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장처 고문서 특징
- 홈
- 소장 고문서
- 소장처 고문서 특징
본 고문서의 주인공 晉州河氏는 死六臣 河緯地(1387-1456) 後孫家를 지칭한다.
註1)
문서 원본은 慶北 安東市 西後面 校洞에 소재해 있었으며, 공개될 당시 소장자는 河鍾禹氏였다. 현재 손자인 河建植氏가 그 원본을 소장하고 있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원본을 대여한 곳도 하건식씨 자택이었다.
河氏家 소장 고문서를 조사한 시기는 1996년 3월~6월 사이였다. 여기에 참여한 연구자는 필자를 비롯해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정구복 교수와 김문택·김학수·윤진영 연구원 등이었다. 이에 앞서 조사팀은 안동 서후면의 교동 하씨 종가와 彰烈祠 소장 고문서를 조사한 바가 있었다. 그러나 종가 및 창렬사 소장 문서는 본서에 수록하지 못하였다.
註2)
精神遺産으로서 고문서는 가문의 사회적 위상을 상징하거나 증명하는 경우가 많았다. 河氏家 문서에는 유독 조상의 업적이나 행적을 문서를 통해 기리거나 증명하기 위해 작성된 것이 많다. 이것은 河緯地라는 인물이 갖는 역사성, 그리고 이를 유지하고자 하는 후손들의 노력과 무관하지 않다. 死六臣으로서 후손이 건재한 경우도드물지만 당대의 문건이 전하는 것은 河氏家가 유일하다고 할 수 있다. 逆賊의 죄를 받아 滅門之禍를 당한 가문에서 조선초기 문서를 다수 소장할 수 있었던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첫째, 조선 태종 대 河澹과 그의 아들인 河綱地·河緯地·河紀地·河紹地 사형제 등 일족이 모두 문과 및 사마시에 합격하는 등 화려한 官歷을 보이고 있어, 당시 하씨가는 사회 경제적으로 매우 공고하였다. 이들은 재산의 籍沒 과정에서 하위지와 그 가족들의 재산을 적절히 分離·隱蔽시켰다. 이 때문에 하위지 이후에도 그 재산이 일정 부분 유지되었다. 즉 경제적 富가 하위지 이후에도 유지되었고, 이 때문에 그 유산들이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이다.
둘째, 영남지방 사족들이 그 유족들을 감싸고 비호하는 분위기가 있었는데, 이것은 단순히 感想 차원이 아니라 매우 실질적이었다. 이는 혼인관계에서 선명히 드러난다. 당시 奉化琴氏·安東券氏는 영남의 대표적 사족이었다. 이들은 하씨를 逆賊家門으로서 멀리하지 않고 통혼권을 형성, 경제적 기반을 제공하거나 사회적 지위를 유지시켜 주었다. 河緯地家 후손들이 死六臣 사건이후 그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이같은 주위 사족의 물심양면에 걸친 후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셋째, 숙종 대 이후 하위지의 伸寃과 復官, 그리고 하위지 후손으로 公認되기까지 누대에 걸친 하씨가 인물들의 끈질긴 노력을 들 수 있다. 사육신 伸寃 문제가 대두되면서, 조정에서는 그의 奉祀孫을 인정할 것인지에 대해 논란이 많았다. 이 때 하씨 문중에서는 많은 증빙자료를 준비하였는데, 하위지 〈遺券〉을 비롯한 각종 고문서가 이 때 근거자료로 제시되었다. 뿐만 아니라 하씨가 인물들은 黨色을 떠나 京鄕의 要路 인물들을 찾아가 각종 자료에 대한 公證을 받아 두었다. 李光庭, 洪啓禧, 鄭澔, 李志奭 등에게 〈書丹溪先生遺券後〉와 같은 글을 받아둔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註3)
이러한 행위들은 단순한 위선 차원을 넘어 가문의 사활과 관련된 일이었다. 따라서 그 열의와 정성은 실로 至大한 것이었다. 이는 또한 그들이 양반 신분을 유지하고 지역사회에서의 사회적 위치를 구축하는 捷徑이기도 했다. 河氏家 문서를 처음으로 학계에 소개한 분은 당시 영남대 교수로 재직하던 李樹健 교수였다. 이 교수는 비교적 사료적 가치가 높은 고문서를 중심으로 脫草·正書하여 慶北地方古文書集成으로 출간하였다.
註4)
이 책에는 주로 조선 전기의 것으로서, 전형적 고문서만을 대상으로 삼았으며, 모두 10점이 실려 있다.
註5)
따라서 본서의 조선 초기 문서는 대다수 慶北地方古文書集成에 소개되어 있다. 본서에는 慶北地方古文書集成에 게재된 문서를 포함하여 추가로 발굴된 문서, 그리고 조선 후기의 門中 및 창렬사 고문서 등을 중심으로 揭載되었다.
柳氏家 고문서로서 本書에 실린 것은 모두 349점이다. 이 가운데 낱장으로 된 개별 문서는 307점이며, 成冊 고문서는 42책이다. 이를 분류해 정리하면 다음 표와 같다.
敎令類 |
疎箚啓狀類 |
牒關通報類 |
證憑類 |
明文文記類 |
書簡通告類 |
置簿記錄類 |
詩文類 |
4 |
46 |
14 |
7 |
8 |
161 |
76 |
33 |
하씨가 문서는 각 작성시기마다 특징을 가지고 있다. 15세기는 하위지와 그 조카 하원과 관련된 分財記, 所志, 牒呈, 陳省 등이 주 내용을 이루고 있다. 17세기에는 주로 숙종 대 하위지의 신원 및 公認과정에서 작성된 것들이 대부분이며, 18,19세기에는 奉祀孫으로서 입지를 굳힌 하씨가 私文書와 宗中 문서가 대종을 이룬다. 종중문서에는 창렬사라는 하위지 제향 서원의 운영과 관계된 문건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진주하씨의 先系는 각 시기마다 발간된 족보마다 약간씩 달리하여 정확한 내용을 알 수 없다. 사마방목 및 기타 문과방목에도 인적사항이 그리 자세하지 않다. 그러나 문과방목에 나오는 河紀地의 가족사항을 보면 신빙성 있는 기록이 발견된다. 하기지는 하위지의 아우이다. 방목에 의하면 그의 본관은 晉州이며, 아버지는 河澹, 조부는 河之伯, 증조부는 河胤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은 河氏家 소장의 초기 족보의 내용과 일치한다.
