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장처 고문서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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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鶴洙(한국학중앙연구원)
 1)
본서에서 소개하는 전적류는 약 500년의 유구한 역사를 지닌 상주 진주정씨 우복종택 山水軒에 소장된 문헌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국학팀에서 우복종택의 전적류를 최초로 조사·수집한 것은 1999년이었다. 본원 장서각국학팀 전문위원인 안승준·김학수를 중심으로 구성된 연구팀은 산수헌을 직접 방문하여 조사에 착수하였고, 2일간의 작업을 통해 대부분의 전적류를 수집하게 되었다.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평소 위선의식이 남달랐던 종손 鄭椿穆 선생과 慈堂 禮安李氏 모자분은 바쁜 일정 속에서도 본원의 자료조사에 적극적으로 협조해 주었고, 한국학연구의 활성화를 위해 선세의 珍藏 문헌을 흔쾌히 본원에 대여해 주었다.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그러나 산수헌 소장의 자료가 워낙 방대하여 1차 조사로는 수집·정리가 완벽하게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에 2000년 4월 2차 조사에 착수하여 잔여 문서들을 대여하였고, 대여가 곤란한 일부 문서는 슬라이드필름으로 촬영하였다. 현재 이 자료들은 본원 장서각국학팀에 위탁되어 목록작성, 마이크로필름촬영, 탈초작업 등 일련의 정리작업이 이루어졌다.
주지하다시피 우복가문은 학문적으로는 退溪·西厓의 학통을 이었고, 정치적으로는 영남남인의 핵심을 이룬 嶠南의 명가였다. 우복 정경세 이래 약 500년 동안 학문과 사환이 유지되는 과정에서 실로 방대한 분량의 문헌을 보유하게 되었다. 이들 문헌들은 자료적 가치 또한 대단히 높아서 한국학 연구에 매우 유용하게 활용될 것으로 믿는다. 특히 우복 정경세 당대에 작성된 필첩류[간찰첩·시첩]는 그 학술적 가치가 인정되어 2001년에『韓國簡札資料選集』 1집으로 출간되었다.
여기서 한가지 안타까운 사실은 현재 본원에서 조사·정리한 전적이 山水軒 문적의 전부가 아니라는 점이다. 宗婦 禮安李氏의 설명에 따르면, 우복종택에서는 전적류의 대부분을 대문채에 보관해 오고 있었는데, 1948년 11월 대문채에 화재[戊子年火災]가 발생하여 전적의 상당 부분을 소실하였다고 한다. 화마의 와중에서 그나마 우복 관련 문적의 일부는 구제할 수 있었지만 鄭宗魯 관련 문적 등 대부분의 전적은 소실되고 말았으며, 현존하는 전적류는 화재 이전 소장본의 절반도 되지 않는다고 한다. 本家는 물론 국가적으로도 커다란 손실이 아닐 수 없다.
본고는 우복가문의 연혁과 인물을 우선적으로 살펴본 다음 소장 전적의 현황과 자료적 가치를 간단하게 짚어 보기로 하였다.
진주정씨는 姜氏·河氏와 더불어「晉陽3姓」의 하나로 불린 진주의 토반·거족이었다. 이들은 고려시대 이래로 진주의 토착세력으로서 강력한 재지적 기반을 구축하는 과거와 관직을 통해 문호를 신장시켜 왔으며, 강씨·하씨 등 진주일대 대성들과의 혼맥을 바탕으로 사회적 기반을 확충해 나갔다. 각종 진주정씨족보류에 따르면, 시조 鄭藝는 평장사, 그 아들 鄭時陽은 대제학을 지낼 정도로 중앙 관계에 진출하여 청요직을 수행하였다.
진주정씨의 한 갈래인 우복가문이 진주의 세거지를 떠나 상주로 정착하게 된 것은 우복의 8대조 鄭義生 때로서 시기적으로는 대략 1300연대 중반경에 해당한다.
『晉州鄭氏族譜』와『商山誌』등의 문헌기록에 따르면, 정의생은 상주목사로 부임한 아버지 정택을 배행하는 과정에서 당시 상주의 강력한 토착세력이던 商山金氏 金得齊(1315-未詳) 의 딸과 혼인하게 되었고, 男歸女家婚의 관행에 따라 상주에 정착하게 된 것이다.  2)
【圖 1】〈晉州鄭氏家系圖-愚伏上代Ⅰ-〉
바로 이런 배경 위에서 상주에 진주정씨 일문이 형성될 수 있었고, 그 직접적인 계기는 정택의 사환에 따른 정의생의 혼맥이었다. 이런 연장 선상에서 상주 진주정씨의 보첩류에서는 정택을 1世, 정의생을 2世로 상정하여 상주입향의 의미를 크게 부각시켰다.
상주입향 이후 정의생과 그의 자손들은 한동안 고관이나 석학을 배출하지는 못했지만 정의생과 아들 정효옹은 부사, 손자 정걸은 호군, 증손 정극공은 창신 교위를 지내는 등 비록 중하급의 관직이나마 사환이 지속되었다. 이는 진주정씨가 처향에 입향한 이후 사회적 기반을 다지는데 중요한 토대가 되 었음에 분명하다.
진주정씨의 상주입향 그리고 향후의 발전과 관련하여 정의생의 처가 상산김씨의 존재를 간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앞서 언급한대로 상산김씨는 상주의 대표적인 토성으로서 진주 정씨와의 통혼 당시에는 관직·훈공 등을 통해 문호가 극대화 되어 있었다. 상산김씨는 신라 경순왕의 후손 김수를 시조로 하는데,고려 중기에 누대에 걸쳐 侍中·翰林學士·政堂文學·贊成事를 배출하여 당대 유수의 벌열가문으로 번성을 구가하고 있었다. 정의생의 처부 金得齊의 직계 3代에 한정하더라도 증조 金之衍은 한림학사, 조부 金鎰은 찬성사를 지내고 商洛君에 봉해졌고, 아버지 金祿은 삼중대광 商城君에 봉해졌을 정도로 환력이 혁혁하였다.
김득제 역시 文臣으로서 고려 공민왕조에 홍건적을 격파하는데 공을 세워 商山君에 봉해졌으며, 우왕 때는 이성계와 함께 왜구 토벌에도 크게 기여한 현달한 인물었다. 그리고 형 김득배(정당문학), 아우 김선치(삼중대광)도 중앙 정계에서 크게 활동함으로서 가문의 전통을 충실히 계승하였다. 특히 이들 3형제는 각기 상낙군, 상산군, 낙성군에 봉군되어 「3형제봉군」의 개가를 올렸으며, 金得培는 東方理學의 祖宗으로 인식된 鄭夢周의 스승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3) 다만 이들은 홍건적·왜구 토벌에 공을 세우면서도 태조 李成桂와는 정치적 입장을 같이하지 않았고, 역성혁명 이후에는 상주로 낙향하여 은둔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처럼 상산김씨는 당대 유수의 사환가문이었고, 정의생은 상산김씨와의 통혼 이후 한동안 처가의 사회·경제적 기반 위에서 세거의 기틀을 마련한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이런 사실은 확증할 만한 문헌기록은 없지만 남귀여가혼, 자녀균분상속 등 당시의 혼인과 상속의 형태를 고려한다면 정의생은 처부 김득제로부터 상당한 재산을 물려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4)
【圖 2】〈商山金氏家系圖-鄭義生妻家-〉
이는 정의생과 그의 자손들이 처향 또는 외향에서 기가의 발판을 마련하는데 커다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진주정씨는 정의생의 玄孫 鄭蕃 대에 이르러 커다란 변화를 수반하게 되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거주지의 이동이었다. 지금으로서는 정의생이 김득제의 사위가 된 이후 상주 어디에 정착했는지는 미상이지만 상산김씨 누대의 선영이 있었고, 1392년 역성혁명 이후에는 김득제 자신이 은거했던 山陽과 그리 멀지 않은 지역에 거주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와 관련하여 정경세의 손자 정도응이 작성한「晉州鄭氏家牒」에 따르면, 정의생~ 鄭克恭까지 4代는 상주의 西山 아래 上新田村에 거주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후 1500년을 전후한 시기에 정극공의 아들 鄭蕃이 종래의 세거지에서 역시 상주목 관할인 栗里로 이거하였는데, 이는 상주입향 이후 4대만에 이루어진 괄목할 만한 변화로서 상산김씨의 영향권에서 완전히 탈피하여 독자적인 문호를 형성할 만한 제반 여건이 조성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家傳에 따르면, 정번은 아버지 정극공의 산소를 상주 靑南(지금의 功城面)의 椧峴에 마련하였는데, 이 터는 臥牛形으로 불리는 명당이었다. 당시 지관이 이 터를 점지해 준 다음 북쪽으로 이거하면 후손 중에 현달한 인물이 배출될 것이라 하여 栗里로 이거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율리로 이거한 이후에도 진주정씨는 현관을 배출하지는 못했다. 정번이 修義副尉를 지냈을 뿐 그의 아들에서 증손에 이르는 3대 모두 백두의 처사였다. 물론 이들은 후일 정경세의 현달로 인해 추증의 은전을 입게 되지만 당시 진주정씨의 환력은 이처럼 전무한 것이 사실이었다.
【圖 3】〈晉州鄭氏家系圖-愚伏上代Ⅱ-〉
그러나 진주정씨는 정계함을 기점으로 문학·학문·과거를 통해 서서히 발신해 나갔다. 정계함은 문재가 있어 金顒(畏齋), 金冲(西臺) 등의 문사들과 교유하였고, 그 아들 鄭銀 成·大成[生員: 松塢]·國成[進士: 復齋] 3형제 역시 유망이 있었으며 서당을 건립하여 일대의 학문적 분위기를 진작시켰다. 특히 정대성·정국성은 상주입향 이후 최초의 사마시 합격자가 되었으며, 이 중에서도 정국성은 학행이 있어 상주목사 尹國馨이 천거하여 思陵參奉에 임명되기도 했다.  5) 정은성의 아들 정여관은 숙부 鄭大成(松塢)에게 수학하여 역시 문예가 숙성하여 정계함-정은성·대성·국성-정여관으로 이어지는 진양정씨「3世文行」의 한 사람으로 칭송되었다.
바로 이러한 토대 위에서 진주정씨는 입향 이래 300년 만에 걸출한 학자·관료를 배출하게 되었으니, 정여관의 아들 愚伏 鄭經世(1563-1633)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주지하다시피 정경세는 유성룡의 고제로서 李滉⇒柳成龍⇒鄭經世로 이어지는 영남학통의 적전으로 인식된 인물이었다. 그는 주자학 전반에 조예가 깊었지만 특히 예학에 정통하였으며, 영남남인으로서는 드물게 인조조에 이조판서에 올라 일국의 銓衡을 담당하고, 兩館大提學으로서 일국의 文柄을 잡았던 매우 현달한 인물이었다.
상주 진주정씨 일문에서 차지하는 정경세의 비중은 실로 막대하다. 정의생에서 정여관에 이르는 8대가 진주정씨가의 점진적인 성장기였다면 정경세는 자신의 학문적·정치적 현달을 통해 가격을 비약적으로 상승시킨 가문의 顯祖요 起家祖였다. 후일 그의 자손들이 嶺南學派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할 수 있었던 것도 鄭經世의 위상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현재 우복종택에 소장된 전적류의 시기적 상한도 정경세가 활동하던 16세기 중후반이며, 선대의 狀碣類 역시 대부분 정경세로 인해 작성된 것들이다.
【圖 4】〈晉州鄭氏家系圖-汝寬 ~ 道應-〉
정경세는 유성룡의 고제라는 학맥상의 지위와 실직 이조판서·문형이라는 환력에 걸맞게 교유관계도 경향에 걸쳐 광범위하게 형성되어 있었다. 우선 그는 18세 되던 1580년(선조 13) 상주목사로 부임한 柳成龍을 사사하여 1607년(선조 40) 유성룡이 사망하기까지 약 30년 동안 서애문하에서 제자로서의 도리를 다하였다. 특히 예학과 경세론은 서애의 영향을 크게 받아 후일 그가 禮學의 대가로 성장하고, 經世家로서의 탁월한 식견을 지닐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
그는 高祖 鄭蕃 이래의 세거지였던 栗里에서 출생하였으나 중년 이후로는 愚山에 우거하는 일이 많았다. 현재 愚伏宗宅이 있는 愚山里는 정경세의 別業이 있던 곳으로 원래의 명칭은 「于北」이었으나 정경세가「愚伏」으로 개칭하여 自號하는  6) 한편 書室을 지어 입거의 기반을 마련하였는데, 여러 문헌에 등장하는「于北山庄」·「愚伏山庄」·「山庄」이 바로 여기이다.
