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장처 고문서 특징

  • 소장 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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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淑景(동아대학교 사학과 박사과정 수료)
현재 朝鮮後期의 書院 연구는 주로 전국적인 명망과 위세를 가진 賜額書院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물론 이러한 연구 경향의 일차적 요인은 이들 서원에서는 비교적 풍부한 古文書들이 발굴된 것에서 찾을 수 있다。이에 반해 비록 사액서원이기는 하지만、지역단위의 서원 곧 일반 사액서원들은 현재 그리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 근본적인 요인은 이들 지역단위의 사액서원에서 발굴되는 고문서가 양과 형태면에서 다양하지 못한 데에 있다고 하겠다。따라서 서원 연구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서도 지역단위 서원의 고문서를 발굴하는 작업은 시급하다고 하겠다。
물론 1970년대 말 이후부터 각 지역에 산재한 고문서를 수집․정리하여 영인하는 작업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이들 작업은 주로 수집한 고문서를 정리하여 그 내용을 해제하는 것이 중심이 된다。따라서 수집 과정과 수집 고문서의 보존상태 등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관심이 소홀하다。이로 인해 고문서의 수집 경위 및 과정에 대하여는 의외로 지식이 축적되어 있지 못하며、또한 수집 이후에 고문서의 보존에 대해서도 관심이 적을 수밖에 없다。특히 비전문가인 소장자가 고문서를 계속 보관할 경우에는 자료의 훼손이라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라고 하겠다。 용산서원 고문서의 해제를 수집 경위 및 과정、 그리고 수집 고문서의 정리 및 보존 등의 문제에서 출발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龍山書院의 고문서는 형태면에서 다양하고 양적으로 방대하다。물론 이들 고문서도 다른 서원의 고문서와 별반 차이가 없다。그렇지만 龍山書院이 전국적으로 명망과 위세를 지닌 서원이 아니라 지역단위의 일반 사액서원인 점에 주목할 경우、이들 고문서의 사료적 가치와 함께 그 특징도 드러날 것이다。곧 이는 조선후기 서원 연구의 공백을 메울 수 있다는 점과 함께 용산서원의 고문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는 뜻이다。이것이 慶州의 伊助 崔氏와 용산서원의 관계 및 용산서원 고문서의 사료적 가치와 특징 등을 언급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배경이다。다만 이 글은 용산서원의 고문서 전반에 대한 설명을 목적으로 하므로 여기에서는 전체 고문서를 내용별로 분류하여 논의하는 것을 중심으로 삼았다。
1990년 2월에 필자는 석사학위 논문의 지도교수인 李勛相 선생으로부터 복사본의 󰡔伊助洞案󰡕이라는 자료를 받았는데、이것이 바로 필자가 용산서원의 고문서를 수집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였다。그런데 이 자료를 처음으로 입수한 분은 金仁順씨였다。천주교 신자였던 그는 19세기 천주교 박해 때에 신자들의 은신처였던 慶州 및 彦陽지역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었다。그러던 중에 이 지역에서 흘러나온 고문서를 입수하였다。그녀는 李勛相 교수(東亞大 史學科)에게 입수한 고문서의 내용을 문의하였다. 이훈상 교수는 이 고문서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면서 이를 토대로 해당 지역을 조사-연구하여 볼 것을 권유하였다。
그리하여 필자는 석사학위 논문의 첫 출발을 󰡔伊助洞案󰡕의 분석에서 시작하였다。이 작업을 진행하면서 伊助지역에 대한 답사의 필요성을 인식하였다。그래서 이 지역의 답사를 위한 사전준비를 하였다。먼저 1971년에 편찬한 󰡔慶州市誌󰡕에서 伊助가 행정구역상으로 慶州郡 內南面에 위치함을 확인하였다。그리고 󰡔경주시지󰡕의 편찬 당시에도 이조에 慶州 崔氏가 가장 많이 거주하고 있다는 기록을 살필수 있었는데、당시 이것은 갓 연구를 시작한 필자에게는 놀라운 사실로서 받아들여졌다。 이렇듯 최씨 씨족이 특정 지역에 집중-분포된 사실은、그 전에 작성된 󰡔이조동안󰡕의 내용과도 일치한다。곧 󰡔이조동안󰡕에 기록된 이름 가운데에도 경주 최씨가 가장 많았던 것이다。더 흥미로운 사실은 경주 지역의 전화번호부에도 이조 지역에는 최씨가 가장 많이 등재된 사실이다。필자는 우선 전화번호부에서 무작위로 선택한 최씨 한 분과 통화를 시도하였다。여러 차례를 시도한 뒤에야 그 분과 통화를 할 수가 있었다。그런데 공교롭게도 통화를 한 분이 바로 경주 이조 최씨이면서 宗孫이었다。이는 필자에게는 매우 행운이라 하겠다。 통화를 통하여 그 분이 崔埰亮 선생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고、아울러 만날 약속을 하였다。
