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당

  • 삶의 공간과 유물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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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곡사
송곡사는 1753년(영조 29)에 건립되었다고 전하며, 1871년(고종 8)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10년에 다시 세웠다. 건물은 학문연구와 제관들이 제향준비를 하던 동서재와 한단계 높여서 제향 공간인 사우로 구성되어 있고, 서산지역 출신 또는 서산지역과 관련된 인물을 배향하고 매년 춘추로 유림들이 제향을 하는 곳이다. 이곳에는 송나라 원외랑으로 송나라가 망하자 원나라 신하가 될수 없다고 배를 타고 간월도에 와서 서산정씨의 시조가 된 정신보, 아들로 몽고군이 신창에 침입하였을 때 야습으로 공을 세워 제교가 되고 그후 나라에 공을 세워 벽상삼한삼중대광추성정책안사공신과첨의부 중찬(문하시중)에 오르고 1182-1284년까지 서산지방에 군호가 없던 것을 서주(瑞州)로 복군시킨 양열공 정인경(鄭仁卿), 서령 부원군 유성간의 6대손으로 천문, 지리에 바락아 사천감 판사로 큰공을 세운 금헌 유방택, 조선 태조와 어려서부터 친구였고 고려조에 광정대부문하평리 공조전서를 지내다가 태조가 왕위에 오르자 두문동에 들어가 절의를 지킨 후송 윤황, 금헌 유방택의 장자로 고려 공민왕 때 대과를 장원급제하고 집현전 대제학과 이조찬서를 지낸 문정공 저정 유백유, 금현의 셋째 아들로 같은 때 대롸에서 6등으로 급제하고 대사성에 오른 위촌 유백순, 저정의 손으로 일찍이 사마시에 합격했으나 단종이 고향에 돌아와 초가집에 묵고 자며 자손들에게 공부를 잘 시키고 임진왜란 때 곡식이 수천석이 있었는데 구휼미로 내 놓았다는 김적, 사계 김장생의 6대손으로 벼슬에 나가지 않고 오로지 학문에만 힘쓴 바 있는 미암 김위재 등 9명의 명현이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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