또 1489년(성종 20) 하위지의 조카 河源(1451-1518)이 당대에 奉化縣監이 올린 牒呈에 대하여 慶尙道觀察使는 〈陳省〉을 통해 다음과 같이 그 四祖를 확인해 주었다.
父生員紹地
祖通政大夫司憲府執義澹
曾祖朝奉大夫門下評理之伯
外祖生員琴嵇本奉化
이 陳省의 내용을 통해 하원의 증조부 ‘之伯’의 존재가 확인된다. 이같은 점에서 시조 河成을 제외한 2세 希甫 ~ 7대 澹에 이르는 河氏家의 先系는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이 점은 河氏家에 전존하고 있는 1700년대 초 족보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註6)
이들 자료를 통해 그 先系를 圖示하면 다음과 같다.
〈安東 晉州河氏 先系〉
이 家系를 면밀히 살펴보면 하씨의 원 거주지는 晉州였고, 그 통혼권은 晉州鄭氏 등 이 지역의 土姓吏族임을 알 수 있다. 하씨 자신들 또한 대대로 同正職이나 武官職을 세습하고 있음이 확인된다. 문과방목에 의하면 河澹·河綱地·河緯地·河紀地·紹地 등의 인물들이 진주를 본관으로 적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즉 이들은 하담 대에 선산으로 이주해 왔지만 그 선대의 世居地는 진주였던 것이다.
세거지 진주를 벗어나 善山으로 그 근거지를 옮기게 되는 시기는 하위지의 아버지 河澹 대였다. 하담이 杞溪 兪氏에게 장가를 들어 婿留婦家婚의 관행에 따라 妻家인 선산으로 그 거주지를 옮겼던 것이다. 妻家가 살고 있던 곳이 바로 善山 迎鳳里였다.
그러면 17세기에 만들어진 一善誌를 통해 영봉리의 당시 사정을 알아보자. 영봉리에는 하담 이전에도 수많은 인물들이 사회적 학문적 근거지로 삼고 있었다. 하담의 妻家인 기계유씨 뿐만 아니라, 유명한 강호 김숙자와 그의 아들 점필재 김종직 등 선산김씨 가문이 이곳에 살고 있었다. 또 田可植, 鄭招(?-1434), 金完湜·金仲卿(一善人) 가문이 세거하던 곳도 영봉리였다. 이들에게 있어서 영봉리는 단순한 거주지가 아니었고, 면학을 통해 입신출세의 길을 다지는 곳이었다. 영남학맥의 종장 김숙자·김종직 부자를 제외하더라도 많은 인재들이 이곳 영봉리에서 배출되었다.
이곳 출신 전가식은 1399년(정종 1) 문과 장원으로 급제하였고, 하담의 처부 유면 또한 1405년(태종 5)에 문과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칠정산내외편 및 농사직설 등을 편찬하여 세종 대의 대표적 학자라 할 수 있는 鄭招(?-1434, 하동인) 또한 영봉리에 살면서, 태종 5년에 副壯元으로 급제하였다. 金完湜·金仲卿 가문 또한 대대로 사환을 지냈는데 이들이 모두 영봉리 출신들이었다. 또 金峙는 영봉리에 살면서 야은 길재에게 학문을 배워 세종조에 이르러 과거에 급제, 사간원 사간을 지냈으며, 담장을 사이에 두고 김숙자·김종직 등과 교류하면서 지냈다.
영봉리 人才群 중에서도 河澹과 그 자녀들 대에 이르면 더욱 신장되는데 하담은 이웃의 강호 김숙자와 교유하면서 자제를 교육시켰다. 하담 그 자신은 1402년(태종 2) 식년문과 乙科에 급제하였고, 큰아들 河綱地는 1429년(세종 11) 문과에 급제하였다. 또 河緯地·河紀地 형제는 1438년(세종 20)에 문과에 同榜으로 합격했다. 이때 하위지는 장원급제였다. 또 그 동생 河紹地조차도 1447년(세종 29)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니, 一善誌에는 당시 하씨가의 인재를 두고 ‘一時人才之盛 以迎鳳里爲首’
註7)
라고 할 정도였다.
이같이 河氏家의 立身은 주위에 학문의 중심지로서 영봉리 사족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위지 형제들과 그 아들들은 모두 선산 영봉리에서 태어나 이같은 환경속에서 在京士族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선산은 영봉리의 인재군 이외에도 吉再와 金叔滋의 학통을 이은 朴瑞生(密陽靷), 李孟專(성주이씨), 鄭之澹, 康愼(信川人), 吳湜 등 인물이 즐비하였다. 조선 인재의 절반은 선산에 있고, 영남 인재의 반이 선산에 있다는말
註8)
또한 이 당시 선산 인재의 성대함을 두고 한 말이었다.