1990년 4월에 필자는 처음으로 이조 지역을 답사하였다。물론 경주 이조 최씨의 종손인 崔埰亮 선생에게 이조의 위치를 정확히 들었으므로、비교적 쉽게 이조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바로 이조 최씨의 宗家를 방문하였는데、예상했던대로 종가는 그 마을에서 규모가 가장 큰 집이었다。무언가 큰 소득이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그러나 그러한 예감은 적중하지 않았다。그 이유는 사전에 종손에 대한 정보를 충분히 파악하지 못하였던 때문이었다。필자는 그 곳에 도착해서야 종손이 교직에 종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이다。그래서 필자는 종손이 근무하는 학교를 방문하였고、이에 종손은 필자를 반갑게 맞이하여 주었다。그리고는 필자를 자신의 집으로 안내하였다。그렇지만 종손은 수업 때문에 필자와 대화를 오래 나눌 수 없다고 하면서、필자에게 󰡔潛窩先生實紀󰡕 한 권을 건내 주었다。이 책은 이조 최씨의 入鄕祖인 貞武公 崔震立에 대한 기록이었다。아쉬운 마음에 그 지역을 둘러보면서 최진립을 배향한 용산서원을 찾게 되었다。그렇지만 이 서원의 내부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다만 바깥에서 건물의 외형만을 보고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이조 지역에 대한 1차 답사는 이렇게 별 다른 소득없이 끝나고 말았다。
필자가 이조지역을 다시 찾은 시기는 그해 9월이다。1차 답사로부터 5개월이나 지난 때였다。사전준비의 소홀로 인하여 성과를 얻지 못했던 1차 답사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이번에는 답사 준비를 충실히 하려고 애썼다。그래서 먼저 조사할 항목을 미리 작성하였다。발견이 예상되는 고문서、이조 최씨 家系에 관한 口傳 등이 그 대표적인 항목이다。그리고 종손에게 흥미를 불러 일으킬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이조동안󰡕도 준비하였다。아울러 종손과 많은 이야기를 나눌 작정으로、공휴일을 택하여 방문하기로 계획하였다。
2차 답사에서 종손인 崔埰亮 선생을 만난 필자가 가장 먼저 한 일은 그에게 󰡔이조동안󰡕을 보여주면서 그 내용을 설명하는 것이었다。그러면서 필자는 이 가문을 조사하는 이유를 이야기하였다。종손은 󰡔이조동안󰡕에 先代들에 관한 기록이 많은 점에 대해 흥미를 보이면서、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족보와 그 내용을 대조해보자고 하였다。󰡔이조동안󰡕과 族譜의 내용을 대조해 가면서、필자는 자연스럽게 종손에게 이조 최씨 가문의 내력에 관한 口傳을 들을 수 있었다。아울러 용산서원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필자는 용산서원에 대해 처음으로 자세한 정보를 얻게 되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필자는 종손에게 혹시 이 가문에서 소장하고 있는 고문서들이 없는지를 물었다。이러한 물음에 대한 종손의 답은 간단했다。이전에는 많았는데 거의 모두 없어졌다고 하면서、특히 6․25전쟁 때에 많은 양의 문서들이 소실되었다고 하였다。현재 남아 있는 것은 단지 漢籍뿐이라고 하였다。아울러 이 한적에 대한 조사는 이미 몇년 전 영남대학교에서 실시했다는 귀띔도 하였다。그러면서 보관중인 고문서 5점을 보여 주었는데、이 고문서들은 牒呈이었다。필자는 이 고문서의 내용을 노트에 옮기는 한편、혹시나 하는 마음에 한적들을 살펴보았다。그렇지만 이번에도 별다른 소득을 얻지는 못하고 족보를 빌려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이 날도 시간이 너무 늦어서 용산서원을 조사하지는 못하였다。
