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장처 고문서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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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덕의 무안박씨 武毅公 朴毅長(1555-1615) 종가 자료에 대한 고문서 조사는 6차에 걸쳐 진행되었다. 그 종가는 현재 경상북도 영덕군 축산면 도곡리에 있다. 무의공 종가 자료를 조사하게 된 계기는 2001년 가을 고성이씨 이항증 선생의 주선에 따른 것이었다.  1) 본 연구원에서는 그해 11월 연구팀을 파견하여 종가 소장의 자료를 일괄 조사하였다. 안승준 전문위원이 2일간 개략적인 현황파악을 하였다.  2) 당시 조사된 자료는 朴毅長 관련 각종 고문서와 고서뿐만 아니라 刀劍·가마 등의 유물을 포함하는 일괄 자료였다. 자료의 양은 고문서 1,971점, 고서 216책을 비롯하여 각종 유물이 223점으로 당시 5톤 트럭 한 대분에 이르는 방대한 규모였다. 이들 자료는 일괄 본원 장서각 고문서실에 대여되었다.
이 자료는 본원의 정리 공정에 따라 보존 처리와 목록화가 진행되었다. 이와 동시에 본 자료에 대한 기탁이 협의되었다. 2005년 7월에는 장서각 정순우 관장을 비롯한 일행이 기탁 섭외와 현지답사를 목적으로 무의공 종가에 대한 2차 조사가 이루어졌다.  3) 이후 박씨 문중에서는 문중회의를 거쳐 본 연구원에 본 자료를 기탁하기로 결정하여 2005년 9월 29일 종가 소장의 자료가 일괄 한국학중앙연구원에 기탁되었고 자료목록집이 간행되었다.  4)
3차 조사는 2005년 10월 26일에 김학수 전문위원 등  5) 이 종가 소장 고제기류(古祭器類)를 비롯하여 전적 일부를 대여하였다. 이들 자료에 대해서는 현재 추가 기탁이 예정되어 있다.
4차 조사는 2006년도 본 자료집 간행을 위한 준비과정으로 이루어졌다. 본 자료의 해제를 담당한 정구복 교수와 정수환 전문원에 의해 2006년 4월 13일에서 14일 양일간 이루어졌다. 본 조사팀은 이 자료를 우선 대략적으로 검토한 후에 해제를 쓰기 위해서 현장 답사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4월 13일 조사팀은 현지에서 종손의 동생인 박용대(朴容大)씨를 비롯하여 박동욱(朴東旭) · 박원우(朴源佑)씨 등 종중관계자를 만나 가전 고문서 및 고전적의 전래경위와 현 종가의 건립연대, 자료 중 의문 사항 등을 문의하였다. 그리고 무의공을 모신 구봉서원의 유적지, 무의공의 묘소와 재사, 무의공의 출생지이고 입향시조가 살았던 영해 인량리의 유적지와 그 후 세거지인 원구리의 경수당(慶壽堂)과 재사 등을 답사하고 사진자료를 마련하였다. 현지조사 중 임란 당시 박의장의 대구 파잠령 전투 유적지를 비롯하여 경주에 위치한 복성비에 대한 조사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저녁에 영덕에서 안동으로 이동하여 숙박하였다.
4월 14일 아침 일찍 안동을 출발하여 대구에서 박동욱씨의 안내에 따라 ‘파잠 전적지’를 답사하였다. 그 과정에서 파잠령은 대구에서 청도로 통하는 팔조령 일대가 전적지임을 확인하였다. 또한 인근의 우록리(友鹿里) 모하당(慕夏堂) 김충선(金忠善)을 모신 녹동서원(鹿洞書院)을 탐방하고 김충선의 문집을 구하였다. 이에서 김충선이 경주부윤 박의장에게 보낸 답서를 구할 수 있었다. 조사팀은 박동욱씨와 함께 경주로 이동하여 점심 식사 후 경주대 이근직교수와 경주고 조철제씨의 안내로 경주 황성공원에 위치한 박의장 경주성 복성비를 비롯하여 경주읍성 유적지를 답사하는 것으로 일정을 마무리하였다.
무안박씨 무의공 종가 고문서는 보관이 비교적 잘된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일부 자료가 집안사람에 의하여 이미 유출되어 학계에 보고된 바 있고,  6) 현재 영남대학교 박물관에서 미공개된 9점이 추가로 입수된 점 등으로 보아 모든 자료가 완전히 보존되지 못한 듯하다.  7) 본서를 출판함에 필자가 종손 박연대씨와 박동욱씨에게 연락하여 안동의 고 박동섭씨 후손으로부터 위 자료와 기타 입안문서 등 4점이 환수되어 연구원에 추가 기탁되었다. 그리고 영남대학교 보관 자료  8) 는 원본 자체로 학계에 소개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자료를 확인할 필요를 느꼈다. 이에 정수환씨에게 교섭하게 하여 8월 9일 출장을 통해 분재기 11점과 토지매매명문 15점 등 고문서 26점을 촬영하였다.  9) 이들 자료는 뒤의 부록 자료와 같다. 그리고 정수환 전문원이 종손 박연대씨의 협조로 무의공의 막내 아들 박선의 고문서자료를 조사할 수 있었다.  10) 여러 번의 자료 조사에 적극 협조해 주신 종손 박연대씨와 동생 박용대씨, 노 종부를 비롯하여 박동욱씨 그리고 종가 여러분의 적극적인 협조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  11)
무안박씨의 중시조는 고려조의 박진승(朴進昇)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고려조에 국학전주(國學典酒)를 역임하였으며,  12) 공(功)으로 무안(務安)을 식읍으로 하사받았다고 한다. 전주는 충렬왕 원년(1275)에 국자감을 국학으로 개칭할 때에 종3품의 제주(祭酒)의 관직을 전주로 개칭한 것이다.  13) 왜 고려초기의 인물이라고 하면서 후기의 관직을 사용하고 있는지 의문이다. 이 후 박씨들은 무안을 본관으로 삼았으며, 사서에는 무안현의 토성으로 박씨가 확인되고 있다.  14) 무안박씨는 고려초에 발신하여 무안을 본관으로 한 이 일대의 호족이었다.
박섬은 고려사에 보이는 최초의 인물이다. 그는 전라도 무안현(務安縣) 출신이다. 현종 원년(1010) 11월 거란군의 침입 시에 공부시랑이자 안북도호부사였던 그가 성을 버리고 도망쳐 주민이 모두 붕괴되었으며,  15) 왕이 광주(廣州), 전주, 나주로 몽진하였는데 무안으로 와 있던 그는 나주에서 왕의 어가를 만나 사직을 하였다가 군사가 퇴각했다는 소문을 듣고 왕을 알현하였다하여 당시의 평이 나빴다고 기록되어 있다.  16) 그러나 이는 당시 사관의 기록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지채문(智蔡文)전에 의하면  17) 전주에서 나주에 이르는 길을 호종한 것으로 나오고 있으며 문종 6년(1052)에는 특명으로 호종공신에 책봉되어 후세의 귀감으로 삼게 하였다.  18) 박섬은 그동안 사재감(司宰監), 장작감(將作監)을 거쳐  19)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를 역임하였다.
박섬 이후 박윤위(朴允位), 박유(朴儒), 박성기(朴成器)는 대장군, 상장군 등을 역임하였다. 무안박씨 무의공파의 선계는 박부(朴琈)20) , 박문오(朴文晤), 박윤류(朴允鏐)21) , 박천무(朴天茂)로 이어지는 가계이다.
󰋫 務安朴氏 家系圖 ① : 朴進昇-朴天茂
박부는 밀직부사(密直副使), 군부판서(軍簿判書), 상장군(上將軍)을 역임하였다.  22) 박문오는 일찍이 고려조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정승(政丞)에 이르렀다. 고려 말 홍건적을 토벌한 공으로 면성부원군(綿城府院君)에 봉해졌다.
박윤류는 고려명신 민지(閔漬, 1248-1326)의 사위로서 내시보승별장(內侍保勝別將), 판도정랑(版圖正郞)을 역임하고 관직이 군부정랑(軍簿正郞)에 이르렀다. 그의 사위는 공민왕 대에 전리판서(典理判書)·개성윤(開城尹) 등을 역임했던 최재(崔宰, 1303-1378)이다.  23) 박윤류의 아들 박천무는 조선 초기에 평양소윤(平壤少尹)을 역임한 것으로 추정된다.  24)
족보에 의하면 인물의 명칭에 대한 고증과 조정의 흔적이 보이고 있다. 사료적 성격이 금석문이 확실시되므로 금석문과 다르게 기록된 족보자료는 이에 의거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무안박씨 가계 중 고려조 인물들의 계보가 정확하지 않아 시기적으로 부조(父祖)의 계승이 맞지 않는 경우가 발견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400년 동안의 세계가 9세대에 불과한 점은 족보의 신뢰성을 그대로 믿기 어렵다. 1세대가 평균 20-30년을 뛰어넘기 때문이다. 이는 족보자료의 불완전성을 보여준다. 중시조 이래의 몇 세대가 탈락된 것인지, 중시조의 연대를 국초로 끌어올린 것인지 확실하지 않다. 더구나 중시조를 충렬왕 대에 개칭된 국학전주라고 칭함이 더욱 그러하다. 즉 현종 대(1010-1031)의 박섬 이후 1270년 대의 충렬왕 대의 박부 대까지 200여 년이 4세대의 기록으로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여말선초의 무안박씨는 왕조교체에 유연하게 대응하는 과정에서 조선의 개국에 기여하기도 하였다. 박의룡은 태조 이성계와 ‘포의지교(布衣之交)’가 있었다고 한다. 그는 1388년(창왕 1) 의주목사(義州牧使)를 역임한 이래 조선의 개국에 적극 가담하여 개국원훈(開國元勳)에 책봉되었다. 조선조에 호조, 병조, 형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1398년(태조 7) 치사하자 태조가 ‘開國定社輪忠立功’의 8자를 내렸다고 한다. 박의룡은 치사한 뒤에 증조 박문오의 유업이 남아 있는 무안으로 낙향하여 소요하였다.  25)
󰋫 務安朴氏 家系圖 ② : 朴天茂-朴之蒙
위의 가계도에 보이는 바와 같이 박형은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이들의 아들 대에 각파가 형성되었다. 특히 장자 박이(朴頤, ?-1478)는 영덕(盈德)의 수령을 역임하였다.
영해의 무안박씨는 박지몽(朴之蒙)이 영해박씨와 혼인하는 것을 계기로 영해에 이거하였다. 이후 영해의 무안박씨는 박지몽을 입향조(入鄕祖)로 하고 이 일대에 세거하고 있다  26)
박지몽은 어려서 고아가 되어 백부 박이에게 의지하였다고 한다. 그는 박이가 영덕군수로 재임할 당시 임소에서 영덕박씨(盈德朴氏, 野城朴氏) 함길도도사(咸吉道都事) 박종문(朴宗文)27) 의 딸과 혼인하였다. 박이는 사환을 위해 상경하였으나  28) 박지몽은 처가인 영해에 우거하였다. 현재 영해군 축산면 원고리이다.
박지몽은 영덕박씨와의 사이에서 다섯 아들을 두었다. 장자 박원기는 1513년(中宗8) 식년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29) 그의 후손들은 부서(府西) 일대를 배경으로 활동하면서 문과합격자를 다수 배출하였다. 그의 아들 박전(朴全)에서 박선장(朴善長), 박한(朴王+旱)으로 이어지는 계열은 3대에 걸쳐 문과 급제자를 배출하였다.  30)
박지몽의 셋째 아들 박영기는 용양위우부장(龍驤衛右副將)을 역임하였다. 현전하는 고문서 중 시대적 상한은 박영기까지이다. 그와 단양신씨(丹陽申氏)와의 사이에는 다섯 아들이 있다. 둘째 아들 박세현은 퇴계 이황의 문인으로서 수군절도사를 역임하였다.  31) 그의 처는 퇴계의 질녀이다. 이황은 박세현의 당호 ‘경수당(慶壽堂)’을 친필로 써 주었다.  32) 셋째 아들 박세렴은 1558년(명종13) 무과에 급제 하고 영일현감, 의주목 판관 등을 역임하였다.  33) 박세현, 박세렴, 박세순 형제는 모두 무과로 출사하여 무신으로 활동하였으나, 한편으로는 퇴계의 문도로서 활동하면서 문무를 겸비한 인물들이었다.
〈경수당 전경-경북 영덕군 영해면 원구리 소재, 도지정유형문화재 제297호〉
󰋫 務安朴氏 家系圖 ③ : 朴之蒙-朴瑜
박의장은 1555년(명종10) 영해부(寧海府) 원고리(元皐里)에서 태어났다. 그의 자(字)는 사강(士剛), 호는 청신재(淸愼齋)이다.  34) 그는 부친 박세렴과 백부 박세현의 주선으로 유일재(惟一齋) 김언기(金彦璣)에게 수학하였다.  35) 박의장은 한편으로 무학(武學)에도 전념하여 1577년(선조 10) 무과에 급제하였다.  36) 무과 급제 후에도 ‘문무’를 겸비하고자 노력하였으며, 성재(惺齋) 금난수(琴蘭秀)  37) 등과 학문적 교유를 지속하였다. 그의 자세한 이력과 행적을 정리하면 표-1와 같다.
󰋫 표-1 : 朴毅長의 이력과 행적