사육신 사건 이후 하씨가를 보자. 사건이 터지자 하위지와 하강지·기지 등과 그 자제들은 모두 처형되거나 연좌되어 가문이 거의 풍지박산되었다. 그런데 사형제 가운데 막내인 하소지는 사건 이전에 세상을 떠나 그 자제들은 화를 면할 수 있었다. 1461년(世祖 7) 하소지의 아들이자 하위지의 조카 河源이 올린 所志에,
“右謹言所志矣段 父紹地亦 河緯地犯罪前 身故爲乎等用良 緣坐不冬爲白有去乙”
註9)
라고 하는 데서 그 사정을 알 수 있다. 즉 하위지의 형제 가운데 당시까지 생존한 河綱地·紀地와 그 자녀들은 모두 被禍되었고, 하소지의 자녀들만이 연좌되지 않고 난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이다. 먼 훗날 숙종 대에 하원이 奉祀孫으로 인정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같은 객관적 사실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하위지의 직계 후손에 대해서 알아보자. 하위지에게는 1남 1녀의 자녀가 있었다. 아들 河璉은 생원시에 합격했으나 아버지의 죄에 연좌되어 처형당하였다. 딸은 모역사건 당시 6세였고, 여자라는 이유 때문에 목숨은 부지한 상태였다. 부모를 잃은 이 딸을 보살펴 준 것은 하위지의 바로 위 누이인 田養智의 妻 河氏였다. 그녀는 이 姪女에 대하여 매우 안타까운 심정으로 보살펴주고 재산까지 물려 주었다. 그 때의 사정이 분재기에 구체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成化五年 三月二十五日 傳准 (中略) 女矣身亦 無後爲乎等用良 同生三寸等亦中 奴婢田畓分給爲乎矣 同生娚河緯地女子段 年六歲時 始叱率居長養 至今順□意孝道爲沙餘良 其父衿奴婢 並只屬公 生理無門 憐悶□□”
註10)
이 분재에 의해 하위지의 딸은 그 고모에게서 노비 3口와 田 39卜을 상속받았다. 그 후 이 딸은 李由義(醴泉人)에게 시집갔다. 그러나 그 남편은 하위지의 일족으로서 정상적인 사회 활동을 하지 못하였고, 결국 出家하여 승려가 됨으로써 목숨을 부지하였다. 이들 부부가 또다시 딸을 두었는데 그 딸이 영봉리 출신 현감 金仲卿(一善人)에게 시집갔다.
註11)
이 때문에 김중경의 후손들은 그들이 하위지의 外孫이라 칭하면서 후대에 이르기까지 하위지의 舊基를 수호하는 한편 立廟奉祀까지 했다고 한다.
註12)
외송봉사가 당연시 되던 조선초기에는 하위지의 봉사는 물론이거니와 田庄과 家舍 등 하위지의 舊基들도 그들이 유지·관리했던 것이다. 하씨가 선산에 거주했을 당시의 家系를 圖示하면 다음과 같다.
〈河氏의 善山 居住時의 家系〉
河紹地의 아들 河源(1451-1518)은 사육신의 난을 피해 奉化로 이주했다. 이 때 그의 나이는 겨우 7세였다. 봉화에는 그의 外家가 있었으며, 琴嵇는 그 외조부였다. 외가로의 이주와 성장은 특이한 경우가 아니라 당시로서는 매우 자연스러운 관행이었다. 또한 그 아버지 하소지가 이미 妻父 琴嵆로부터 일정한 재산을 받아 그 근거를 확보해 둔 상태였다.
註13)
따라서 봉화 외가에는 그가 이주하여 살기에 여러 조건이 갖추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가 壯年 이후 이주해 살았던 곳은 현재 안동 서후의 松坡였다. 松坡는 16세기 분재기에는 ‘所夜’라 칭하기도 했고
註14)
, 松栗 所野 松夜 등으로도 표기되었다. 우리말로는 ‘솔밤’, 혹은 ‘소밤’으로도 불린다.
註15)
하씨가 松坡로 이주하게 된 배경은 역시 혼인 때문이었다. 하원의 이주한 시기는 그가 안동권씨 權玠의 딸에게 장가를 들면서부터였다. 妻家 권씨는 이 지역에서 성장한 가문으로서 그 배경이 막대하였다. 그의 처 증조부는 판서를 지낸 權靷이었고, 그 장인 또한 司正을 지낸 인물이었다. 그는 분재기에서 보이지만 처가로부터 상당 수준의 재산을 물려받아 사회 경제적 기반을 굳힐 수 있었다. 이에 관한 문서가 본서에 게재한 분재기 3번(權玠分衿文記)이다. 이 분재기는 그가 25세 때인 1475년(成宗 6)에 작성된 것이다. 형식상으로는 사위가 아들을 낳자 이를 축하하기 위해 주는 분재였다. 하지만 권개는 축하에 앞서 선산과 봉화 등지를 떠돌아 다니면서 방황하는 사위의 모습에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실제 당시 하원은 學生 혹은 正兵 등의 직역을 가지고 있었지만 거의 平民 신분으로 하락한 상태였다. 이러한 상태를 안타까워한 장인은 그의 자녀 출산을 계기로 막대한 재산을 상속해 주었다. 이 때 그가 받은 재산은 田 15日耕(4結), 노비 4구, 그리고 草·瓦家 30간이었다.
註16)
이와 같이 하원은 처가의 경제적 후원으로 말미암아 안동 송파에 무사히 정착할 수 있었다.
16세기 안동에 정착한 뒤 하씨가는 주위의 타 가문에 비해 번성하지 못하였으나, 줄곧 하원이 이주한 松坡를 중심으로 500년 이상 이곳에 세거하고 있었다. 하원 당대 이후 그 家系를 圖示하면 다음과 같다.
〈河氏의 家系 1 (安東 定着 以後)〉
〈河氏의 家系 2 (遇龍 ~ 鍾禹系)〉
1) 1461년(世祖 7)의 河源 所志
註17)
1461년(世祖 7)에 河源(1451-1518, 兒名 龜童)이 推刷都監에 올린 것이다. 여기서 하원은 仲父 하위지의 모역 사건과 관련하여 잘못 屬公된 노비에 대해 그 반환을 요청하였다. 하원은 그 아버지 하소지 소유의 노비가 속공된 것은 분재기를 상고하지 않은 결과이므로, 誤認되어 속공된 노비 4구는 돌려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추쇄도감에서는 20년마다 작성하는 공노비의 正案에는 그 노비가 등재되어 있지 않다고 확인해주었다. 그 사실을 추쇄도감에서는 判官 2인, 提調 2인, 都提調가 署押하여 공식 문건으로 작성해 주었다. 이로써 하원은 노비 4구를 되돌려 받을 수 있었다. 문서내에는 위의 내용과 연관하여 발급된 1536년(중종 31)의 안동부 斜給이 첨부되어 있다. 이것은 앞의 입안이 발급된 뒤 75년이 지난 뒤에 이루어진 것이며, 안동부에서 하원의 증손 漣(1522-1601)에게 발급하였다. 일종의 公證文書이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嘉靖十五年正月初三日安東府
終德所生奴今音成良妻所生末得河漣 斜給“
이 내용은 하원이 還給받은 노비 가운데 ‘婢 終德’에 대하여 어떠한 시비가 생겼거나, 생길 소지가 있기 때문에 공증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 내용을 풀이하면, “(비 종덕의 소생) 奴 今音成과 良妻 소생인 末得은 河漣에게 그 소유권을 認定해준다”는 뜻이다.