필자는 이조지역에 대한 1, 2차의 답사에서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한 셈이다。이들 두 차례의 답사는 종가를 중심으로 이루어졌고、여기서 고문서의 발굴을 기대한 것이다。그래서 10월에 3차로 이조를 답사하면서、이번에는 용산서원을 목표로 하였다。필자는 종손인 崔埰亮 선생을 만나자마자 바로 용산서원을 조사할 수 있도록 부탁하였다。종손은 이러한 필자의 부탁을 흔쾌하게 받아주었다。1、2차의 답사과정에서 종손은 필자의 작업을 충분히 인식한 것이다。그렇지만 종손은 용산서원에도 고문서는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필자는 처음으로 용산서원의 내부로 들어갈 수 있었다。서원의 내부에서 본 건물을 조사하였지만 고문서를 발견하지는 못하였다。그래서 나오려다가 서원에 부속한 건물이 눈에 띄어서 종손에게 그 용도를 물었는데、그 곳은 서원을 관리하는 사람이 기거하는 곳이다。그렇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 곳의 방에 들어가보니 다락방이 하나 있었다. 종손은 다락방에는 서원의 행사시에 사용하는 물건을 보관하는 곳이라고 하면서 고문서는 없다고 하였다。그렇지만 필자는 이 곳을 조사하고 싶었다。 그래서 다락방을 열어 보았는데、뜻밖에도 거기에서 고문서가 들어 있는 나무상자와 광주리를 발견한 것이다。 사실 지금 생각해보아도、필자에게 그 순간은 매우 흥분스러웠다。당시 종손도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필자는 종손과 함께 발견한 고문서를 검토하면서 오랜 시간을 보냈다。 종손은 검토과정에서 가문에 대한 기록과 先代의 이름을 발견하자 매우 흥미로운 반응을 나타냈다。이리하여 어둠 속에 묻혀 있던 용산서원 소장의 고문서가 빛을 보게 된 것이다。필자는 종손의 허락을 얻어 2차 답사 때의 고문서 5점과 함께 이때 발견한 고문서를 빌릴 수 있었다。
필자는 이들 고문서를 정리-분석하여 1992년에 석사학위 논문을 완성하였다。이후에도 이 지역에 대한 조사는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이훈상 선생은 宗家 이외에 이조 최씨의 후손들도 고문서를 소장하고 있을 가능성에 주목하였다。그렇지만 이들 후손을 모두 찾아 다닌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시간은 차치하더라도 경비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택한 방법이 해마다 1월에 행하는 문중 제사에 이훈상 선생과 필자가 직접 참여하는 것이다。제사가 끝나면、종손인 崔埰亮 선생이 필자를 문중의 관계자들에게 소개해 주고、이 과정에서 문중의 어른들에게 혹 소장하고 있는 자료가 있다면 필자에게 열람을 해주도록 하는 부탁도 잊지 않았다。이미 종손이 필자의 학위논문을 문중의 관계자들에게 보여 주었으므로、그 효과는 매우 대단하였다。바로 필자는 문중의 제사에 참석한 분에게서 경주 최부자집으로 알려진 이조 최씨 가문의 東派에도 고문서가 있다는 정보를 들을 수 있었고、아울러 종손의 도움으로 그 문서를 열람할 수 있었다。그런데 뜻밖에도 그 고문서들은 이조 최씨의 가문에 관한 것들이었다。지난 세 차례의 답사에서도 발견하지 못했던 고문서들을 얻는 결실의 순간이었다고 하겠다。 이조 지역의 고문서 발굴 작업은 또 다른 형태로 지속되었다。작은 성과의 하나지만 1997년 日本에 연구차 체류중인 이훈상 선생이 東京의 東洋文庫에서 경주 최씨 가문의 戶口單子 2점을 찾아낸 사실도 빼놓을 수 없다。
(二) 수집 고문서의 정리와 보존
① 정리와 복사
필자는 방대한 양의 고문서를 발견했다는 기쁨도 잠시밖에 가질 수 없었다。필자 앞에는 이들 고문서를 어떻게 정리해서 보존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놓여 있었던 것이다。더욱이 방대한 고문서를 과연 빌려갈 수 있을까 하는 문제도 작은 고민이 아니다。그런데 고문서를 빌려가는 문제는 의외로 쉽게 해결되었다。이 문제에 대해 종손인 崔埰亮 선생이 흔쾌히 허락을 해주었던 것이다。선생은 젊은 시절에 서울에서 교직생활을 하다가 바로 이 해에 낙향하였다。漢學에도 조예가 깊은 선생은 종손으로서 문중의 현양사업을 구상하고 있던 중이었다。바로 이러한 시기에 필자는 선생과 인연을 맺은 것이다。
종손인 崔埰亮 선생은 고문서의 양이 방대하므로 몇 차례에 나누어서 가져가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그래서 필자는 이들 고문서를 여러 차례에 걸쳐 이훈상 교수의 연구실로 옮겼다。옮기는 과정에도 고문서의 상태를 감안하여 신중하게 처리하였다。이들 고문서의 상태를 점검한 이훈상 선생은 고문서 정리를 위한 몇가지 방향을 설정하였고、이에 따라 필자는 고문서를 정리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발견 당시에 용산서원 소장 고문서는 상태가 매우 좋지 못하였다。문서가 만들어진 시기에 따라 차곡차곡 정리된 것이 아니고、일정 순서 없이 얽히고 섥힌 채로 있었다。나무상자와 광주리에 담긴 이들 문서들은 그 대부분이 쥐똥과 함께 뒤섞여져 있었다。어떤 고문서는 벌레가 갉아 먹기까지 하였다。또한 표면에는 별 이상이 없던 고문서도 안을 펼치자 심하게 훼손되어 있었다。
