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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학진흥원 유교넷 : 전체: "끼니"에 대해 총57건의 자료가 검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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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종 23년(1886) 5월 21일 류도성(柳道性)이 삼종숙(三從叔)의 종상(終祥) 때 지은 제문이다. 평시 빈곤으로 를 잇지 못하면서도 기개와 절조를 잃지 않았던 고인을 추모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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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경덕 / 유교문화>인물 / 오경덕
      오경덕(吳敬德 ; 1556∼1643)의 자는 득이(得而), 호는 보계(葆溪)이다. 천성이 효우하고 꾸밈이 없었다. 안음교수(安陰敎授)가 되어 교육에 전념하였고, 위기지학에 힘써서 영진에 뜻이 없고 집이 간구하여 를 이어가지 못해도 안연하였으므로 당시에 삼고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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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德川里旌孝閣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청송군
    터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이웃사람이 맛있는 음식을 먹으라고 주면 먹지않고 반드시 부모에게 드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고 한다. 부모가 병환중에 계시면 병이 쾌차할 때까지 도 잊은채 눈물어린 지극한 간호를 했다고 한다. 가세가 매우 빈곤하여 를 거르는 때도 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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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1년 8월 15일의 기록이다.<br/> 향사 때의 쌀 지출 경비 내역이다. 15일 아침, 점심, 저녁 식사의 쌀 지출 현황이 기록되어 있다. 15-20홉 사이의 쌀이 매 마다 지출되었다. 상재와 하재 참석자들의 식대 지출인 것 같다. <br/> 書押한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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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1년 8월 16일의 기록이다.<br/> 향사 때의 쌀 지출 경비 내역이다. 16일 아침, 점심, 저녁 식사의 쌀 지출 현황이 기록되어 있다. 15-20홉 사이의 쌀이 매 마다 지출되었다. 상재와 하재 참석자들의 식대 지출로 보인다. <br/> 書押한 사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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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答周進士(鳳翔) 31 / 기록자료>고도서 / 이야순
    안경을 처음 낀 소감이 담겨 있다. 저자는 이빨과 모발이 일찍 쇠약해져서 70, 80된 노인과 다름이 없었는데, 안경을 일상생활에 긴요하고 눈앞이 또렷하여 잠시도 빼놓을 수 없다고 했다. 다만 그것은 가까운 곳을 보는 경우에는 편하지만 멀리 볼 때는 분명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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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答李象文 29 / 기록자료>고도서 / 유휘문
    을 느 한 번 보고 없애 버리라며 겸양의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지난 춘분 큰 눈이 내릴 때 정원의 매화가 봉우리를 터트린 것을 보고 읊은 시를 함께 보내면서 자신의 감회를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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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어 매우 슬프다고 했다. 가족이 를 거르고 있으니 곡식 한 포만 보내 주면 열흘 안에 집에 있는 판자(板子)를 팔아 갚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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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희소 / 유교문화>인물 / 김희소
    유집을 탐독하였다. 집이 가난하여 를 잇지 못하였음에도 개의치 않았으며 자개봉(紫盖峯) 밑에 초옥을 짓고 문천거사(文泉居士)라 호하며 교천서숙(交川書塾)에 첨학소(瞻學所)를 만들어 후진지도에 힘썼다. 선생은 산림에 숨어 궁곤하게 지내면서 일생의 정력을 쏟아 학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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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同窩 柳衡鎭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안동민속박물관
    선생의 본관은 전주로 자는 은로(殷老)이며 호는 동와(同窩)이다. 치규(致奎)의 아들로 정조 20년(1796)에 태어나 고종 원년(1864)에 타계하였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재능을 보였으며, 를 잇지 못할 만큼 가난한 살림에도 아랑곳없이 문을 닫고 한결같이 독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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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주헌 / 유교문화>인물 / 문주헌