나이

연도

내 용

비고

1

1555(明宗 10)

▫ 寧海府南 元皐里第 出生

12

1566(明宗 21)

▫ 惟一齋 金彦璣에게 수학

▫ 玉山 權暐, 梧峯 申之悌, 蘆川 權泰一 등과 수학함

19

1573(宣祖 6)

▫ 參奉 李之英의 딸과 혼인

23

1577(宣祖 10)

▫ 武科 급제

24

1578(宣祖 11)

▫ 惺齋 琴蘭秀와 ‘맹자’를 강학함

25

1579(宣祖 12)

▫ 權知訓練奉事參軍

33

1587(宣祖 20)

▫ 軍器寺參奉(12월)

34

1588(宣祖 21)

▫ 器寺副奉事→軍器寺直長→廣興倉主簿→軍器寺主簿

▫ 鎭海縣監(12월)

35

1589(宣祖 22)

▫ 惺齋 琴蘭秀와 鎭海·醴安을 오가며 교유함

▫ 咸安兼官(6월)

37

1591(宣祖 24)

▫ 12월 경주진관병마절제도위, 慶州判官

38

1592(宣祖 25)

▫ 4월 : 壬亂발발, 竹長縣 入據

▫ 草堤戰鬪(6월), 慈仁戰鬪· 永川城 수복(7월)

▫ 慶州城 복성(9월)

▫ 兼繕工監副正(9월), 兼軍器寺正(11월)

39

1593(宣祖 26)

▫ 大丘파잠령 전투(3월 10일), 梁山戰鬪

▫ 通政大夫(3월), 慶州府尹(5월)

▫ 表裏 1襲 하사(9월)

▫ 伯父 朴世賢(11월), 父 朴世廉(12월) 喪

40

1594(宣祖 27)

▫ 起復, 慶州일대 적 소탕

41

1595(宣祖 28)

▫ 嘉善大夫(10월)

43

1597(宣祖 30)

▫ 火旺山城에서 郭再祐와 만남

▫ 明 摠兵 李如梅 營에 배속됨

44

1598(宣祖 31)

▫ 蔚山城 戰鬪, 戰馬 1匹을 하사받음

45

1599(宣祖 32)

▫ 星州牧使兼左道防禦使(윤4월)

46

1600(宣祖 33)

▫ 慶尙左道兵馬節度使(2월)

겨울 낙향

51

1605(宣祖 38)*)

▫ 宣武原縱功臣 1等에 녹훈됨

54

1608(宣祖 41)

▫ 慶尙左道節度使(8월)

57

1611(光海 3)

▫ 仁同府使兼助防將(11월)

58

1612(光海 4)

▫ 左道節度使(11월)

59

1613(光海 5)

▫ 公洪道水軍節度使(9월)

60

1614(光海 6)

▫ 慶尙道水軍節度使(2월)

61

1615(光海 7)

▫ 水營에서 終身(1.25일)

▫ 寧海府西 烏峴 入葬(4.8일), 賜祭(5월)

1622(光海 14)

▫ 資憲大夫 戶曹判書에 추증됨.

1633(仁祖 11)

▫ 寧海府西 集喜庵으로 遷葬

1665(顯宗 6)

▫ 精忠祠 건립

九峯 소재

1784(正祖 8)

▫ 贈諡 : 武毅

1785(正祖 9)