필자는 이런 상태의 고문서에서 먼저 먼지를 털어내고 이물질을 제거하는 작업부터 시작하였다。그리고는 이어서 구겨진 문서들 하나하나를 조심스럽게 다림질을 해서 펴나갔다。이러한 작업과정에서 항상 가장 중요하게 고려한 점이 문서의 원형을 보존한다는 것이다。그래서 고문서가 발견된 당시의 상태도 염두에 두었다。가령 발견 당시 고문서들이 어떤 봉투에 들어 있었다면、이들 문서를 정리한 뒤에도 반드시 원래 상태대로 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일차적인 정리작업이 끝나자、다음에는 정리한 고문서의 목록 작성과 함께 이를 모두 복사하였다。 복사작업은 일차적으로는 연구에 이용하려는 목적에 있었다。 그렇지만 고문서를 민간 차원에서 보관하다가 도난․화재 등으로 잃어버릴 염려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였다。물론 복사과정에서도 고문서의 원형을 잃지 않도록 하고 아울러 훼손되지 않도록 주의하였다。이 과정에는 수 개월의 기간이 소요되었다。
② 고문서 보존을 위한 노력과 景慕閣의 건립
필자는 정리한 고문서를 종손인 崔埰亮 선생에게 약속대로 반환하였다。종손은 정리된 고문서를 보고는 매우 감격하였다。필자 또한 기쁜 마음이었다。종손은 고문서의 보존방법을 고민하다가 마침내 장서각을 짓기로 결정하였다。당시 종손은 조상의 현양사업을 추진하고 있었던 때여서 이 문제를 쉽게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이다。그래서 1992년에 종가의 사랑채 옆에 장서각을 새로 건립하고 이를 景慕閣이라고 칭하였다。 1993년 1월에 종손과 필자는 여기에 500여권의 전적과 고문서를 정리하여 전시하였다。아울러 유물과 함께 주변의 마을주민들이 기증한 민속품도 진열하였다。지역의 주민들도 이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그래서 이 경모각은 지역주민과 함께 하는 공간으로 기능하게 되었다。현재 이 곳에는 일반인과 학생들은 물론 경주를 찾는 일본 관광객들도 한번쯤은 방문하고 있다。
이에 덧붙여 종가의 고택인 忠義堂이 지방유형문화재로 지정받았다는 사실도 언급할 필요가 있다。이는 충의당의 연혁을 입증하는 고문서의 발굴로 인하여 가능했기 때문이다。물론 고문서 가운데 몇 점도 문화재로 지정을 받았다。
끝으로 이들 고문서의 보존을 위한 노력 및 결실과 관련하여 한 가지 더 언급해야 할 점이 있다。2000년이 저물어 가는 시점에서 이들 자료를 영인하여 출간하는 작업이 실현되었는데、이것은 필자는 물론 종손인 崔埰亮 선생과 이훈상 선생 모두의 오랜 염원이기도 하였다。이에 앞서 崔埰亮 선생과 이훈상 선생은 이를 영인、출간하기 위한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여러모로 노력하였다。그렇지만 오랫동안 뜻을 이루지 못하였는데 다행히도 韓國精神文化硏究院에서 출간 작업을 맡기로 하였다。아울러 정구복 선생 및 이 작업의 실무를 담당한 安承俊 선생의 고마운 노력도 짚고 넘어가야 하겠다。
(一) 慶州 崔氏 家門의 伊助 地域 入鄕과 龍山書院의 설립
慶州 崔氏 家門이 伊助 지역에 入鄕하여 在地士族으로서 생존과 성장을 해나가는 과정은 대체로 세 시기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이는 용산서원의 연혁과 주도집단의 변화 과정과도 대략 일치한다고 하겠다。
첫 번째는 경주 최씨인 崔震立이 伊助지역에 입향하여 활동한 시기이다。이 가문은 고려시대에는 吏族이었는데、고려말에 司成公인 崔汭代에 사족으로 신분상승을 하였다。원래에는 皇五里(현재의 皇五洞)에 세거하다가、崔得汀(최진립의 曾祖)대에 見谷 龜尾洞으로 이거하였다。그러다가 貞武公인 崔震立대에 이르러 거주지를 다시 이조 지역으로 옮겼다。이후 이들 가문은 최진립을 入鄕祖로 하는 이조 최씨라고 불리어졌다。
최진립이 이조로 이거한 배경은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곧 그의 아버지인 崔臣輔가 이 지역에 따로 가옥을 가지고 있었던 점、이들 가문이 伊助의 天龍寺에 속한 전답을 소유하였던 점、그리고 최진립의 外家가 이조였다는 점 등이 그러한 것이다。특히 이 가운데 외가를 따라서 거주지를 이동한 점은 조선전기 사족들의 전형적인 사례에 속한다고 하겠다。입향조인 최진립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생 崔繼宗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는데、이때 경주와 彦陽 등지에서 군공을 세웠다。그래서 최진립은 宣武原從功臣에 올랐다。이후 그는 水軍統制使를 역임하기도 하였다。
(一四)