    여러 선비와 도의로 사귀어 강마하기에 힘썼다. 이어서 지헌(止軒) 최효술(崔孝述)에게 수업하여 『중용』과 『심경』의 난의(難疑)한 것을 질문했다. 가세가 극히 가난하여 를 잇지 못했으나 집념이 굳세고 지기(志氣)가 화하여 오직 도로써 후진들을 강론하고 장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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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성이씨 보인재 [간찰17] / 기록자료>고문서 / 변시섬
    지 못하다하고, 백씨형(伯氏兄)이 일하다가 와서 모임을 마친 뒤에 같이 북협(北峽)으로 갔다가 어제 하광(賀廣)에 도착하였는데, 겨우 하룻밤 이야기하고 헤어진 것이 여전히 서운한 것을 느 이 마음이 전혀 죽지 않은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존장(尊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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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탁(禹倬) 시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안동문화원
    가가 있네. 바람 잔 수면에 안개 비 해 묵은 담장머리 이끼도 무성해라. 비 개인 들판에서 들리는 격양가 <HXMLSUP ID="008"></HXMLSUP> 수풀 끝엔 차가운 삭정이가 자라네. 우탁(禹倬) 1263 ~ 1343 고려 말기의 학자. 자는 천장(天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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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이현보의 모친 안동 권씨 시조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안동문화원
    정원 : 조선조 때 왕명의 출납을 맡은 관아 선반 : 관아에서 관원에게 때 제공하던 식사 대명전 : 개성에 있었던 궁궐, 여기서는 조선의 궁궐을 가리키는 말 <해 설> 이 시조는 1527년(중종 22) 61세의 이현보가 동부승지가 되어 어머니를 뵈러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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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녁의 를 계속 제공해 주어야한다고 했다. 말 값을 장만하기 어려움은 진실로 상대방이 말한 것과 같다 하고, 아무쪼록 주한(主漢)과 계획해보는 것이 좋을듯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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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素隱金公墓碣銘(幷序) / 기록자료>고도서 / 김홍락
    했다. 어버이를 섬김에 孝敬을 다하였고 형제간에는 우애가 독실했으며 집이 본래 가난하여 를 자주 걸렀는데 여러 잡무를 몸소 하며 어버이에게 맛있는 음식을 항상 제공했다. 어버이의 초상에 정성을 다하였고 문사가 크게 떨쳐 과거를 보았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경전연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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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려서부터 독서를 좋아했고 형제간에 우애가 있었는데 大山 이선생을 찾아가 배우고 東巖 柳長源, 百弗菴 崔興遠, 后山 李宗洙 선생에게도 배웠다. 동생의 죽음에 문을 닫아걸고 朱子와 退溪의 책을 공부하였는데 를 이을 수 없어도 태연히 글을 읽었다. 이웃 사람들은 공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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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櫟窩 李世胤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안동민속박물관
    사헌부감찰, 의금부도사, 사직서령(社稷署令) 등을 거쳐 동 16년(1792)에 적성현감(積城縣監)으로 부임했다. 공은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도 몹시 가난하여 두어 칸 초가에서 를 잇기가 어려웠으며 그 장인이 죽고 장모가 장인의 뜻이라 하여 재산 문서 한 상자를 공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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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성이씨 보인재 [간찰192] / 기록자료>고문서 / 사하 류연승
    , 하늘이 끝내 시원하게 비를 내려주는 것을 아 만백성들이 열렬이 갈망한다고 했다. 아이들이 날마다 뒷도랑에 보(洑 : 농경지에 물을 대기 위하여 소규모의 둑을 쌓고 흐르는 냇물을 막아 두는 저수시설)를 쌓느라고 애써 골몰하지만 기력만 허비할 뿐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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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암유고 / 기록자료>고도서 / 오식
    하였다.<br/> 오경덕은 천성이 효우하고 꾸밈이 없었다. 안음교수(安陰敎授)가 되어 교육에 전념하였고, 위기지학에 힘써서 영진에 뜻이 없고 집이 간구하여 를 이어가지 못해도 안연하였으므로 당시에 삼고선생(三古先生)`이란 칭호가 있었으니 옛 모습, 옛 마음, 옛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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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送金雙巖赴慈仁序 15 / 기록자료>고도서 / 송정환
