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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 : 전체: "끼니"에 대해 총3건의 자료가 검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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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원 우배선 의병진 관련자료 - 1.교지(교첩)(花園 禹拜善 義兵陳 關聯資料 - 敎旨(敎牒)) / 조선 선조 26년(1593)~광해군 1년(1609) / 12건 / 국왕문서/교령류 / 우국일 / 경기 안양시 / 낱장
    이 문서는 대구 월촌의 단양우씨 종손가에 소장되어 있던 월곡(月谷) 우배선(禹拜善, 1569~1621)과 관련된 교지, 간찰, 각택기에 관한 것이다. 우배선은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으로 본관은 단양(丹陽). 자는 사성(師聖), 호는 월곡(月谷)이다. 임진왜란 직후에 전쟁에 대한 공로로 1604년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먼저 우배선과 관련한 교지 12점을 보면, 교첩 2점ㆍ교지 8점ㆍ추증교지 2점이 있다. 교지는 왕이 신하에게 관직(官職), 관작(官爵), 시호(諡號), 자격(資格), 토지 및 노비 등을 내려주는 문서이다. 교첩은 왕이 5품 이하의 관리를 임명할 때 발급하는 사령장이다. 교첩의 내용을 보면, 선조 26년(1593) 2월 군공(軍功)으로 장사랑 예빈시참봉(將仕郞禮賓寺參奉)인 우배선을 선무랑 행군기시주부(宣務郞行軍器寺主簿)로, 같은 해 3월 역시 군공으로 군기시주부에서 봉훈랑 군기시판관(奉訓郞軍器寺判官)으로 승진시킨 사령장이다. 교지는 그를 1593년 5월 통훈대부 군자감정 겸 합천군수(通訓大夫軍資監正兼陜川郡守)로 임명하는 것에서 선조 38년(1605) 4월 절충장군 행경상좌도수군우후(折衝將軍行慶尙左道水軍虞侯)에 임명하는 것까지 8점이 있다. 나머지 추증교지 2점은 선조 36년(1603) 2월 우배선이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책록됨으로써, 그의 부친 우성덕(禹成德)을 가선대부 호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嘉善大夫戶曺參判兼同知義禁府事), 같은 해 같은 날 그의 모친 장씨(蔣氏)를 정부인(貞夫人)에 각각 추증한 것이다. 다음으로 간찰 1점은 정인홍(鄭仁弘, 1535~1623)이 당시 합천군수를 지내고 있던 우배선에게 보낸 것이고, 각택기(各宅記)는 영의정 이덕형(李德馨)ㆍ좌의정 윤승훈(尹承勳)ㆍ우의정 류영경(柳永慶) 등 주요 고관들의 명단과 그들의 거주지를 간략하게 적어 놓은 것이다. 단양우씨 종중에 소장된 우배선 관련 자료는 그가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활약한 인물이므로 임진왜란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며, 또한 교지류를 통해서 그의 관력을 살펴볼 수 있다.
    출처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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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원 우배선 의병진 관련자료-2.간찰(花園 禹拜善 義兵陳 關聯資料 - 簡札) / 조선 선조 32년(1599) / 1건 / 간독류/간독 / 우국일 / 경기 안양시 / 낱장
    이 문서는 대구 월촌의 단양우씨 종손가에 소장되어 있던 월곡(月谷) 우배선(禹拜善, 1569~1621)과 관련된 교지, 간찰, 각택기에 관한 것이다. 우배선은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으로 본관은 단양(丹陽). 자는 사성(師聖), 호는 월곡(月谷)이다. 임진왜란 직후에 전쟁에 대한 공로로 1604년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먼저 우배선과 관련한 교지 12점을 보면, 교첩 2점ㆍ교지 8점ㆍ추증교지 2점이 있다. 교지는 왕이 신하에게 관직(官職), 관작(官爵), 시호(諡號), 자격(資格), 토지 및 노비 등을 내려주는 문서이다. 교첩은 왕이 5품 이하의 관리를 임명할 때 발급하는 사령장이다. 교첩의 내용을 보면, 선조 26년(1593) 2월 군공(軍功)으로 장사랑 예빈시참봉(將仕郞禮賓寺參奉)인 우배선을 선무랑 행군기시주부(宣務郞行軍器寺主簿)로, 같은 해 3월 역시 군공으로 군기시주부에서 봉훈랑 군기시판관(奉訓郞軍器寺判官)으로 승진시킨 사령장이다. 교지는 그를 1593년 5월 통훈대부 군자감정 겸 합천군수(通訓大夫軍資監正兼陜川郡守)로 임명하는 것에서 선조 38년(1605) 4월 절충장군 행경상좌도수군우후(折衝將軍行慶尙左道水軍虞侯)에 임명하는 것까지 8점이 있다. 나머지 추증교지 2점은 선조 36년(1603) 2월 우배선이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책록됨으로써, 그의 부친 우성덕(禹成德)을 가선대부 호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嘉善大夫戶曺參判兼同知義禁府事), 같은 해 같은 날 그의 모친 장씨(蔣氏)를 정부인(貞夫人)에 각각 추증한 것이다. 