사실 정경세는 중장년기에「荷渠」·「桑成子」등의 호를 주로 사용했고, 한때 「石潨道人」으로 불리기도 했었다. 그러나 書室의 건립과 잦은 우거를 통해 다져진 愚山과의 강한 인연을 바탕으로 점차 그의 아호는「愚伏」 으로 통용되었고, 사후에는 문집의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한편 정경세는 사회적·학문적 지위에 반해 경제적으로는 그다지 안정적이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만년에는 각종의 옥사에 연루된 나머지 제반 여건이 불안정했으며, 거처도 일정하지 않았다. 그가 창녕조씨의 세거지인 梅湖村으로 이거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당시 매호촌에는 우복과 교유가 깊었던 曺友仁·曺希仁 형제가 살고 있었는데, 우복은 이들 형제의 배려 속에 매호이거를 단행했고,1633년에는 여기서 생을 마감하였다.
특히 조희인은 옥사 당시에는 옥바라지를 전담하는 등 우복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이런 선상에서 양가 사이에는 굳건한 세의가 형성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점에서 매호촌과 조우인·희인 형제는 우복의 생애와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공간이요 인물들이었다.
17세기 초반 중앙 정계와 영남학파에 미친 우복의 영향력은 실로 지대한 것이었다. 우선 그는 학식·문장 그리고 풍부한 정치적 경험을 바탕으로 유성룡의 사후에는 영남남인의 구심점으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학문적으로는 이황⇒유성룡으로 이어지는 학통의 정맥으로서 흔히 이황의 3고제로 불리는 유성룡·김성일·정구 3인이 모두 사망하는 1620년 이후에는 장현광과 더불어 영남학파의 우뚝한 학자로 부상하였다.  7)
1610년(광해군 2) 정인홍이「晦退辨斥疏」를 지어 李彦迪과 李滉을 비난하자 이를 변무하였고, 1620년 柳成龍·金誠一의 廬江書院(虎溪書院) 合享 당시 位次 문제를 두고 사림의 논의가 분분했지만 이를 일축하고 유성룡을 東配位, 김성일을 西配位로 결정할 수 있었던 것도  8) 영남학파에서 차지하는 그의 위상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당대의 명사답게 우복의 교유관계는 경향을 막론하고 광범위하게 형성되어 있었다. 유성룡·정구·장현광 등 영남학파의 중진들은 물론 김장생·이호민·이덕형·장유·최명길·윤흔·신익성 등 중앙의 명사들과도 두루 교유하였다. 특히 이전·이준·조우인·조희인·전식 등은 동향의 지우들로서 이 중에서도 이준·조희인과의 관계는 더욱 각별하였다. 정경세의 교유관계는 우복종가(山水軒)에 소장된 燕行贈言·愚伏堂 手柬·名賢筆蹟 등의 書帖類에서 보다 선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우복의 학문적 영향력은 그의 門人錄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현재 우복종가에는「愚伏先祖別集營刊時文蹟」이 소장되어 있는데, 여기에 1791년 경에 작성된 문인록이 수록되어 있다. 지금까지 우복의 문인현황에 대해서는 학계에 별로 알려진 것이 없었는데, 이 자료의 발굴로 인해 우복문인들의 규모와 구성을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 우복문인록은 퇴계·남명·한강·여헌 등 다른 문인록에 비해 체제가 완비되지 않은 초본상태이며, 문인들의 인적사항도 매우 소략한 편이다. 그러나 이를 통해 우복의 학문적 영향권을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자료임에는 분명하다.  9)
우복문인록에는 유성룡의 3子로 병산서원에 종향된 柳袗을 首題로 하여 모두 107명의 명단이 수록되어 있다. 지역적으로는 상주·안동·경주·성주 등 영남일원에 두루 분포하였으며, 호서와 경기 출신의 문인들도 일부 포함되어 있다. 특히 영남출신의 문인들은 대부분 영남 명가의 자제들로서 문과를 거쳐 중앙 관계에서 고관을 지낸 인물이 적지 않은데, 金應祖·金涌·洪鎬 등이 그 대표적인 예라 하겠다.
우복문인은 그 규모에 있어 한강·여헌에 비해서는 다소 미약한 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강·여헌이 벼슬보다는 학문과 후학양성에 몰두한 반면 우복은 오랜 기간 동안 출사하여 세상의 경륜에 치중한 점을 고려한다면 우복의 문인규모가 결코 작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인적구성 또한 탄탄하여 退溪⇒西厓⇒愚伏을 거쳐 전개되는 영남학통의 흐름과 관련해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
한편 진주정씨는 우복을 기점으로 하여 혼반이 비약적으로 상승하였다. 흔히 우복가문을 두고 『영남 최고의 혼반』이라는 예칭이 붙은 것도 이 때문이었다. 우복 자신은 진성이씨 李堣의 증손녀를 繼配로 맞이하여 안동권과의 혼로를 열었다. 李堣는 이황의 숙부로서「松齋없이는 退溪도 없다(無松齋 無退溪)」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이황이 학문적으로 대성하는데 엄청난 영향을 미친 인물이었다.
우복에 의해 확충된 진주정씨의 혼반은 그 자녀에게도 그대로 이어졌다. 우복의 장자 鄭杺은 경주 여주이씨 李宜活의 딸과 혼인하였는데, 이의활은 李彦迪(晦齋)의 손자이다. 그리고 차자 정학은 상주의 명문 진주강씨 姜淵의 딸과 혼인하였고,장녀는 盧守愼(穌齋)의 증손 盧碩命에게 출가하였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사실은 우복의 次女가 宋浚吉과 혼인했다는 점일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송준길은 호서 懷德 출신으로 宋時烈과 더불어 兩宋으로 불린 서인의 영수였다. 지역적으로는 영남과 호서 사이에, 정파상으로는 남인과 서인 사이에 통혼이 이루어진 것이다. 물론 이 시기에는 黨內婚이 일반화 되지는 않았지만 이 혼인은 이례적인 경우임에는 분명했으며, 우복의 현달에 따른「擇壻」의 성격이 다분한 혼사였다.
송준길은 우복의 사위가 된 이후 약 10년 동안 상주에서 살았다. 그 시기는 정경세의 장자 정심이 29세로 단명한 1625년에서 우복의 상이 끝나던 1635년경으로 추정된다. 송준길의 상주 우거는 처남 정심의 단명에 기인하는 바 크며, 이 과정에서 그는 우복의 행적을 정리하고 유문을 수습하여「愚伏年譜」찬술의 바탕을 마련하였다. 지금 학계에 알려진「우복연보」는 송준길이 찬술한 것이며, 현재 우복종택에 소장된 우복연보는 正祖의 御覽用으로 작성된 정종로의 淨書本 인데, 그 대본은 역시 同春堂 所撰의 우복연보이다.
송준길과 전주정씨와의 혼인 그리고 그의 상주우거는 우복 가문의 정치적 향배와 관련하여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송준길은 직계 자손들도 현달하였지만 외손가계가 매우 번성하였는데, 숙종비 인현왕후와 숙종조 노론의 중진 閔鎭遠은 바로 그 외손이었다. 특히 민진원의 자손들은 왕실의 외척가문으로 서 조선 후기 노론정권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처럼 우복가문과 여흥민씨 사이에는 송준길을 매개로 한 인척관계가 형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후일 영남 남인들의 정치적 영락 속에서도 우복가문이 비교적 순탄하게 사환을 유지하고 정치적 외풍을 크게 받지 않은 것도 노론 명가들 과의 척분과 전연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1702년(숙종 28)에는 상주가 우복의 처향이라는 명분에서 興巖書院이 건립되었고, 숙종이 양송을 추장하는 취지에서 華陽洞書院과 흥암서원에 친필 扁額을 하사하자  10) 흥암서원은 상주는 물론 영남 내 노론의 중심서원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11) 비록 우복가문은 영남의 다른 명가와 마찬가지로 남인을 표방했고, 상주 道南書院과 愚山書院을 중심으로 활동하였지만 송준길의 존재가 정치적인 완충작용을 한 것만은 분명하다.
한편 우복의 장자 鄭杺은 家學을 계승하여 1624년(인조 2) 사마양시에 합격하고 동년 9월 문과에도 합격한 수재였다. 이후 그는 사림의 極選인 藝文館檢閱로 재직하며 장래가 촉망되는 청년관료가 되었으나 1625년(인조 3) 천연두에 걸려 29세의 나이로 사망하고 말았다. 鄭杺의 단명으로 인한 가화의 와중에서도 愚伏은 손수 묘지를 찬하여 亡子의 명복을 빌었다.
정심의 早卒은 분명 집안의 시련이었지만 우복가문은 손자 鄭道應 대에 이르러 새로운 활기를 되찾게 되었다.
鄭道應은 일찍이 과거를 단념하고 학문에 노력한 林下의 山林處士였다. 친가로는 서애고제 우복의 손자였고, 처가로는 서애의 3자 柳袗의 사위였으며, 외가로는 영남학파 형성의 토대를 마련했던 李彦迪의 외증손이었던 그는 누구보다 학문적 여건이 충족된 가문의 자제였다. 특히 조부 우복과 처부 유진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30대에 이미 학행이 알려져 1648년(인조 26) 유일로 징소되어 교관에 임명된 이래 대군사부, 시강원자의, 원자보양관 등 학술보도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인조는 물론 효종의 신임도 깊어 1658년(孝 宗 9)에는 兒馬 1필을 사급 받는 은전을 누리기도 했다.  12) 그는 처신이 원만하였으며, 일생 학문을 연마하고 愚伏 이래의 家聲을 유지하는데 주력하였는데, 「無忝齋」라는 아호도 이런 의식의 발로라 하겠다. 정도응은 저술로서『無忝齋集』(2冊), 編著로『昭代粹語』와 『昭代名臣行蹟』을 남겼다.
【圖 5】〈晉州鄭氏家系圖-道應~仁模-〉
愚伏~ 鄭道應에 이르는 3대에 의해 진주정씨의 가격이 크게 신장되었다면, 정도응의 아들 鄭錫僑는 이를 착실하게 계승·발전시킨 인물이었다. 벼슬은 비록 1677년(肅宗 3) 학행으로 천거되어 崇陵參奉, 新寧·全義·英陽縣監을 지내는데 그쳤지만 우복에 의해 마련된 世業을 유지·보존하고  13) 家藏의 문적을 완비함에 있어서는 실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현재 우복종택 소장의 전적 중에는「鄭錫僑希伯」 이라고 새겨진 인장이 상당수 날인되어 있다. 경서·사서·문집·필첩류·족보류 등 비교적 간행 또는 필사연대가 오래된 전적에는 어김없이 이 인장이 날인되어 있는데, 이는 많은 분량의 전적이 정석교 대에 마련되었음을 의미한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우복가문에서는 우복에서 정석교에 이르는 4대 동안 매우 많은 전적이 구비되었을 것이며,정석교가 어느 시기에 이를 정리하면서 守藏印을 찍은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우복종택 전적류의 역사성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정석교의 행적과 이력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바로 이런 기반 위에서 정석교의 아들 鄭冑源(1686- 1756)이 8대를 세거했던 율리를 떠나 우산이거를 단행하였다. 「晉州鄭氏世譜」(卷一) 〈鄭冑源條〉에 『晩年에 愚山의 歌芝洞으로 들어와 燁洞으로 자호하였다(晩年入愚山歌芝洞自號燁洞) 』는 기록으로 보아 그 시기는 대략 1750년을 전후로 생각된다.
정주원의 우산이거의 일차적인 배경은 앞서 언급한대로 우산에 愚伏이 마련한 田庄[于北山庄] 이 있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여기에는 우복이 지은 書室이 있었는데, 우복과 그 자손들은 율리와 우산을 자주 왕래하며 이 곳 서실을 독서처로 이용해 왔지만 寓居의 형태였지 永住는 아니었다. 그런데 정주원이 솔가하여 이거함으로서 진주정씨 우복종택이 栗里에서 愚山으로 옮겨지게 된 것이다.
정주원이 우산이거를 실행한 보다 실질적인 이유는 경제력과 관계가 있었다고 한다. 비록 문서로는 전하지 않지만 宗孫 鄭椿穆과 門老들의 언급에 따르면, 영조가 정경세의 학덕과 종사에 미친 공적을 치하하여 우산일대를 우복가문의 사패지로 내렸는데, 그 토지의 규모가 東西 2km, 南北 4km였다고 한다.  14) 이 전언이 확실하다면 정주원은 산장 주변의 방대한 토지를 하사받으면서 우산으로 이거한 것으로 이해된다. 이 과정에서 우복가문은 율리의 동종들과 떨어져 우산에서 새로이 宗門을 형성하게 되었는데, 현재의 우복종택(山水軒)도 이 때 지어진 건물이다.
한편 愚伏家門은 우산으로 이거한지 3대만에 儒學史에 빛나는 우뚝한 학자를 배출하게 되는데,鄭冑源의 손자 鄭宗魯(立齋)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정종로는 정경세의 6세손으로 탁월한 문장과 학문을 바탕으로 退溪⇒西厓⇒愚伏으로 이어지는 학통의 적전으로 인식될 정도로 영남학파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았던 인물이었다. 그는 우복 이래의 가학을 계승하면서도 李象靖(大山),崔興遠(百弗庵),朴孫慶(南野) 등 당대 영남의 명유들을 종유하여 학문의 저변을 넓혔다. 특히 당시 영남학파의 종장이던 이상정과의 관계가 더욱 밀접하였는데, 이상정의 문인록인「高山及門錄」에도 이름이 등재되어 있다.