    1735(영조 11) 정언 벼슬을 지낸 金埅이란 분이 90세 된 노모를 모시고 백수로 살아가는데 를 잘 잇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영조가 처음 親政을 시작하면서 이 말을 듣고 즉시 그에게 慈仁縣監을 제수하라고 명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한다. “영남인들은 白衣로는 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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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운 / 유교문화>인물 / 강운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 정자(正字)에 올랐으며, 다음해에 저작(著作), 박사(博士), 종부시주부(宗簿寺主簿), 성균전적(成均典籍),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을 역임하였다.1828년 이조정랑(吏曹正郞)이 되었으나 곧 사임하였다. 그는 집이 가난하여 가 이어지질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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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천집 / 기록자료>고도서 / 김희소
    의 문인으로 일찍 출세의 뜻을 끊고 주자(朱子)와 퇴계(退溪)의 유집을 탐독하였다. 집이 가난하여 를 잇지 못하였음에도 개의치 않았으며 자개봉(紫盖峯) 밑에 초옥을 짓고 문천거사(文泉居士)라 호하며 교천서숙(交川書塾)에 첨학소(瞻學所)를 만들어 후진지도에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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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신음하면서 날을 보내니 답답하고 괴로움을 견디기 어렵다고 했다. 최근에 집안 동생이 제때에 를 잇기도 어려운 지경에 있다고 들었지만, 급박함을 구제할 길이 없으니 이것도 하나의 마음에 걸리는 일이라고 했다. 마침 정춘도(丁春燾)가 순영(巡營 : 조선시대에 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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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식이 없어 그리운데 요즘 잘 계시며 아드님도 어른 잘 모시고 있는지 궁금하다고 안부를 물었다. 이어 나는 때로 그대의 훌륭한 글을 읽고 있는데 나도 모르게 오래된 병이 몸에서 떠나가는 것을 느 벗의 선물이 매우 크다고 하였다. 요즘 이 학문이 끊어졌으니 그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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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옥(鄭玉)이 며느리의 병에 필요한 약재와 기타 일들에 대하여 지인에게 보낸 편지로, 요즈음 추위가 혹독한데, 여러분들의 안부가 어떠한지 묻고, 자신은 식구들 거느리고 그럭저럭 지내지만, 흉년의 상황으로 이미 걱정이 많음을 느 어찌해야 하느냐고 했다. 며느리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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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리선생유필 / 유교문화>유물 / 미상
    다. 5차례나 영의정을 지내면서도 항상 2칸 초가집에 살면서 를 걱정해야 하는 청빈한 삶을 살았던 참 선비였다. 인조로부터 궤장(几杖)을 하사받았다 이 목판은 이원익의 글씨를 인쇄하여 책으로 만들 수 있게 만든 서판이다. 초서체로 쓰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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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파했다. 노년에 거듭 당한 슬픔은 건강을 잃을수 있어 막 서찰을 써서 위문을 드리려고 하는데, 문득 보내주신 문안을 받고 감사함과 부끄러움을 번갈아 느 드릴 말씀이 없다고 했다. 지난겨울에 찾아가 만나려던 계획은 실로 사모하던 끝에 나왔으나, 마침 유성화가 건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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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되돌아 왔으니 이 외에는 다시 다른 계책이 없고, 다만 벌 받기를 기다릴 뿐이라고 했다. 자신의 거취(去就)가 이와 같은데, 비장(裨將)의 요청은 오히려 번거로움이 심해 어지러움을 느 어찌 곡진하게 베풀 수 있겠느냐고 했으며, 사람들이 대부분 말하기를 그의 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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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고 하기에 “집안이 가난하고 부모가 나이가 많아서, 를 잇는 것이 급선무이니 형편상 전적으로 학문할 수가 없다.”라고 타일렀더니 조카가 게으름 피우지 않고 열심히 일도하고 공부도 한다고 말했지만, 자신이 희롱해서 말하기를 “지난날 부형(父兄)이 원할 때는 공부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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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奴馬) 기록 아래 점을 찍어 숫자를 표시한 것이 있는 데, 이것은 식사를 확인한 것으로 보인다. 뒷부분에 음식을 차려 낸 상(床)의 숫자를, 날짜와 , 상원(上員:정식 대회 참가자)과 하원(下員:따라온 하인),, 분상(分床)과 원상(圓床)으로 구분하여 적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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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점점 어려움을 느 심히 고통스럽고 염려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전팽(專伻 : 심부름꾼)을 지금에서야 보내니 용서해주길 바라며 나머지 사연은 협지(夾紙 : 별지)에 남겨두고 예를 갖추지 않고 편지를 올린다고 하였다. 마지막으로 복동(卜同)이 편에 말한 편지 3통은 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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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상배문록 / 기록자료>일기류 / 김희소