두 번째는 入鄕祖인 貞武公 최진립을 기리는 祠宇를 건립하였던 시기이다。최진립의 후손(貞武公派)은 5派로 나누어졌다。곧 宗派、東派、西派、辛乙派、里派 등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종파가 최진립대 이후 현재까지도 이조에 거주하여 오고 있다。비록 이들 종파가 최진립의 사우를 건립하는 데에 일정한 역할을 담당하기는 하였지만、사우를 건립한 주체는 남면의 사족들이 결성한 面約組織이었다。그리하여 1699년에 최진립의 사우를 건립하였다. 물론 사우를 건립하는 데에는 경주부의 府尹과 주변 지역 사족의 후원도 있었다。
세 번째는 祠宇에서 賜額書院으로 성장하는 시기이다。1710년에 崇烈祠라는 사액을 받게 되면서 그 명칭을 용산서원으로 명명하게 되었다。초기에 용산서원의 운영에 참여한 집단은 龍山書院의 󰡔考往錄󰡕에 잘 나타나 있다。이에 의하면、초기에는 용산서원의 운영에 경주부의 전체 사족과 함께 鄕任들까지도 참여하였다。그러다가 18세기 중엽 이후가 되면서부터 남면의 사족을 중심으로 서원의 운영이 이루어졌다。특히 그 가운데에서도 이조 최씨의 宗派가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이들은 선대와는 달리 중앙의 관직자를 배출하지는 못하였다。그렇지만 용산서원의 운영을 주도해나가는 방법으로 이 지역의 지배적인 사족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였다。
(二) 龍山書院 古文書의 특징과 사료적 가치
비록 용산서원이 崇烈祠라는 사액을 받기는 하였지만、道山書院이나 玉山書院 등과 같이 전국적인 명망과 위세를 지닌 서원은 아니었다。역사적으로 명망있는 인물이 아닌 이조 최씨의 입향조를 배향한 점、서원의 운영이 이조 최씨의 종족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점、그리고 지역적 규모도 경주 南面을 그 한계로 하였던 점、전국적으로 명망을 지녔던 사원에 비해 경제적 기반과 규모가 작은 점 등에서 그러하다。더욱이 용산서원은 대원군이 개혁정책의 일환으로 단행한 서원철폐 때에 그 운명을 다하였다。곧 용산서원은 조선시대에 일반적인 규모를 가진 사액서원의 한 유형에 해당한다고 하겠다。이런 점에서 볼 때、용산서원에서 발견된 다양한 양의 고문서들은 사료적 가치가 크다고 하겠다。이는 기존 서원 연구의 공백을 메운다는 점에서 특히 그러하다。
용산서원에서 발굴한 고문서는 종류면에서 다양하고 양적인 면에서도 비교적 풍부하다고 하겠다。물론 용산서원에서 발굴된 고문서 가운데 대부분은 타 지역의 서원에서 발견한 고문서의 형태와 별반 차이가 없다。가령、서원의 조직에 관한 고문서 、향촌사회의 운영 및 질서에 관한 고문서 、서원의 경제관련 고문서 、전답의 경영방식에 관한 고문서 、노비에 관한 고문서 、서원의 중건이나 보수 및 이건에 관한 고문서 등이 그러하다。그리고 서원의 일지에 해당하는 󰡔考往錄󰡕도 남아 있다。그렇지만 용산서원이 지역단위의 사액서원인 데에 초점을 둘 경우에、용산서원의 고문서는 그 특징이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난다고 하겠다。이럴 경우에 󰡔고왕록󰡕이나 󰡔龍山書院任員名單󰡕과 같은 고문서에서 이 지역의 주도적인 가계가 변화해 나가는 양상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또한、방대한 양의 牒呈과 書目에서도 이들 경주 남면의 사족이 지역민 지배의 주도권을 두고 지방관과 권력의 역학관계를 어떤 방식으로 모색하였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덧붙여、용산서원의 고문서에는 이 지역 사족들이 촌락을 지배한 방식을 보여주는 다양한 자료들이 포함되어 있는 점이 주목되는데、가령 洞案、鄕案、面案 등이 그 대표적인 자료이다。
(一) 書院의 운영과 운영집단을 보여주는 고문서
○ 󰡔考往錄󰡕 : 용산서원 󰡔고왕록󰡕은 1696년에서 1744년까지、1793년에서 1871년까지로 현재 두 책이 남아 있다。이 책은 용산서원 설립 시기부터 서원 운영과 관련되는 제반 사항을 日誌 형식으로 기록한 것이다。특히 사액받기 이전의 祠宇 설립의 주도 집단과 배경、사액받는 과정、그리고 용산서원으로 명명되기까지의 과정 등을 자세히 적고 있다。이 과정에서 서원에 현물을 기부한 사람과 그 내용도 기록하고 있다。또한 토지、노비 뿐 아니라 서원에서 殖利한 것 등 서원 경제와 관련되는 내용도 세밀하게 기록하였다。이는 토지매매문서인 󰡔明文󰡕이 19세기의 것이 많은데 비해 17세기 말 부터 19세기 말까지의 소유 토지 규모를 알 수 있어 이 서원의 경제기반을 파악하는데 유익하다。그러므로 이 책은 서원의 전반적인 상황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것이다。