▫ 精忠祠(九峯精舍)를 九峯書院으로 변경

*)이는 연보에는 50세 1604년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장서각 소장 󰡔선무원종공신녹권󰡕에 의하여 수정하였다.
박의장은 무과 급제 후 1579년 훈련원봉사참군(訓練院奉事參軍)을 시작으로 군기시직장(軍器寺直長), 광흥창주부(廣興倉主簿) 등을 역임하였다. 1588년(宣祖 21) 말 외직으로 진해현감(鎭海縣監)으로 부임하였으며, 1592년 임란 발발 당시에는 경주판관(慶州判官)이었다. 그는 경주판관으로서 영천성 수복(7월), 경주성 복성(9월)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3월 10일 대구 파잠전투  38) 의 혁혁한 전공으로 이듬해에는 통정대부 경주판관(通政大夫慶州判官)으로 특진되었다가 5월에 경주부윤에 임용된다.  39) 정유재란 당시에는 경주를 중심으로 활약하면서 군향(軍餉)을 지원하는데 진력하였으며,  40) 울산성 전투에 참전하였다. 1599년 윤4월에 경주부윤에서 성주목사겸경상좌도방어사로 이임되었다. 임란시 전공으로 박의장은 1605년(선조38) 선무원종공신 1등에 녹훈되었다.  41) 이 공신책봉은 이 가문의 결속에 대단히 중요한 계기가 되었음을 그의 아들딸들의 화회문기를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전란 후 박의장은 경상좌도절도사(慶尙左道節度使), 인동부사(仁同府使) 등을 역임하였다. 특히 그는 1613년(광해군5) 공홍도수군절도사(公洪道水軍節度使)에 제수되자 노모 봉양을 위해 체직을 요청하였으며, 광해군은 그에게 경상도수군절도사(慶尙道水軍節度使)를 제수함으로써 효를 다할 수 있도록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1614년(광해군6) 경상수영에서 세상을 떠나자, 자헌대부 호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사후에 구봉서원에 향사되었으며, 정조 8년(1784)에는 ‘무의(武毅)’의 시호가 내렸다.  42)
박의장의 아우 박홍장 또한 1580년(선조13) 무과에 급제한 무신이었다. 무과 급제 후 평안도(平安道) 벽동군(碧潼郡)에 위치한 아이만호(阿耳萬戶), 북병사(北兵使) 이일(李鎰, 1538-1601)의 군관, 선전관(宣傳官)을 역임하였다. 1589년(선조22) 제주판관(濟州判官)에 제수된 뒤 임란이 발발하자 제주조방장(濟州助防將)으로 전란을 지원하였다.  43) 1594년(선조27)에는 영암군수(靈巖郡守)를 거쳐 대구부사(大丘府使)에 임명되어 전략적 요충지인 대구를 보전하여 군량을 원활히 지원하는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대구부사로서의 공로가 인정되어 군자감정(軍資監正), 장악원정(掌樂院正), 의흥위 상호군(義興衛上護軍)에 제수되었다. 1596년(선조29) 박홍장은 일본에 통신사로 파견되었다. 황신(黃愼)을 상사(上使)로 하고 박홍장을 통정대부로 승진시켜 부사(副使)로 삼았다.  44) 11월 귀국하여 순천부사(順天府使)를 역임하고 이듬해 상주목사겸상주첨병마절제사(尙州牧使兼尙州僉兵馬節制使)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부임하지 못하였다. 박홍장은 1598년 4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45) 1665년(현종6) ‘정충사(구봉서원)’에 형 박의장과 함께 제향(祭享)되었다.
박의장과 영천이씨 사이에는 4남 3녀를 두었다. 장자 박유는 그의 고신에 의하면 1593년(선조26)과 1594년(선조27) 무과에 두 번 급제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는 난중의 혼란한 상황에서 무과가 첩설되었던 결과라고 본다.  46) 무과 급제 후 그는 훈련원주부(訓練院主簿), 장기현감(長鬐縣監)을 역임하였으며,  47) 박의장의 명에 따라 박홍장이 일본사신을 갈 때 동래까지 숙부를 배웅하였다. 전란이 종결된 후에는 영산현감(靈山縣監) 등을 지내면서 부친 박의장의 대가(代加)를 통해 통훈대부에까지 올랐다. 밀암(密庵) 이재(李栽)가 찬한 묘갈명이 있다.
한편 박의장의 넷째 아들 박선은 전후 선대의 유업을 수습함은 물론 무반가의 전통 위에 문한가로서의 전환을 위한 기반을 마련한 인물이었다. 그는 1592년 박의장의 나이 42세에 얻은 아들이었다. 박유는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수암(修巖) 류진(柳袗)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665년(현종6)에 도백(道伯)의 추천으로 조산대부(朝散大夫)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제수되었으나 출사하지 않고 향리에서 후진 양성과 수신에 진념하였다. 그는 영해 일대에 문명이 높았으며 문집으로 󰡔도와집(陶窩集)󰡕이 있다. 사후에 향인들에 의해 도계사우(陶溪祠宇)가 건립되었다. 박선은 1620년경에 현재의 영덕 축산 도곡리에 이거하면서 ‘충효당(忠孝堂)’  48) 을 신축하고 1644년에는 백형 박유를 위해 현재의 무의공 종가를 건립하였다고 한다.  49) 그의 이력과 학문적 행적을 본다면 박의장 사후 문적의 수습과 가내의 기반을 재정비하는데 역할이 지대하였다고 하겠다.
〈무의공 종택 전경 : 영덕군 축산면 도곡리 소재,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74호〉
무안박씨 영해파는 박지몽의 이거 이후 영해·영덕 일대에서 재지적 기반을 형성하고 있었으며 박의장·박홍장 형제에 의해 가격이 급신장되었다.  50) 그 결과 통혼 범위에 있어서도 영남의 명가로 확대되었다. 박의장의 자녀를 중심으로 단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박유의 처는 월성손씨(月城孫氏) 손시(孫時,1555-1603)의 딸이었다. 손시는 적개공신(敵愾功臣) 손소(孫昭)의 현손으로 경주 양동의 송첨(松簷-書百堂)이 바로 박유의 처가였다.  51) 둘째 아들 박위는 청도의 재령이씨(載寧李氏) 식성군(息城君) 이운룡(李雲龍, 1562-1610)의 딸과 혼인하였다.  52) 박선은 하회의 풍산유씨 유단(柳褍)의 딸과 혼인하였는데 그녀는 서애 유성룡의 손녀였다.  53) 그는 풍양조씨 조기원의 딸과 재혼하였는데, 조기원은 임란 의병장 검간(黔澗) 조정(趙靖,1555-1636)의 아들이었다.  54) 사위 재령이씨 이시형(李時亨, 1586-1612)은 영해의 재령이씨로서 운악(雲嶽) 이암(李涵)의 아들이다.  55)
(3) 임란 이후 무안박씨 무의공파의 가계와 인물
임란 이후 조선 후기 무안박씨는 문·무과 급제자를 배출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관로 또한 막혀있는 상황이었다. 무안박씨의 통혼권은 영남의 남인을 중심으로 연결되고 있는데, 조선 후기 영남 남인이 중앙정계에 진출이 자유롭지 못한 것이 일반적이었다. 따라서 무안박씨는 중첩적인 혼인과 그를 바탕으로 한 학문적 연대를 바탕으로 가격을 유지 및 신장시키고 있었다.
조선 후기 무안박씨 무의공 종가의 인물 중 대표적인 학자로는 박문립, 박정걸, 박회찬, 박재우 등이 있다. 박문립(朴文立, 1602-1673)과 박문기는 유년기 아버지를 여의자 숙부 박선의 훈도를 받으며 성장하였다. 박정걸(朴廷杰, 1683-1746)의 호는 남포(南浦)이며 밀암 이재의 문인으로 활동하였다. 문집으로 󰡔남포선생문집(南浦先生文集)󰡕이 있다. 박회찬의 호는 형려(衡廬)로서 유고가 있다. 그의 아들 박재우는 호가 근암(近庵)으로 정재(定齋) 유치명(柳致明)의 문인으로 활동하였다. 문집으로 󰡔근암집(近庵集)󰡕이 있다.  56)
영덕의 무안박씨는 박세현이 퇴계 이황의 문인으로 활동한 이래 박선이 장현광과 유진의 문인으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박정걸이 밀암 이재의 문인, 박재우가 정재 유치명의 문인이었다. 무안박씨 무의공 종가의 인물들은 조선 후기 퇴계학맥을 중심으로 한 영남학파의 중추적 인물들을 다수 배출하면서 영남에서의 위상이 높았다.
무안박씨 가문은 영양남씨, 영천이씨, 월성손씨 등과의 통혼을 통해 확고한 기반을 마련하였다. 영남학파의 거두인 갈암 이현일(李玄逸)은 바로 박의장의 손서(孫壻)였다.  57) 뿐만 아니라 조선 후기 여주이씨, 전주유씨, 아주신씨, 풍산유씨, 재령이씨, 고성이씨 등 영남의 벌족과 중첩적인 통혼을 통해 사회적 기반을 공고히 유지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박유 이래의 무안박시 가계를 정리하면 家系圖 ④와 같다.
󰋫 務安朴氏 家系圖 ④ : 朴瑜-朴淵大
박지몽에 의해 영덕에 이거한 무안박씨는 박세현이 퇴계의 문도로 활동하고 이를 기반으로 한 박세현·박세렴 형제는 영해·영덕에 정착하였다. 무안박씨의 활동범위를 비약적으로 신장시킨 인물은 박의장과 박홍장 형제의 임란활동을 통해서였다. 이들 형제는 혁혁한 전공을 바탕으로 전시 영남을 보존하는 데 큰 공을 세웠음은 물론 전후 자녀들의 혼인에 있어서도 영남의 명가들과 통혼함으로써 무안박씨의 사회적 기반을 확충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무안박씨는 기존의 무반가의 성격에서 탈피하여 박유를 중심으로 문한가로서의 성격으로 전환하였다. 박선이 여헌·수암 양문의 문인으로 활동함은 물론 밀암 문인 박정걸, 정재 문인 박재우 등을 배출하면서 영남학파의 핵심적 가문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박의장의 아버지인 박세렴 남매가 분재한 화회문기에 의하면 그의 조부 박영기의 재산은 밭 361두락, 논 393두락, 노비 56구인 것으로 확인됨으로 중농이상의 부를 소유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박세렴은 그 중 논밭 217 두락과 노비 19명을 상속받았으므로 비록 큰 부농은 아니지만 가족생활을 이끌어갈 규모였다고 생각된다. 이런 규모는 중소지주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이후 박의장 대에 재산이 부쩍 늘었음을 박유남매화회문기에 의해 확인할 수 있다. 이 분재기는 현재 영남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었다. 그 내용은 이수건이 편찬한 󰡔경북지방고문서집성󰡕에 실려 있고,  58) 그 원본을 사진자료로 본서에 실었다.