    )이며 어머니는 완산유씨 세원(世源)의 딸이다. 그는 이상정의 문인으로 일찍 출세의 뜻을 끊고 주자(朱子)와 퇴계(退溪)의 유집을 탐독하였다. 집이 가난하여 를 잇지 못하였음에도 개의치 않았으며 자개봉(紫盖峯) 밑에 초옥을 짓고 문천거사(文泉居士)라 호하며 교천서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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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隱孝閣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청송군
    해갔다. 그는 양모의 병을 고칠려고 오매불망 도 거르면서 명약을 찾을려고 노심하던중 300리 밖에 좋은 약이 있다 해서 먼동이 트기전에 길을 떠나서 약을 구해서 300리길을 단숨에 달려 석양때에 집으로 돌아오니 때마침 그의 집은 불이나서 병든 노모의 방이 불길에 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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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先妣張氏行蹟 27 / 기록자료>고도서 / 류초
    같았으며, 여러 번 를 굶은 적도 있었다. 선비는 그 뜻을 잘 받들어서 몸에 온전한 옷 한 벌 없었지만 슬픈 빛을 보이지 않았으며, 남에게 요구한 적도 없었다. 그래서 고을에서 매우 칭찬하였다. 가난한 생활 속에서도 남의 어려움을 보면 곧 돌보아 주었다. 16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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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祭宜人南夫人 25 / 기록자료>고도서 / 김윤안
    이주하고 나니 아는 이 없어 무엇을 빌릴 곳이 없었다. 당신은 당신의 머리를 팔아 를 이었건만 나는 알지 못하였고, 당신이 나를 괴롭히지 않았기에 나는 편안히 지낼 수 있었다. 이 모두 당신의 婦德이건만 지난겨울에 병을 얻어 이렇게 떠나고 말았다. 더욱 가슴 아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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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곡유고 / 기록자료>고도서 / 이중륙
    가난하여 를 잇지 못하나 동심(動心)하는 바 없었으며, 후생을 교수함에 재질의 고하에 따라 토론함이 자세하여 반드시 실천을 주로 삼았다 한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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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祭淑人南氏文 21 / 기록자료>고도서 / 류초
    없거나 죽어서 제사지내 줄 사람이 없어서 외롭게 의탁할 곳이 없는 사람이 많으며, 자손이 뜰이 가득한 경우는 드물다고 하였다. 조석의 와 사철 옷가지를 갖추기 어려워 하루의 편안함도 누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고, 따뜻함이 몸에 맞고 주리고 배부름이 자기 뜻에 맞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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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와집 / 기록자료>고도서 / 문주헌
    어 강마하기에 힘썼다. 이어서 지헌(止軒) 최효술(崔孝述)에게 수업하여 『중용』과 『심경』의 난의(難疑)한 것을 질문했다. 가세가 극히 가난하여 를 잇지 못했으나 집념이 굳세고 지기(志氣)가 화하여 오직 도로써 후진들을 강론하고 장려하였다. 삼읍(三邑)의 교수가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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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4) 사천(沙川)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안동문화원
    잣나무 그늘이 드리웠고 비는 흩뿌려 헌함을 적시고 다시 다리에 젖어드네 날마다 더위 잡고 흐느 더욱 그리운데 평생 홀로 세한의 자태 빼어나셨네. 라 하였다. 문조(文祖)가 또다시 차운하여서, 집과 누각을 처음 지음에 새롭고자 하였는데 붓을 대니 끝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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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 다시 살아난 착한 며느리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안동시
    아주 가난한 집에 착한 며느리가 시집을 왔다. 어찌나 가난하였는지 때마다 며느리는 양식 걱정을 하였다. 그래서 어쩌다 양식이 생기면 아끼느라고 밥을 조금 밖에는 하지 못했다. 시부모와 남편의 밥을 차례로 뜨고 나면 자기는 밥이 없었다. 그래서 늘 누렁지를 긁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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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九潭里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안동민속박물관