다음으로 간찰 1점은 정인홍(鄭仁弘, 1535~1623)이 당시 합천군수를 지내고 있던 우배선에게 보낸 것이고, 각택기(各宅記)는 영의정 이덕형(李德馨)ㆍ좌의정 윤승훈(尹承勳)ㆍ우의정 류영경(柳永慶) 등 주요 고관들의 명단과 그들의 거주지를 간략하게 적어 놓은 것이다. 단양우씨 종중에 소장된 우배선 관련 자료는 그가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활약한 인물이므로 임진왜란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며, 또한 교지류를 통해서 그의 관력을 살펴볼 수 있다. 【번역 해제】 (1장) 정인홍(鄭仁弘)이 1599년(선조32) 합천군수(陜川郡守)에게 올린 글이다. 자신의 죽은 아들의 비가 진주성(晉州城)이 함락될 무렵 진군(陣軍)에게 강제로 약탈당하였고, 또 잉질걸(芿叱乞)의 소를 염말(廉末)이 경군인(京軍人)에게 빼앗겨 지금 본 현의 강경소리(康京所里)에 있다고 언급하고 있다. 이어, 전말을 알고 있는 응세(應世)를 추문(推問)하여 소를 되찾아달라는 것이다. 만약 그렇게 할 수 없다면 곧바로 주목(州牧)에 고발하여 처분을 바라겠으니, 살펴달라는 내용의 편지이다. ( 작성자 : 조명근 )
    출처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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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원 우배선 의병진 관련자료 - 각택기(花園 禹拜善 義兵陳 關聯資料 - 各宅記) / 조선 선조년간(1568~1608) / 1건 / 민간문서/기타류 / 우국일 / 경기 안양시 / 낱장
    이 문서는 대구 월촌의 단양우씨 종손가에 소장되어 있던 월곡(月谷) 우배선(禹拜善, 1569~1621)과 관련된 교지, 간찰, 각택기에 관한 것이다. 우배선은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으로 본관은 단양(丹陽). 자는 사성(師聖), 호는 월곡(月谷)이다. 임진왜란 직후에 전쟁에 대한 공로로 1604년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먼저 우배선과 관련한 교지 12점을 보면, 교첩 2점ㆍ교지 8점ㆍ추증교지 2점이 있다. 교지는 왕이 신하에게 관직(官職), 관작(官爵), 시호(諡號), 자격(資格), 토지 및 노비 등을 내려주는 문서이다. 교첩은 왕이 5품 이하의 관리를 임명할 때 발급하는 사령장이다. 교첩의 내용을 보면, 선조 26년(1593) 2월 군공(軍功)으로 장사랑 예빈시참봉(將仕郞禮賓寺參奉)인 우배선을 선무랑 행군기시주부(宣務郞行軍器寺主簿)로, 같은 해 3월 역시 군공으로 군기시주부에서 봉훈랑 군기시판관(奉訓郞軍器寺判官)으로 승진시킨 사령장이다. 교지는 그를 1593년 5월 통훈대부 군자감정 겸 합천군수(通訓大夫軍資監正兼陜川郡守)로 임명하는 것에서 선조 38년(1605) 4월 절충장군 행경상좌도수군우후(折衝將軍行慶尙左道水軍虞侯)에 임명하는 것까지 8점이 있다. 나머지 추증교지 2점은 선조 36년(1603) 2월 우배선이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책록됨으로써, 그의 부친 우성덕(禹成德)을 가선대부 호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嘉善大夫戶曺參判兼同知義禁府事), 같은 해 같은 날 그의 모친 장씨(蔣氏)를 정부인(貞夫人)에 각각 추증한 것이다. 다음으로 간찰 1점은 정인홍(鄭仁弘, 1535~1623)이 당시 합천군수를 지내고 있던 우배선에게 보낸 것이고, 각택기(各宅記)는 영의정 이덕형(李德馨)ㆍ좌의정 윤승훈(尹承勳)ㆍ우의정 류영경(柳永慶) 등 주요 고관들의 명단과 그들의 거주지를 간략하게 적어 놓은 것이다. 단양우씨 종중에 소장된 우배선 관련 자료는 그가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활약한 인물이므로 임진왜란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며, 또한 교지류를 통해서 그의 관력을 살펴볼 수 있다. 【 번역 해제 】 (1장) 영의정 이덕형(李德馨) 이하 47명의 문신(文臣)에 대한 거주지를 적은 것이다. 일별해보면, 의정부의 삼정승ㆍ돈녕부사ㆍ오성부원군ㆍ좌찬성, 그리고 육조의 판서ㆍ참판ㆍ참의와 사헌부의 대사헌ㆍ집의ㆍ장령ㆍ지평, 그리고 사간원의 대사간ㆍ사간ㆍ정언ㆍ헌납, 승정원의 육 승지와 기타 청평 부원군, 전임 판서, 박홍로ㆍ이수광ㆍ송사재로 분류된다. 기록한 시기는 1603년(선조36)으로 추정되며, 기록 목적은 비상연락 자료로 활용하기 위한 듯하나, 처음부터 끝까지 서식이 일정하지 않고 상이한 점이 다른 용도로 쓰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 48명을 선별해서 기록한 이유에 대해서는 이 기록만으로는 규명이 쉽지 않다. ( 작성자 : 조명근 )
    출처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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