이 분재기는 1631년에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3년 상을 치르고 난 뒤에 남매들이 모여서 분재한 것으로 특이한 분재기에 속한다.  59) 박의장은 7남매를 두었고 얼자가 한 명 있었다. 자녀의 결혼 시에 주었던 신노비(新奴婢)가 8명씩 주어졌고, 총재산이 노비 260명이었고, 논밭 총 1,400여 두락 이상이 되었다.  60) 네 아들에게는 기와집 한 채씩이 주어졌다. 우마 등에 대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이런 규모라면 당시 영해지방에서는 큰 부자라고 할 수 있다. 임진왜란 중에 부를 축적할 수 있었던 주 원인은 난 중에 헐값으로 매매되는 토지와 노비를 박의장 부인이 근검하게 생활하여 사들였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특히 토지와 노비 중에는 매득한 것이 절반 정도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도망노비는 그렇게 많지 않다. 이는 현직을 가진 관료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당대에 매득한 노비였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특히 매득노비는 입안을 낸 경우는 세 건이 보인다.  61) 이는 엄청난 부의 증가가 박의장 대에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경제적 상황에서 1597년에 사재 700석을 군량으로 국가에 바친 것을 이해할 수 있다.  62) 또한 그의 토지와 노비의 매득으로 인한 재산 증식은 󰡔선조실록󰡕에 실리게 되었고, 영해부사 박이장의 고발이 있었던 사정  63) 을 이해하게 하여 준다. 그리고 부의 중심이 노비에서 토지로 옮겨져 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전답의 소종래는 명시되지 않았으나 그 규모가 마지기로 1석락지, 20마지기의 기록이 간혹 보이나 대부분의 토지 단위는 몇 마지기의 소규모이므로 이는 사들인 것을 뜻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녀가 균등분급을 하고 있으며 그 결과 제사의 자녀 윤행도 행하여졌다고 생각한다. 제사는 4명일 제사와 기일제, 생신제, 그리고 봄과 가을에 묘제가 올려지도록 규정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제사의 윤행은 이 집안의 경우 4명절에 제수를 돌려가며 마련하는 것이었다. 불천위 제사를 길이 지낼 수 있도록 분재기에서 철저하게 마련하고 있다. 장손이 분재기에서 완의한 대로 제사를 봉행하지 못하면 자손이 모두 모여 불효죄로 관에 고하여 처벌케 한다거나 묘직이는 제사 때를 제외하고는 장손이라도 부릴 수 없도록 확실한 조처를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불천위 제사에 대한 깊은 배려를 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사위 중 성균진사 박종무는 아들이 없을 뿐만 아니라 멀리 살고 있어 4명일 제사를 다른 자식처럼 거행할 수 없다는 뜻에서 받은 토지 중에서 두 섬지기의 토지를 제사 윤행시 제물 준비금으로 반납함을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아들 중 셋째 아들 박륵과 막내아들 박선은 각각 불천위 제시 비용이 모자랄지 모른다고 하여 노비 2명과 전답 9마지기를 각각 분급받은 몫에서 반납하는 문서를 위의 화회문기 말미에 기록하였다. 이를 통해 그들의 돈독한 우애와 종가를 유지하려고 노력한 뜻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에 묘전 소출금을 관리하는 규약을 마련하고 있어 일종의 계문서적인 성격까지도 이 분재기는 가지고 있다.
〈무의공 박의장 묘역 : 경북 영덕 창수면 수리 소재〉
〈박의장 묘표〉
〈박의장 서압〉
이 집안의 경제적 기반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박의장의 임진왜란에 세운 공적과 경주부윤으로서 백성의 안집을 위한 정치가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그의 선대부터 무과출신가문이었고, 박의장 또한 무과급제를 하여 관직이 시작되었다. 그는 교생신분으로 1577년 10월에 23세의 나이에 별시 무과 병과 18인에 급제하였다. 그는 이 시험에서 강관의 질문에 응대를 잘하여 문무를 구비한 장수감으로 칭찬을 받았다고 연보에 전하고 있다.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2년 전인 1590년 12월에 경주진(慶州鎭) 병마절제도위에 임용되었다.(고신 참조) 병마절제도위는 종6품직으로 경주진이란 직은 주위의 청하 영일, 장기, 기장, 동래, 언양의 진의 군사관계를 담당하는 직이었다. (경국대전 병전 참조) 이 직을 맡은 같은 달 22일에 조봉대부 행경주부판관에 발령되었다.  64) 조봉대부는 종4품직이고 판관직은 종5품의 자리였기 때문에 ‘行’ 자가 붙은 것이다. 이때 그의 나이 36세였다. 1592년 9월 1일의 고신에는 종3품직인 중훈대부로 승진하여 선공감 부정 겸 경주판관에 발령되었다.
1592년 4월 13일 부산진이 코니시 유끼나까(小西行長)가 이끄는 일본군에 의하여 함락되고 14일에는 동래진이 무너졌다. 이때에 그는 경주부의 군사를 이끌고 병사 이각(李珏)의 명으로 동래에 달려갔으나 각이 겁을 먹고 동래진을 구원하지 않고 도망치려 하자 박의장은 병사에게 항의를 하였다고 문집에 전하고 있다. 할 수 없이 병사의 명에 의하여 경주부에 돌아와 죽장(竹長)의 요새에 군사를 매복시키고 있었다.
당시 경주부윤은 윤인함이었는데 나이가 많았던 것 같다. 윤인함은 왜군이 공격해 온다는 소문을 듣고 병기와 화약을 모두 못에 버리는 잘못을 저질렀고 차마 이곳을 떠나지 못하다가 박의장이 경주에 도착하자 경주의 치안을 맡기고 도망쳤다. 군사를 잡아들인다는 포망장(捕亡將)이란 명칭으로 경주부를 빠져나갔다. 박의장은 장기현감 이수일(李守一)과 함께 경주부를 지키려고 하였으나 들이닥치는 가토오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이끈 1만명의 왜군 대병을 감당할 수 없어 북문을 열어 백성을 피신하게 함으로써 경주부가 4월 21일에 함락되었다. 경주부의 함락은 경상도 일대에 큰 충격을 주었다. 경주는 경상좌도의 요충지였기 때문이었다. 이후 박의장은 흩어진 군사를 모으는 데에 주력하였다.
1592년 영천지방의 권응수는 인근 의병 3,500여 명을 모아 7월 25일부터 27일까지 경상도의 교통상 요지인 영천을 탈환하는 전투에 성공하였다. 이때의 전과는 왜군 517명의 목을 벤 것으로 실록에 기술되어 있다.  65) 이는 철저한 군율, 지형지물의 이용, 천시의 적응, 적정의 정확한 입수에 의한 것이었다. 이에 머물고 있던 왜군은 제5진 후쿠사마마사노리 부대였다. 일본군은 이후 경주성으로 퇴각하였다. 이 전투에 경주판관 박의장도 참전하여 영천성의 서북방 공격에 참전하였다. 박의장은 이전에 6월 25일 초제전투, 7월 6일에 자인성 전투, 8월 7일에는 자인현에서 왜병을 격파하였다.
이 무렵 요동군 5,000명을 이끌고 평양에 도착한 조승훈(祖勝訓)이 평양성 전투에서 패배하여 돌아간 상황이어서 중앙정부에서 파악한 전국(戰局)의 전망이 아주 참담하였던 때였다. 선조는 의주로 피난을 하여 중국으로 갈 생각을 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경상도 초유사였던 김성일은 8월 7일자로 경상좌도 관찰사로 발령되었다. 중앙정부에서는 경상도를 둘로 나눠 좌도와 우도 관찰사를 임명하는 임시조처를 취했다. 경상우도 관찰사는 한효순이 같은 날자에 발령을 받았다.
8월 21일 경상좌도 병사인 박진은 인근 13개 군현의 의병과 관군 36,000명  66) 을 모아 경주성 안에 있는 1만명의 왜군을 공격하다가 역습을 받아 대패하였다. 이는 치밀한 작전계획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전투에서 선봉장은 권응수와 경주판관 박의장이 맡았다. 이때의 의병 중에는 권응수, 김득복, 정의번 등 경상좌도 의병과 관군이 힘을 합쳤다. 이 전투에서 경주의병장 최인제, 손덕침과 영천의 의병장 정의번 등이 전사하였다. 왜군의 복병에 급습을 당하여 2,000명이 전사하는 큰 패배를 겪었다. 박진은 안강으로 도망을 쳤다. 이 전황은 초유사 김성일이 중앙에 보고하여 실록에 실려 있다.
권응수는 9월 초1일자로 경상좌도 병마우후라는 관직을 받게 되었고 초유사 김성일로부터 의병대장이라는 칭호를 부여받았다. 그 후 경주판관 박의장의 주도하에 경주탈환전이 행해졌다. 즉 9월 7일과 8일에 관군과 의병군을 통합 지휘하여 경주성에 주둔하고 있던 5,000명의 왜군을 격퇴하였다. 이때 경주판관 박의장은 결사대와 치중대, 향병부대로 조직하고 유격전법을 사용하여 승리할 수 있었다. 이때 이장손이 발명해 낸 ‘비격진천뢰’라는 새 무기를 사용하였다. 이로 인해 경주부의 관곡 4만여 석을 확보하여 이를 군량으로 유용하게 사용하였다.
〈경주읍성 전경 : 경주시내에 부분 복원된 옛 경주성 성벽일부, 사적 제96호〉
〈동도복성비(東都復城碑) : 현 경주시 황성공원내〉
이 무렵 평양에서 명측과 일본측의 화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왜군의 점령지였던 경상도 좌도와 우도에서의 의병의 반격은 일본군이 화의를 제의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한 배경이 되었다. 일본군은 전방부대와 후방부대의 연락이 두절되었고, 계획했던 군량의 보급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군량의 보급로는 이순신에 의한 수군의 승리로 왜군의 해상로가 막히고 육지에서는 각지에서 의병의 전투가 일어나 육로도 차단되었다. 일본군은 대군을 동원하여 첫 공격에서는 성공하였으나 이를 지킴에는 큰 문제가 생긴 것이었다. 점령지역에서 이런 관군과 의병의 반격이 있으리라는 것은 일본군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1593년 1월 5-7일에는 51,000명을 이끌고 온 이여송의 명군에 의하여 평양성 탈환전투가 있었고, 1월 27일에는 이여송이 벽제관 전투에서 패배하여 이후 평양으로 명군을 퇴각시켰다. 선조는 명군의 적극적인 공격을 요구하였으나 명군은 이에 전혀 응하지 않았다. 명나라와 일본간의 화의를 조선 정부는 적극 반대하였다. 대간들은 권율이 척후병을 보내 무악부근에서 발각되어 양민이 학살된 죄를 물어 그의 파직을 요청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2월 12일 전라도 관찰사겸 순찰사인 권율은 정예병 2,300명을 이끌고 행주산성에서 한성에 주둔한 전군 3만명의 왜군이 총대장 우키다히데이에(宇喜多秀家) 등 7명의 장군이 이끄는 파상적인 공격을 막아내는 승리를 거뒀다.  67)