정종로는 당대의 명사답게 교유 범위도 매우 넓었다. 大山 門下의 3高弟[湖門三老] 로 통하던 金宗德(川沙), 黃啓熙(審 幾堂), 南漢朝(損齋) 등은 그가 가장 밀접하게 교유했던 인사들이었다. 일찍이 당송팔대가의 문장을 섭렵하여 문장가로도 명성이 높았던 그는 각처에서 들어오는 실로 방대한 분량의 문자청탁에 응하였는데, 그 실상은 그의 시문집『立齋集』에 실린 序文·記文·跋文·祝文·上樑文·墓文·行狀類에서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그의 학행은 징소의 배경이 되어 1789년(정조 13) 참봉직을 시작으로 1796년(정조 20)에는 사포서 별제, 1798년에는 사헌부지평, 1088년에는 사헌부 장령에 임명되었다. 특히 정조는 여러차례 유지를 내려 출사를 종용하였고, 징소시에는 항상 교통편을 제공하는 등 그에 대한 신임과 예우가 매우 각별했다.  15)
정종로에 대한 정조의 신임이 두터웠던 데에는 그의 학행에 더하여 名臣(鄭經世)의 冑孫이라는 점이 크게 작용한 것 같다. 1796년 정조가 예관을 보내 愚伏을 致祭하는  16) 한편 정경세의 年譜를 어람코자 했을 때 정종로가 이를 淨書하여 봉납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사실 정종로는 이상정이 사망하던 1781년 이후부터 1816년 사망하기까지 약 30여 년 동안 영남학파 원로로서의 권위를 누렸다. 이러한 권위는 그가 지닌 學行·文章·家格에 바탕하는 것이었으며, 1807년 경상감사 尹光顔이 鄕飮酒禮를 개최할 당시 그를 賓으로 초빙한 것도 원로에 대한 예우의 일환이었다.  17)
정종로는 학자로서만 뛰어난 것이 아니라 인격적으로도 모범이 되었고, 관료로서도 치적이 많았다. 1797년 조정에서 그를 康翎縣監에 임명하자 계모 忠州朴氏의 봉양을 이유로 함창현감으로 부임하여 봉양에 정성을 다하는 한편 선정을 베풀어「活佛」 이라는 예칭까지 얻게 되었다.
이처럼 정종로는 출중한 學問·文章, 그리고 관료로서의 치적을 바탕으로 자신은 물론 진주정씨 우복가문의 격을 한층 높이게 되었다. 이 점에서 정경세가 상주 진주정씨의 起家祖였다면 정종로는 이를 더욱 顯彰시킨 중흥조라 해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圖 6】〈晉州鄭氏家系圖-仁模 ~ 民秀-〉
그의 문하에는 柳尋春·黃磻老 등 우뚝한 문인들이 상당수 포진해 있었으며, 의욕적인 저술활동의 결과로『立齋集』 (48卷 24冊), 『立齋別集』(10卷5冊),『群書衍語』(40 卷)을 남겼다. 이런 바탕 위에서 그는 1836년(헌종 2 ) 문인과 후손에 의해 愚山書院에 배향되었으며, 그의 학통은 柳尋春(江皐)⇒柳疇睦(溪堂)을 통해 전수되어 영남학통의 주요한 골격을 이루었다.
정종로에 의해 확충된 우복가문의 성가는 아들 鄭象晉, 손자 鄭民秀에 이르러서도 커다란 변화없이 지속되었다.
정상진은 1827년(純祖 5) 천거를 통해 선릉참봉을 지내냈고, 정민수 역시 1839년(憲宗 5) 천거를 입어 혜릉참봉에 임명됨으로서 비록 하급직이나마 사환을 지속하였다. 이들 양대에 이루어진 주목할만한 사안은 역시 선대의 墓道整備와 문집의 간행일 것이다. 특히 정상진은 선대의 분묘 중 墓誌가 없었 던 鄭杺·鄭道應(=豊山柳氏)·鄭錫僑(=廣州李 氏)·鄭冑源(玉山張氏) 등의 묘도에 묘지를 완비하는 등 先塋의 儀物整備에 크게 노력하였다. 이 때 만들어진 묘지의 대부분이 탁본으로 남아 전해지고 있다.
나아가 그는 재종제 鄭象履의 협조 속에 1821년(순조 21)에는『愚伏別集』, 1832년에는『愚伏年譜』를 간행하는 한편 아들 정민수에게 명하여『愚伏集』·『立齋集』의 중간을 용의주도하게 계획·추진하였다.『立齋集』은 워낙 거질이었기 때문에 편집 과정이 복잡하고 간행경비의 조달이 쉽지 않았지만 정민수는 재물을 모아 경비를 조성하는 한편 직접 원고를 점검하여 간행에 따른 제반 준비를 거의 완료하였다. 그러나 1843년 사망함으로서 刊役을 완수하지는 못했지만 1844년(憲宗 10) 상주 愚山書院에서 간행된 『愚伏集』(重刊本), 『立齋集』은 바로 이들 부자의 줄기찬 노력의 결실이었다. 겸하여 그는 10년 계획으로 鄭宗魯의『群書衍語』의 간행작업에 착수하였으나 건강의 악화로 완수하지 못하자 장손 鄭東奎에게 간역을 위임할 정도로 선대 遺文의 정리·간행에 남다른 열성을 보였다. 이처럼 우복가문 문적이 정리·간행되어 세상에 배포된 배경에는 정상진·정민수의 남다른 노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8)
한편 정상진·정민수 대에 이루어진 또 하나의 특기할 사항은 역시 우산서원의 건립일 것이다. 우산서원은 정경세의 주향처로서 1835년 정상관·정상리 등 우복본손과 사림의 협조 속에 건립되었는데, 사당의 명칭은 崇道祠였다. 물론 정경세는 상주의 수원 道南書院에 배향되었지만 그의 獨享處는 없는 상태였다. 이에 우복의 讀書處이며 후손들의 거주지인 愚山에 서원을 건립해야 한다는 논의가 일어나 1835년 10월 崇道祠를 건립하여 우복 위패를 봉안하게 된 것이다.  19)
정민수 이후에도 진양정씨는 學行과 仕宦 그리고 영남 명가들과의 혼맥을 바탕으로 영남의 유림사회에서 두각을 드러내며 世家의 가격을 유지해 나갔다. 정민수의 아들 정윤우는 1855년(哲宗 6) 道薦을 입어 禧陵參奉에 임명된 이후 掌樂院正, 司僕寺正 등 중앙의 요직을 역임하는 가운데 철종의 신임이 깊어 1862년(철종 13)에는 兒馬 1필을 사급받기도 했다. 그리고 위선사업에도 노력하여 1862년(철종 13)에는 증조 鄭宗魯의『立齋年譜』간행하기도 했다.
정윤우의 행적 중 주목할만한 부분은 역시 그가 1866년 (高宗 3) 丙寅洋擾 당시 嶺南右道召募使에 활동한 사실이다. 소모사는 전란 또는 유사시에 설치되는 임시 관직으로서 문인기반이 튼튼하거나 사림의 명망이 있는 인물에게 주어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정묘호란 당시에는 김장생(湖西)·장현광(嶺南) 에게 이 직책이 부여되었고, 1728년(영조 4) 戊申亂 때에는 李衡祥이 이 직책을 수행한 바 있다. 이를 통해서 본다면 당시 정윤우 역시 영남우도에서는 상당한 명망을 지닌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으며, 성격이 인후하여 정종로와 마찬가지로 백성들로부터「活佛」이라는 칭호를 얻기도 하였다.  20) 그의 召募活動은「召募營日記」·「召募行中謄錄」·「召募處命後日記」에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는데, 이들 문서는 병인양요 당시 영남유림의 대응상을 알 수 있는 중요 자료이다.
【圖 7】〈晉州鄭氏家系圖-民秀 ~ 宜黙-〉
한편 정윤우의 장자 鄭東奎는 1848년(憲宗 14) 문과에 합격하여 승정원주서·사간원정언·홍문관부교리 등 주로 근시직과 삼사의 청요직을 수행한 文臣이었다. 그의 문과 합격은 우복의 직계로는 鄭經世·鄭杺에 이은 세 번째의 科慶으로서 가문의 영화가 지극하였다.
사실 그는 일찍부터 학식과 문재를 인정받아 조부 鄭民秀로부터『群書衍語』(鄭宗魯著)의 간행을 위임받을 정도로 집안의 기대가 컸던 인물이었다.정동규는 의성김씨 김재공의 딸과 혼인하였는데,金在恭은 정종로와는 大山門下의 동문이던 金熙周(葛川)의 아들이었다. 김희주는 선조조의 명신 金宇宏(開巖)의 후손으로 봉화 海底里(바래미)에 세거하였으며, 학식과 환력을 바탕으로 영남학파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했던 인물이다. 정동규에 의해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우복가문의 科慶은 정동규의 아들 정의묵에게도 이어졌다. 정의묵은 상주의 名儒 柳疇睦(溪堂)의 문인으로  21) 1879년(고종 16) 진사시에 합격하여 思陵參奉·義禁府都事·翊衛司左侍直을 역임하다 1885년(고종 22) 증광문과에 합격하였다.
이후 그는 홍문관교리·병조참의·안동군수·同副承旨를 역염하는 과정에서 한때 愚伏宗家의 宅號가 鄭承旨宅으로 불리기도 했다.
사실 정의묵의 아버지 정동규는 촉망되는 문신이었으나 31세로 단명함으로서 관료로서 대성하지는 못했다. 당시 8세 소년이었던 정의묵은 어머니 眞城李氏 슬하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그의 과거 합격과 출사는 실로 각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한편 정의묵은 1894년(고종 31) 동학혁명이 발생하자 영우소모사로 활동하였는데, 일찍이 그의 조부 정윤우도 병인양요시에 소모사의 직책을 수행한 바 있다. 이는 기본적으로 정윤우·정의묵이 지닌 탁월한 역량과 중망에 바탕하는 것이지만 우복 가문이 嶺右 최고의 명가임을 방증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정의묵은 소모사로 활동하는 동안 업무수행상황을 착실하게 기록하였는데,「召募事實」(乾坤), 「召募日記」, 「討匪大略」, 「慶尙道召募營錢穀入下實數成冊」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 문서는 동학혁명 당시 관군의 진압상황을 알 수 있는 매우 소중한 자료들이다.
이처럼 정의묵은 관료로서 현달을 구가하는 한편 위선사업에도 주력하여 1899년에는 鄭夏黙 등 同宗 인사들과 협모하여『愚伏別集』을 간행하였고, 1901년(광무 5)에는 鄭經世의 墓碑를 건립하기도 했다. 이런 다양한 이력의 결과로 현재 우복종택에 소장된 문서 중 1800연대 중반 이후의 자료는 鄭宜黙과 관련된 것이 대부분이다.
정의묵의 아들 정재붕은 1905년 음직으로 慶基殿參奉을 지냈으며, 아들이 없어 아우 鄭在喆의 장자 鄭龍鎭을 양자로 들여 우복의 종통을 이었다. 현재 우복가문의 종통은 정용진의 아들 鄭演을 거쳐 현 종손 鄭椿穆에게로 이어지고 있다. 정춘목은 일찍이 선친을 여의고 어머니 禮安李氏를 모시고 선대의 田庄과 宗宅(山水軒)이 있는 우산리에 살고 있다. 그는 爲先意識이 남달라 선대의 文籍을 유지·보존하는데 성혈을 다하는 한편 한국학연구를 촉진하는 차원에서 일체의 家藏典籍을 韓國精神文化硏究院 藏書閣國學팀에 대여해 주었다.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圖 8】〈晉州鄭氏家系圖-宜黙 ~ 椿穆-〉
Ⅲ. 典籍類의 현황과 자료적 가치  22)
山水軒 소장의 전적류는 크게 古文書·成冊古文書·古書로 3분된다. 분량상으로는 고서가 가장 많고 그 다음이 고문서, 성책고문서 순이다. 그러나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원래 산수헌에서 소장해 온 전적류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종손의 어머니 예안이씨의 구술에 따르면, 약 60년전 산수헌에 큰 화재가 발생하여 대부분의 전적을 이 때 소실하게 되었다고 한다. 우복가문에서 가장 많은 전적류를 남길만한 인물은 역시 鄭經世와 鄭宗魯이지만 이들의 행적에 비해 현전하는 전적이 매우 소략한 것도 화재에 기인하는 것이다. 그나마 정종로에 비해 우복 관련 전적이 많은 것은 화재 당시 우복 관련 문서를 우선적으로 보호하는 과정에서 정종로 관련 문적의 대부분을 소실하게 된 것이다.
현재로서는 화재시에 어느 정도의 전적이 소실되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여러 가지 상황으로 보아 현전하는 것보다는 훨씬 많은 전적이 소실된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그리고 고문서·성책고문서보다는 고서가 더 많이 소실된 것으로 파악되는데, 이런 정황은 山水軒 소장의 고서 중에 유난히 낙질본이 많은 점에서도 방증된다고 하겠다.
