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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조식유적 정문 전경
조선시대의 대표적 사상가이자 대학자인 남명 조식선생의 유적이다. 선생의 자는 건중(楗仲), 본관은 창녕(昌寧), 오는 남명이다. 선생은 1501년 현재의 합천군 삼가에서 태어났다. 30세가 되던 해에는 처가가 있는 김해 신어산(神魚山) 아래에 산해정을 지어 학문을 연구하고 강론하였고, 48세부터는 삼가에 뇌룡사(雷龍舍)를 지어 찾아오는 제자들을 가르쳤다. 조정에서 선생에게 단성현감(丹城縣監) 등 여러 차례 벼슬을 내렸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그러나 현실에 대한 과감한 비판과 임금의 잘못된 정치에 대하여 직업으로 상소하는 등 나라와 백서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었다. 61세 때 지리산 천왕봉이 바라보이는 이곳에 산천재를 지어 제자들을 가르치다가 72세로 일생을 마쳤다.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정(文貞)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여기에는 남명선생과 관련된 산천재, 덕천서원, 세심정, 묘소, 신도비, 여재실 등의 사적이 있다. 산천재는 선생이 여생을 보낸곳으로, 마루 위 벽에는 밭가는 그림 등 벽화 3점이 남아 있다. 덕천서원은 1576년(선조 9)에 선생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지은 것인데, 1609년에 사액서원이 되었다. 그러나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20년대에 복원되었다. 세심정은 덕천서원 앞 강가에 있는데, 학문하는 여가에 휴식하는 곳이다. 묘소는 산천재 뒷산에 있는데, 선생이 생전에 손수 자리 잡은 곳이다. 신도비는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이 비문을 지었는데, 남명기념관 경내에 있다. 여재실은 문중에서 제사를 지내는 가묘로 별모라고 있컫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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