1593년 3월 10일 경주 판관 박의장은 대구의 파잠령 전투에서 수천명의 왜군을 혼비백산하게 하였다. 파잠령은 현재 대구시 파동으로 대구에서 청도와 밀양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여기에는 깊은 골짜기가 있다. 박의장은 일본군이 이동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300명의 군사를 골짜기에 매복시켜 놓고 기다리다가 후미 부대를 급습하였다. 이때에 31명의 머리를 베었고, 123필의 말을 빼앗는 전과를 올렸다.  68) 전적지였던 파동의 우록동(友鹿里)에는 현재 가등청정(加藤淸正)의 선봉장이었던 사야가(沙也加)가 300명의 군사를 대동하고  69) 조선이 문물과 예절이 있는 곳임을 알고 투항하여 와 김충선(金忠善, 1571-1642)이란 이름을 하사받고 후손들이 세거하고 있다. 현재 이곳에는 모하당(慕夏堂) 김충선을 추모하는 녹동서원(鹿洞書院)과 ‘모하당 기념관’이 있다. 기념관에는 이 일대에서 몇 년 전 도로공사 과정에서 수습한 조총 한 자루가 전시되어 있는데 이는 파잠령 전투장에서 왜군이 버린 것으로 짐작된다. 김충선은 우리나라 장수들에게 조총을 만들도록 기술자 김계수(金繼守)를 보내 당부하였다. 박의장도 그에게 조총을 만드는 방법을 문의하는 서신을 보냈다. 이에 답한 글에서 기술자 김계수(金繼守)70) 를 보낸다는 내용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팔조령 일대 전경 : 파잠전적지로 추정됨〉
이 전투 결과가 중앙정부 즉 의주에 있는 국왕의 처소에 알려진 것은 아마 한 달 후인 4월 중순경이었다. 이 무렵은 3월부터 심유경과 한성에 있는 소서행장 사이에 강화의 담판이 이루어져 명군은 물론 조선 군대에게도 일본군대를 공격하지 말라는 명령이 내려져 실제로 경기도 지역에서는 관군의 작전이 중지된 상황이었다.  71)
이에 강화회담을 반대하던 국왕에게 이런 왜군의 격파 사실은 대단히 반가운 것이었다. 아직 경상도 지역에는 명군이 진주하지 않았고, 강화회담의 결과가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전쟁의 전공으로 그를 당상관으로 승진시켰다.  72) 그 후 박의장은 양산군 사화령(沙化嶺)에 복병을 배치하여 왜군 200명을 만나 53명을 목 베는 전과를 올렸다.  73) 박의장은 경상좌도 관찰사겸 순찰사 한효순(韓孝純, 1543-1621)에 의하여 공로가 보고되고 그의 건의에 따라 1593년 5월 25일자로 경주부윤에 임용되었다. 이때 나이 39세였다.
일본군은 한성에서 명나라와 강화협상을 통해 포로로 잡은 두 왕자를 송환한다는 것과 명군이 후퇴하는 일본군을 공격하지 않는다는 것을 조건으로 1593년 4월 18일 한성에서 퇴각하여 경상도 지역으로 철수하였고, 약속한 왕자의 송환은 6월 초에 이루어졌다. 왜군의 퇴각을 뒤따라 명나라 군대는 9월에 경상도 경주 지역에 일부 병력이 진출하였다.  74) 명군의 주둔으로 경주부는 심각한 경제난에 시달리게 되었다. 이에 따라 도체찰사부도 경주에 마련되었으니 그 경제적 부담을 경주부윤이 책임져야 하였다. 그리고 이후 왜군과의 전선은 경상도 일원에 형성되었다.
이에 앞서 일본군은 전군을 몰아 6월 22일부터 28일까지 진주성의 2차 공략에 들어간다. 진주성의 2차 공격은 토요토미히데요시의 명에 의한 것으로 1592년 1월 초 1차 전투에서 패배한 것을 복수하기 위한 것이었고, 이 전투가 패배한 것은 일본군 전군이 투입되었는데도 우리나라 군대는 명군에 의하여 주위의 관군이 이를 지원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 제일 큰 원인이었다. 9월에 박의장은 경주부윤의 교체를 자원하는 글을 순상(관찰사)에게 올렸는데 그 이유는 백성생활의 판탕으로 명군의 군량을 혼자 댈 수 없다는 것이 주 이유였다. 물론 이웃 고을에도 할당이 되었지만 그것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본직을 걸고 백성의 침탈을 막아보려는 그의 의지가 담긴 것이었다. 이런 어려운 상황에 군량 조달의 모든 책임은 경주부윤의 몫이었기 때문이었다.  75) 이해 12월 23일 그는 아버지 상을 당하여 달려갔으나 임종을 하지 못하였고, 경주인 전참봉 이사겸(李士謙)등 300명이 순찰사에게 올린 등장(等狀) 등장(等狀)76) 으로 기복(起復) 명령이 내려져 아버지 무덤을 만들고 곧바로 1594년(甲午) 1월 경주부윤의 자리로 달려와야 했다.
1594년 2월 24일에는 경주부 남쪽에 양산의 왜군이 침범했다는 소식을 듣고 군대를 이끌고 이를 격퇴하였으며, 3월19일 아침 10시경에 기장현(현재 양산군 기장읍) 임랑포 전투에서 왜병 1,000명과 싸워 조선인 포로 317명을 구해내기도 하였다.  77) 5월 13일에는 기장에 주둔하고 있던 왜적이 경주부 남쪽에 침입하자 이를 격퇴하였다. 7월 13일에 경주부 동쪽에 침입한 왜군을 격퇴하였다. 당시 동생은 강진에 있어 부모를 모실 아들이 없었다. 7월에 그는 홀로 계시는 어머님을 위로하기 위한 5-6일의 휴가를 요청하는 글을 올린다.  78) 이 무렵 그의 체임을 두려워한 경주 부민들이 관찰사와 순행어사(巡行御使)에게 그의 유임을 탄원하는 글을 올렸다.  79) 박의장은 부윤으로서 명군에게 자신은 수모를 당하면서도 백성들을 안집시키려 노력하였다. 그는 용감한 군사는 사패(射牌)로 차출하고 병약자는 농사에 전념하게 하여 군사와 농사의 실효를 거두는 행정을 하였다. 그가 백성의 생활에 주력하다 보니 그의 주위에 있는 향리와 관노들의 불평도 없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그가 후일 비판되는 주 원인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에 그는 부윤에 연임되었다.  80) 이후 정유재란 때까지 전쟁은 소강상태가 지속되었다. 1597년 8월 정유재란 때에는 왜군의 진격목표가 경상도가 아니라 전라도를 점령하려는 계획도 있었다. 왜군의 본영과 가까운 경주는 정유재란 시 1주일간 성이 왜군에 점령되었다가 곧바로 탈환되었다. 박의장은 8월 창령의 화왕산성 전투에 참여하였고, 10월 5일 안강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이 무렵 울산의 도산성(島山城)을 쌓고 있는 가등청정을 치기 위한 전투가 1597년 12월 22일부터 1월 4일까지 계속되었다.  81) 2차 도산성 전투는 1598년 9월 22일부터 10월 4일까지였다. 박의장은 1, 2차 전투에 참여하였다. 1차 전투 때에는 1,000명의 관군을 인솔하고 명나라 장수 해생(解生)이 이끄는 중협의 부대에 배치되어 싸웠다. 1598년 8월 도요토미히데요시의 죽음과 일본군의 패퇴로 일본군이 완전철수하자 장기간의 전쟁은 끝났다. 그는 전시에 무관으로서 경주판관 2년, 경주부윤 6년을 맡으면서  82) 8년간 경주를 지키는 장수로서 그리고 행정관으로서 소임을 다하였다. 경상도 좌도의 여러 전투에 참여하여 지형지물의 이용, 적의 동정에 대한 파악, 무기의 준비, 부하 등의 통솔 지휘로 승리를 이끌고 인심을 얻은 지략과 덕성을 겸비한 장군이었고 백성을 위한 훌륭한 목민관이었다. 1605년(만력33년) 4월 16일에 그는 선무공신에 봉해지지 못하고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에 봉해진 것은 그에게는 적절하지 못한 포상이었다.  83)
〈무의공 박의장 신도비 : 영덕군 창수면 수리 소재〉
교령류에는 유서, 유지, 홍패, 고신, 녹패 등이 있으며 대부분 박의장과 관련한 자료이지만 박세렴, 박선의 문서도 있다.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에 형성된 문서로서 증빙류와 함께 가장 오래된 자료로 구성되어 있다.
유서(諭書)는 두 점으로서 박의장을 공홍도수군절도사(公洪道水軍節度使)와 경상좌도수군절도사(慶尙左道水軍節度使)에 각각 임명하면서 내린 것이다. 이들 두 문서는 후반부가 결락된 까닭으로 작성연대를 파악할 수 없으나 박의장의 연보를 통해 1613년(광해군5) 공홍도수군절도사, 1614년(광해군6) 경상도수군절도사로 임명되었음을 알 수 있다.  84) 본 유서는 박의장이 공홍도수군절도사에 임명되고 노모봉양을 위해 사직을 청하자 광해군이 그를 경상도수군절도사에 임명한 배경이 작용하였다. 내용은 절도사로서 한 지방의 병권 발동과 적의 토벌에 있어 왕과의 긴밀한 연락을 유지할 것을 명함과 동시에 안민에 힘쓸 것을 당부하고 있다.
유지(有旨) 두 점은 임란 당시 선조가 박의장에게 보낸 것이다. 1598년(선조31)의 유지는 경주부윤 박의장에게 700석의 양향(粮餉)을 국가에 기부한 공으로 전마(戰馬) 한 필을 하사하는 내용이다. 박의장은 명군에 배속되어 울산성을 공략할 당시 군량이 부족하자 영덕 고향의 사재를 털어 군량 700여석을 지원한 바 있었다. 총관사(總管使) 유영경(柳永慶)의 서장(書狀)에 의해 그의 군량지원 사실이 알려지자 조정에서는 그에 대한 논상을 두고 논란이 일었다. 이덕형 등은 박의장은 전공으로 이미 재상의 반열에 있으므로 가자(加資)할  85) 수 없으니 포상할 것을 건의하였다.  86) 이에 선조는 그에게 특별히 전마를 하사하도록 하면서 본 유지를 내리게 되었다.
1600년(선조 33) 선조가 박의장에게 내린 유지는 상경종사(上京從仕) 것을 종용하는 내용이다. 당시 전란이 종결되면서 명군이 철수할 경우 도성방위를 위해 외방에 있는 무신으로 당상관 이상을 상경하게 하여 도성수호의 책무를 맡기는 방안이 논의되고 있었다.  87) 외방에 있는 당상관 이상의 무신은 상경하여야 하며, 특히 박의장은 지략에 뛰어난 고위 무관으로서 외방에 있을 수 없으니 속히 상경하라는 당부이다. 당시 박의장은 경상좌도병마절도사로 재임 중이었다.
홍패 두 점은 박세렴과 박의장이 무과에 급제하면서 받은 과거 합격증이다. 박세렴은 1558년(명종14) 보인(保人)의 신분으로 무과 병과에 4인으로 급제하였다. 박의장은 1577년(선조10) 교생(校生)의 신분으로 무과 병과 18인으로 합격하였다.  88)
고신은 모두 70점으로 박세렴, 박의장, 박유, 박문립과 관련한 자료이다.  89) 박세렴 고신은 19점이다. 학생 박세렴은 1558년에 무과에 급제하자 가자(加資)를 통해 효력부위(效力副尉)의 품계를 받았다. 그는 1559년(명종14) 3월 미조항진관적량수군권관(彌助項鎭管赤梁水軍權管)을 시작으로 훈련원(訓練院), 군기시(軍器寺)를 중심으로 사환하였으며, 외직으로는 영일현감(迎日縣監)과 의주목판관(義州牧判官)을 역임하였다.  90)
박의장의 고신에 나타난 실직을 중심으로 한 환력을 정리하면 표-2와 같다.
󰋫 표-2 박의장의 告身과 그의 宦歷