○ 󰡔龍山書院任員名單󰡕 : 1766년에서 1844년까지 서원의 임원 곧、院長과 有司들의 명단을 기록해 놓은 것이다。이들 院任의 姓氏별 분포를 보면 서원 발전 초기 단계에는 慶州府 사족 전체가 참여함을 알 수 있다。그런데 18세기 중엽 이후에는 서원의 운영집단이 南面 사족 중심으로 변화한다。 특히 그 중에서도 배향자의 후손인 伊助 崔氏의 참여가 두드러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이를 통해 이조 최씨 가문이 서원을 중심으로 이 지역에서 자신들의 명망을 유지해 나간 사실을 볼 수 있다。
(二) 書院의 경제기반과 재정 운영 상황을 보여주는 고문서
① 書院의 인적자원과 관련된 고문서
○ 󰡔龍山書院所屬案󰡕󰡔龍山書院保率案󰡕 : 현재 확인되는 󰡔龍山書院所屬案󰡕은 8책이며、󰡔龍山書院保率案󰡕은 2책이다。이 案들은 1762년 부터 1807년 1월까지 용산서원 소속의 良丁、下典、奴의 실태를 기록해 놓은 것이다。이는 서원의 유지와 경영을 위한 중요한 인적자원이다。기록된 형태를 보면 먼저 保率들의 이름을 기입하고 그 아래 거주지를 명기하면서 도망한 자도 표시를 해 놓았다。이 案을 분석해 보면 18세기 이후 용산서원의 양정 및 노비의 수는 계속 증가하여 1762년 59명에서、1807년에는 114명으로 거의 두 배 가까이 증가한 사실을 알 수 있다。그리고 용산서원 소속 奴의 경우는 도망한 사례를 별로 찾아볼 수 없다。또한 용산서원에 소속된 양정이나 奴는 주로 서원이 소재한 남면 지역에 집중-분포되어 있는 현상을 볼 수 있다。특히 현재 자료가 확인되는 유명서원에 󰡔保率案󰡕 이 남아 있지 않은 상황을 고려할 때 서원의 院屬 실태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
○ 󰡔龍山書院院生案󰡕 : 용산서원에는 10여책의 󰡔龍山書院院生案󰡕이 있다。이 책은 용산서원의 額外院生의 명단을 거주지와 함께 기록하여 놓은 것이다。院生은 이미 잘 알려진 바와 같이 額內院生과 額外院生으로 구별된다。서원의 원생은 원래 靑襟錄에 들어 있어 額內、額外의 구분이 없었다。이러한 구별이 언제부터 생겼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肅宗 이후 기록에서 보인다。額外院生의 수가 늘어나자 1711년(肅宗 37)에는 賜額書院의 경우 20명으로 인원을 제한하였다。이들은 避役을 목적으로 書院에 입속한 자들이다。용산서원 원생의 경우、1800년 이후 규정된 원생수보다 10명이 많은 30명을 확보하고 있었다。이들 원생들의 거주지는 대부분 경주 남면 일대에 집중되어 있다。이것은 원생이 서원의 중요한 인적 기반으로 국가의 양역확보문제와 관련하여 서원의 원생확보에 대한 관심을 잘 보여준다。
○ 󰡔龍山書院奴婢案󰡕 : 현재 2책이 남아 있으나 干支만 기록되어 있어 정확한 연대는 알기 어렵다。다만 노비의 이름을 󰡔考往錄󰡕과 󰡔龍山書院所屬案󰡕에 나타난 노비명과 비교하여 18세기 후반으로 추정하였다。여기에는 이들의 거주지도 함께 기록되어 있다。
○ 󰡔淸風樓營建日記󰡕 : 1778년 용산서원에서 淸風樓의 건립 과정을 日記 형식으로 기록한 것이다。여기에는 청풍루를 건립할 때 동원한 良丁 및 下典을 기록하고 있다。또한 이 과정에 관아에서 협조한 사항도 보인다。
○ 󰡔奴婢明文󰡕 : 용산서원에는 10여건의 노비 매득 문서가 있다。이는 서원에서 매득한 것으로 󰡔考往錄󰡕에 기록된 내용과 일치한다。
② 토지와 관련된 고문서
○ 󰡔本院庚午改量田畓長把謄書󰡕 󰡔田畓記󰡕 : 이 책들은 각각 1812년과 1814년에 작성된 것이다。여기에는 용산서원의 田畓의 규모와 소재지를 함께 기록하고 있다。이 당시 서원 전답은 4結에서 6結에 이른다。이는 국가에서 규정한 免稅田 3결보다 많다。용산서원 전답은 설립초 이후 점차 확대되는데、19세기 초엽에는、18세기 중엽 당시 보다 田은 약 3배로、畓은 약 2․5배로 확대된 양상을 보여준다。19세기 초엽 이후에도 畓은 계속 증가 추세에 있었다。다만 그 규모는 영남지역의 대표적인 서원인 도산서원、옥산서원이 18세기경에 20결에서 40결 정도를 소유한 것을 고려한다면 매우 적은 규모이다。이는 사액 서원으로서 郡縣을 넘어설만한 위세나 영향력을 갖지 못했으나、군현 내 특정 지역 단위의 사족들의 이해의 결집체로서 작용한 서원의 전형적인 규모는 아닐까 생각된다。1814년 당시 서원 소유 전답은 거의 전부가 남면에 집중되어 있었다。이는 서원전을 늘려가는데도 멀리있는 전답보다는 서원이 위치한 지역을 중심으로 토지를 집적해 나간 사실을 알 수 있다。
○ 󰡔願納文󰡕󰡔龍山書院義藏畓結卜記󰡕 : 이 책들은 각각 1745년과 1788년에 작성된 것으로 이조 최씨 문중에서 용산서원에 헌납한 전답을 기록한 것이다。전답의 규모는 대략 3結과 4結 정도이다。이러한 문중의 義藏畓은 서원 토지의 확대에 크게 기여하였다。이를 통하여 이 시기 용산서원의 토지 규모를 알 수 있다。