원본의 크기는 56Cm×47Cm이다. 73.5Cm×47Cm 크기의 배접지에 붙혀져 있다. 안동부의 斜給文書는 크기가 29Cm×55.5Cm이다. 官印은 6개(8Cm×8Cm 4개, 6Cm×6Cm 2개)가 있다. 또 문서내에는 9.5Cm×1.5Cm 크기의 籤紙(문서의 맨 마지막 부분)가 붙어 있다. 첨지는 원문 ‘所生老古知婢’ 부분을 指定하여 ‘奴末叱終祖母終德’이라고 쓰여있다. 즉 노비의 系譜 사항을 적어 소유권 시비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다.
2) 1489·1490년의 奉化縣 牒呈
註18)
1489년(成宗 20) 6월과 이듬해인 1490년 2월 奉化縣監 洪某가 慶尙道觀察使에게 올린 牒呈이다. 현재까지 발굴된 牒呈 가운데 最古의 것이다. 이 첩정은 임기가 끝난 관원에 대하여 다른 직책으로 갈 수 있도록 陳省을 발급해 줄 것을 요청하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약 8개월 사이에 발송된 두 건의 牒呈이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이같은 공문이 발송된 것은 당시 正兵으로 있던 河源(1451-1518)이 임기가 끝나자(仕滿) 새로운 관직을 받기 위해 그 四祖에 대한 陳省을 발급받기 위해서였다. 이에 그는 당시 살고 있던 봉화현에 그 사실을 소지로서 요청했고, 봉화현에서는 이 사실을 관찰사에게 보고하여 회신을 받았던 것이다. 관찰사는 帳籍을 확인 陳省을 발급해 주었는데, 後錄한 陳省에는 하원의 四祖, 즉 부, 조, 증조, 외조의 관품과 관직, 그리고 성명이 열기되어 있다.
원본은 折帖되어 있으며, 크기가 59Cm×40Cm이다. 73.2Cm×47.2Cm)크기의 韓紙에 배접되어 있다. 紙質은 楮紙로서 약간 검은 색은 띠고 있다. 문서 중·하단에 39×24Cm 크기로 오리고 이를 다시 붙인 자국이 있다. 오린 부분의 배면에는 다른 고문서가 필사되어 있다. 아마 이 원본에다 붓으로 낙서를 한 뒤, 뒤에 이 부분을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 배접할 때 반대로 붙인 것으로 판단된다.
도장(6Cm× 5.5Cm)은 모두 5개이며, 奉化縣과 慶尙監營의 관인이다. 여기에는 발송 주체인 봉화현감의 署押도 날인되어 있다. 제작 연대는 ‘弘治二年 二月 十一日 辰時’이라 하여 공문서를 작성하는 時刻까지도 표시되고 있다. 이 점들은 조선 후기에는 사라지는 문서관행이다.
가. 分財立案
1) 1469(成宗 1) 善山都護府立案 - 田養智妻 河氏分衿立案-
註19)
하위지의 손위 누이였던 田養智의 妻, 孺人 河氏가 후손이 없자, 자기 親庭의 同生·三寸(조카)등에게 재산을 상속하고 이를 선산도호부에 공증을 받은 문서이다.
註20)
이 분재에서 하위지의 6세 된 딸은 고모 하씨가 데리고 살고 있었는데, 그에게는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노비 3구와 田 39卜이 분재되었다. 그녀를 기르고 분재까지 한 것은 그 아버지 재산이 모두 속공되어 살아나갈 길이 없기 때문이라 하였다. 受給者는 이 외에도 同生兄 하강지의 아들 河砏, 同生弟 李石柱의 妻 河氏, 姪女 黃無心의 妻 李氏, 同生弟 하소지의 아들 龜童, 남편의 同生弟 田養亨과 그 남편의 妾女 蓮芝 등이 있다. 이와 같이 無後한 여자의 재산은 그 자신이 재주가 되어 그 親家 및 媤家의 인물들에게 분재되었다. 하씨는 이 분재사실에 대하여 선산도호부에 公證을 요청하였고, 府에서는 이의 없이 立案을 발급해 주었다. 문서는 크게 하씨의 입안 소지 부분과 분재기 부분으로 양분되며, 중간 부분이 크게 마멸되어 구멍이 여러 군데 뚫려 있다. 善山都護府의 官印(7Cm×7Cm 30개)과 하씨의 圖書(3Cm×3Cm 1개)가 있다.
2) 1534년(中宗 29) 安東府立案 - 河源妾良女甘莊 分財立案 -
註21)
1534년에 河源(1451-1518)의 妾인 良女 甘莊이 그 남편 하원으로부터 받은 재산을 嫡孫子인 徹岷(1504-1581)에게 상속하고, 受給者 하철민이 이 사실을 관에 신고하여 입안을 받은 문서이다.
甘莊이 분재를 하게 된 것은 남편의 遺書에 따른 것이었으며, ‘지극한 효성’이 別給의 이유가 되었다. 원래 부자간, 祖孫 사이에는 官署하지 않고 白文記를 사용하지만 이 경우 祖孫간이었지만 妾女였기에 官署文記, 즉 立案을 받아 두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분재에서 재주 및 증인으로 참여했던 감장과 權起門이 다짐(侤音)을 제출하였고, 안동도호부사는 判官의 확인을 거친 뒤 입안을 발급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입안과정은 7월 초 9일에서 9월 초순(9일 전후)까지 약 2개월이 걸렸다. 문서의 전체 길이는 217.5Cm이다.