순번

연도

내 용

비고

1

1579(宣祖12)

▫ 權知訓鍊院奉事

武科 加資

2

1587(宣祖20)

▫ 忠武衛 副司果→訓鍊院參軍→軍器寺參奉

3

1588(宣祖21)

▫軍器寺副奉事→軍器寺直長→廣興倉主簿→軍器寺主簿

→金海鎭管兵馬節制都尉→鎭海縣監

4

1590(宣祖23)

▫ 慶州鎭兵馬節制都尉→慶州府判官

5

1592(宣祖25)

▫ 繕工監副正兼慶州府判官→軍器寺正 慶州府判官

軍功賞職

6

1593(宣祖26)

▫ 慶州府尹

軍功賞加

7

1599(宣祖32)

▫ 虎賁衛司直→星州牧使

8

1600(宣祖33)

▫ 蔚山郡都護府使

9

1601(宣祖34)

▫ 龍驤衛副護軍

10

1608(宣祖41)

▫忠武衛司猛→蔚山都護府使→慶尙左道兵馬節度使

11

1611(光海3)

▫ 仁同都護府使

12

1612(光海4)

▫ 蔚山都護府使

13

1613(光海5)

▫ 公洪道水軍節度使

박유의 고신은 11점이다. 고신에 의하면 그는 두 번의 무과 급제와 그에 따른 별가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1593년(선조26) 무과 병과로 급제하고 별가를 통해 효력부위(效力副尉)의 품계를 받았으며 이듬해에는 무과 을과로 급제하고 돈용교위(敦勇校尉)가 되었다. 그는 장기현감, 영산현감을 역임하였으며, 부 박의장의 대가(代加)를 통해 통훈대부의 반열에 이르렀다.
무안박씨 무의공 종가 소장 고신에는 가자, 별가, 대가 등과 같은 사연으로 인해 품계가 지속적으로 상승하거나 자손들에게 품직이 주어지는 사례가 빈번하다.  91) 이는 당시 사족들의 특권을 유지하는 한 방편이기도 하였다.  92)
증직교지와 추증교지는 박의장이 통정대부의 품계로 경주부윤에 임명되거나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에 녹훈되는 것을 계기로 그의 부모와 조부모에게 내려졌다. 증시교지는 박의장에게 1784년(정조8) ‘무의’의 시호를 내리는 교지이다. 녹패는 박의장이 경상좌도수군절도사로 재직 중이던 1615년(광해군7) 정월 병조로부터 발급받은 녹과 증서이다. 그는 당상관으로서 ‘제오과록(第五科祿)’을 받았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봄에 중미(中米) 3석, 조미(糙米) 8석, 전미(田米) 1석, 황두(黃豆) 8석, 주(紬) 1필, 정포(正布) 4필, 저화(楮貨) 8장이 지급되었음을 알 수 있다.  93)
소차계장류는 단자, 부의단자, 물목단자, 상언, 소지류, 호적류  94) , 품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들 중 소지류가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부의단자(賻儀單子)는 영양(英陽)에서 영해의 영시소(迎諡所)로 부의를 보내면서 보낸 단자이다. 영해의 영시소는 박의장의 시호를 받는 무의공 종택을 지칭하는 것이다. 박의장은 1784년(정조8)에 시호를 받았다. 영양의 사고(沙皐)에 거주하는 조경규(趙敬圭), 조상룡(趙尙龍), 조상연(趙尙衍)은 영해의 무의공 종택 영시소에 전문 1민(緡)을 보냈다. 전문 1민은 10냥이다. 물목단자 중 영덕현령이 무안박씨 종가에 보낸 자료도 또한 박의장의 영시와 관련이 있다고 본다. 영덕현령이 보낸 물목은 생문어(生文魚), 생대구(生大口) 등의 건어물이었다.
소지류(所志類)는 모두 52점으로 이들은 소지(所志)를 비롯하여 등장(等狀), 단자(單子), 의송(議送) 등 내용과 형식에 따라 다양하게 구분된다. 이들 자료는 내용상 상호 연결되어 있는 까닭에 본서에서는 내용의 이해를 돕고자 소지류로 일괄 분류하였다. 소지류의 내용 중 절반가량인 26건이 산송과 관련한 내용이다.
1683년(숙종9) 소지는 영해의 박하상 등이 선영의 소재관[兼官]에게 올린 소지이다. 박하상 등은 울진(蔚珍)에서 이거해와 거주하고 있는 남시두(南時斗)가 무안박씨의 선영[무의공 묘소]에 투장하자 관에 정소하였다. 그러나 당시 영해부사가 공관인 까닭에 판결이 쉽지 않았으며 남씨가에서도 그 시점을 이용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에 무안박씨가에서는 재차 관련 소지를 점련하여 재차 겸관에게 소지를 올렸으나 역시 본관이 환임(還任)한 뒤에 판결할 것을 지시하는데 그치고 있었다.
산송 관련 소지류 중에는 신(申)·남(南)·권(權)씨와 무안박씨 사이의 쟁송으로 1794년에서 1796년까지 계속되었다. 계축년(1733년)에 영해부에 거주하는 남섭양(南燮陽)·권운섬(權運暹)이 공모하여 무의공 박의장의 분묘가 있는 곳에 투장하게 되었다. 또한 신운한(申雲漢)이 다시 인근에 투장하는 일까지 발생하였다. 산송과정에서 박씨가의 박계주(朴啓周) 등이 연루된 구타사건과 박희복(朴熙復)이 이들의 묘소를 훼손한 일로 속전(贖錢)을 바치는 일이 발생하였다. 본 산송은 무의공 종가에서 승소하여 일단락되는 듯하였으나 이굴(移屈)을 미루는 과정에서 대립이 격화되었다. 심지어 남씨가를 중심으로 무의공의 신도비를 훼손하거나, 상한을 동원하여 박씨가의 분암(墳菴-집희암)을 침탈하기까지 하였다. 본 송사는 박씨가가 승소하였음에도 이 후 40여 년이 지난 1836년(憲宗2)에 영양에 거주하는 권압잠(權炠潛)의 부인(婦人)의 분묘를 박의장 분묘 국내에 마련하면서 논쟁이 재발되었다.
19세기 전반에는 1811년(순조11) 관노(官奴) 장가(張哥), 1818년 박인금(朴仁金), 1823년 권방한(權邦翰)과의 산송이 이어졌다. 이들 산송은 부서(府西) 여현(余峴)에 위치한 박문립의 분묘에 대한 투장에 대응한 것이었다. 당시의 산송에는 풍기, 영주, 순흥(花川 朴盡 後孫) 일대에 거주하고 있는 그의 후손들이 모두 동원되고 있었다.
19세기 후반에는 박하상의 분묘를 둘러싼 산송이 전개되었다. 그의 분묘는 부남(府南) 웅창화(熊倉花) 임산(林山)에 있었다. 1868년(高宗5) 같은 고을에 거주하는 도장(都長) 김성근(金性根)이 처와 형의 분묘를 잠매(潛埋)하였다. 박씨가에서는 암행어사에게 의송을 제출하는 등 적극 대응하였다. 그러나 김성근이 응소하지 않고 도망다니고, 심지어 그가 향청, 유향소뿐만 아니라 향리배와 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까닭에 구금 송치가 쉽지 않았다.
호적류는 12점으로 1798년 박시영(朴時永) 호구단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19세기에 형성된 자료이다.  95) 호적류에 나타난 거주지는 남면(南面) 정신(貞信) 하반포(下反捕)이다. 호적에 나타나는 주호는 박시영, 박종수(朴宗秀), 박회찬(朴晦燦), 박재기(朴載祺), 박재희(朴載禧)이다. 박재기와 박재희는 무의공 종가의 종손이 아니었음에도 이들의 호구단자가 종가에 남아 있다. 종손 박재우(朴載祐)가 세상을 떠나자 아우 박재명(朴載明)의 아들 박우종(朴禹鍾)으로 계후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이들의 명의로 종가의 호구단자가 올려졌다.  96) 호구단자를 통해 개명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노비에 대해서는 부모에 대한 기록뿐 아니라 거주지를 밝히고 있다. 영덕 내에 거주하는 노비에 대해서도 남면(南面) 이외의 지역일 경우 읍내(邑內), 서면(西面) 등과 같이 별도로 명기하였다. 영해 인근의 영덕, 평해는 물론 영천, 경주, 흥해 등에 거주하는 노비가 확인된다.
첩관통보류는 첩정, 관문, 해유문서, 고목, 망기로 구성되어 있다.
1878년(고종 15) 첩정은 언양현감(彦陽縣監)이 삼군부(三軍府)에 언양의 부노산봉대(夫老山烽臺)의 일기(날씨)와 수번(守番) 현황을 첩보한 내용이다. 부노산봉대의 위치는 언양의 남쪽 5리에 위치한 것으로 남으로는 양산의 위천봉대(渭川烽臺), 북으로는 경주 소산봉대(蘇山烽臺)와 거리를 두고 있었다. 본 첩정은 11월에 삼군부로 첩보한 것으로 지난 10월 한 달 동안의 날씨와 수번을 적고 있다. 번을 서는 것은 5일씩 6번으로 나누어 오장(伍長) 1원과 군(軍) 4원으로 구성되었다. 무안박씨 종가와 언양현과의 관련성을 찾을 수 없으나 현재 영덕 축산면 종가 인근에 대소산봉수대(大所山烽燧臺)를 비롯하여 축산포영(丑山浦營)이 설치되었던 점과 연관이 있으리라 추정한다.
임자년에 구봉서원에서 영해도호부에 올린 첩정은 서원 소속 노복에 대한 신역면제를 요청하는 내용이다. 구봉서원이 1785(正祖 9)에 정충사(精忠祠,九峯精舍)에서 개명되었다가 1868년 훼철된 것을 참고하면 이 사이에 작성된 자료로서 1792년 혹은 1852년경에 작성된 자료이다. 구봉서원이 설립되고 서원에 10구의 노비가 획정되었다. 그러나 노비 수를 다 채우지 못한 상황에서 당해 군역을 분간하면서 서원 소속의 노가 혼입되고 말았다. 도호부사는 이들 노 2구에 대한 신역을 탈급해 주라는 처분을 내렸다. 이들 외에 예천과 의성에서 순찰사에게 올린 첩정 3건은 무의공 종가 소장 전적의 낙장된 표지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배접지 속에서 발견된 자료이다.
〈구봉서원 터 : 영덕군 영해읍 원구리 소재〉
관문은 1점으로 결락이 심하여 내용파악이 어려운 상화이다. 내용 중에 천병(天兵), 천장(天將), 이제독(李提督) 등의 용어가 등장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임란 당시의 문서로 추정된다. 내용은 주로 군량을 중심으로 한 재정의 운영상을 담고 있다. 단지 관문의 결락 부위 중 만력28년(1600)으로 추정되는 내용이 있어 임란 후 내용을 정리하였거나 당시 경상좌도병마절도사로 재임하고 있던 박의장이 해유를 위해 제출한 자료 중 일부로 추정될 뿐이다.
고목은 향교의 누역(樓役)이 완성되자 각 댁의 존로(尊老)들을 초빙하는 문제와 장의(掌議)로 천망된 데 따른 출좌(出座)를 아뢰는 내용이다. 이들 자료의 발송처와 작성연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망기는 4점으로 무안박씨의 재실(喜菴齋·椒齋)의 유사를 천망하는 내용과 박구락(朴九洛)이 병산서원과 덕양서원 유사에 천망된 자료이다.
증빙류는 입안, 수표, 수기, 완의로 구성되어 있으며 입안이 중심이다. 입안의 작성연대는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로 명문, 분재기와 더불어 무안박씨의 당대 경제적 기반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입안 15점 중 작성연대를 정확히 알 수 없는 4점은 매매사실에 대한 초사(招辭)만 남아 있으며 1619년 토지상환명문은 입안발급 요청 소지만 점련되어 있으나 입안에 소급 적용하였다. 입안은 서실입안(閪失立案), 분재입안(分財立案), 사환입안(使喚立案), 그리고 매매사급입안(賣買斜給立案)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실입안이 병조에서 발급된 것을 제외하면 입안은 영해부, 영덕, 경주부에서 발급되었다.
1573년(선조 6) 박세렴이 병조로부터 발급받은 서실입안은 그가 조사첩(朝謝牒)을 분실한 사실에 대해 입안받은 자료이다. 그는 1559년(명종 14)과 1565년(명종 20)의 임명장을 분실하자 병조에 서실 사실을 증명해 주는 입안을 발급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병조에서 상고(相考)한 결과 박세렴이 1595년 미조항진관적량수군권관(彌助項鎭管赤梁水軍權管)과 1565년 임치진관금갑도수군권관(臨淄鎭管金甲島水軍權管)을 역임한 사실을 확인하고 입안을 발급해 주었다.
1603년(선조 30)의 분재입안은 박의장이 수양부 박세현에게 노비를 별급받고 영해부로부터 발급받은 입안이다. 1577년(선조 10) 박의장이 일찍이 등과함은 물론 효심이 깊자 양부 박세현이 23세의 박의장에게 노비 2구와 답(畓) 8두락 전(田) 7두락을 별급하였다. 별급문기에 의하면 박의장은 일찍이 3세 전에 박세현에게 수양되어 성장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당시 박세현은 경상좌도수군절도사(慶尙左道水軍節度使)였다. 증인으로는 전월송포만호(前越松捕萬戶) 박효장(朴孝長)과 내섬시봉사(內贍寺奉事) 박세순(朴世淳)이 참여하였다.  97)
1584년(선조 17) 박세현은 박의장의 수양을 파기하면서 그동안의 기른 정리에 따라 비 1구를 추가로 별급하는 문서를 작성하였다. 박세현은 박의장을 수양하고 계후(繼後)하고자 두 차례나 정소하였으나 남의 장자로 계후할 수 없다는 이유로 좌절되었다.  98) 그러던 차에 첩자녀(妾子女)가 장성하였을 뿐 아니라 국법에 납속으로 허통하여 사로(仕路)를 열게 되자 적자녀(嫡子女)의 의를 갖추게 되었다. 이에 박의장을 파양(破養)하기로 결정하였다. 단지 그를 20여 년 동안 기른 정성은 부자의 정리와 다름없다고 지적하고 박의장이 장가갈 당시 별급한 노비 각 1구와 등과할 당시 별급한 노 2구, 답 8두락 전 7두락을 비롯하여 비 1구를 추가로 별급하였다. 본 분재기는 1577년의 별급문기와 점련되어 제출되었다.
박의장은 분재가 있은 이후 약 20년 후에 영해부에 본 분재에 대한 입안을 요청하는 소지를 그간의 사정과 함께 제출하였다. 소지에 의거해 영해부에서는 이미 세상을 떠난 박세현을 대신하여 그의 자녀들, 즉 훈련판관(訓練判官) 박응장(朴應長), 신덕룡(申德龍), 이번(李蕃)으로 하여금 분재 사실을 확인하는 초사를 받았다.  99) 본 초사에 의거해 영해부에서는 1603년(선조30) 입안을 발급하였다.
1586년의 영해부 매매사급입안은 박세렴이 노비를 매득하고 발급받은 입안이다. 방매자의 매매사유는 당해 환자(還上) 납부는 물론 가뭄과 기근에 따른 생계를 모색하기 위해서였다. 1593년에서 1601년에 이르는 6건의 입안은 임란기 영해부와 경주부로부터 노비의 매매와 사환에 대해 발급받은 사급입안으로 구성되어 있다. 입안에 점련된 명문에 의하면 임란으로 인한 가난과 실농(失農), 유리(流離)하는 실상이 잘 반영되어 있다. 임란기 노비와 전답에 대한 매매는 생사의 갈림길에 생계를 위한 절박한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으로 일반적으로 흉황을 계기로 저가로 전답 등을 매득하는 사례와는 구분되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
1593년 박세렴이 영해부로부터 발급받은 입안 임란 중 기아자를 구활하고 이들의 사환을 확인받은 자료이다. 1673년의 입안은 박하상이 장온(張蘊)으로부터 비를 매득하고 평해군으로부터 발급받은 매매사급입안이다. 본 입안에는 장온이 분재받을 당시의 분재기는 물론 박하상이 매득한 노비를 묘직 수호를 위해 사환하는 것을 결의하는 문중완의가 점련되어 있어 참고된다.
1676년(숙종2) 문중완의는 무안박씨 종중에서 박의장의 묘위 재사인 집희암(集喜菴)의 운영에 대해 의결한 내용이다. 박의장의 분묘는 무안박씨 영해 입향조의 분묘가 위치한 오현(烏峴)에 함께 있었다.  100) 오현에 있던 박의장과 그 배위의 분묘는 1633년 오현과 지근거리인 현재의 영덕군 창수면 수리로 옮겨졌다. 분묘에는 묘위 수호를 위한 집희암을 마련하였다.  101) 본 완문은 집희암의 기명(器皿) 관리는 물론 재사 운영을 위한 묘위답(墓位畓)의 재정 확보를 위해 종중에서 완의를 작성하고 있다.
〈덕후루·집희암 전경 : 영덕 창수면 수리 소재, 경북 유형문화재 제234호〉
명문문기류는 분재기, 패지, 명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분재기는 18세기까지 무의공 종가의 경제적 배경을 반영하고 있으며, 명문은 18세기 이후의 상황을 부분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분재기는 21점으로 17세기 이전의 자료로 구성되어 있다.  102) 화회문기를 중심으로 무안박씨가의 경제적 추이를 일별해 볼 수 있다.
가장 오랜 분재기는 박세렴 남매의 화회문기이다. 본 분재기의 서두부분이 결락되어 정확한 작성연대를 알기 어려우나 박세렴이 권지훈련원봉사(權知訓練院奉事)로 재직할 당시 분재받은 자료임이 참고된다. 박세현과 박세렴 형제의 졸년이 1593년인 점을 감안하면 적어도 그 이전에 작성된 자료로 판단된다. 본 분재에 참여한 인물은 아래와 같다.