이제 산수헌 소장 전적류를 고문서·성책고 문서·고서로 구분하여 현황과 자료적 가치에 대해 간단하게 살펴보기로 하겠다.
1) 敎令類
山水軒 고문서 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역시 紅牌·白牌·告身·差定帖·綸音·有旨·祿牌 등의 敎令類이다.
「홍패」의 경우 우복 직계로 鄭經世·鄭杺·鄭東奎·鄭宜黙 등 모두 4명의 문과 합격자가 배출되었는데, 유감스럽게도 愚伏의 紅牌만 남아 있지 않다. 그리고 사마 합격자는 정경세(進士)·정심(兩試)·정의묵(進士) 등 3명이지만 현재는 정심의 생원·진사 백패와 정의묵의 진사 백패만 남아 있는 데, 이 또한 화재에 따른 일실로 판단된다.
이에 비해「고신」(敎牒포함)은 정경세에서 정심·鄭道應·鄭錫僑·鄭宗魯·鄭象晉·정동규·鄭民秀·정의묵·鄭在鵬에 이르는 10대의 고신이 비교적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다. 시기적으로 볼 때 官界에 나아갈 수 있는 하한은 우복의 12세손 정재붕까지이다. 여기에 우복을 포함하면 모두 13대가 되는데, 이 중에서 10대가 관직에 진출하였으니 영남남인으로서는 실로 놀랄만한 환력이 아닐 수 없다.
고신 중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역시 우복의 辭令狀으로 1589년(선조 22) 行弘文館正字 임명장에서부터 1633년(인조 11) 兼世子右賓客同知春秋館事 임명장까지 모두 158건이 남아 있다. 정경세 다음으로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정의묵의 고신이다. 이는 정의묵이 우복을 제외하고 堂上官에 오른 유일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추증교지」는 모두 14건인데, 鄭銀成(曾祖)·鄭繼咸(祖)·鄭汝寬(考)과 그의 부인들에게 내려진 것이다. 이는 정경세의 현달로 인해 법전에 따라 3대가 추증된 결과이다.
「증시교지」는 1660년(현종 1) 정경세에게 文肅의 諡號를 내리는 내용이다. 『愚伏年譜』에 따르면, 실제 宣諡 행사가 이루어진 것은 이로부터 5년이 지난 1665년(현종 6 ) 8월이었으며, 선시관은 吏曹正郞 呂聖齊였다. 장소는 昌寧縣 官舍였는데, 당시 정경세의 장손 鄭道應이 창녕현감으로 재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복의 시호는 남인 집권기인 1693년(숙종 19) 영남유생들의 건의에 의해 文莊으로 개시되었다.  23)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 시호교지는 남아 있지 않다.
「유지」는 모두 39건인데, 정경세(31건), 정심(2건), 정도응(3건), 정종로(2건), 정동규(1건)이다. 우복에 대한 인조의 신임을 알 수 있는 문서로서 보관 상태도 매우 양호한 편이다.
교령류에서 주목할 만한 자료는 역시「賜送記」(5건) 일 것이다. 이 사송기의 작성시기는 1632년과 1633년 경인데, 昭顯世子가 당시 시강원의 보도관(賓客)으로 재직하던 정경세에게 藥材·藥物·食物 등을 하사한 내용이다.
국왕 또는 세자가 신하들에게 약물·식물을 하사한 기록은『朝鮮王 朝實錄』에 흔하게 보이고 있지만 약물·식물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기록된 원본 문서는 매우 드물다는 점에서 매우 주목되는 자료라 하겠다.
2) 疏箚啓狀類
소차계장류는 奏單·疏草·啓·上言·所志類·稟目·戶口單子·世系單子·葬地申告書 등인데, 이중 주목할 자료는「소지류」와 「품목」이다. 소지류는 다시 내용상 山訟과 債訟으로 대별된다. 산송의 대상 분묘는 진주정씨 先代諸位, 정경세, 정종로, 정상진 등인데, 이중 가장 중심을 이루는 부분은 역시 정경세 분묘 투장에 따른 산송이다.
우복의 산소는 咸昌縣 南面 恭儉湖 西麓의 卯向에 위치하였다. 이후 정경세의 현손 鄭冑源대인 18세기 중엽에 투장사건이 발생하여 산송으로 비화되었고, 이 산송은 11세손 정의묵에 이르기까지 줄기차게 전개되었다. 본 소지류에는 약 15건의 소지가 포함되어 있으나 모두 1860연대 이후의 문건에 불과하며, 그 이전의 소지는 전혀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산수헌 성책고문서 중에는「湖壟天水帖」과 「文莊公愚伏鄭先生墓所禁護文桉」이라는 문서가 소장되어 있다. 이 문서에는 산송이 발생하던 18세기 중반에서 마무리되던 19세기 후반까지 약 150년 동안의 山訟 전말이 총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위 두 성책본의 저본은 역시 낱장의 소지가 중심이 되었겠지만 현재는 소지의 대부분이 일실되고 전사된 성책본을 통해 당시의 실상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연구자들은 소지류와 두 성책고문서를 상호 참작하여 연구를 진행해야 할 것이다.
이 외 정종로와 정상진 분묘관련 산송 소지는 문건이 온전하지 않아 내용의 연결성이 적은 것이 단점으로 작용하고 있다. 여하간 이 소지류는 우복가문의 산송현황을 알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자료임에는 분명하다.
한편 채송은 전적으로 정의묵과 관련된 사안이다. 정의묵은 1896년 안동군수로 재임하는 과정에서 세전수납과 관하여 피소되는 곡절이 있었다. 소송사건은 그가 안동군수에서 물러난 뒤인 1900~1904년 사이에 발생하였는데, 이 소지는 바로 이 때 작성된 문서들로 원고 李仲模 등과 피고 정의묵 상호간의 공방전이 잘 드러나 있다.
마지막으로 품목은 우복분묘 산송관련 문건 또는 愚山書院 관련문건인데, 전자는 소지류의 관련 문건이라 할 수 있다. 시기적으로는 1880년(고종 17) 에서 1889년까지 약 20년 동안의 기록이다. 후자는 우산서원에서 免役·免稅를 요청하는 내용인데, 현실적으로 우산서원 문서가 많지 않다는 점에서 희소성이 높은 자료라 하겠다.
3) 牒關通報類
첩관통보류는 關·書目·告目·官報·望記·回題 등이다.
「關」(1건) 은 1679년(숙종 5) 廣興倉主簿 鄭錫僑 관련 문서이며, 서목(3건)은 정의묵과 관계된 것으로 東學罪人의 治罪, 召募業務報告, 安東郡守時 경내 山訟業務報告가 주된 내용이다.
「告目」(15건)은 안동군수 鄭宜黙에게 올린 下僚들의 건의·보고서로서 東學·結錢·稅錢·賃料·辭任 등에 관한 내용이다. 「官報」(7건) 역시 정의묵에게 배포된 것으로 모두 1898년(光武 2) 2월분이다.
「望記」(2건)는 1868년(고종 5) 鄭允愚를 龜湖書院院長에 薦任하는 망기와 1897년(광무 1) 鄭宜黙을 淸溪報德 壇都有司에 천임하는 망기가 고작인데, 우복가문의 사회적 지위를 고려한다면 望記의 절대 다수가 일실된 것으로 판단된다.
4) 證憑類
證憑類는 路文·完議·侤音 등이다.
「路文」(3건)은 일종의 여행허가증과 같은 것으로 1796년(正祖 20) 鄭宗魯의 사헌부지평 承召時 路文,1852년(철종 3) 정동규의 尙州行(覲親) 路文, 1853년(철종 4) 정동규의 상주행(親病) 路文 등 모두 3건이다.
「完議」(4건)는 先塋守護, 愚伏山所의 歲一祭, 愚伏門人 系列에서 결성한 愚山修稧所의 운영과 관련된 내용이다.
「侤音」 은 1884년(고종 21) 우복분묘 투장과 관련된 蔡時龍의 移葬 侤音이다.
5) 明文文記類
「明文」(2건)은 土地와 山野賣買明文이며, 「宮房文書」(1건)는 1900년(광무 4) 榮親王宮에서 咸昌郡首書記에게 발급된 것으로 영친왕궁소유 田畓의 개간을 지시하는 내용이다.
6) 書簡通告類
서간통고류는 通文·委囑狀·婚書·物目單子·한글簡札·簡札 등이다.
「通文」은 柳致明(定齋)의 不遷位 관련 내용이나 아주 최근의 문서로서 고문서적인 가치가 미약하다. 「委囑狀」은 1919년 李王直에서 정재붕을 洪陵主監郎廳에 위촉하는 문서인데, 홍릉은 高宗의 陵號이다. 鄭在鵬은 1905년(光武 9) 경기천참봉을 지내는 등 李氏王家와는 아주 밀접한 관계에 있었던 인물이다.
「婚書」(21)는 納徵·四星·涓吉 문서가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시기적으로는 17세기 중후반인 鄭錫僑 대에서 근세의 鄭在鵬에 이르기까지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 있는 편이다.
「物目單子」(5건)는 대부분 祭需物目單子이며, 「簡札」은 知舊간에 왕래된 安信類가 주류를 이룬다.
7) 置簿紀錄類
置簿紀錄類는 分定記·婚喪祭禮文書·時到記·擇日記·節目·置簿·國忌錄 등이다.
「分定記」(3건)는 1862년(哲宗 13)「立齋年譜」(鄭宗魯) 간행시,1876년(高宗 13) 義城金氏(鄭允愚配位) 初終時, 1901년(光武 5) 우복묘비 건립시의 諸執事錄이다.
「婚喪祭禮文書」(3건)은 관례·혼례가 중심을 이루고, 「時到記」(3건)는 愚山鄭氏 宗會 관련 문서가 눈에 띈다.
「擇日記」(2건)는 鄭東奎의 葬擇과 先塋奠掃 택일기이다.
「節目」(2건)은 講學契와 永慕所의 절목인데, 강학계는 우산정씨의 獎學契이며, 영모소는 鄭經世의 齋室이다.
8) 詩文類
詩文類는 記序跋·奉安文·賜祭文·祭文·輓詞·偏論·墓文行狀類·試券 등이다.
「記序跋」(3건) 중 눈에 띄는 문서는 柳疇睦(溪堂)이 지은 鄭宜黙의 字辭이다. 유주목은 정의묵의 冠禮時에 賓으로 초빙되어 孟齋라는 字를 지어 주었는데, 이 字辭는 맹재의 의미를 풀이하고 정의묵에게 학문과 행신의 도리를 당부하는 글이다. 특히 이 문서는 유주목의 친필로서 署名은 물론 印章 도 찍혀 있어 마치 서예 작품을 연상케 하는 명품이다.
「奉安文」(1건)은 1835년(憲宗 1) 정경세의 우산서원 入享時에 지은 봉안문으로 撰者는 유성룡의 후손이며 立齋門人이었던 柳台佐(鶴棲)이다.
「賜祭文」(1건)은 1796년(正祖 20) 正祖가 정경세를 치제하기 위해 지은 御祭文이다. 내용 중에『淑諸退陶 忠於紫陽』이라 하여 愚伏을 朱子·退溪의 적전으로 추장한 의미심장한 구절이 있다.
당시 정조가 제문을 내림과 동시에 우복의 文集과 年譜를 봉진하라는 명을 내리자 정종로가 應命하였는데,현전하는『愚伏年譜』(筆寫本)은 바로 이 때 정서된 것이다.
「祭文」(68건)과「輓詞」(4건)는 여느 제문·만사와 다를 바 없으며, 「偏論」(1건)은 李心喆이 評한 鄭宜黙의 편론이다.
「墓文行狀類」(7건)는 鄭宗魯·鄭允愚·鄭宜黙 등의 墓誌·墓碣·行狀이며,「試券」(15건)은 鄭杺·鄭允愚·鄭東奎·鄭宜黙·鄭永黙·鄭在鵬 등의 시권인데, 일부는 錄名 부분이 탈락되어 작성자를 파악할 수 없다. 이 중에는 정심의 문과 합격시권(1624), 정동규의 문과합격시권(1848), 정의묵의 진사입격시권(1879)과 문과합격시권(1885)도 포함되어 있다.
9) 拓本·遺墨書畵類
탁본류와 유물서화류로 대별된다. 「탁본류」(23건)는 진주정씨 역대의 묘지명 탁본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탁본류 중에서 주목할 자료는 盧鴻의 神道碑銘과 金誠一의 신도비명이다.
노홍은 노수신의 부친이며, 비명은 朴承任이 찬하고, 金應南이 篆額을 썼으며, 韓濩(石峯)가 글씨를 썼다. 건립 연대는 1589년(선조 22)이며, 韓石峯의 작품 중에서 아직 서예사 분야에 미공개된 글씨라는 점에서 그 중요성이 배가되고 있다.