註22)
安東都護府의 官印(7Cm×7Cm) 15개가 찍혀 있다.
나. 分財記
1) 1456년(世祖 2) 河緯地 遺書 - 遺券
註23)
1456년에 작성된 河緯地의 遺書 혹은 遺言에 해당하는 분재기이다.
註24)
하위지는 단종 복위를 시도하던 중 거사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어 옥에 갇히게 되는 데, 이 유서는 옥에서 죽기 직전 그 조카 하원에게 작성해 주었다고 전해지는 분재기이다. 분재한 내용은 소와 말, 솥, 東海(동이), 수저 등 가축과 가재도구, 그리고 호미와 삽 등 농기구, 山羊皮, 가죽 신발, 말안장 등 당시 일상에 필요한 생활용품이었다. 분재 물품은 ‘才物件記 善山降眞洞在’, ‘京家在’ 등과 같이 그 소재처별로 적혀 있다.
유권의 지질은 그다지 양호한 편이 아니며, 우측 상단과 중간에 2-3군데의 훼손된 곳이 있다. 1차례 이상의 보수, 손질을 거쳐, 후손들에 의해 褓에 쌓여 “丹溪先生遺券”으로 명명, 보존되고 있다. 財主인 河緯地는 ‘在京中興盛坊 叔父(署押)’로 표기하고 있으며, 受給者는 ‘石國’ 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그는 兒名이 ‘龜童’이며 훗날 源으로 개명한다. 증인 1인은 분명치 않으나, 遺券에 대한 後記에 의하면 하위지의 형 河綱地로 추정하기도 한다. 또 다른 증인으로 하위지의 朋友인 樗軒 李石亨(1415-1477), 혹은 하위지의 妹弟 李石柱로 추정하기도 한다.
2) 1447년(世宗 29) 琴𣒎別給文記
註25)
1447년에 琴𣒎가 그의 사위 河紹地에게 婢 2구와 鍮東海 1점, 그리고 1石落只의 畓을 별급한 분재기이다. 琴嵆는 당시 慶尙道 奉化縣 勿也에 살고 있었고 成均 生員이었다. 別給한 사유는 河紹地가 生員試에 합격한 것을 축하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琴氏家가 오랫동안 침체를 면치 못하다가 그가 생원에 합격해 ‘天地振動’하게 할 것이라고 좋아하였다. 그러나 하소지는 그 장인에게 극진한 효를 다하여 ‘孝吾至大’하다는 칭찬을 받기도 했으나 일찍 죽어 장인의 바램은 희망에 그치고 말았다. 문서의 우측 상단과 중단이 마멸되어 3-4군데의 구멍이 나 있다. 紙質은 기름을 먹인 것으로 보여지며, 색깔은 약간 희다.
3) 1475년(成宗 6) 權玠別給文記
註26)
1475년에 權玠가 사위 河源(1451-1518)에게, 그 得男을 축하하기 위해 재산을 별급한 분재기이다. 간단한 분재기이지만 하위지의 조카 하원이 謀逆 사건의 가족으로서 본가 善山과 외가 奉化 등지를 전전하는 모습, 또 분재를 통해 경제적 안정을 도모해 주고자하는 그 장인의 노력이 엿보인다. 또 이 문서를 통해 하위지 등의 거사가 왕실에는 謀逆였지만 사족들에게는 義擧로 받아들이는 일면이 보인다. 이에 그는, ‘天道가 돌고 돈다면 이 가문은 반드시 훗날이 있을 것’이라고 토로하고 있다.
註27)
하원이 받은 재산은 田 15日耕(4結), 노비 4구, 그리고 草·瓦家 30간이다.
4) 1519년(中宗 14) 河自澄同生四娚妹 分財記
註28)
1519년(中宗 14) 河自澄(1470-1512) 同生 四娚妹가 재산을 상속한 문서로서, 본서의 분재기 4번, 5번으로 실린 동일 시기의 분재기 2건이다. 분재기 4번은 分財 序文만이, 5번은 분재서문은 없고 그 後錄 부분(상속내역)만이 기록되어 있다. 4번 문서는 하단 부분이 傳存 과정에서 결락되었다. 반면 분재기 5번은 둘째 아들 河自洪 몫으로 받은 것만을 기록한 것으로서 분재기 종류 가운데 이른 바 ‘衿給’ 문기이다. 통상 衿給 문기는 都文記와 달리 분재기 서문을 비롯한 타인의 분재몫을 제외하고 자기가 받은 ‘몫(衿)’만을 기록한다. 따라서 분재기 5번은 결락된 문서가 아니다.
이같은 사정을 미루어 볼 때 분재기 4번은 都文記로서 종손 하자징 몫의 분재기였고, 5번은 그 동생 하자홍 몫의 분재기인 셈이다. 둘째 아들 하자홍의 분재기가 큰 집인 하자징 계열의 후손이 보존하게 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즉 하자홍이 無後함으로써 재산과 함께 분재기 자체가 큰 집인 하자홍가로 이전되어 보관되어 왔기 때문이다.
분재는 자식간의 平均 분급을 원칙으로 한 당대의 관행을 따랐다. 이에 노비는 老·迷·弱과 實·不實로 구분되었고, 토지는 品等을 分揀하여 정확한 균분이 되도록 하였다. 분재에 참가한 사람은 長子인 訓導 하자징은 이미 죽어 그의 처 豊山柳氏(1473-1550)가 대신 참가했다. 柳氏夫人은 안동의 河回 풍산유씨 中始祖 격인 工曹典書 柳從惠의 손녀였다. 또 長妹夫는 무과를 거쳐 僉使를 지낸 朴自範이다. 분재 당시 그는 禦侮將軍行兵馬虞侯였으나, 뒷날 함길도에서 여진족을 맞아 싸우다 전사하였다.
註29)
末妹의 남편으로 기록된 幼學 金 아무개는 족보에 의하면 副將을 지낸 金益光(遂安人)이다.
