 인력의 동원 현황, 물자의 조달 상황이 자세하게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유복기의 후손으로서 중수 현장을 방문한 인사들의 입출입 사항도 병기하고 있다. 본 일기에서 한가지 주목할 사실은 공사 현장에 軍丁·役丁이 동원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임금과 무관하게 동원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들이 어떤 성격의 존재들이며 기양리사, 전주유씨와는 어떤 관계에 있는지는 미상이다. 보다 심층적인 연구가 요망된다. 경비내역에 대해서는 그날 그날의 지출 상황을 날짜별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있어 전반적인 흐름을 이해하기에 용이하다.
바. 分賑文簿(置簿紀錄類 N0.15)
1756년(영조 32) 흉년을 당하여 전주유씨 문중에서 문족들을 대상으로 한 진휼의 전말을 기록한 문서이다. 이는 국가의 공식적인 진휼이 아닌 전주유씨 문중에서 자체적으로 실시한 私賑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당시 분진의 책임자(都監)는 柳台齊(1699-1767), 실무담당자(有司)는 柳正鉉·柳興源이었다. 분진을 위한 물력은 岐陽書堂別庫·大祭位·宗家祭位 등 문중의 공비를 중심으로 일부 부유한 일족들의 지원을 통해 조달되었다. 이렇게 조달된 물력의 총액은 백미 4석 3두, 정조 3석 7두, 전문 46양 4전이었다.
분진일기에 따르면 분진 활동은 동년 3월 7일을 시작으로 3월 18일, 3월 28일, 4월 8일, 4월 18일, 4월 28일, 5월 8일, 5월 18일 등 10일 간격으로 8차에 걸쳐 이루어졌다.
진휼의 양은 문중의 원로와 일반 문족을 구분하여 전자에는 백미 1두, 후자에는 정조 1두를 지급한 것으로 나타난다. 수혜 대상은 대략 20여 家口로 정리된다. 본 문서에는 가구의 명칭과 수혜량을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어 그 상황을 세세하게 확인할 수 있다.
맨 마지막에 수록된 분진절목(6개조항)에는 진휼에 따른 물력의 조달, 임원의 선정, 진휼의 대상, 진휼의 간격과 시한 등에 대한 규정이 상세하게 마련되어 있다. 여기에 따르면 분진의 시한은 春收까지로 한정하고 있으며 물력의 부족으로 인해 특별이 어려운 문족만을 진휼의 대상으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본 문서는 문중조직을 통한 사적 진휼의 대표적인 사례라는 점에서 사회사적 가치가 높은 자료이다.
사. 日記類(其他類 N0.1)
(1) 好古窩考終時日記
원명은 〈先師古窩先生考終時日記〉이다. 작성자는 柳嘉鎭이며, 古窩는 호고와 柳徽文(1773-1832)을 말한다. 고종은 5복의 하나인 考終命을 말하는데, 천수를 누리다 편안하게 생을 마감한다는 의미이다. 유휘문은 대산 이상정 문하의 3고제로 칭송된 유장원의 문인으로 학덕을 겸비하여 관찰사·암행어사에 의해 누차 천거된 인물이다. 특히 그는 출중한 학문으로 당시 영남학파에서 명성이 높았으며, 19권 10책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好古窩集』을 남겼다.
이 자료는 유휘문의 사망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기록한 것이다. 초본 자료로서 문서가 박락되고 글자의 마모가 심한 편이다. 그러나 고종일기의 구체적인 사례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2) 柳東植日記
유동식의 일기로서 수록 시기는 1892년 8월 12일에서 9월 17일까지이다. 임란 당시 안동 의병장으로 활동한 柳復起의 포증을 위한 상언의 전말을 날짜별로 기록한 것이다. 본 서에 수록된 告身(N0.10)·啓目에 따르면, 1892년에 포증을 상언하여 이듬해인 1893년에 가선대부에 추증된 것으로 나타난다. 이 일기는 바로 1892년 상언 당시의 일기이다. 본 문서는 초서로 기록되어 있으며 중간 중간 마모된 글자가 있으나 전체적인 흐름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은 없다.
일기에는 고종의 陵行을 기하여 상언을 기획·추진하는 상황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즉 자료의 수집, 편집회의, 상언의 초본작성, 대표자(言頭)의 선정, 상언 당일의 상황이 날자별로 정리되어 있다. 자료의 성격상 지방 유생들의 이른바 〈疏廳日記〉와 흡사하다.