김성일의 신도비명은 1635년(인조 13)에 건립된 것인데, 撰者는 정경세, 篆額은 金尙容, 글씨는 李山賚가 썼다. 이 탁본은 서예사적인 가치도 높지만 김성일의 신도비는 숙종연간에 다시 건립되었기 때문에 舊碑의 상태를 알 수 있는 자료는 본 탁본이 유일한 실정이다.
「遺墨書畵類」(20건)는 墨蹟과 목판본 등이 혼재되어 있으며,해서·행서·초서·전서등 서체도 다양하다. 이 중 해서 대자로 쓰여진「石坡」는 鄭象晉의 雅號로서 글씨는 田○龍(淵泉)이 썼다. 그리고 柳淵孝가 쓴「愚山齋」(篆書)는 진주정씨의 齋室 현판이다.
목판본으로서 주목되는 글씨는 이황이 쓴「屛銘」과「元朝五箴」이다. 병명은 이황이 그의 제자 김성일에게 써 준 글씨로 현재 그 원본은 김성일 종가의 유물관[ 雲章閣] 에 소장되어 있다. 이 글씨는 이황의 친필이기도 하거니와 내용이 워낙 심오하여 模刻되어 영남유림에 배포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元朝五箴은 李彦迪이 27세 되던 정월 초하루에 학문과 행신의 의지를 더욱 다지기 위해 지은 5가지 箴言이다. 평소 이황은 이언적을 매우 존경하여 손수 그의 行狀을 찬하였고, 이언적의 손자 李浚(求菴)의 부탁이 있어 원조오잠을 쓴 것이다. 원본은 현재 경주 옥산리의 독락당에 소장되어 있는데, 이황의 여러 글씨 중에서 가장 명품으로 꼽히고 있다. 山水軒에 소장된 원조오잠 글씨는 비록 이를 모각한 목판본이기는 하지만 원본의 필치를 매우 핍진하게 살리고 있다.
마지막으로 유묵서화류 중에는 계회도로 파악되는 서화 1건이 포함되어 있다. 워낙 훼손이 심하고 조각 조각 분리되어 있어 정확한 내용을 파악할 수는 없지만 편린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복代에 만들어진 계회도임을 알 수 있다. 시기적으로는 적어도 1600년 이전에 작성된 것으로 파악된다. 매우 귀중한 미술사자료가 이렇게 심하게 훼손되어 매우 안타까울 따름이다.
山水軒 소장 典籍類 중에서 자료적 가치가 가장 높은 부분이 바로 성책고문서이다. 총 수량은 174책이며, 내용상으로는 書畵類에서 置簿記錄類에 이르기까지 종류가 매우 다양하다. 여기서는 이 모든 내용을 다룰 수는 없고, 중요 자료에 대해 개략적인 설명을 더하기로 한다.
1) 筆帖類
① 宣祖御筆
1630년(인조 8) 義昌君 李珖이 간행한 선조의 御筆帖. 판종은 목판본이다. 의창군의 발문에 따르면, 선조는 國事의 여가에 항상 서법의 연마에 노력하였고, 작품의 수도 매우 많았다. 그러나 선조는 자신의 글씨를 좀처럼 신하들에게 내리는 일이 없었으며, 그나마 임란의 와중에서 상당수가 소실되었다고 한다. 이에 의창군이 잔존하는 유묵을 모아 이 필첩으로 제작하게 된 것이다. 의창군의 표현대로 본 필첩에 수록된 글씨의 분량은 많지 않지만 小字에서 大字까지 자형이 다양하며, 판각의 상태도 비교적 양호하여 초간본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여기에 수록된 글씨는 후일 列聖御筆에 수록되었다. 편찬자 義昌君은 선조의 아들로 호는 松泉, 시호는 敬憲이다. 당대의 명문장가 許筬의 사위이며, 필력이 웅혼하여 일시의 편액·비문의 글씨를 전담할 정도였으며, 특히 해서에 특장을 보였다고 한다.
② 文莊公手澤
鄭經世의 친필 원고를 성첩한 문서. 제목 [文莊公手澤은 본 문서를 성첩할 당시 후손들이 붙인 이름이다. 본 [文莊公手澤]에는 김성일·곽준의 신도비명의 원고 초본이 수록되어 있는데, 초본인 만큼 삭제·가필·추기한 흔적이 역력하다. 이 두 건의 신도비명은『愚伏集』(卷17)에 수록되어 있다.
③ 愚伏堂手柬
鄭經世의 筆帖. 시고·간찰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수록된 내용은 一黙에게 증정한 7언율시, 자신의 거주지인 愚山 일대의 경치를 노래한 시인 [愚谷雜咏十二絶], 智上人(僧侶)에게 증정한 7언율시인 [贈智上人], 1607년(宣祖 40) 상주지역 원로들의 모임인 白首會에 참가하여 지은 7언율시인 [白首會詩(幷序)], 菊圃 金廷堅의 원운(是日席上口占)에 대한 李埈·鄭經世의 차운시인 [是日席上口占], 서애 유성룡에게 보낸 편지인 [ 上西厓先生書], 金長生에게 보낸 편지인 [與沙溪書] 등 매우 다양하다.
④ 愚伏堂手簡
우복 鄭經世의 簡札帖. 대부분 子姪·孫子와 與答한 편지이다. 내용은 安信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피봉을 함께 성첩하여 편지를 받은 사람을 쉽게 알 수 있다. 편지의 대상자는 鄭景烈·鄭景式·鄭景華(이상 아우), 盧稷(甥姪), 崔參知, 鄭杺·鄭樽·鄭木學·鄭櫟(이상 아들), 鄭道應(손자) 등 모두 10인이다.
⑤ 先賢筆帖(1)
鄭經世에게 증여된 명사들의 간찰과 시고. 이 중 李時發·鄭曄·李廷龜·吳允謙·權盼·吳億齡·徐渻·李安訥 등 당대의 명사들이 망라되어 있다. 사료적인 가치와 함께 서예사적으로도 주목되는 자료이다. 수록된 간찰·시고를 인명에 따라 구분하면 아래와 같다. 인명을 확인할 수 없는 인물은 미상으로 구분하였으며, ( )의 수는 동일인의 필찰이 이어지는 경우이다.
□存敬(簡札) 李時發(簡札2) 鄭曄(簡札2) 未詳人(簡札) 全湜(簡札) 未詳人(詩稿) 朴彛敘(詩稿) 盧稷(詩稿) 未詳人(簡札) 李廷龜(簡札) 未詳人(簡札) 未詳人(簡札) 吳允謙(簡札2) 未詳人(簡札) 權盼(簡札) 全湜(簡札5) 鄭曄(簡札) 權盼(簡札2) 吳億齡(簡札) 李廷龜(簡札2) 未詳人(簡札) 金允安(詩稿) 徐渻(詩稿) 李安訥(詩稿) 未詳人(詩稿)
⑥ 先賢筆帖(2)
정경세에게 증여된 명사들의 간찰과 시고. 李元翼(梧里)·李好閔(五峯)·李廷龜(月沙)·沈喜壽(一松)·呂裕吉·金涌(雲川)·李尙毅(少陵)·韓浚謙(柳川) 등 모두 8인의 筆札로 구성되어 있다.
李元翼(簡札4) 李好閔(簡札13) 李好閔(詩稿) 李廷龜(簡札) 沈喜壽(簡札8) 呂裕吉(簡札) 金涌(簡札) 李尙毅(簡札4) 韓浚謙(簡札13)
⑦ 燕行贈言 1609년(光海君 1) 鄭經世가 冬至使로 파견될 당시에 증여된 知舊·門人들의 送別詩帖.
李好閔·沈喜壽·李廷龜·李廷馦·希菴·趙翊·李埈·全湜·金憲·李琠·李尙伋·成灠·金允思·金應德·曺友仁·金鳳儀·舟巖·南溪·黃時幹·金知復·孫礻唐·曺希仁·鄭榮邦·孫起陽·申楫·崔挺豪·眞城後人·李大圭·全克恒·李達 등 약 30여명의 송별시가 수록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송별 시첩은 한 사람의 필체로 작성하는 경우가 많지만 본 [燕行贈言]은 개개인의 친필일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送別詩(燕行詩) 연구는 물론 서예사적으로 주목되는 자료이다. 특히 이호민(3)·심희수(3)·이정구(6)·조우인(8)의 시고에는 상당수의 印章이 찍혀 있는데,여기에 대해서도 정밀한 분석이 요망된다.
⑧ 同春堂筆蹟
1653년(효종 4)에 작성된 宋甲祚(睡翁)의 墓表 탁본첩. 송준길이 墓表를 찬하고 글씨도 썼기 때문에 同春堂筆蹟으로 명명하였다. 송준길은 이 시기의 대표적인 유학자이며 名書家였는데, 용인의 [吳允謙墓碣], 연산의 [豚巖書院廟庭碑]는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본 묘표 또한 송준길의 글씨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지만 보존 상태가 불량하여 중간 중간에 글자가 박락된 흠이 있다. 참고로 송갑조는 宋時烈의(尤菴) 부친이다.
또한 山水軒에는 [愚山雜詠]을 쓴 宋浚吉의 墨蹟도 소장되어 있다.
⑨ 先世遺墨
鄭經世-鄭東奎에 이르는 愚伏家門 11代의 筆帖. 모두 11건의 簡札·詩稿가 수록되어 있다. 문서의 후반부에 [山水軒寶藏]이라 기록하여 소장처를 명시하였다.
11건 중에서 간찰이 10건이며, 시고가 1건인데, 정경세의 5세손 鄭仁模의 필적만 누락되어 있다.
2) 畵帖·契帖類
① 聖庭稧帖
1610년(광해군 2) 金宏弼·鄭汝昌·趙光祖·李彦迪·李滉 등 이른바 사림오현의 문묘종사시에 집사로 참여한 인사들의 계첩. 聖庭은 문묘의 별칭이다. 계첩의 체제는 표제·그림·그림제목·座目·跋文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모든 면은 絹本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表題]: 聖庭稧帖으로 표제되어 있다. 墨跡과 題簽의 상태로 보아 후대에 별첨한 것으로 보인다.
[그림]: 絹本 墨書로서 배경은 文廟이다. 문묘의 건물과 주변의 경관을 간략하게 묘사하고 참례한 인사들을 위차에 따라 표시하였다. 그림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契會圖와 유사하다. 畵者는 미상이지만 이 시기 繪畵(契會圖)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그림제목]: 篆書로 [五賢從祀時參禮圖]로 기록되어 있다. 書者는 미상이다.
[座目] 성균관 대사성 辛慶晉 이하 모두 38명이 수록되어 있다. 말미에「右凡三十八人」, 「萬曆三十八年庚戌九月」이라 기록하여 참례인의 수와 기년을 명시하였다. 좌목의 기록 방식은 관품·관직·성명을 기록한 다음 그 아래에 字·號, 그 아래에 과거사항, 그 아래에 생년·본관을 기록하였다. 號를 기록한 것이 일반 계첩과 다름 점이다. 본 계첩의 소장자인 鄭經世는 第2位에 기록되어 있는데, 당시의 직책은 嘉善大夫 行忠佐衛護軍이다.
[跋文]: 오현의 문묘종사를 경하하고 광해군의 성덕을 기리는 내용이다. 초서로 기록되어 있으며 비교적 장문의 글이다. 찬자는 정경세이다. 이 글은『愚伏集』(卷15)에「五賢 從祀廟庭集禮契帖序」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② 金吾稧帖
1883년(고종 20)에 작성된 義禁府都事의 계안. 금오는 의금부, 금오랑은 의금부도사(5品→9品)의 별칭으로 정원은 10명이다. 금오계첩은 조선시대 계회도[계회첩]의 가장 전형적인 형태로서 현존하는 작품도 가장 많은 편이다. 본 계첩은 표제·그림·좌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림은 계회 장면을 묘사한 것으로 장소는 의금부이다. 10명의 구성원 중에 분홍색 관복을 입은 사람은 首任(先任)으로 파악된다. 계첩에 따라서는 구성원이 9명으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이는 당직 근무자를 감안한 표현 방식이다.
좌목에는 權寅夏 등 모두 10명의 명단이 가록되어 있다. 명단의 기록 방식은 品階·職任·이름을 기록한 다음 그 하단에 字·生年,그 하단에는 科擧·入仕 여부, 그 하단에는 本貫을 기록하였다. 본 금오계첩은 鄭宜黙에게 반질된 것이다. 정의묵은 정경세의 10세손으로 문음을 통해 출사하여 참봉,의금부도사를 역인한 다음 1885년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동부승지에 이르렀다.