5) 1531년(中宗 26)의 河源의 妾 良女甘莊의 別給文記
河源(1451-1518)의 妾 良女 甘莊이 남편의 嫡孫으로서 종통을 이은 河徹岷(1504-1581)에게 재산을 別給한 분재기이다. 분재 서문에 따르면 이 분재는 하원의 유서에서 따른 것이다. 당시 하원은 죽기 전에 첩 감장에게 일정한 재산을 분재하였는데, 그 재산은 그녀 생존 당시에는 그가 향유하다가 일정 시점에는 다시 적자녀에게 許給하도록 했다. 단, 하원은 분재대상과 그 多寡에 대한 결정은 그녀에 대한 ‘孝道’로써 판단하라는 단서를 달아 놓았다. 즉 하원은 죽으면서 그 첩을 보호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제시해 두었던 것이다.
하원의 적자녀 가운데는 사남매가 있었다. 이 가운데 그녀는 주거 위치와 부모에 대한 효도, 그리고 훗날 자신의 제사를 받들어 줄 사람으로서 嫡孫 철민을 지목했다. 그에게 재산을 줌으로써, 治喪 등 그녀의 死後에 대한 조치도 함께 당부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문서에서 良妾 甘莊은 嫡子에게 ‘河自洪氏’, 적손에게 ‘河徹岷氏’라고 하여 ‘氏’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氏라는 표현의 좋은 용례가 된다. 또 자식이 ‘부모님’을 쓸 때 ‘父母主’로 표기하는데 이 분재기에서는 ‘子息主’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또한 재산을 줄 때도 ‘許與’라는 일반적인 용어를 쓰지 않고 ‘許上’이란 용어를 쓰고 있다. 이와 같이 고문서에서도 신분과 嫡庶에 따라 그 명칭이 달라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위지의 친필 유묵으로는 앞서의 분재기인 〈遺券〉과 본 簡札이다. 유묵은 후손들에 의하여 〈丹溪先生遺墨〉으로 명명, 전존되고 있다. 折帖되어 있으며 크기는 34.5Cm×44Cm이다. 2건은 간찰이나 작성시기 및 受給者는 알 수 없다. 간찰의 경우적갈색의 楮紙이며, 글자의 상태, 보관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기름을 먹인 듯 하다. 필자가 확인한 원본으로 된 간찰로서는 그 제작시기가 가장 이른 편에 속한다. 하지만 작성연대가 확인되지 않아 아쉬움이 있다. 자세한 서지적 검토가 필요하다.
하위지가 伸寃되는 것은 그 사후 250년이 지난 숙종 후반인 17세기 말~18세기 초반이었다. 이 시기에는 하위지 뿐만 아니라 세조의 집권과정에 대한 재평가와 함께 사육신 관련 인물들에 대한 사면과 복권이 함께 이루어졌다.
河氏家에는 이에 관한 문건이 많다. 본서의 교령류에 실린 문서는 전부 이에 관한 것이다. 가장 먼저 1692년(肅宗 18)에 하위지의 官爵이 復舊되었고, 1758년(英祖 34)에는 贈職과 함께 ‘忠烈公’이라는 諡號가 내려진다. 이때 부인 김씨에 대한 관품도 함께 내려졌다.
또 당시에는 하위지의 봉사손을 누구로 정할 것인가에 대하여 조정에서 심각한 논의가 벌어졌는데, 그 결과 예조의 확인을 거쳐 발급된 된 것이 본서의 立案 3번 禮曹立案이다. 이 입안에는 일반적인 繼後 입안과는 그 형식이 다르다. 하위지 사후 약 250년 지난 후에 계후가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그 과정과 증빙 서류에 대한 鑑定 사항이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 이 입안은 예조를 비롯한 관청과 閔鎭厚·閔鎭遠 등 당대의 최고 실력자들이 왕에게 繼後 인정을 건의하고, 왕이 이를 허락하는 내용이다. 다음은 그 내용을 인용한 것이다.
하위지가 죽기 전 그 조카 源에게 주었다는 문건, 즉 遺券이 실재한다. 그 문건 안에서 受給者로 기록된 龜童과 石國 은 뒷날 源으로 개명하기 전의 兒名과 冠名이었다. 그러나 화를 당한 뒤 감히 바로 繼後하지 못하였다. 하원은 하위지 처 김씨의 부탁으로 외가에 보내져서 온갖 어려움을 겪고 자랐다. 그런데 하위지의 아들 대의 이름은 行列字에 모두 ‘石’字가 들어가는 글자로써 돌림자를 삼았으나 石國은 화가 미칠까 두려워 源으로 개명했다. 또 선산에 있는 하위지의 묘는 8·9대 동안 제사를 지내고 있었다. 따라서 代數의 遠近을 따지지 말고 恩典을 베풀어 줄 필요가 있었다. 숙종은 이에 대해 六臣은 ‘與他有別’함으로 계후하여 봉사할 것을 허락해 주었는데, 이는 하위지만이 復權된 것이 아니라 그 후손들이 세상에 公認되어 지역사회에서 입지를 확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하씨가에는 많은 문건이 양산되었다. 1659년(孝宗 10) 順川朴氏 박팽년 후손 朴崇古의 간찰, 1707년(肅宗 33) 閔鎭厚가 河見圖에게 보낸 간찰, 그리고 1770년(英祖 46)에 하위지가 시호를 받을 때 오고 간 수많은 간찰 등이 있다. 그 대표적 문건이 〈書丹溪先生遺券後〉이다.