長娚

通訓大夫前行渭源郡守

朴世賢

次妹夫

前部將

權大仁

次娚

權知訓練院奉事

世廉

筆執末娚

內贍寺奉事

世淳

孼妹夫

南仲宗

孼娚

世溫故代妻

召史

孼次娚

世恭

분재에 참여한 인물은 박세현을 비롯한 7남매를 중심으로 하고 있었다. 분재 내용 중에는 박영기의 장자로서 무후한 박세충의 얼녀(孼女)에게도 분재하고 있어 8남매를 분재 대상으로 하고 있다.  103) 본 분재기의 서문과 박세현금의 분재내용 결락 등으로 인해 자세한 분재 사정과 정확한 재산의 규모 파악에는 한계가 있으나 이들을 표로 도식화하면 아래와 같다.
󰋫 표-3 : 박세렴남매화회문기의 분재현황(田畓-斗落, 奴婢-口)

長女

(權大仁)

次子

朴世廉

次子

朴世淳

孼長女

(南仲宗)

孼次子

朴世溫

孼次子

朴世恭

長兄孼女

80.0

95.0

87.5

33

23

35

8

361.5

101.5

122.5

106.0

13

26

18

6

393.0

7

10

9

1

1

28

10

9

7

1

1

28

未詳

2

2

2

3

3

8

1

1

2

4

전답에 대해서는 행정지명이 명기되고 있지 않아 영해를 중심으로 분포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104) 노비에 대해서는 신노비질, 매득노비로 구분하고 있으며, 연안부(延安府)에 거주하는 1구의 노비만이 명기되고 있어 노비 또한 영해를 중심으로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유루분급질(遺漏分給秩)에 대해서도 다시 분재가 이루어졌다.
분재대상 재산의 정확한 규모는 박세현의 기록이 결락된 까닭에 정확히 알 수 없다. 적자녀와 얼자녀의 분재규모에는 차등을 두고 있으나 그들 내부에서는 평균분집을 구현하고자 하였다. 현재 남아 있는 분재기에 의하면 16세기 후반 영덕 무안박씨가의 경제적 규모를 가늠할 수 있다. 15두를 1석으로 기준하였을 경우 전답의 경우 밭은 24석 논은 26석의 규모를 상회하였다. 노비는 58구, 소 8마리, 솥 4개이다.  105) 이러한 규모는 당시 사족의 경제적 규모에 비해 방대한 규모의 재산은 아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106) 아울러 임란 당시 군량미로 700여 석을 지원한 사실은 영해 일대 박씨가를 비롯한 제 가문의 지원에 힘입었을 가능성이 크다.  107)
박유남매화회분재기는 영남대학교 박물관 소장자료이다. 본 분재기는 박의장 당대의 경제적 배경을 사실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분재기의 내용에 따른 재산규모는 표-4와 같다.
󰋫 표-4 : 박유남매화회문기의 분재 현황

田畓未詳

奴婢未詳

기타

비고

主祀秩

6石10斗落

1石6斗落

4

4

祭器秩34

家垈田 포함

祖考妣秩

2

考妣秩

5石20斗落

70斗落

3

1

祭器秩21

長女孫魯

63斗落

80斗

17

18

長子 朴瑜

57斗落

34卜5束

72斗5升

20卜4束

18

21

1

次女 朴樅茂

1石27斗

67斗5升

20斗落

13

18

次女 李時亨

2石34斗

62斗5升

4斗落

15

12

1

次子 朴瑋

1石61斗

70斗5升

20

17

1

瓦家1坐

家垈田 포함

次子 朴玏

2石52斗

1石61斗5升

20

12

家垈田 포함

末子 朴璿

2石43斗5升

56斗落

1石落只

16

19

瓦家1坐

家垈田 포함

孽子 朴珷

1石8斗落

8斗落

1

1

長孫 朴文立

1

1

孫 朴文度

2

孫 朴文起

1

孫壻 李{白+周}

1

外孫壻 鄭好仁

1

孫壻 李榮久

1

20石375斗5升34卜5束

2石554斗5升20卜

1石24斗落

134

126

3

祭器55. 瓦家2坐

박문립남매화회문기는 박유의 자녀들이 그의 사후에 재산을 화회분집한 분재기이다. 박유는 1618년에 세상을 떠났으며, 3년상이 끝나고 분재를 하였다고 볼 경우 1620년경에 본 분재기가 작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분재기 서두와 상단부의 결락으로 정확한 내용 파악에는 한계가 있으나 명확한 내용을 중심으로 분재현황을 파악하면 표-5와 같다.
󰋫 표-5 : 박문립남매화회문기의 분재현황

田畓未詳

奴婢未詳

기타

비고

主祀秩

6石10斗落

1石6斗落

4

4

祭器秩34

家垈田 포함

祖考妣秩

2

考妣秩

5石20斗落

70斗落

3

1

祭器秩21

長女孫魯

63斗落

80斗

17

18

長子 朴瑜

57斗落

34卜5束

72斗5升

20卜4束

18

21

1

次女 朴樅茂

1石27斗

67斗5升

20斗落

13

18

次女 李時亨

2石34斗

62斗5升

4斗落

15

12

1

次子 朴瑋

1石61斗

70斗5升

20

17

1

瓦家1坐

家垈田 포함

次子 朴玏

2石52斗

1石61斗5升

20

12

家垈田 포함

末子 朴璿

2石43斗5升

56斗落

1石落只

16

19

瓦家1坐

家垈田 포함

孽子 朴珷

1石8斗落

8斗落

1

1

長孫 朴文立

1

1

孫 朴文度

2

孫 朴文起

1

孫壻 李{白+周}

1

外孫壻 鄭好仁

1

孫壻 李榮久

1

20石375斗5升34卜5束

2石554斗5升20卜

1石24斗落

134

126

3

祭器55. 瓦家2坐

전답의 소재지는 장녀에게 분재된 경주소재의 전답을 재외하고는 모두 영해 인근에 위치한 것으로 판단된다.  108) 노비의 분포 또한 전답과 대동소이하다 하겠다. 17세기 초엽의 무안박씨의 경제적 규모는 전답이 12석 가량, 노비가 37구 정도였다. 물론 분재기에 노비전답이 모두 기재된 것이라 판단하기는 어렵다고 하더라도 16세기 말의 상황보다 많이 위축된 규모임을 알 수 있다.  109)
17세기 후반의 분재기 중 박문립이 말년에 자녀에게 재산을 분재한 금급문기(衿給文記)가 있다. 분재기에 나타난 분재현황은 표-6과 같다. 본 분재기에 의하면 여전히 17세기 초엽보다 분재량이 재차 감소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표-6 : 박문립금급문기의 분재현황(田畓-斗落, 奴婢-口)

主祀位

長子(朴洵

次子(朴氵+楚)

長女(李埰)

孼女

비고

280卜1束*)

13

8卜***)

23卜7束**)