③ 壬午司馬榜會之圖
내 용 : 1582년(宣祖 15)의 사마시 합격자들이 동방회를 가진 다음 이를 기념하기 위해 작성한 계첩. 계회의 개최와 계첩의 작성시기는 1630년(인조 8)이다. 鄭經世의 발문에 따르면, 이 모임은 삼척부사로 부임하는 李埈을 餞別하기 위해 결성되었다. 방회를 주선한 사람은 李培迪·柳舜翼이며, 尹昉 이하 12인이 좌목에 기록되어 있으나 尹昉은 신병으로 인해 참석하지 못했다. 당시의 방회는 사마 입격 이후 49년만에 가진 모임이었기 때문에 高官이 된 인사도 많았지만 상당수의 동방들이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 방회에 12명만이 참여한 것은 참가 자격을 당상관 이상의 유관자로 한정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본 계첩은 [表題]·[契會圖]·[座目]·[詩]·[跋文]으로 구성되어 있다. 계회도 부분은 絹本彩色이고 나머지는 絹本墨書이다. 계회도의 篆額은 金尙容의 글씨이고, 그 나머지 座目·跋文 등은 李弘冑의 글씨이다.
[表 題]:「壬午司馬榜會之圖」
[契會圖]: 제목과 그림의 2단 구성이다. 제목인 [壬午司 馬榜會之圖](篆書)는 金尙容의 글씨이다. 그림은 다른 계회도와 마찬가지로 계회의 장면을 묘사한 것으로 畵者는 미상이다. 계회의 장소는 충훈부인데, 12명의 참가자가 충훈부 청사의 중앙(4명)·동편(2명)·서편(6명)에 좌정하고 있고, 그 아래로 충훈부의 서리로 보이는 시종, 춤을 추는 기녀, 음식을 준비하는 찬모의 모습이 보인다. 회화의 기법과 양식은 이 시기 계회도의 전형적인 형태라 할 수 있다. 하단의 일부분을 제외하면 보존 상태가 비교적 양호한 편이다.
[座 目]: 尹昉 이하 12명의 성명이 열서되어 있다. 대부분 당상관 이상의 고관으로서 김두남·이배적을 제외하면 모두 문과 출신이다. 좌차는 방회의 취지를 고려하여 나이·관직과 상관없이 사마 합격 당시의 科次에 따르고 있다. 좌목의 명단을 약기하면 아래와 같다.
[詩]: 鄭經世 이하 모두 11首의 詩가 수록되어 있다. 앞의 4수는 정경세의 原韻을 吳允謙·李埈·柳舜翼이 이를 次韻한 것으로 이준을 송별하는 내용이다. 나머지 7수는 이준의 원운을 金尙容·尹昕·李培迪·尹昉·李弘冑·尹晥이 이를 차운한 것으로 방회를 기념하는 내용이다. 초서로 기록되어 있으며 이 또한 이홍주의 글씨이다. 李貴와 金斗南만 詩가 없으며 윤방은 방회에는 불참했으나 시는 수록되어 있다.
[跋文]: 방회의 동기, 취지, 전말을 적은 글. 찬자는 정경세이다. 이 발문은『愚伏集』別集(卷1)에 수록되어 있다. 본 방회의 전반적인 성격, 의의와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정보가 담겨 있다.
④ 蘭亭修會圖
王羲之의 蘭亭稧 고사를 담은 版畵帖이다. 1592년(선조 25) 중국에서 간행된 것으로 1609년(光海君 1) 鄭經世가 중국에 동지사로 갔을 때 구입했을 가능성이 크다 .
이 판화에는 蘭亭의 정경과 왕희지 등 42인이 난정 주변에서 流觴曲水하는 장면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으며, 인물의 상단에는 각기 지은 詩를 부기하는 등 난정고사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편집되어 있다. 본 판화첩은 간행연도가 오래된 舊本으로서 서화사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작품으로 판단된다.
3) 愚伏關聯文蹟
① 愚伏先祖別集營刊時文蹟
『愚伏集』 「別集」간행의 전말을 기록한 문서. 수록된 연도는 1791년(正祖 15)-1792년(正祖 16)이다.
愚伏門人錄과 관련된 사항이 주된 내용을 차지하고 있으며, 각각 다른 시기와 다른 용도로 작성된 門人錄序·門人錄·愚伏鄭先生門人子孫稧案·修稧所出物案·愚伏先生文集補遺所扶助記가 일건 문서처럼 장첩되어 있다.
참고로『愚伏集』(20卷 10冊)은 모두 두 차례에 간행되었다. 초간본은 1657년 宋浚吉(사위)·沈大孚(문인)·鄭道應(아들)의 주관하에 상주 道南書院에서 목판으로 간행되었으며, 중간본은 1844년 愚山書院에서 간행되었다. 그리고 별집 역시 두 차례 간행되었다. 1821년(순조 21) 후손 鄭象履의 주관하에 원집에서 누락된 시문과 연보·부록을 8卷 4冊으로 간행한 이래 1899년에는 후손 鄭夏黙 등이 12卷 6冊으로 重刊하였다.
별집에 수록된 우복연보는 정경세의 사위인 송준길이 1633년-1646년까지 약 13년 동안 편찬한 것이다. 본 문서에서 말하는 〈別集營刊〉은 1821년 당시의 별집 간행을 의미한다. 다만 본 문서의 주요 부분을 차지하는 〈문인록〉은 별집에 수록되지 않았다. 당초 연보와 함께 문인록을 별집으로 간행하려 했으나 여러 사정으로 인해 문인록은 누락된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본 문서에 수록된 문인록 관련 기록은 아직 세상에 공개되지 않은 일차 자료이다. 수록된 순서에 따라 그 내용을 살펴보기로 한다.
[門人錄序]: 1791년(정조 15). 黃景幹이 편찬한 門人錄의 서문이다. 서문에 따르면, 정경세의 문인록은 愚伏宗家에 초본이 있었으며 이를 수정하여 문인록의 체제를 완비한 사람은 黃啓熙와 黃景幹이었다. 이들은 정경세의 문인 黃紐의 후손으로서 상주 출신이다. 이처럼 서문까지 작성된 것으로 보아 당초 문인록을 별집에 포함시키려 했음이 분명하다.
[門人錄]: 문인록의 좌목이다. 柳袗을 首題로 모두 107명이 수록되어 있다. 문인들의 성명 아래에 科擧·官職·號를 간단하게 기록하였다. 이는 정경세의 문인록으로서는 최초로 공개된 자료이며 수록 범위도 방대한 편이다.
다만 문인들의 행적·제문·만사 등을 수록한 도산급문제현록·회연 급문·여헌선생문도록·고산급문록 등에 비해서는 내용이 매우 소략하다. 따라서 완비된 문인록이기보다는 문인 명단으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 이런 현상이 나타난 것은 정경세의 문인 범주를 확정하는데 근본적인 목적이 있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정경세의 문인은 상주를 중심으로 안동·함창·선산·성주·경주·진주 등 영남 일대에 두루 분포한 것으로 나타난다. 首題된 유진은 유성룡의 3자로 병산서원에 배향된 인물이며, 사위인 송준길은 제7위에 올라 있다. 이외 洪鎬·黃紐·曺希仁·金應祖·鄭榮邦·金涌·柳元之·金榮祖· 姜大遂 등의 명단도 보인다.
사실 본서에 수록된 문인들의 대부분은 김성일·유성룡·정구·장현광의 문하를 출입한 사람들이다. 예를 들어 김응조는 유성룡·장현광의 문인이며, 김용은 김성일의 문인이며, 강대수는 정구의 문인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들과의 중복성을 파악하는 것도 의미 있는 작업이라 생각된다. 본 문인록은 「愚伏門下」의 범위와 성격에 대한 파악은 물론 영남학통의 연구에 있어서도 필수적인 자료로 평가된다.
그리고 후일 영남남인으로서 노론으로 전향한 인물 중에는 정경세의 문인계열이 비교적 많은 편이다. 申碩蕃·全克恒·全克恬은 바로 그 대표적인 경우에 속한다. 이는 상주가 충청권과 지역적으로 인접하고 송준길이 정경세의 사위라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도 보다 정미한 연구가 요망된다.
[愚伏鄭先生門人子孫稧案]: 1791년(正祖 15). 愚伏門人의 후손들이『愚伏集』 별집·연보 간행에 따른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결성한 계의 계안. 冒頭에 1791년 10월 黃景幹이 지은 계안의 序文이 있고, 그 아래로 계원 명단이 열서되어 있다. 황경간은 바로 앞에서 언급한 문인록의 서문을 지은 사람이다. 좌목에는 황경간 이하 모두 166명이 수록되어 있다. 계원들의 분포지는 상주를 중심으로 청송·경주·용궁·안동·풍기 등지이다.
[修稧所出物案]: 1791년(정조 15). 위 계원 중 44 인의 출자금 내역이다. 다만 인명이 아니고 〈趙北溪宅〉·〈全雲溪宅〉 등 宅號로 표기되어 있어 인적 사항을 확인하기 매우 어렵다.
출자 금액은 宅號 아래에 표기되어 있는데, 대체로 1양~10양 범위이다.
[愚伏先生文集補遺所扶助記]: 1792년(정조 12). 별집 간행에 따른 경비 조달의 내역을 기록한 문서. 맨 앞에 〈通文所告〉라는 제목으로 통문을 보낸 문중의 명단을 기록하였다. 그 아래로 일기 형식으로 저간의 사정을 자세하게 기록하였다.
본 문서에 따르면, 별집 간행 논의는 1790년경 玉洞書 院에서 최초로 발론되었다. 옥동서원은 정경세의 주향처로서 도남서원과 더불어 상주의 대표적인 서원이다 . 그러나 옥동 서원에서 모든 경비를 부담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융통책으로서 淵源各家에 협조를 요청하게 된 것이다. 이 때 金鍊大·金東瑜가 유사로 차정되어 실무를 담당하였는데, 본 기록은 金鍊大가 작성한 것으로 생각된다.
본 문서는 바로 보유소의 부조금을 요청에 대한 연원각가의 회신을 날짜별로 수록한 것이다. 조선 후기 문집 간행의 실태를 알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자료로 판단된다.
〈通文所告〉: 보유소의 부조금 요청에 회답한 문중의 명단. 풍산유씨 이하 모두 22개 문중의 명단이 기재되어 있다. 某里某門中으로 기록함으로서 누구의 후손인지 분명하게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정경세의 문인계열임에는 분명하다. 龍宮의 紙谷鄭門中을 제외하면 모두 상주일대로 추정된다.
[序文]: 내용상 金鍊大(有司)의 서문에 해당한다. 별집 간행 논의의 발단, 부조금 요청의 취지와 경위가 간략하게 서술되어 있다.
[日記]: 1792년 9월 1일 보유소 유사 金鍊大·金東瑜가 淵源各家에 부조를 요청하는 통문을 발송하는 내용부터 시작된다. 그 이하 부조금 요청에 부응하는 연원각가의 回文과 有司의 薦出 사항을 날짜별로 기록하였다. 수록된 통문은 鄭榮後(梅塢) 후손, 金廷堅(菊園)의 후손, 金秋任(畏棲庵)의 후손, 안동·경주·예천·용궁의 통문이 전부이다. 참고로 좌도지역 담당유사에 趙邾이 선출되었다.
② 愚伏先祖別集開刊時文蹟
『愚伏集』 「別集」 간행에 따른 晉州鄭氏(우복후손)와 豊山柳氏(서애후손) 사이의 마찰상을 기록한 문서. 수록 연도는 1821년(순조 21)- 1838년(헌종 4) 이다.
별집 중에서도 문제가 된 부분은 송준길이 찬한「愚伏年譜」였다.『우복집』은 1657년(孝宗 8)에 원집이 간행되고, 1821년(純祖 21)에 부록·연보를 합하여 별집을 간행하였다. 물론 우복연보는 송준길의 저술이므로 이미 1682년(숙종 8) 에 간행된『同春堂集』에 수록되었다. 그러나『우복집』으로 간행되기는 이때가 처음이기 때문에 비로소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정경세는 유성룡의 고제이며 인조조 영남남인의 영수였다. 그런데 송준길이「愚伏年譜」를 편찬하면서 유성룡을 은근히 폄하하였다는 것이 풍산유씨의 주장이다.
따라서 이 문제는 풍산유씨의 이의 제기에 대한 진주유씨의 변론 형식으로 전개되었다. 물론 이런 와중에도 우복연보는 1821년(순조 21) 후손 鄭象履의 주관하에『愚伏集』別集으로 간행되었지만 두 집안 사이의 갈등은 19세기 후반까지 계속되었다. 심지어 도산서원에 통문을 보내 자신들의 정당성을 피력하는 등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였다. 본 문서는「愚伏年譜」 간행에 따른 상호 갈등의 서막에 해당하는 매우 중요한 기록이다. 본 문서는 내용상 [先祖別集刊役事實] [日 記] [往復書簡原本] 등 크게 4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先祖別集刊役事實]: 정상리가 기록한 1657년(효종 8 )~1820년(순조 20)까지 우복집 간행의 전말. 정상리는 정경세의 7세손으로 정종로의 유지에 따라 別集 간행을 주관한 인물이다. 여기에는 원집의 간행(1657), 연보의 편찬(1633~46) 연혁이 비교적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1682년조에는 우복연보가 동춘당집에 수록된 사실이 기록되어 있으며, 1789년조에는 正祖가 우복집의 元集· 別集과 年譜를 열람한 내력이 적혀 있다. 이 때 교량적인 역할을 담당한 사람은 蔡濟恭과 李萬運이었다.