〈書丹溪先生遺券後〉는 折帖되어 보관되고 있으며, 같은 제목으로 각기 두사람이 撰한 글이 있다. 먼저 작성된 것은 1739년(영조 15)에 李光庭(1674-1756)이 지은 것으로 후손 河準海의 청에 의해 後記를 쓰게 되었다. 그 내용은 하위지가 작성한 유권의 내용 및 缺落 부분, 署押者 등에 대한 고증, 그리고 하위지의 봉사손이 되기까지의 내력에 관한 것이다. 고증 사항은 ① 龜童(石國)字 아래의 署押者는 樗軒 李石亨이고, ② 다음 행의 署押만 있는 부분은 先生(하위지)의 筆跡이며, ③ 興盛坊 叔父의 署押自은 선생의 형 河綱地의 필적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또 이 기문에는 하위지 후손이 살아남아 奉祀하게되기까지의 내력이 소상하게 적혀 있다. 이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모역 사건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자 하위지의 부인 김씨의 손으로 遺券을 여종의 옷깃에 싸서 조카인 龜童에게 갖다 주게 하였다. 구동이 어릴 때 외가인 봉화의 琴氏家에서 자랐는데, 금씨에게는 貴同이란 이름을 가진 奴가 있었다. 재앙이 일어나나라에서 龜童을 찾아나서자 금씨가 그 奴를 대신 보냈다. 使者가 그 奴에게 이름을 물으니, ‘貴童’이라 하였다. 사자가 즉시 龜童인줄로 여기고데리고 갔다. 구동이 자라나서 감히 石國으로 이름을 삼지 못하고 개명하여 ‘源’으로 고쳤다. 하씨로서 안동에 사는 자는 모두가 그의 후손으로서 숙종 갑신년(1704, 숙종30)에 중신들의 上言으로 河源이 하위지의 嗣孫이 되었으니 하위지가 세상을 떠난 지 249년만의 일이었다.
遺券에 대한 또 한편의 記文은 1759년(英祖 35) 洪啓禧(1703-1771)에 의해 쓰여졌다. 그 내용은, 유권의 전래경위와 신빙성 여부, 授受者에 대한 추정에 관한 것이다. 뒷면에 ‘丹溪先生文集序’(李敦禹, 한산인), ‘丹溪集序’(金炳學) 등이 첨부되어 있다.
〈題故司諫河先生遺券後〉는 鄭澔(1648-1756)가 쓴 것으로서 앞의 내용과 깊은 연관성을 가진다. 정호는 처음 하씨 유족이 이 遺券에 대한 글을 청탁하자 하위지가 난을 당해 목숨이 경각에 달려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가하게 家財雜物을 상속하는 契券을 작성한 것은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판단했다. 고민 끝에 그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했다. 남효온의 추강집 〈六臣傳〉에 의하면, ‘세조가 하위지를 이조참판에 超拜한 이후, 이때부터 받은 녹봉과 別莊 1곳은 받아 먹지 않았다.’고 한다. 이같은 사실에서 정호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 하위지가 遺券을 작성하게 된 원래의 뜻은 ‘내가 죽은 뒤에 家中의 雜物은 관의 籍沒 여부를 물론하고 이 유권에 기록된 것만이 家財이며, 그 나머지 녹봉과 별장은 나의 家財가 아님을 유권을 통해 밝히고자 했으며 나아가 후인들로 하여금 그 懲意를 알게 하고자 후세에 이 문건을 남겼던 것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그는 죽음에 임박한 하위지가 구구하게 문건을 적어 둔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유권을 이해하는데 또 다른 해석으로 참고할 만하다.
가. 壬癸契會圖
註31)
1613년(光海君 5) 河遇聖(1552-?) 등 안동 일대의 壬子年(1552)· 癸丑年(1553) 사이에 태어난 선비 11人이 鶴駕山 廣興寺에서 회동하고 이를 기념하여 작성한 契會圖이다. 본 계회도의 내용에 대해서는 安東 葛田의 順興安氏家에서도 동일 시기의 계회도를 所藏하고 있다. 이는 安聃壽라는 인물이 계원이었기 때문이다. 古文書集成에 소개되어 있다.
註32)
하지만 동일한 시기에 작성된 계회도임에도 불구하고 그림이 자못 다르다. 일반적으로 계회도는 계회 구성원들이 동일본을 分臧하는 것이 원칙이다. 따라서 본 〈壬癸契會之圖〉에 참가했던 11인의 수장본도 같아야 한다. 그러나 安聃壽家 所藏本과 河遇聖家 所藏本은 詩題部分 및 座目의 내용과 필체는 동일하지만 그림 부분은 전혀 다르다. 安聃壽家 所藏本이 16, 17세기의 전형적인 畵風인 중국 浙派風의 특징을 나타내며 契會場所의 實景을 배경으로 한 작품임에 비하여 河遇聖家 所藏本은 중국적이며 道家的인 화풍을 띄고 있어 판이한 형태를 보이고 있다. 이는 동일본을 분장하는 것으로 이해되는 계회도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과는 거리가 있다. 이 두 계회도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분석이 요구된다.
나. 梅窓筮仕契會圖
註32)
梅窓 鄭士信(1558-1619)의 在官時의 契會圖 6점을 합철해 놓은 계회첩이다. 정사신은 본관이 淸州이며 호를 梅窓 혹은 神谷이라 하였다. 후손에 의해 ‘梅窓筮仕契會圖
註33)
’라 題名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아버지는 枓, 형은 현감을 지낸 鄭士誠이다. 그는 1582년(선조 15)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저작·박사·감찰·정언·예안현감·병조정랑·부수찬 겸 경연검토관·춘추관기사관·전적·예조정랑·수찬 등을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에는 평양으로 피란 중 대열을 이탈하였다 하여 削職당하였다. 후에 강원도에서 의병을 모아 왜병을 무찌른 공로로 1594년 경상도 도사, 1595년 선산군수를 역임했다. 1609년(광해군 1) 문과 重試에 급제하였고, 이듬해 동지사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璿系辨誣의 공으로 光國原從功臣이 되었다. 그 뒤 정례원판결사·밀양부사 겸 경상도중도방어사를 지냈다.
본 계회도는 정사신이 중앙 관직을 지낼 때 동료 관원들과 契會를 열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제작된 것이다. 정씨가의 계회도가 어떤 사유로 하씨가에 소장되어 있는 지에 대해서는 그 유래를 잘 알 수 없다. 정씨의 후손은 安東市 北後面 道津洞에 살고 있는데, 이들은 정사신의 아버지 鄭枓 당대의 분재기(1581년, 선조 4)를 소장하고 있어 참고가 된다.