12

4

4

4

4

5

1

3

7

5

1

별급문기로는 1612년(광해군 4) 이지영(李芝英)110) 의 처 이씨가 박의장에게 비(婢) 1구를 별급하는 문서가 있다. 딸 사위 박의장이 평소 봉양에 극진하였을 뿐 아니라 수연(壽宴)도 성대하게 거행하자 비를 별급하였다. 1620년 박유의 처 손씨가 박문립에게 별급한 분재기는 종가건립을 위한 재원으로 노비를 아들에게 별급하는 내용이다.
명문은 65점으로 16세기 11점, 17세기 11점, 18세기 17점, 19세기 19점이다.  111) 16세기 명문은 박세렴이 田을 매득하면서 작성한 명문 1점과 박의장이 전란 중에 노의 이름으로 畓과 婢를 매득하는 자료 1점이 있다. 매매명문에 등장하는 무안박씨가 인물로는 박하상이 확인되고 그 외에는 노비의 이름으로 매득하였거나 구문기로 존재하는 자료들이다. 이들 명문 중에는 ‘椒齋’, ‘구봉서원’, ‘喜庵齋’ 등에서 전답을 매득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자료가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
(6) 서간통고류
서간통고류는 통문, 간찰, 위장, 혼서, 존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통문에는 1848년(戊申)경에 순흥과 영해 종중에서 족보간행을 위해 보낸 통문을 비롯하여 구봉서원과 관련한 답통(答通)이 있다. 간찰은 무의공 박의장 간찰을 중심으로, 박정결, 박회찬 등의 가서(家書)가 있다. 이 외에도 유치명, 이재, 신분구 등의 간찰이 주목된다. 간찰 중 특히 박의장이 시호를 받을 당시 영시소(迎諡所)로 부조 등을 보낸 자료가 다수 남아 있어 여타 치부·성책자료 등과 연계하여 영시 절차에 대해 검토할 여지가 있다.
혼서 중에는 1720년(숙종46) 박하상이 그의 손자 박명주(朴命周)의 혼례시에 혼주로서 철성이씨(鐵城李氏=고성이씨) 이시성(李時城)가에 보낸 문서가 있다. 존문은 1901년(광무5) 영덕군수 呂가 무안박씨 종가에 보낸 안부 편지이다.
(7) 치부기록류
치부기록류 자료는 결락이 심하고 내용의 연결성이 떨어져 작성자와 연도파악에 어려움이 많다.
전답안 중에는 1631년(인조 9) 손충의댁제위전답(孫忠義宅祭位田畓)을 기록한 자료가 있다. 전답은 분재기 등을 검토한 결과 영해 일대에 존재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손충의댁은 박유의 처가인 월성손씨를 지칭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집사분정기는 박씨가의 장사(葬事), 천장(遷葬) 당시의 분정 현황을 기록한 자료들이다. 이들 중에는 1784년(정조 8) 박의장의 시호가 내려지자 영시청(迎諡廳)이 설치되고 이에 따른 영시례를 행하기 위해 집사분정한 자료가 있다. 도판(都判) 박진태(朴鎭泰, 1730-1803), 박래주(朴來周)를 비롯하여 도검(都撿) 박진현(朴鎭鉉)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집사분정의 항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都判, 都撿, 酒監, 行酒監, 麵監, 上床監, 飯監, 磐監, 行磐監, 果監, 肉監, 魚監, 米監, 南草監, 供器監, 鋪陳監, 燒木監(松炭監), 菜監
영시를 위해 분정한 인사는 무안박씨가 인물 64명이 동원되었으며, 각종 물력의 조달과 운영을 위해 효과적으로 집사 분정하였다.
치부류는 ‘희암재’와 ‘오현재’ 등의 문중재사 추수기와 전곡의 운영을 기록한 자료이다. 이들 자료는 심한 결락 등으로 인해 구체적인 작성시기와 내용 파악에 많은 어려움이 있다.
(8) 시문류
‘자족당기’는 17세기 중엽에 안릉(安陵) 이익세(李翼世) 등이 지은 것으로, ‘자족당’은 박문립의 자호이다. 이들 외에 ‘향음주례시서(鄕飮酒禮詩序)’, ‘구봉송금수계서(九峰松禁修稧序)’ 등 작자와 시기를 알 수 없는 각종 서문이 있다.
상량문은 1915년경에 박재헌(朴載憲), 박재만(朴載萬) 등의 ‘동도복성비각이건상량문(東都復城碑閣移建上樑文)’ 등이 있다. ‘도도복성비’는 임란 당시 박의장의 경주성 복성을 기념하여 1816년(철종 12)에 경주부 관아에 건립되었다. 일제 강점기인 1915년에 경주의 황오리(皇吾里)로 이건되었으며, 해방후 1959년에는 다시 인왕리(仁旺里)로 옮겨졌다.  112)
만사는 18세기 이후 종가의 박하상 이후 종손에게 올린 자료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가장 오랜 것으로는 박태주(朴台周)가 박하상에게 올린 만사이다. 이 외에도 박우영(朴宇永)이 박회찬의 영전에 올린 장문의 만사 등이 있다.
(9) 성책고문서113)
성책고문서는 ‘치부기록류’로 분류될 수 있으나 자료와의 상관성을 고려하여 성책고문서로 별도로 구분하였다. 이들 자료 중에는 完文, 節目 등이 부기되어 있어 참고할 필요가 있다.
전답안은 모두 6종이다. 무안박씨의 재실인 ‘초재’, ‘희암재’ 등과 관련한 전답을 정리한 것들이다. ‘남초호석봉전안(南初戶石奉田案)’은 남초면에 거주하는 무안박씨의 호노인 석봉의 명의로 기록된 전안을 정리한 것이다. 작성 시기는 석봉이 등장하는 소지류 자료 등을 참고하였을 경우 1742년경으로 추정된다. 전안에 기재된 토지는 남초 소재의 전답 70복(卜) 8속(束)이다.  114) 박씨가 소유의 석몽 명의로 된 전결에 대한 착란이 심하여 박씨가의 소송을 계기로 타량(打量)이 이루어졌으며, 그 과정에서 ‘복(覆)·곡(哭)’ 자의 지번에 대한 착란이 심한 것이 확인되었다. 이에 새로이 이정(厘整)하고 전안을 확정하는 완문을 함께 발급하였다. 본 전안에는 응복(應福) 호의 전안에 대해서도 갑진년(1844)에 새로이 타량한 내용과 그에 대한 관의 확인이 부기되어 있다.
‘희암전안(喜庵田案)’은 1873년(고종 10)에 희암재의 전답현황을 관으로부터 확인받은 자료이다. 대상토지는 희암재 소속의 ‘서초(西初)’와 ‘서이(西二)’ 지역 소재의 전답현황이다.  115) 전답 규모는 서초 소재가 1결 61부이고, 서이 소재가 1결 14부 9속으로 모두 2결 74부 9속 규모의 전답이다. 본 전안을 작성할 당시의 도감(都監)은 박중찬(朴仲燦, 1828-1877), 별색(別色) 신계성(申啓成), 서원(書員)이 김윤순(金允淳)이었다. 문서의 말미에는 영해도호부 발행의 완문이 부기되어 있다. 완문은 집희암(=희암재)의 전안에 대한 착종이 심하자 새로이 타량하고 수정된 양안에 따라 새로운 전안을 발급하고, 향후 이에 준행할 것을 증명하는 내용이다.
‘대소민구폐절목(大小民瘼矯捄節目)’은 남면(南面)의 결전과 호포의 수납은 물론 정전(情錢)등과 관련한 규정을 마련한 것으로 작성 시기는 갑오년[1834]이다. ‘완문(完文)은 전결에 대한 복정과 수세 문제에 있어 무자년[1828] 겨울을 기준으로 하여 향회(鄕會), 도서원(都書員), 면서원(面書員) 등이 상의하여 절목을 마련하고 이를 각 면에서 준행할 것을 합의한 내용이다. 절목은 7개 조목으로서 결복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상호 협의할 내용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향회중(鄕會中)에서 결의된 것들이다. 이들에 대해 수조청(收租廳)에서는 향회에서 논의된 내용과 입의(立議=절목)에 따라 수행할 것을 밝힌 내용이 부기되었다.
박의장의 1784년(정조 8) 영시(迎諡) 당시 일기와 부조현황을 기록한 자료는 ‘무의공영시일기(武毅公迎諡日記)’와 ‘영시시부조기(迎諡時扶助記)’가 있다. 영시일기는 10월 22일에서 25일까지 일정별로 정리되어 있다. 22일에는 영시를 위한 집사분정에 따라 당담원들이 도착하고 있다.  116) 23일에는 영해부를 오가며 예관의 도착 여부와 행사의 준비 일정 등의 연락을 취함과 동시에 의절(儀節)과 공궤(供饋)에 대한 논의가 지속되고 있다. 24일은 영시를 위해 제원이 정사재당(精舍齋堂)에 모였으나 장소의 협소로 인해 별도의 장소를 마련하였으며, 공궤에 있어 많은 어려움이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한편, 당일 오후 예정되었던 영시례는 다음날 아침으로 연기되었다. 25일은 영시례가 행해진 당일로서 행사의절과 참석원에 대한 기록이 자세하다. 아침에 반수(班首)로 생원 권창유(權昌愈), 백태형(白兌亨) 등을 정하고 조반 후에 상읍례(相揖禮)를 행하였다. 이어 영해부사를 비롯하여 영덕, 영양, 영일 등의 수령들이 행례한 다음 사림과 자손의 순으로 진행하였다. 예관이 의복을 갖춘 후 종손이 신주를 내어오는 것으로 절정에 달했다.
‘영시시부조록’에는 경북 각지의 가문별로 도래한 부조현황 및 무안박씨가 내부의 부조내역을 항목별로 정리함은 물론 후반부에는 항목별 지출현황을 기록하였다.  117) 부조기의 서두에는 경주 이조(伊助) 최생원이 건시(乾柿) 1첩을 부조한 것을 필두로 경주, 안동, 영양, 진보, 영덕, 영천, 평해, 울진 등지의 서원과 가문에서 부조하였다. 영해부 내에서는 남씨, 이씨의 여러 가문과 향교를 비롯하여 박씨가 각 지파별로도 별도로 부조가 이루어졌다. 부조액은 모두 373냥이 넘는 액수였다. 지출은 9월의 향례에 24냥 4전, 소 4마리 구입에 25냥 5전, 채단 값으로 46냥을 지출하였으며, 이 외에도 어물, 채소, 기명, 주가 등의 명목으로 소소하게 지출되었다. 행사 후 잔액은 80냥 2전 4푼이었다.  118)
이들 외에 장례시 통부록(通訃錄)과 부조·시도기·조객록 등이 있다. 박유를 비롯하여 박문립, 박순 등의 가장은 박씨가의 인물과 내력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들이다.
무안박씨 영해파는 박지몽이 15세기 말 이곳에 입향한 후 지금까지 세거하고 있는 명문가이다. 이 집안 가문의 위세를 크게 신장시킨 것은 무의공 박의장 대이다. 그의 집안은 무과출신이 많았고 박의장은 임진왜란을 통하여 경주부 판관 2년, 경주부윤 6년, 8년간 경주부를 지키는 장수로서 그리고 명나라 군대의 군량, 군사의 징발 등에 군사적 지략과 용맹, 행정가로서 모범이 될 우국지사라 할 수 있다.
경주부민들은 박의장을 부모처럼 생각하고 있다고 표현하였다. 자신이 명군에 수모를 당하면서도 백성의 침탈을 혼자의 힘으로 막아내었다. 백성들은 이러한 은덕을 드러내면서 세 차례의 탄원서를 내어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그를 유임케 하여 달라고 간절히 요청하였다. 박의장은 전쟁의 전 기간에 경주부민을 위해서 혼신의 힘을 다 쏟았다. 그러나 이런 공로는 그만이 아니라 향리와 관노들이 함께한 것이었다. 향리들 중 체형을 받은 사람은 이에 불만을 가져 후일 그의 공을 헐뜯는 데에 주원인이 된 듯하다.
그리고 그의 임란 중의 공적은 󰡔선조실록󰡕에 ‘파잠전투’, ‘사화령전투’의 내용이 서술되어 있고, 1593년 5월 전국의 상황이 극히 불투명한 상황에서 비변사는 전국에서 큰 승리를 거둔 장수는 경주 박의장과 울산의 김태허라는 기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공을 표창함에는 겨우 선무원종공신에 책봉되었을 뿐이다. 이는 그에 대한 공정하고 적절한 포상이라 할 수 없다. 이는 중앙 정계에 있는 사람과의 관계 정립에 그가 신경을 쓰지 않은 데에도 이유가 있을 것이다. 무의공 집안은 임진왜란 중 경제력을 크게 확장한 문중의 한 예이고 선무원종공신의 책봉은 이 가문의 종족적 결속을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영해박씨의 고문서는 16세기 문서부터 보존되었어야 하는데 일부가 유출되어 현재 완전한 상태가 아니다. 그러나 이들 문서는 당시의 사회경제적 상황을 이해함에 아주 소중한 자료임에 틀림이 없다. 본 자료를 영인·출간함을 계기로 보다 깊은 임진왜란사와 16세기의 사회경제적 상황을 연구함에 아주 소중한 자료임을 확신한다. 그리고 특히 경주의 임진항쟁사는 현재 의병중심으로 연구된 것을 보완할 수 있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앞으로 본 자료를 통한 깊은 연구가 많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