○ 󰡔土地明文󰡕 : 용산서원에는 약 300여장의 󰡔土地明文󰡕이 소장되어 있다。이 明文은 용산서원 설립 시기인 17세기 후반부터 19세기 후반까지 약 200년간 서원의 토지거래문서이다。이 고문서들은 서원 토지의 소재지、매매사유、전답수량 등 토지 경영의 다양한 면을 보여준다。이들 토지매매문서를 연대별로 분석해 보면 서원의 설립초에는 토지매매가 적고 18세기 이후로 매매가 활발하다。18、19세기 용산서원 토지매매는 거의 대부분 경주에 거주하는 양반 및 양인들 간에 이루어졌으며 매매 대상에 오른 토지는 거의 남면에 집중되어 있다。특히 시대가 내려올수록 서원소재지인 남면의 토지가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한다。
매매 사유는 구체적인 내용이 밝혀지지 않은 거래(要用所致)가 대부분인데、이는 아마도 긴급한 필요에 의한 매매를 의미하는 것이라 믿어진다。그 외에 부채나 移買도 주요 사유가 된다。특히 移買의 경우、남면 토지를 서원 소재지 부근 토지로 바꾸는 것이어서 서원 소재지로의 토지 집중 양상이 다시 확인 된다。
매매 대상에 오른 토지들은 주로 상속 받았거나 매득한 사유지이지만、位土가 거래 대상이 된 경우는 적었다。한편 토지 거래 문서를 통한 거래 규모는、서원 일지에서 확인되는 것보다 훨씬 크다。밭의 매매와 관련된 거래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반면、논의 매매규모는 매우 방대하다。이것은 서원이 주로 논의 집적에 깊은 관심을 가진 사실을 보여준다。
서원에서 18세기 후반 이후 토지를 방매한 사유는 주로 서원 건물과 廟宇 重修、實紀 刊役 등에 사용한 빚을 갚기 위함이 많았다。이 중 서원에서 방매하는 답은 주로 別庫畓、別置畓이었다。또한 최씨 가문 사람들이 畓을 팔 경우 다른 곳보다 용산서원에 대부분 방매하였다。거래 관행과 관련하여 소유 주체에 대한 애매한 처리도 주목된다。서원이 매매 주체임에도 불구하고 타인의 성명으로 처리된 것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③ 서원의 재정 운영과 관련된 고문서
○ 󰡔別置都錄󰡕󰡔別庫都錄󰡕 : 용산서원에는 약 50여권의 󰡔都錄(別置、別庫)󰡕이 남아 있다。이 󰡔都錄󰡕은 干支만 나와 있고、이를 대조하여 파악할 수 있는 단서가 없어 연대 추정이 어렵다。연대 추정이 가능한 것은、거의 19세기 후반 이후의 것이다。서원의 재정 운영은 일종의 서원 경리 장부(󰡔傳與記󰡕 또는 󰡔도록󰡕)를 통하여 전체적인 면을 파악할 수 있다。용산서원에 소장된 회계장부는 크게 別置(임시운영기금)、別庫(특별정규기금)、都錄(정규기금) 셋으로 구분된다。이외에도 서원의 행사때에 작성한 居接、實記刊役、神道碑重修、迎額 등과 관련한 회계도록 등이 남아 있다、이들 󰡔도록󰡕은 서원의 경제 운영과 관련되는 사항을 기록해 놓았다。즉、전년도에 傳受 받은 쌀과 돈을 기록하고 6개월 내지 1년 동안 서원에서 사용한 것을 기록하고 마지막으로 전수되는 쌀과 돈을 기록하였다。이것은 서원의 경제 운영과 규모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그런데 기록 자체가 구체적이지 못하고、작성자 및 작성시기에 따라 기록 방식에 차이가 있다。그리하여 재정운영에 대한 변동상황의 전모를 구체적으로 파악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 󰡔秋收記󰡕 : 용산서원에는 󰡔秋收記󰡕 3책과 󰡔別置秋收記󰡕 2책、󰡔壇所秋收記󰡕 1책이 남아 있는데、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다。󰡔秋收記󰡕는 모두 慶南 蔚山에서 병작한 것을 서원이 거두어 들인 것이다。󰡔別置秋收記󰡕 󰡔壇所秋收記󰡕는 각각 別置와 壇所에서 거두어 들인 것으로 보인다。
○ 󰡔傳與記󰡕 : 서원의 院長 또는 有司 교체시 新舊원장과 유사가 인수인계의 절차로서 작성한 것이다。기재방법은 󰡔도록』과 비슷하나 여기에는 서원의 모든 믈품들이 기록되어 있다。
(三) 書院、官、農民 등 三者의 이해 관계를 보여주는 고문서
○ 󰡔完文󰡕 : 18세기 兵曹, 禮曹, 慶州 府尹이 용산서원에 발급한 것이다。내용은 주로 용산서원 소속 良丁을 役에서 면제하라는 것이다。아울러 용산서원 소속 寺院인 安溪庵에서 紙桶을 만들어 서원에 충당하였는데、이를 침범하지 말라는 것이다。이는 서원의 경제기반과 관련한 서원 士林과 지방 官衙와의 관계를 잘 보여준다。
○ 󰡔龍山書院士林書目󰡕 󰡔龍山書院齋任書目󰡕 : 용산서원에는 약 200여장의 많은 書目이 남아 있다。이는 18세기 초엽 부터 19세기 중엽까지 용산서원 士林、齋任이 府尹에게 올린 것이다。여기에는 서원의 院生、良丁、完護村 등과 관련한 내용 및 良丁과 노비 보호등 특히 서원 경제 기반과 관련된 내용이 다양하다。이것은 서원과 지방관아、농민의 삼자의 관계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이 문서들은 용산서원 소장 고문서 중 특히 주목되는 것으로 서원이 이 지역사회 사림들의 조직체로서 지역민을 지배해 나가는 모습을 잘 보여준다。