상언은 8월 20일 묘시 고종의 明陵(숙종릉) 행차를 기하여 용의주도하게 이루어졌다. 이후 유동식 등은 성균관·재동을 거점으로 이조판서의 집을 방문하여 상언의 결과를 누차 탐문하는 한편 승정원의 서리에게 뇌물을 주기도 하였다.
한편 일기 앞 부분의 치부는 상언에 따른 경비지출장부에 해당한다. 이를 통해서 볼 때 엄청난 경비가 지출되었음을 알 수 있다. 본 문서는 상언의 이면사를 파악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자료임에 분명하다.
(3) 不祧廟建立日記
1922년 전주유씨 수곡종택의 家廟를 중건할 당시의 일기이다. 일기의 작성자는 유정희이며, 수록시기는 1922년 2월~7월이다. 문서의 원래 명칭은 미상이나 내용을 고려하여 不祧廟建立日記라 이름하였다.
주자가례에 따르면, 가묘에는 4대의 신주를 봉안하고, 불천위의 경우는 별묘를 건립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별묘를 건립하기보다는 가묘 내에 불천위를 함께 봉안하였다. 이럴 경우 西上法에 따라 불천위→고조→증조→조→고의 순으로 위패가 배열되었다. 유복기는 임란에서의 공이 인정되어 불천위가 되었지만 별묘는 건립되지 않았다. 따라서 그의 위패 역시 자손들과 함께 가묘 내에 봉안되었다. 이 점에서 수곡종택의 가묘는 부조묘라 할 수 있다.
수곡종택에 가묘가 최초로 건립된 시기는 미상이지만 본 문서에 의거할 때 유복기의 5세손 유원현(1674-1755)이 가묘를 중건한 것은 분명하다. 이후 약 200년이 경과하여 유정희에 의해 다시 중수되기에 이른 것이다.
본 일기는 개기·입주·상량·감실제작·이안 등 가묘 건립과 위패 이안의 절차를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는 기와·목재 등 건립에 사용된 자재, 동원된 인력, 역사를 주관한 임원(유사)들의 역할과 명단, 상량문의 찬자와 내용 등이 명시되어 있다. 따라서 본 자료는 가묘 건립의 과정과 실상은 물론이고 건축사적인 면에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본 서에 수록된 〈家役時日記〉(1934­1936) 역시 관련 문건의 하나로서 중요시 된다.
아. 東國地圖(其他類 N0.4)
柳復起(1555~1617)가 모사한 東覽圖 계열의 8도지도이다. 전주유씨 가전에 따르면 임진왜란(1592) 당시 의병용으로 제작되었다고 한다. 경기도·충청도·황해도·강원도·경상도·전라도·평안도·함경도 순으로 수록되어 있으며 각 도면의 상단에는 역도·첨사·만호의 소재지를 기록하였다. 도면에는 감영·병영·진영의 소재지와 군현·산·천·해가 채색으로 표기되어 있으나 채색의 형태는 각 도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울릉도가 강원도에 수록되어 있으며 獨島는 竹島로 표기되어 있다.
각 도면의 배면에는 각 군현의 노정과 동서남북 사방으로 인근 군현과의 거리를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그리고 이용의 편의를 위해 군현의 주요 별칭을 아울러 기록하고 있다. 함경도의 배면에는 각 군현의 노정은 물론 〈中朝各省道里〉·〈中朝進貢路程〉을 첨부한 것이 특징이다.
다만 본 지도는 유복기 당대의 모사본이 아니라 그의 손자 柳榰의 주선을 통해 중수된 것이다. 이런 사실은 지도의 말미에 수록된 유지의 발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유지는 본 지도의 모사자가 자신의 조부 유복기임을 분명하게 밝힌 다음 이를 보수하게 된 내력과 공정을 아주 자세하게 기록하였다. 발문에 따르면, 유복기 수택본은 약 150년 이상이 경과하면서 종이가 파락되고 자획 또한 상당수 마멸되었다. 이에 후손들이 이를 改圖하려 했지만 방법을 몰라 그대로 방치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1689년(숙종 15) 유지가 능주목사로 부임하여 글씨와 모사에 능한 李應梅라는 下吏를 만나 그에게 보수를 부탁한 것이다. 따라서 현재의 동국지도는 유복기의 모사본을 저본으로 하여 이응매가 중수한 것이다. 유지의 발문은 조선후기 지도 모사의 공정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