    개의 깊은 소(沼)가 있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구담리는 순천 김씨와 광산 김씨들이 집성마을을 이루며 살고 있는 곳으로 마을이 작고 형세가 볼품이 없었다고 전하는데 이 마을에서 전하는 전설에 의하면“이 마을에는 가난하여 를 거르는 일이 많았지만 한 번도 남의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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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喜懼齋 金瑞雲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안동민속박물관
    고장에 사는 진사 송익룡이 “절로 온 꿩, 둥우리 옮긴 닭 이야기”라는 글을 짓기도 했다. 한 번은 그 아버지가 메추리 구이를 먹고 싶어했는데 공이 마침 들에 나가매 개가 따라와 길옆에서 메추리를 잡기도 했다. 아침, 저녁 때마다 공이 반드시 어버이의 상차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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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상례(喪禮)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안동문화원
    고 한다. 수시가 끝나면 “빈소방”을 만들고 병풍으로 시신을 가린 다음, 그 앞에서 전상을 차린다. 남녀 상주는 흰 옷으로 갈아입고 남자 상주는 위가 터진 통건(通巾)을 쓴다. 상주는 상을 당하면 세면이나 목욕을 하지 않고, 곡을 계속하며, 때에도 고기반찬이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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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님 영전에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안동민속박물관
    못 울게되고 생시에 효도 못한 것이 사후에 아무리 애통한들 무슨 뜻이 있으릿가 생각하며 생각할수록 가슴을 아프게 합니다. 우리 형제 팔남매 하나같이 양육할 때 한서냉온 가려가며 객지에 보낸 자식 외어 배고플까 수심이 다되도록 당신 몸을 있으시고 자여위한 그 심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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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中國文化遺蹟 紀行歌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안동문화원
    일세 지하철과 無軌電車 대중교통 수단이라 중국의 文化遺蹟 明淸代것 태반이라 천년고도 어디에도 백년고목 별로없고 도처綠樹 竝木들은 우리나라 포플러라 중심가로 양편에는 <HXMLPIC ID="001"></HXMLPIC> 靑紅깃발 나부 올림픽 개최유치 열기의지 표현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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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비 정신으로 승화된 三太師의 얼을 찾아서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안동문화원
    정신과 청빈한 인격으로 나라를 보전하고 지키기 위해 애를 쓰셨습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후손들이 결코 잊어서는 안될 일입니다.” “선생님! 국난을 당하여 나라를 구하고 보전하기 위해 백성들과 함께 보리밥과 도토리묵으로 를 연명하면서 위로는 임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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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I. 무교제의로서 별신굿과 성주굿의 전통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안동문화원
    명권을 지니고 있는가 하면, 집돌이 별신을 하거나 소지를 올리거나, 산주가 모든 사람들 가운데 가장 우선된다. 동사(洞舍)에서 합숙을 하며 잠을 잘 때에도 산주만 동쪽에 위치한 독방을 차지하며 다른 광대들은 한 방에서 같이 잠을 잔다. 아침저녁의 때도 서낭신에 바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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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避炎亭 · 避炎亭說 · 松溪亭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영주문화원
    ” 하니 “온 세상이 불구덩이 같은 뜨거운 들에서 허덕이는데, 나는 초연(超然)히 청려(靑藜) 지팡이를 끌어 이 정자에 거닐어 정신이 밝고 심기가 상쾌해서 표연히 선경(仙境)에라도 올라 티끌 울타리를 벗어난 듯한 정취를 느 이름을 그렇게 붙임도 마땅치 않을까.”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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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深棲广銘 · 深棲广重建記 · 深棲广記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영주문화원
    나무 열매로 를 이어가도 남이 쌀밥 먹고 비단 옷 입는 것을 원하지 않았으며 옹기로 창문을 내고 흙 침상에 살아도 남의 서까래와 기둥으로 집 지은 것을 원하지 않으면서 욕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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