註34)
계회도 5점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太常稧會圖
○ 製作年代 : 1585년(선조 18)
○ 內 容 : 1585년 奉常寺 官員들의 稧會圖로서 太常은 奉常寺의 별칭이다. 본 계회도의 소장자 鄭士信의 年譜에 의하면, “1585년(宣祖 18)년 博士를 거쳐 奉常寺直長에 제수되었다”
註35)
는 기록이 있다. 이에 근거해 볼 때 계회도의 작성 연대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계회도의 형식은 題目, 그림, 座目의 3단 구성이다. 제목의 題字는 전자로 쓰여져 있는데, 이는 당시 계회도의 일반적인 경향이다. 계회 장소는 봉상시가 아니고 경치가 빼어난 특정 지역을 선정하여 회계한 것으로 보이는데, 정확한 장소는 알 수 없다. 다만 그림의 내용으로 보아 계회 장소의 실경을 그린 것으로 판단된다. 그림의 중국 浙派의 화풍에 영향을 받고 있는데, 수준 있는 작품으로 평가된다. 座目에는 奉常寺正 이하 參奉에 이르기까지 모두 13명의 관원이 제명되어 있는데, 이중에는 전임관도 3명이 포함되어 있다.
2) 蓬山契會圖
○ 製作年代 : 1582년(宣祖 15)
○ 內 容 : 1582년(宣祖 15)년 문과에 급제하여 權知承文院副正字로 承文院에 分官된 4명의 인사들이 蓬山에서 계회를 열고 작성한 계회도이다. 좌목에 수제로 기록된 인물은 ‘通政大夫行東來都護府使慶州鎭管兵馬同僉節制使’의 직함만 파악될 뿐 하단이 훼손되어 성명을 파악할 수 없다. 그 이하 李鐵, 金翼賢, 金洎, 鄭士信 등 4명이 순차로 기록되어 있다. 본인의 좌측에는 父의 직함과 성명을 아울러 기록하고 있다. 본 계회도는 좌목에 수록된 鄭士信에게 배당된 계회도로 좌목의 하단 부분이 약간의 손상을 입었을 뿐 계회도의 전반적인 보존 상태는 대체로 양호한 편이다. 그림 부분도 별다른 훼손이 없고 수준도 높다. 계회 장소의 實景을 화폭에 담은 것으로 보여지며, 원경과 근경을 조화롭게 배치하여 생동감이 있다. 16세기 후반 계회도의 전형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3) 薇垣稧會圖
○ 製作年代 : 1587년(宣祖 20)
○ 內 容 : 司諫院 관원들의 계회도로서 薇垣은 司諫院의 별칭이다. 다만 현직 사간원 관원들로만 구성된 것이 아니고 전직 관리 3인이 포함되어 있다. 본 계회도의 참가자인 鄭士信의 文集인 梅窓集에는 본 계회도와 관련한 간단한 기록이 있다. 여기에 따르면, “萬曆 15年 司諫院正言에 제수되었다. 薇垣稧會圖가 있다.
註36)
”라는 언급에서 본 계회도의 작성시기와 구체적인 제목을 알 수 있다. 보존 상태는 대체로 양호하다. 그림은 계회 장소인 사간원의 실경을 그렸는데, 기록화적인 성격이 강하다. 좌목에는 大司諫 任國老 이하 前職 正言 申潗에 이르기까지 모두 8명이 제명되어 있다. 職銜, 姓名, 字, 號, 生年, 科擧事項(大·小科), 本貫을 순차적으로 기록하였다. 본 계회도의 소장자인 鄭士信은 당시 正言으로서 참여하였다.
4) 郎官契會圖
○ 製作年代 : 1586년(宣祖 19)
○ 內 容 : 제목이 기록되어 있지 않아 정확한 명칭은 알 수 없다. 다만 좌목에 鄭士信이 ‘守佐郞’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을 근거로 추론할 수 있다. 鄭士信은 1586년(宣祖 19)에 禮曺와 刑曹의 좌랑을 거쳤고, 1589년(宣祖 22)에 兵曹佐郞을 역임했다. 따라서 이 계회도는 그가 이 세 官府에 근무할 당시에 제작되었다고 보여진다. ‘守佐郞’이라는 직책과 그림의 경관을 고려할 때, 1586년 봄 禮曺佐郞 재직 당시에 작성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우선 그림의 배경이 봄 경관으로 보이고, 禮曺佐郞은 鄭士信이 처음으로 6품직에 제수될 때의 직책이므로 행수법에 의거 守職을 받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림의 중앙 부분과 좌목의 일부에 훼손의 흔적이 있다. 따라서 제명된 인물의 인적사항을 밝히는데 어려움이 있다.
5) 兵曹郎官稧會圖
○ 製作年代 : 1589년(宣祖 22)
○ 內 容 : 제목이 없어 정확한 명칭을 알 수는 없지만 1589년(선조 22) 兵曹郎官들의 계회도로 추정된다. 소장자 鄭士信의 年譜에 따르면, 정사신은 1586년(선조 19)에 禮曺佐郞과 刑曹佐郞, 1589年에 병조좌랑을 지낸 것으로 나타난다. 본 계회도는 좌목에서 官品과 官職이 일치하는 것으로 보아 1589년 병조정랑 재직시에 작성된 것이 확실시 된다. 본 계회도 역시 기본적으로 題目, 圖, 座目의 삼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계회 장소는 교외의 특정 지역을 선정하여 회계한 것으로 나타나며 그 실경을 화폭에 담고 있다. 좌목에는 正郞 3인, 佐郞 3인 모두 6인이 제명되어 있다.
6) 槐院稧會圖
○ 製作年代 : 1582년(宣祖 15)
○ 內 容 : 승문원 관원들의 계회도이다. 槐院은 승문원의 별칭이다. 1582년 문과 급제하여 승문원에 분관된 인사들의 계회도로서 관직은 권지승문원부정자로 나타난다. 모두 17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좌측에 부의 직함과 성명을 병기하였다. 좌목 부분이 약간 훼손되었으나 전반적으로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직함, 성명, 자, 생년, 사마시 합격시기, 본관의 순으로 기록하였는데, 본관 부분은 매우 상태가 좋지 않아 판독이 거의 불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