○ 󰡔等狀󰡕 󰡔所志󰡕 : 용산서원에 소장된 所志의 분량은 대략 27장 정도 된다。이 가운데 10여장을 제외하고는 훼손된 부분이 많아 연대를 추정하기가 어렵다。연대가 추정되는 문서는 17세기 중엽에서 18세기 중엽까지이다。내용은 土地 免稅에 관한 진정․청원․소송과 서원 소속 額外儒生들을 軍役에 충당하지 말아 달라는 등 다양하다。또한 서원 山長에게 서원 別庫錢에 관한 사항을 올린 것 등도 포함되어 있다。경주 남면지역 民과 서원、官衙와의 관계를 잘 보여준다。
○ 󰡔牒呈󰡕 : 용산서원과 이조 최씨 宗家에 보관된 牒呈은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의 것으로 용산서원 士林이 府尹에게 올린 것이다。내용은 서원 소속 안계암의 지통과 매득 노비를 침범하지 말아 달라는 것이다。여기에는 所志의 내용과 중복되는 것도 있다。
(四) 다른 지역 書院 및 士族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고문서
○ 󰡔通文󰡕 : 용산서원에는 약 60여장의 󰡔通文󰡕이 보관되어 있다。연대는 대략 18세기 초에서 19세기 후반까지이다。慶尙北道에 소재한 鄕校、서원과 사우에서 용산서원에 보낸 것이다。이것은 서원의 사회적 연망과 관계를 잘 보여 준다。
○ 󰡔到記󰡕 : 용산서원에는 약 20여권의 󰡔到記󰡕가 소장되어 있다。이는 용산서원에 내방한 사람의 이름을 기록한 명단이다。여기에는 경주 최씨 가문 사람 뿐 아니라 경주 및 그외 지역에서 서원을 방문한 사람의 명단이 있다。이것은 서원의 인적 교류관계를 보여준다。
○ 󰡔尋院錄󰡕 : 용산서원에 내방한 인사들의 이름을 적어 놓은 명단으로 󰡔到記󰡕와 비슷하다。이름 아래 거주지를 명기해 놓고 있어 경주 지역과 그 주변 지역 사족의 연망과 지방관과의 관계를 알 수 있다。
○ 󰡔書院居接錄󰡕 : 용산서원에 보관된 󰡔書院居接錄󰡕은 3책이다。居接은 서원에서 春秋로 행하는 중요한 행사중의 하나이다。이 때 백일장에 참석하고 방문한 사족들의 이름을 기록해 놓은 것이다。이는 서원의 사회 관계를 잘 보여 준다。
(五) 慶州 兩班社會의 조직과 운영에 관련된 고문서
용산서원에는 󰡔慶州鄕案󰡕 󰡔南面約案󰡕 󰡔伊助洞案󰡕 󰡔鄕飮契案󰡕 등이 소장되어 있다。이것은 양반사회의 조직화를 반영하는 각종 형태의 조직체들의 자료로서 주목된다。󰡔伊助洞案󰡕은 17세기 중반부터 18세기 후반까지 이조 최씨 가문이 중심이 되어 작성된 것이다。󰡔南面約案󰡕은 17세기 중반부터 18세기 초반까지 작성된 것만 남아 있으며、그 가운데 몇 책은 부분적으로 훼손이 되어 있다。이 案을 통해 경주 남면의 유력 사족을 알 수 있다。󰡔慶州鄕案󰡕은 17세기 말부터 19세기 말까지 경주지역의 양반사회를 잘 보여준다。현존하는 󰡔慶州鄕案󰡕은 4책이 있는데 2책은 󰡔慶州鄕校誌󰡕에 수록된 서문만 확인할 수 있고 2책은 서문과 명단이 있다。1679년의 서문을 보면 󰡔경주향안󰡕은 오래 전부터 있었는데 임란때 잃어버리고 1601년에 회원들이 다시 案을 만들었다。1601년 이후 1601-1674년 이전에 기록된 것을 합쳐 4책으로 다시 만들었는데 책자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다。그리하여 이조 최씨 가문의 辛乙派인 崔國樞가 종이를 사서 비단으로 장식한 뒤 1601년부터 1799년까지 인원을 수록하여 1책으로 만들었다。
󰡔鄕飮契案󰡕은 경주 廣齊院 이남의 사족들끼리 계를 결성한 것이다。이러한 거주지역을 중심으로 한 양반들의 각종 조직체는 자신들의 내부질서를 유지함으로써 거주 지역에 대한 지배를 확보한 양상을 보여준다。
그런데 본 고문서집성에는 용산서원과 이조 최씨 가문과 관련한 고문서의 분량이 방대하여 경주 양반사회의 조직과 운영、都錄을 비롯한 경제 관련 고문서들은 게재하지 않았다。
一。本『古文書集成』五十․五十一은 慶北 慶州市 內南面 伊助里 所在、慶州崔氏 宗宅所藏의 古文書를 影印한 것이다。
二。本書의 分類는 본 연구원에서 간행한 󰡔韓國古文書整理法󰡕(尹炳泰 外著、1994)에 따랐다。위 책에서 거론하지 않은 문서는 문서의 양식과 내용에 따라 문서명을 부여하고、해당하는 類에 포함시켰다。
三。일부 중요본 또는 상태가 불량한 문서는 칼라사진을 추가하여 판독이 가능하도록 하였다。
四。문서는 연대순으로 배열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으나、일부의 문서는 그 성격에 따라 내용별로 배열하였다。
五。연도표시는 西紀로 표기하고、괄호 속에 해당 왕의 재위 연도를 표기하였다。
例: 1651(孝宗 2)
六。各 文書에는 文書名、番號、作成年代、規格(세로×가로)을 차례대로 記載하였다。文書規格의 단위는 센티미터(Cm)이다。
七。一部文書는 編輯의 편의상 原文에 손상을 주지 않는 범위 내에서 부분적으로 형태를 바꾸거나 축율을 달리한 경우도 있다。
八。本 고문서에 대한 해제연구는 2편이다。수록문서 전반에 대한 것은 「古文書集成」 五十집에、書院에 대한 것은 五十一집에 게재하였다。
九。收錄文書는 本院所藏 마이크로필름 NO。35-008839~008841、35-009546~009547、35-00574~009579에 촬영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