1791년조(본문에는 純祖辛亥로 기록되어 있으나 이는 正祖辛亥의 오기이다)에는 우복문인의 후손들이 별집 간행을 위해 修稧所를 결성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이를 주도한 인물은 黃景幹(進士)·金相欽이며 상주일대에서 15家, 도내에서 8家가 여기에 참여한 것으로 나타난다.
1812년조에는 송준길의 후손이 우복연보의 책판을 정경세의 후손에게 인계한 사실이 수록되어 있으며, 1818년 조항에는 사림들이 별집 刊冊所를 설치한 경위가 기록되어 있다. 1820년 조항에는 계장 李學培가 별집의 편차를 확인한 사실과 「斯文錄」·「經筵日記」등의 교정 사실이 기록 되어 있다.「斯文錄」은 南漢皜, 「經筵日記」 등은 姜世白(應敎)이 교정하였다.
[日記]: 別集(愚伏年譜) 간행에 따른 풍산유씨와 진주정씨 사이의 갈등상을 일기 형식으로 기록한 부분. 저자는 정경세 의 7세손 鄭象順이다. 본 일기의 수록 연대는 1821년 5월 16일~ 1834년 8월 10일이다. 주요 사건만을 요약 정리하여 분량은 많지 않다.
당시 풍산유씨의 대표자는 柳尋春·柳台佐·柳相祚이며, 진주유씨의 대표자는 鄭象履(1777- 1848)·鄭象順으로 나타탄다. 본 일기에는 풍산유씨가 진주정씨측에 이의를 제기하고 진주정씨가 여기에 대해 변론하는 약 13년 동안의 과정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풍산유씨는 안동의 屛山書院을 중심으로 여론 을 주도하며「愚伏年譜」의 문제점을 강경하게 지적하였다. 이에 진주정씨의 대표자가 수차례 안동의 하회를 왕래하며 의견을 조정하고 道南書院에서도 조정책을 시도하였으나 모두 무산되었다. 이런 선상에서 1832년 (순조 32) 8월 24일에는「우복연보」 문제로 인해 도남서원에서 도회가 개최되기도 했다. 참고로 본 일기가 시작되는 1821년은 愚伏年譜」가『愚伏集』 別集으로 간행되던 해이며, 道會가 개최되던 1832년은「愚伏年譜」 가『文莊公 譜 로 단독 간행되던 해이다.
결국 이 문제는 13년 동안의 논의 과정에서 별다른 합의를 도출하지 못하고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그 여파는 19 세기 이후까지 그대로 존속되었다.
[單子]: 1825년(純祖 25) 진주정씨측에서 도내에 제출한 단자로 정상점·정상리 이하 모두 11명이 연명하였다. 문서의 좌측 상단에는 본 단자에 대한 柳相祚·柳台佐의 회신이 첨부되어 있다.
[往復書簡原本]:「愚伏別集」 의 간행과 관련하여 왕래된 書翰의 原本 .
柳台佐(3) ·柳道性(3)의 간찰 6건이 배접되어 있다.
③ 愚伏先生諡狀
宋時烈이 찬한 鄭經世의 諡狀. 단순한 시장이 아니라 시장을 올린 다음 奉常寺⇒禮曺⇒吏曹⇒議政府를 거쳐 국왕에 의해 諡號가 최종 결정되기까지의 牒呈·關·啓目 등의 공문서 원본이 첨부되어 있다. 본 문서에 따르면 , 봉상시에 諡狀이 올려진 것은 1659년(孝宗 10) 12월이었고, 봉상시에 서 예조에 牒呈한 것은 1660년(顯宗 1) 1월이었다. 이 때 諡號望 으로 文肅·文憲·文莊이 비망되었다. 예조에서 다시 이조로 關文을 보낸 것은 同年 2월이었고, 이조에서 議政府에 牒呈한 것은 同年 同月이었다. 이런 절차를 통해 국왕의 최종 인가가 난 것은 1663년(현종 4) 正月 25일이었다. 시호는 수망인 文肅으로 결정되었는데, 諡註는「勤學好問曰文 , 「剛德克就曰肅」이었다.
「愚伏年譜」에 따르면, 1660년(현종 1)에 정경세에게 文肅의 시호가 내린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이 때는 시호가 논의되던 과정이었지 결정된 것은 아니었으며, 예관이 파견 되어 宣諡行事가 이루어진 것은 1665년(顯宗 6) 8월이었다. 그러나 이 시호는 1693년(肅宗 19) 영남유생들의 건의에 의해 당초末望 이었던 文莊으로 改諡되었다. 본 문서는 시호가 결정되는 전과정을 공문서를 통해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고 하겠다.
④ 湖壟天水帖·文莊公愚 伏鄭先生墓所禁護文桉
咸昌(恭檢湖 西麓) 소재 우복분묘의 산송에 따른 所志類와 題音 등을 합철한 문서. 두 문서는 내용상 동일한 문서이며, 「湖壟天水帖」 이 완전한 문서이다. 1700연대 중반에서 1800연대 후반까지 약 150년 동안의 쟁송과정이 수록되어 있다. 두 문서 모두 소지·제사 등을 중심으로 후대에 정서한 것인데, 「文莊公愚伏鄭先生墓所禁護文桉」 이 더 이른 시기에 정서된 것이다.
본 산송은 咸昌縣에 거주하던 權處晉이 우복분묘에 투장하면서 시작되어 약 150년 동안 줄기차게 진행되었다. 문서의 주된 내용을 차지하는 것은 역시 정주원·정중로·정종로·정윤우·정민병·정의묵 등 본손들의 소지와 거기에 따른 순상·상주목사·함창현감의 제음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황경간·황반로 등 입재문인들이 진정한 것도 있으며, 정주원의 상서 중에는 閔翼洙(牧使) ·閔昌洙 (副率) ·閔亨洙(校理) ·閔百祥(進士) 등 인현왕후의 아버지인 閔維重의 자손들과 李縡(刑曹判書) ·宋堯卿(牧使) ·元景夏(副率) 등 송준길의 내외자손들이 대대적으로 연명한 것도 있다. 이는 우복자손들이 산송을 빨리 해결하기 위해 이들에게 협조를 요청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산송은 鄭宗魯 대에 이르러서도 그치지 않다가 고종연간인 鄭宜黙 대에 와서야 종결 되었다.
4) 名單類
① 廟內士林執事
1796년(正祖 20) 9월 13일 正祖가 禮官을 보내 愚伏을 치제할 당시의 士林執事記. 당시 致祭行事는 宗宅의 家廟에서 행해졌는데, 예관은 禮曺正郞 閔匡魯, 大祝(兼典祀官) 은 상주목사 金載淳, 司儀官은 金山郡守 李廷書, 祝史官은 문경군수 宋倫載, 齋郞官은 찰방 崔鳳瑎였다.
廟內의 執事를 맡은 선비는 贊者 柳鳳祚 등 18명이며, 禮式에 참여한 士林은 무려 470여명 이나 되었다. 이들은 상주는 물론 안동·인동·경주·예천·용궁·칠곡 등 영남 각처의 선비들로서 南漢朝·金宏·李堣 등 名士들의 이름도 보이고 있다. 문서의 서두에는 致祭時의 日記와 儀節이 수록되어 있어 치제의 일정과 양식을 파악하는데 크게 참고가 된다.
正祖가 우복을 치제하게 된 것은 정종로의 영향이 컸다. 당시 정종로는 학행으로 징소되어 入朝하고 있었는데, 정조는 그를 매우 신임한 나머지 그 예우가 우복에 대한 치체로까지 파급된 것이다.
② 奉安敦事錄
1835년(憲宗 1) 鄭經世의 愚山書院 奉安時의 執事錄으로 內題는 「崇道祠腏享竣事錄」이다. 우산서원은 정경세의 主享處로서 1835년에 건립되었으며, 이듬해인 1836 년에 鄭宗魯를 배향했다.
본 문서에는 都有司 鄭象履 등 58명의 奉安時 집사 명단과 85명의 참가 유생 명단이 수록되어 있다. 당시 원장은 柳喆祚(郡守)이며, 우복종손은 鄭象晉(參奉)이었다. 삼헌관은 柳喆祚(初獻)·趙㯖(亞獻)·鄭象晉(終獻) 으로 정해졌으며, 陶山·屛山·紹修書院 등에서 유생이 파견하여 執禮를 도왔다. 문서의 말미에는 봉안 당시의 일정을 기록한「日錄」이 부기되어 있다.
③ 院錄
우산서원 院儒 名單으로 1816년(純祖 16)에 작성된「丙子秋享時加錄」과 1819년(純祖 19)에 작성된「己卯春 享時加錄」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는 추가록이며 이전에 原錄이 있었음을 말하지만 현재 원록은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문헌으로 확인되는 愚山書院의 제향시기는 1835년이다. 1835년에 우복의 위패가 봉안되었고, 이듬해인 1836년에 鄭宗魯가 배향되었는데, 본 원록의 작성시기는 1816년과 1819년인 바 서원의 연혁과 차이를 보이고 있다.
사실 본 문서는「院錄」이라 표제되어 있을 뿐 우산서원이라는 문구는 없다. 다만 산수헌에 소장되어 있고, 愚伏本孫들의 명단이 다수 수록되어 있어 우산서원으로 추정한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본 원록이 우산서원 문서가 아닐 가능성과 1835년 우복 위패의 공식적인 봉안 이전에도 사림들에 의해 祭享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으로 압축할 수 있을 뿐이다.
5) 召募使關聯文蹟
① 召募營日記
1866년(고종 3) 丙寅洋擾 당시 영우소모사로 활동한 鄭允愚의 일기. 공적인 일기가 아닌 개인 기록으로서 수록된 시기는 양요가 발생한 동년 8월에서 9월 23일까지이며, 내용도 매우 간단한 편이다.
② 召募行中謄錄
병인양요 당시 慶尙右道召募營의 謄錄으로 議政府關文, 巡營關文, 通文, 移文, 倡義文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필사자는 소모사 鄭允愚이며, 수록된 시기는 1866년 9월 20일에서 10월 1일까지이다.
③ 召募處命後日記
1866년(고종 3) 丙寅洋擾 당시 영우소모사로 활동한 鄭允愚의 일기. 命後는 소모사에 임명된 이후를 말하며, 이 또한 소모영의 공적인 일기가 아니라 召募使 鄭允愚의 개인 일기이다.
④ 召募事實(乾·坤)
1894년(高宗 31) 동학혁명 당시 영우소모사로 활동한 鄭宜黙이 소모영에서 발수급한 각종 공문서를 月日別로 정리한 문서. 소모사에 임명되던 동년 10월 17일부터 이듬해인 1895년 정월 24일까지의 甘結·傳令·通諭·關文 등이 세세하게 수록되어 있다.
당시 조정의 대응책과 영우소모영의 활동상을 파악하는 데에는 가장 필수적인 자료이며, 중간에 수록된「召募營幕下爬任記는 소모영의 조직과 인적 구성을 살피는데 크게 참고가 된다. 맨 마지막에는 1894년 9월 10일에 하달된 興宣 大院君의 布諭文과 동년 10월 14일에 발송된 宣撫使의 甘 結이 부가되어 있다.
⑤ 召募日記(單)
동학혁명 당시 嶺右召募使로 활동한 鄭宜黙의 召募日記. 召募營의 공식 기록이 아닌 소모사 개인의 日記이다. 수록된 시기는 1894년 10월 17일 소모사 임명에서부터 이듬해인 1895년 정월 27일까지이다. 「上之三十二年乙未二 月上弦召募使鄭宜黙書于山水軒中」 이라는 말미의 기록으로 보 아 소모활동을 마친 직후 자신의 거주지 山水軒(愚伏宗家) 에서 正書했음을 알 수 있다.「召募事實」의 관련 자료라는 점에서 매우 주목된다.
⑥ 討匪大略(全)
1894년 동학군의 토벌 상황을 관군의 입장에서 정리한 문서로서 영우소모영과 소모사 정의묵을 중심으로 서술되어 있다. 다만 鄭宜黙이 鄭令」 으로 표현되어 있고,「忠厚剛毅 素爲嶺之望也」라는 人物評으로 보아 鄭宜黙이 직접 작성한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리고 맨 서두에「安東郡印」 이라는 관인 이 찍혀 있고, 종이 또한 안동군에서 사용하던 官用紙인 것으로 보아 1896년 안동군수로 부임한 정의묵이 관련문서를 衙前에게 주어 이를 정리하게 했을 가능성이 크다. 내용 상으로는「召募日記」·「召募事實」의 중요한 관련 문서이다.
⑦ 慶尙道召募營錢穀入下實數成冊(兩湖都巡撫營)
1894년(高宗 31) 12月 慶尙道召募營에서 兩湖都巡 撫營에 보고한 財務 보고서.
⑧ 慶尙道召募營錢穀入下實數成冊(議政府)
1894년(高宗 31) 12月 慶尙道召募營에서 議政府에 보고한 財務 보고서.
6 ) 其他
① 達城鄕飮錄
1807년(純祖 7) 慶尙監營에서 열린 鄕飮酒禮의 전말을 가록한 문서. 당시 경삼감사였던 尹光顔은 감영 公廨의 낙성에 즈음하여 감영 소재 觀德堂에서 향음주례를 설행하였는데, 이 문서는 賓으로 초빙되었던 정종로가 작성한 것이다.
본 達城鄕飮錄은 향음주례 전과정의 의절·절차·방식은 물론 참여 인사의 명단과 그들의 시문 등이 상세하게 수록되어있어 조선 후기 향음주례의 設行 형태를 이해하는 데에는 가장 적합한 자료로 판단된다. 참여 인사는 감사 尹光顔(主人)·鄭宗魯(賓) 등 영남 각처에서 무려 322명에 달했으며, 정종로의 아들 鄭象晉도 참가자의 한 사람이었다.
山水軒에 소장된 고서는 經史子集을 총괄하여 424種 827冊이다 . 이 중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것은 역시 集部이며, 집부 중에서도 別集(韓國本) 이 절대 다수를 차지한다. 이런 경향은 우복가문뿐만 아니라 여타 가문의 전적류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앞서 산수헌은 1948년 화재로 인해 상당수의 전적를 소실했다고 했다 . 그 중에서도 고서류의 손실이 가장 컸던 것으로 사료되는데, 현재 남아 있는 고서는 화재 이전 소장본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나마 현존하는 고서도 화재의 여파로 낙질·결본된 것이 많은데, 오히려 완질본이 남아 있는 경우가 드물 정도라 하겠다. 독자들은 이 점을 유의하기 바란다.
① 經部
모두 15종 23책이며, 論語·詩傳·禮記·春秋·家禮·常變通攷·四禮考證 등 경부의 일부만 소장되어 있다. 사가에서 매우 흔하게 소장되어 있는 孟子·大學·中庸 등이 보이지 않고, 그나마 남아 있는 것 중에도 낙질본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도 화재의 여파로 생각된다.
이처럼 경부는 종류가 다양하지 못하고 낙질본이 많아 전반적으로 자료적 가치는 높지는 않지만『禮記集註大全』은 甲寅 字系列의 활자로서 서지학적 가치가 높은 貴重本에 속한다.
수장인은 [ 鄭錫僑希伯] 또는 [ 山水軒主人章] 으로 날인되어 있는데, 전자는 우복의 현손 鄭錫僑의 인장으로 주로 판본이 오래된 고서에 날인되어 있다. 후자는 鄭宜黙의 인장으로 추정되며, 1800연대 중반 이후에 간행된 도서에 날인되어 있다. 이런 현상은 다른 고서에도 일반적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우복가문의 전적이 鄭錫僑·鄭宜黙에 의해 크게 확충되었음을 반증한다.
② 史部
사부는 編年類(5종 15책), 系譜類(3종 5책), 傳記·門 人錄·辨正錄類(18종 33책), 地理類(4종 4책), 法典類 (1종 2책), 年譜類(9종 9책) 등 도합 40종 68책이 .
역시 낙질본이 많으며, 1800연대 이후에 간행된 석인본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편년류 중에는 완질본으로 남아 있는 兪棨의『麗史提綱』이 눈에 띄며, 계보류 중에는 『晉陽鄭氏家牒』(筆寫本)이 주목된다. 『晉陽鄭氏家牒』은 鄭道應이 편찬한 상주 진주정씨의 世世史蹟으로서 우복가문이 상주에 입향하여 우복을 거쳐 정도응에 이르는 門史가 매우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전기류에는 李滉이 輯註한『朱子行狀』(木板)과 유성룡이 편찬한 풍산유씨 가문의 선대사적인『終天永慕錄』, 문인록류에는 李象靖의 문인록인『高山及門錄』이 주목된다. 『終天永慕錄』은 그 초본이 하회의 충효당에 소장되어 있고, 이를 본원 에서『古文書集成』으로 영인한 바 초본과 판본을 대조해 보는 것도 유익하리라 생각된다. 그리고『고산급문록』은 비록『大山實紀』 에 영인·수록되어 있지만 원본은 그다지 흔하지 않는 편이다.
변정록류에는『心經發揮附刊辨破錄』과『寒岡先生言行錄謬條辨破錄』이 있는데, 전자는 정구의『심경발휘』에 관한 내용이며, 후자는 장현광의 후손들이 정구의『한강언행록』 중에서 장현광과 관계되는 부분을 변파한 내용이다. 특히 이『寒岡先生言行錄謬條辨破錄』은 정구와 장현광 사이의 淵源是非의 연장선상에서 출현한 책자로서 이른바「寒旅是非」 를 이해하는 데에는 필수 자료가 된다.
한편 전기류 중『昭代名臣行蹟』은 우복의 손자 鄭道應이 편찬한 명신들의 행적으로 前集·後集·外集·別集을 합하여 모두 8책이다. 외집에 鄭象履(1823), 鄭喆愚(1862) 등의 서발문으로 보아 이미 18세기 초중반에 일차 간행된 것으로 생각되나 현존본은 1900연대 이후에 간행된 鉛印本이다. 참고로 현재 산수헌에는『昭代名臣行蹟』 의 초본은 남아 있지 않으며,鄭道應의 또 다른 저술인『昭代粹語』도 소장되어 있지 않다.
地理類에서 주목할 자료는『昌山誌』이다. 『昌山誌』는 鄭道應이 편찬한 昌寧의 邑誌로서 원래 상·하 2책었으나 현재는 上卷만 남아 있다. 모두에「縣監鄭道應編」이라는 墨書가 있고, 그 옆에「鄭錫僑希伯」이라는 인장이 찍혀 있는 것으로 보아 鄭道應의 수고본을 정석교가 정리하여 淨書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 창산지는 창녕의 읍지류를 집대성했다는 점에서 자료적 가치가 높으며, 조선 후기 私撰邑誌의 연구에도 매우 중요한 문헌으로 평가된다.
③ 子部
총 18종 33책이며, 이 역시 낙질본이 많은 편이다. 이 중에서도 劉寅의『孫武子直解』(2책)·『尉繚子直解』(1책), 鄭逑의『心經發揮』(3책), 李滉의『朱書節要』, 鄭經世의『朱書酌海』등은 간행연도가 비교적 오래된 고본들이다. 특히 정경세의『朱書酌海』는 이황의『주서절요』의 전통을 이은 名著 로서 모두 8책으로 간행되었으나 현재 山水軒 에는 1冊(권12-13)만 남아 있는 실정이다.
언행록 중에는 崔興遠의『百弗菴言行錄』, 鄭經世의『愚伏言行錄』, 鄭宗魯의『立齋先生言行箚錄』이 있는데,『百弗菴言行錄』만 木板本이고, 그 나머지는 필사본이다.
특히 『立齋先生言行箚錄』은 언행록 간행을 위해 문인들의 箚記를 편집·정리한 것으로 언행록 편찬의 가장 초보적인 단계라 할 수 있다.
④ 集部
집부에는 크게 別集(中國本: 4종 11책), 別集(寒國本 : 277종 576책), 合稿類(28종 67책), 實紀類(36종 42책), 詩稿類(6종 7책) 등 모두 351종 693책이 다. 모든 전적류 중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자료적 가치도 매우 높은 편이다.
別集(중국본)의 대부분은 鄭錫僑의 인장이 날인된 17세기 이전의 고판본이며, 내용은 伊川擊壤集, 杜詩, 柳柳州文 등 시문류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이 중 『文選』은 初鑄甲寅 字本이고, 『纂註分類杜詩』은 무신자로 인쇄된 서지학적으로 매우 귀중한 고서들이라 하겠다.
한편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인 柳宗元의 글을 모은『唐大家柳柳州文抄』 에는 [商山世家]·[朴命○印]이라는 수장인이 찍혀 있는데, 이는 원래 박씨집안의 소장본이던 것이 어떤 경로를 통해 우복종가에 유입되었음을 말해 준다.
別集(韓國本)은 흔히 말하는 개인의 詩文集으로 판본상으로는 活字·木板·石印·鉛印 등 판종이 다양하며, 시기적으로는 여말선초부터 근세의 인물에까지 광범위하게 걸쳐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화재의 여파로 인해 상당수가 낙질본이며, 심지어『愚伏集』·『立齋集』조차도 완본이 없는 실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 古書(別集)들은 조선시대 영남사림의 학문과 사상 그리고 교유관계를 연구함에 있어 매우 소중한 자료들이 많다. 지역적으로는 대부분 상주·안동·성주·경주·예천·선산·문경·봉화·예안·영천·성주·칠곡·의성·군위 등 영남 상도(지금의 경상북도)의 각가에서 반질된 문집들이며, 진주권의 문집도 일부 포함되어 있다.
영남 외에는『同春堂集』(宋浚吉),『炭翁集』(權諰),『有懷 堂集』(權以鎭),『栗谷集』(李珥),『芝川集』(黃廷彧),『無愁翁集』(權愭),『艮翁集』(李獻慶),『景淵堂集』(李玄祚),『錦谷集』(宋來熙),『霧隱集』(鄭之虎),『五山集』(車天輅),『秋坡集』(宋麒壽),『海左集』(丁範朝) 등 서울·경기·호서·강원권 의 일부 南人·老論 명사들의 文集을 들 수 있다. 영남권 이외의 문집이 많은 것은 우복가문의 교유범위가 그만큼 넓었음을 의미한다.
사실 정경세와 정종로가 서발문을 지어 준 문집만 하더라도 그 수가 상당한 바, 화재가 아니었다면 산수헌 소장 문집류의 규모는 매우 방대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산수헌 소장 문집 중에서 주목할 자료는 역시 학문·사환적으로 현달한 인물보다는 비교적 명성이 적게 나면서도 지역사회에 영향을 크게 미친 인물, 즉 鄕儒 들의 문집일 것이다. 명사들의 문집은 대부분의 주요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일부는 영인 발간되어 학술적으로도 널리 이용되고 있는 반면 향유들의 문집은 내용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그 지역이 아니면 구할 수 없는 것이 많다. 산수헌에는 영남 중에서도 상주일대의 문집류는 거의 대부분을 소장하고 있기 때문에 상주지역 사족의 학문·정치·사회적 동향을 이해하는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합고류·실기류·시고류 역시 낙질본이 많고 지역적으로 영남에 편중된 한계는 있지만 아직 학계에 별로 소개가 안된 것들도 있어 보다 구체적인 검토와 연구들 요하는 자료들이 많다.
합고류의『世稿』(晉陽鄭氏) 와 실기류의『東祠八賢實紀』는 진주정씨의 가계와 행적을 파악하는 데에는 가장 일차적인 자료가 된다. 전자는 우복의 직계 중에서 문집이 간행되지 않은 인물들의 유고와 부인들의 행적을 합본한 것이며, 후자는 상주 진주정씨 중에서 東祠에 배향된 鄭繼咸·鄭銀成·鄭大成·鄭國成·鄭汝寬·鄭汝龍·鄭而弘·鄭憲世 등 8人의 實紀를 합철한 것이다. 참고로 우복의 종통계열로서 문집 또는 유고를 남긴 사람은 鄭經世·鄭道應·鄭宗魯·鄭象晉 등이다.
이상에서 상주 진주정씨 愚伏家門의 가계와 인물, 산수헌 소장의 전적류의 현황에 대해 간단하게 살펴보았다. 진주정씨는 고려 후기 사환·혼맥을 바탕으로 상주에 입향한 이후 재지사족으로서의 토대를 강화하는 가운데 16세기 중엽 정경세라는 우뚝한 학자·관료를 배출하는 과정에서 영남의 명가로 부상했음을 알 수 있었다. 나아가 우복의 자손들이 사환·학행을 통해 이를 면면히 유지함으로서 19세기 후반을 거쳐 지금에 이르기까지 우복가문은 영남 굴지의 명가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특히 우복가문의 혼반은 영남에서도 으뜸 이었고, 입재 정종로는 우복 이후 진주정씨를 가장 빛낸 인물의 한 사람이었다.
우복가문은 우복에서 정재붕에 이르는 13대 동안 4대가 문과에 합격하고, 10대가 사환에 종사하는 등 환력이 쟁쟁하였으며, 이 중 4대가 문집을 남김으로써 학문적 역량도 상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愚伏과 立齋 의 각종 저술은 조선 후기 유학사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이런 배경 위에서 우복종택에는 고문서·고서 등 상당한 전적이 소장될 수 있었고, 1900연대 중반까지도 가장문헌으로 세전되어 왔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1948년 전적이 소장된 대문채에 화재가 발생하여 대부분의 전적을 소실하게 되었고, 현재 남아 있는 것은 그 일부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러한 火變에도 불구하고 산수헌에는 결코 적지 않은 분량의 전적이 남아 있는데, 본서에 수록된 목록은 산수헌 소장 전적의 전량에 해당한다. 비록 고서의 경우는 낙질본이 많다는 흠이 있기는 하지만 산수헌 소장의 古文書·成冊古文 書·古書는 조선후기 鄕村社會史, 儒學史는 물론 古文獻學, 書誌學 연구에 있어 커다란 보탬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